카이렌은 자신의 의료 기록을 읽기 전에 먼저 식사를 했다.
이전 같았으면 기록을 보자마자 야영지로 돌아와 검부터 들었을 것이다. 하지만 이번에는 메이가 내민 수프를 끝까지 먹었고, 담당 의사가 약속된 시간에만 기록을 살피자고 했을 때도 수긍했다. 수현은 그 변화가 이상할 만큼 뿌듯했다.
“기록을 보면 무서운 사실이 나올 수도 있습니다.”
카이렌이 말했다.
“그럴 수도 있죠.”
“제가 정말 죽었다가 살아난 거라면요?”
“그건 아직 확인되지 않았어요.”
“확인되면 달라지는 게 있습니까?”
수현은 잠시 생각했다.
“과거에 있었던 일을 아는 건 중요하겠죠. 하지만 지금 카이렌 씨가 쉬어도 되는 사람이라는 사실은 달라지지 않습니다.”
카이렌은 고개를 숙였다. 그가 두려워하는 것은 죽음 자체보다, 자신이 오래전부터 누군가의 물건처럼 취급되었을지 모른다는 가능성일지도 몰랐다.
진료실에는 담당 의사 소라가 기다리고 있었다. 그녀는 먼저 열람 동의서의 범위를 확인했다. 카이렌 본인의 장치 사용 기록과 의료상 필요한 정보는 읽을 수 있지만, 다른 환자의 신원이나 기록은 가릴 예정이었다.
“그런데 제 이야기에 다른 사람이 끼어 있으면요?”
“연관성이 있다고 해서 그 사람의 사생활을 자동으로 공개할 수는 없습니다. 필요한 부분은 별도 동의를 구해야 해요.”
카이렌은 작게 웃었다.
“수현 씨가 평소에 하는 말과 비슷하군요.”
소라가 답했다.
“환자를 존중한다는 건 원래 그런 겁니다.”
***
기록 첫 장에는 K형 안정 장치의 보급 수량이 적혀 있었다. 한 개는 야전 진료소에, 한 개는 수송 차량에, 또 한 개는 북방 회복소에 전달됐다. 장치의 수량이 세 개인데 카이렌의 손등에 고리 모양 흉터가 있다고 해서 바로 같은 물건이라고 볼 수는 없었다.
“그럼 제 손에 남은 자국은 무엇입니까?”
“반지 모양의 화상 흔적일 수도 있고, 도구에 눌린 흔적일 수도 있습니다. 당시 치료 기록이 필요합니다.”
소라가 말했다.
“그 사흘 동안 누가 치료했는지는 적혀 있나요?”
“그중 한 날은 야전 기록이 비어 있습니다. 다른 날에는 응급 진정 약물이 투여됐다는 요약만 남아 있죠.”
“그렇다면 제가 의식을 잃었다는 사실도 확실하지 않은 건가요?”
“당신이 당시 의식을 회복하지 못했다는 진술은 여러 개 있습니다. 그러나 어떤 처치가 언제 이뤄졌는지는 여전히 확인해야 합니다.”
카이렌은 두 손을 내려다봤다. 전투에서 수많은 상처를 받았는데도 이 흰 자국 하나는 어쩐지 다른 상처처럼 느껴졌다. 자신의 몸에 있었던 일을 자기만 모르고 있다는 사실 때문이었다.
수현은 침묵을 지켰다. 그녀는 이곳에서 처음으로 카이렌을 봤을 때 고열을 앓으면서도 출정 서명을 하던 모습이 떠올랐다. 그때처럼 지금도 그의 선택을 대신할 수는 없었다.
“나머지 기록을 보시겠습니까?”
소라가 물었다.
카이렌은 깊게 숨을 쉬었다.
“오늘은 여기까지 하겠습니다. 남은 자료는 다음 방문에 보겠습니다.”
소라가 조용히 기록을 덮었다. 수현은 그가 그만 읽겠다고 말한 것이 기뻤다. 이 세계의 용사는 보통 힘들다는 말을 하려면 설명을 열 장쯤 붙여야 했다. 카이렌은 이제 한 문장으로 멈출 수 있었다.
