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가동 지시서의 발신 부서는 존재하지 않았다.
정확히 말하면 지금은 존재하지 않았다. 예전에 ‘회선 긴급복구단’이라는 임시 조직이 있었고, 조직이 해산된 뒤 남은 장부는 세 군데로 나뉘어 옮겨졌다. 왕도 기록원, 남문 기술서고, 그리고 운하관리청. 수현은 안내문을 읽고 잠시 고개를 숙였다.
“사람 하나 옮길 때도 서류가 이렇게 많았나요?”
세드나가 물었다.
“제 소환 건이요? 그렇게 많았으면 좋았을 텐데. 동의서 하나가 없잖아요.”
그녀는 화가 나면 농담을 한다는 사실을 최근 알아차렸다. 농담을 듣는 사람을 웃게 하려는 게 아니라, 자신이 겁에 질렸다는 걸 잠시 가리기 위해서였다.
운하관리청의 자료 담당 리카는 수현의 요청서를 한참 읽었다.
“설비 운전자의 개인 이름까지 열람하고 싶으신 건가요?”
“당일 작업에 관한 승인 절차와 보존된 연락 경로가 우선입니다. 이름은 책임 확인에 필요할 경우 정해진 절차로 확인하겠습니다.”
“이상한 요구를 많이 받아 봤습니다. 오래된 사고에 화가 나서 모든 직원 이름을 달라는 사람도 있었어요.”
“그런 마음은 이해할 수 있어요. 하지만 이름을 안다고 원인이 보이는 건 아니니까요.”
리카는 잠시 수현을 바라보다가 열람 목록을 내밀었다. ‘재가동 신청서’, ‘예산 지출 승인’, ‘안전 확인 부속서’. 세 종류였다. 문제는 두 번째 서류에 찍힌 B-13 인장이었다.
“또 이 인장이네요.”
수현은 한숨을 쉬었다.
세드나가 곧바로 말했다.
“B-13은 회복 운영 비용의 위임 인장입니다. 이것만으로 사람 이동이나 장비 재가동을 승인한 것은 아닙니다.”
“알아요. 그래서 예산을 승인한 사람이 기술 안전까지 승인했다고 쓰지 않을 거예요.”
리카가 지출 장부를 펼쳤다. 거기에는 봉인된 장비를 ‘점검용으로 복원’한다는 항목이 있었다. 수현은 날짜를 확인했다. 노아가 봉인했다고 진술한 날로부터 석 달 뒤였다.
“점검용 복원은 실제 작동과 달라요?”
“그렇습니다. 내부 부품을 검사하는 것과 사람이나 물건을 옮기는 시도는 다릅니다.”
“그런데 이 기록에는 작동 시험 결과가 붙어 있네요.”
리카가 종이를 넘겼다. 부속서 마지막 장에는 흰 봉투 모양의 그림과 ‘회신 접속 불량’이라는 문구가 보였다.
***
그날 오후, 운하 옆 작업대에서 갑작스러운 소란이 벌어졌다. 점검하던 작은 수문이 닫히면서 작업자 한 명의 장화가 끼인 것이다. 물은 무릎 높이까지 차올랐고, 주변 사람들은 아무도 물길을 제대로 보지 못한 채 손잡이부터 돌리려 했다.
“더 닫으면 다리까지 끼어요!”
수현은 소리쳤다. 기술 지식이 있어서가 아니었다. 작업자가 몸을 뒤로 뺄 수 없을 만큼 문이 기울어진 게 보였기 때문이다.
데런은 먼저 발판을 고정했다. 리카는 비상 정지줄을 잡아당겼고, 작업자 둘이 긴 막대기로 수문에 걸린 잔해를 밀어냈다. 누군가 빠르게 달려가 수문 감독자에게 알렸다. 큰 기계가 느리게 멈췄다.
작업자는 장화를 벗고 가까스로 빠져나왔다. 발목에 상처는 있었지만 의식이 또렷했다. 그는 자신이 늦장을 부려 사고가 났다고 말했다.
“장화가 끼였다는 걸 알았을 때 이미 손잡이가 돌아가고 있었어요.”
리카가 물었다.
“정지 신호는 누가 담당했지?”
“원래는 위에서 보는 사람이 있어야 하는데 오늘은 전달이 안 됐습니다.”
수현은 옆에서 듣다가 한마디만 덧붙였다.
“사람이 다친 사실과 그 사람이 잘못했다는 판단은 다른 문제예요. 먼저 치료를 받고, 무엇이 전달되지 않았는지 기록하는 게 좋겠습니다.”
작업자는 손을 떨며 고개를 끄덕였다. 관리청 직원들이 안전 줄을 다시 확인했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누가 빨리 수문을 닫는지가 중요했지만, 이제는 누가 중지 신호를 받아 주는지가 더 중요해졌다.