***
밖으로 나와 걷는데, 젠이 급히 다가왔다. 서쪽 경계 초소에 사소한 충돌이 있었고 용사에게 보고할지 판단을 요청하러 온 것이었다. 카이렌은 본능적으로 걸음을 빠르게 하다가 멈췄다.
“지금 누가 현장을 지휘합니까?”
“오르카가 후방 지원을 맡고 데런이 대피 경로를 확보했습니다.”
“민간인 위험은 있습니까?”
“현재는 없다고 보고됐습니다.”
“그럼 제 보고는 저녁 정리 시간에 받겠습니다. 긴급 상황으로 바뀌면 담당자가 다시 알리세요.”
젠은 놀란 얼굴로 그를 쳐다봤다.
“괜찮겠습니까?”
“그렇게 하기로 했잖아.”
카이렌은 담담하게 대답했다. 젠이 물러나자 수현은 손뼉을 치려다가 참았다. 현장에서의 변화를 매번 칭찬으로만 처리하면 오히려 카이렌의 선택이 자기 허락을 받은 행동처럼 느껴질 수 있었다. 그녀는 그냥 함께 걸었다.
한참 뒤 카이렌이 먼저 말했다.
“오늘은 아무도 다치지 않게 했습니다.”
“좋은 일이죠.”
“검을 빼지 않았는데도요.”
“그게 더 멋있을 때가 있어요.”
***
의료기록 열람을 중간에 멈춘 카이렌은 막상 진료실을 나서자 불안해졌다. 모르는 내용을 덮어 두었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그는 천막 안을 서성이다가 메이에게 물었다.
“제가 겁이 나서 도망친 걸까요?”
메이는 잠시 카이렌의 얼굴을 살폈다.
“기록을 언제, 어디까지 볼지는 본인이 정할 일이지요. 다만 안 보고 싶다면 왜 안 보는지도 스스로 생각해 보세요.”
“진실이 무서웠습니다.”
“그럼 오늘은 쉬고 다음에 볼 수도 있겠죠.”
카이렌은 허탈하게 웃었다. 평생 동료들 앞에서 두렵다는 말을 하면 안 되는 사람처럼 살았다. 두렵다고 말하면 누군가 실망할까 봐 더 큰 소리로 출정을 주장했다. 이제 메이는 그 두려움을 듣고도 그를 존중했다.
그는 잠시 쉬었다가 자신의 진료 요청서 뒷면에 문장을 썼다. ‘다음 열람 때는 사흘째의 투약 기록부터 보고 싶습니다.’ 그 한 문장을 쓰는 데는 검을 뽑는 것보다 더 오래 걸렸다. 하지만 쓰고 나니 마음이 가벼워졌다.
***
오후에는 원정대의 작은 훈련이 있었다. 젠은 발목을 다치지 않도록 짧은 거리에서만 화살을 쏘았고, 데런은 새로 들어온 지원병에게 말의 고삐를 풀기 전에 확인할 사항을 알려 줬다. 카이렌은 훈련이 끝나기도 전에 한 병사가 발목을 잡고 앉아 있는 것을 봤다.
“괜찮습니까?”
“괜찮습니다. 조금 삐끗했을 뿐입니다.”
“일어나지 않아도 됩니다. 확인하고 쉬세요.”
그는 자연스럽게 말하고 나서 스스로 놀랐다. 예전의 자신이었다면 훈련을 끝낸 다음 쉬라고 했을 것이다. 한 사람의 훈련 시간이 줄어드는 것을 원정대 전체의 손실처럼 느꼈으니까. 하지만 지금은 다친 몸으로 무리하다 더 오랫동안 움직이지 못하는 것이 더 큰 손실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오르카는 훈련 중단표에 해당 병사의 이름을 적고 대체 담당자를 정했다. 카이렌은 자기 이름을 쓰지 않았다. 그가 모든 일을 대신할 필요는 없었다.
***
저녁에는 제7원정대의 월간 평가 자료가 돌아왔다. 휴식 시간이 늘어난 만큼 출정 횟수는 조금 줄었다. 예전의 감독관이라면 그 숫자만 보고 질책했을 수도 있다. 하지만 이번에는 부상자가 줄고 보급품 분실 보고가 감소한 수치도 함께 있었다.
“같은 숫자를 보고도 다른 말을 할 수 있군요.”
카이렌이 중얼거렸다.
메이는 대답했다.
“사람들이 덜 다치는 것까지 기록해야 하는 거죠.”
젠이 끼어들었다.
“전령이 배달할 문서도 줄었어요. 누가 출근했고 누가 쉬는지 미리 알면 같은 명령을 세 번 보내지 않아도 되거든요.”
데런은 그 말을 듣고 힘껏 고개를 끄덕였다. 마차의 바퀴를 교체하는 비용도 줄었다고 했다. 쉬는 사람이 생기면 일을 못 하는 게 아니라, 미리 계획을 세워 불필요한 왕복을 줄이게 되었다.
카이렌은 보고서를 접었다. 영웅이란 이름으로 자신이 자랑했던 것은 늘 출정 횟수였다. 이제는 아무도 다치지 않고 돌아온 날의 숫자가 자랑스러웠다.
***
그날 밤 그는 수현에게 답장을 보냈다.
‘오늘 의료기록을 끝까지 읽지는 못했습니다. 그렇지만 제 몸에 대한 다음 결정을 제가 하기로 했습니다. 그리고 원정대는 저 없이도 하루를 잘 보냈습니다.’
답장을 적고 나서 카이렌은 처음으로 마지막 문장이 가장 마음에 든다고 생각했다. 자신의 빈자리를 다른 사람이 채우는 일이 두렵지 않았다. 혼자만 용사여야 하는 시대에서 조금씩 벗어나고 있었다.
수현은 편지를 받아 읽고 웃었다. 그녀는 카이렌에게 ‘아주 잘하셨습니다’라고 쓸 뻔했지만 잠깐 멈췄다. 마치 검사하는 사람의 평가처럼 들릴 수 있었다. 대신 이렇게 적었다.
‘당신이 직접 결정한 일이어서 더 좋습니다. 다음 기록을 볼 때도 급하게 보지 마세요. 저 역시 제 조사에서 모르는 것을 모른다고 적겠습니다.’
편지는 서로 다른 주제를 다루고 있었지만 같은 약속이었다. 타인의 속도에 떠밀리지 않겠다는 약속.
***
다음 날 수현은 카이렌의 의료정보를 알려 달라는 낯선 사람의 요청을 받았다. 작은 신문을 만든다는 기자였다. 그는 용사가 소생되었을지도 모른다는 소문이 사람들의 관심을 끈다며, 사실이라면 모두에게 알릴 책임이 있지 않느냐고 물었다.
“카이렌 씨의 치료 기록은 그분 개인 정보입니다. 제가 공개할 권한은 없어요.”
“그러나 왕국의 영웅 아닙니까?”
“영웅도 환자가 될 수 있고, 환자는 허락 없이 자기 병력을 드러낼 의무가 없습니다.”
기자는 몇 차례 더 설득하려 했지만 수현은 말하지 않았다. 다른 사람이 그녀의 서울 주소를 마음대로 공개했다면 기분이 어땠을까. 그래서 이 문제만큼은 애초부터 선을 명확히 그어 두었다.
카이렌은 나중에 그 일을 듣고 작게 고개를 숙였다.
“제 일인데 수현 씨를 곤란하게 만들었네요.”
“저는 딱 한 가지 말했을 뿐이에요. 본인이 결정할 문제라는 것.”
“언젠가는 사람들이 물어봐도 괜찮을 만큼 준비될까요?”
“그럴 수도 있고, 끝내 공개하지 않을 수도 있죠.”
카이렌은 잠시 생각했다. 그리고 이번에는 감사하다는 말 대신 자신에게 주어진 선택을 그대로 받아들였다. 여태껏 그는 다른 사람을 지켜야 한다는 이유로 자신의 삶을 내줄 수밖에 없다고 믿었다. 자신의 이야기에는 문을 닫아 둘 권리가 있다는 사실을 이제야 배우는 중이었다.