“오래된 서류가 왜 이렇게 불편한지 알겠네요.”
리카는 돌아오는 길에 말했다.
“기록에는 항상 시작과 끝이 있는데, 멈추게 한 사람은 빠져 있어요.”
“멈춘 사람도 업무를 한 거니까요.”
수현은 답했다.
***
저녁 회의에는 루세가 합류했다. 그는 재가동 신청서와 그 뒤에 붙은 시험 결과를 조심스럽게 비교했다.
“이상합니다. 신청서의 장비번호는 봉인 대상의 구조와 맞지만, 시험 결과에 적힌 부품은 다른 제작 연도입니다.”
“같은 기계일 수는 없나요?”
“수리해서 부품을 바꿨다면 가능합니다. 하지만 교체 기록이 없어요.”
“그럼 허위 결과인가요?”
“그렇게 단정할 수는 없죠. 장비번호를 재사용했을 수도 있습니다.”
수현은 장비번호 아래 새긴 작은 사선을 가리켰다. 노아가 그려 준 봉인 견본에도 있었다.
“이 사선은 무슨 뜻이에요?”
“안전 차단 후 재검사 대기입니다. 재검사 결과가 없으면 구동하지 않는다는 표시죠.”
세드나가 말했다.
“그렇다면 비용 인장이 찍힌 문서는 수리비 지급에 관한 것이고, 기술적으로 재가동해도 된다는 허가는 따로 찾아야 합니다.”
“맞아요.”
수현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데 한 가지가 신경 쓰였다. 신청서는 봉인된 장비를 점검한다고 하면서 부속 결과에는 ‘회신 접속 불량’이라고 적었다. 접속하지 않았다면 불량인지 알 수 없는 항목이었다. 시험의 범위를 벗어나 작동을 시도했을 가능성이 있었다.
“이 문서를 쓴 사람에게 물어볼 수 있을까요?”
리카가 장부를 훑었다.
“작성자 이름 대신 복구단 제2조라고 되어 있네요. 인수인계 담당자 명단은 있습니다.”
수현은 다시 이름보다 역할을 물었다.
“당시 복구단 제2조가 실제로 현장에서 한 일을 설명하는 작업일지가 있나요?”
“예, 안전 확인 부속서의 뒤편에 보존됐다고 되어 있습니다.”
“그것부터 열람해야겠어요.”
***
운하관리청에는 서류를 검토하는 사람과 수문을 움직이는 사람이 거의 대화하지 않는다는 문제가 있었다. 리카는 이번 사고를 계기로 둘이 만나는 자리를 만들자고 제안했다. 수현은 그 자리에 참석하겠다는 요청을 받았지만 먼저 역할부터 확인했다.
“제가 여기 제도를 정할 권한은 없어요. 당사자들이 필요한 자료를 정리하는 데는 도움을 드릴 수 있습니다.”
리카는 고개를 끄덕이고 작업자들의 의견을 먼저 들었다. 수문 근무자는 비상 정지 신호가 여러 번 전달되지 않았다고 했고, 행정 직원은 그렇게 긴급한 내용을 일반 접수표에 적는 관행을 몰랐다고 말했다. 양쪽 모두 잘못을 전부 떠넘길 마음은 없었다. 다만 서로의 업무 방식이 어디서 이어지는지 처음 알게 된 듯했다.
“그럼 급한 신호는 누가 받게 합니까?”
수현이 물었다.
한 작업자가 손을 들었다.
“현장 감독자가 바로 받아야 합니다. 그런데 감독자가 휴무면 누가 대체하는지가 안 적혀 있어요.”
“그 부분은 저희가 정해야겠네요.”
리카가 대답했다.
회의는 생각보다 오래 걸렸다. 단순히 규정을 하나 만드는 것으로 해결되지 않았다. 대체 근무자가 너무 적었고, 급한 신호를 받아도 동력실까지 전달하는 시간이 걸렸다. 결국 그들은 임시로 정지 신호를 두 명에게 동시에 보내고, 한 사람이 확인하지 못하면 다른 사람이 받도록 했다. 무조건 둘이 일한다는 구호보다 현실적인 조정이었다.
***
회의가 끝날 무렵, 바깥에서 아이 하나가 수문 아래로 떨어뜨린 작은 나무 배를 찾고 있었다. 수문 작업자가 가까이 가지 말라고 했지만 아이는 위험을 이해하지 못했다. 데런이 한쪽 무릎을 꿇고 아이와 눈높이를 맞췄다.
“저 배는 지금 꺼낼 수 없어. 물이 내려가고 안전한 사람이 확인하면 찾아보자.”
“지금 꺼내 주면 안 돼요?”
“지금은 위험하거든.”
데런은 거짓 약속을 하지 않았다. 배를 반드시 찾아 주겠다고도 하지 않았다. 대신 아이가 다치지 않도록 집으로 돌려보냈다.