그날 밤 수현은 카이렌의 흉터에 관한 질문을 기록 노트의 개인 정보 구역에만 남겼다. 기술 조사 쪽 장부에는 아무것도 옮기지 않았다. 사건이 연결되어 있을지도 모른다는 이유만으로 모든 사람의 사생활이 공개되는 것은 아니었다.
그는 편지를 보내기 전에 한 번 더 읽었다. 자신이 원정대원에게 이제는 명령보다 질문을 더 많이 한다는 사실을 알아차렸다. 그 변화가 무척 낯설었다. 예전에는 질문하는 지휘관이 약하다고 배웠다. 그러나 최근에는 질문하지 않는 지휘관이 위험할 수 있다는 걸 배웠다.
카이렌은 펜을 들어 짧은 문장을 덧붙였다.
‘내가 없는 날에 누가 무슨 일을 했는지보다, 그날 모두 무사했는지를 먼저 묻겠습니다.’
수현은 그 문장을 받아 읽고 오래도록 웃었다. 그 말이 결국 자신이 여러 번 강조했던 출근부의 목적이었다. 사람을 감시하려는 것이 아니라 사람에게 무슨 일이 있었는지 잊지 않기 위해서.
수현은 그 편지를 노트에 붙이지 않고 조심스럽게 접었다. 카이렌의 선택을 보여 주는 기록이었지만 당사자의 개인 편지이기도 했다. 공개하고 싶은 기록과 간직해야 할 기록 사이에도 경계가 있었다. 수현은 카이렌이 허락하지 않는 한 이 편지를 다른 회의에 제출하지 않기로 마음먹었다.
***
해질 무렵 세드나에게서 긴급 편지가 왔다. 종점 운용실에 관한 자료 하나가 새로 분류되었다는 내용이었다. E-17의 실제 접속 여부를 확인할 수 있는 ‘안전 차단 재검사표’가 구형 문서 목록에서 발견됐다. 세드나는 원본이 이관 중이라 열람에는 며칠이 걸릴 수 있다고 덧붙였다.
수현은 카이렌에게 편지를 보여 주지 않았다. 의료기록을 보던 날 밤까지 함께 사건 조사에 끌고 갈 생각은 없었다. 그러나 카이렌은 그녀의 표정을 보고 알아챘다.
“또 새로운 기록이 나왔군요.”
“네. 다만 아직 읽어 보진 못했어요.”
“중요한 기록입니까?”
“저에게는 그럴 수 있어요.”
카이렌은 잠시 고민하더니 말했다.
“그럼 잘 확인하십시오. 대신 끼니는 꼭 챙기세요.”
수현이 웃었다.
“그 말은 제가 할 대사였는데요.”
“배웠습니다.”
그리고 그는 메이가 준비한 두 번째 수프를 먹으러 돌아갔다.
수현은 그 뒷모습을 보며 생각했다. 고향으로 돌아가는 길을 찾는 일과 여기 남은 사람들의 삶을 지키는 일은 서로 적이 아니다. 다만 어느 한쪽을 위해 다른 쪽을 희생하겠다고 약속하는 순간 문제가 된다.
그녀는 여관으로 돌아와 종이를 펼쳤다. 카이렌의 의료 문제는 카이렌이 주체가 되어 결정한다. E-17 재검사표는 자신의 사건으로 확인한다. 같은 밤에 기록된 일이라고 모든 사람이 같은 사건의 부속품이 되는 것은 아니었다.
수현은 노트 맨 끝에 작게 적었다.
‘사흘의 빈칸은 내 마음대로 채우지 않는다.’
그 옆에는 또 다른 문장을 썼다.
‘집에 돌아가는 계획도 다른 사람의 삶을 지워 가며 세우지 않는다.’
마침내 그녀는 불을 껐다. 이날의 조사가 끝났다는 표시였다. 메이가 매번 고리를 보고 잠을 못 이루던 밤처럼, 자신도 기록에 매달려 아침을 맞을 수는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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