수현은 그 모습을 보고 생각했다. 영웅의 전투와 마찬가지로 행정도 때로는 해 줄 수 없는 일을 해 주겠다고 말하지 않는 용기가 필요하다. 메이에게 모든 빚이 없어질 거라고 약속하지 않은 것처럼, 카이렌에게 잃어버린 기억을 반드시 찾겠다고 말하지 않은 것처럼, 자신에게도 곧 돌아갈 수 있다고 함부로 말하고 싶지 않았다.
그날 밤 루세와 다시 자료를 비교하던 수현은 간단한 도식을 그렸다. 재가동 신청, 안전 확인, 운용 시험, 결과 기록. 그중 ‘안전 확인’과 ‘결과 기록’ 사이에 여러 갈래의 선이 있었다. 루세는 그 선이 각각 다른 작업반의 책임을 나타낸다고 설명했다.
“만약 누군가 ‘시험을 멈춰라’고 했다면 이 선들 중 어디에 기록됐을까요?”
“정상이라면 모두에게 전달됐어야 합니다.”
“하지만 오늘 수문에서 본 것처럼 못 받은 사람이 있을 수도 있겠죠.”
“예. 그래서 원본 전송 기록을 찾는 겁니다.”
루세는 새 자료를 손가락으로 짚었다. 제2조의 정지 요청은 접수됐고 그 뒤의 처리란이 비었다. 빈칸이 곧 무시를 뜻하지는 않는다. 다만 무엇이 일어났는지 모른다는 사실은 명확하다.
수현은 표를 덮었다. 자료마다 사람이 있고, 각 사람은 위험한 순간에 선택을 했다. 서류만 보면 종종 그 선택이 지워진다. 이제는 문서의 표식뿐 아니라 서로 다른 역할에 있었던 사람들의 말을 묶을 수 있을지 알아봐야 했다.
***
관리청을 나서려던 수현은 리카가 환자 상태를 다시 확인하는 것을 보았다. 수문에 장화가 끼였던 작업자는 치료를 받고 다리를 절뚝이며 나왔다. 리카는 그에게 당장 원래 업무로 복귀하라고 하지 않았다. 대신 의사의 제한 사항과 본인이 할 수 있는 업무를 물었다.
“내일까지는 오래 서 있으면 안 된답니다.”
“그러면 앉아서 하는 기록 정리 업무를 제안할 수 있겠군요. 원하지 않으면 휴식을 신청해도 됩니다.”
“그럼 동료들이 힘들어질 텐데요.”
“사고가 난 뒤의 인력 문제는 관리청이 해결할 문제입니다.”
그 말에 작업자가 안심했다. 수현은 이렇게 실제 현장에서 누군가 배우고 변하는 모습을 보는 것이 좋았다. 아주 많은 교육 자료가 생겨도 결국 사람이 말을 다르게 하기 시작해야 규정은 살아 움직였다.
수현은 작업자에게 잠시 손을 흔들고 돌아섰다. 자신의 조사도 마찬가지였다. 보존고의 기록이 아무리 늘어나도 실제로 누군가 제동 장치를 누를 수 없다면 같은 사건은 다시 일어날 것이다. 수현은 오늘 사고 보고서가 누락되지 않도록 접수번호를 확인하고, 그 번호를 관리청 직원에게 그대로 맡겼다. 남의 업무를 대신 끝내는 것은 오래가는 해법이 아니었다.
리카는 수현에게 관리청의 새로운 임시 안내문을 보여 줬다. 전부를 바꾸는 문서는 아니었지만 ‘정지 요청을 받은 사람의 확인 없이 재가동하지 않는다’는 문장이 들어 있었다. 수현은 그 문장을 보고 웃었다. 과거의 누군가가 지키지 못했을 수도 있는 규칙을 지금 여기서 다시 시작하는 것이다.
“이 규정이 실제로 지켜지는지도 확인해 주세요.”
“그게 저희가 할 일이죠.”
리카의 대답은 짧았지만 확고했다.
***
밤이 깊자 리카가 아주 오래된 부속서를 찾아왔다. 장마에 젖은 흔적 때문에 절반쯤 찢어진 종이였다. 수현은 책상 위에 한 장씩 펼쳐 놓고 루세가 정해 준 간격 이상 손을 대지 않았다.
첫 줄에는 ‘기기 연결 확인’, 둘째 줄에는 ‘종점 응답 검토’, 셋째 줄에는 ‘대상 이동 시험 금지’가 적혀 있었다. 그런데 같은 페이지의 뒤쪽에는 묘한 문장이 남았다.
‘접속 상태 확인을 위해 무대상 경로를 잠깐 열었다.’
“무대상 경로가 뭔가요?”
루세가 답했다.
“지정된 이동 대상 없이 통신 회선만 연결하는 시험으로 보입니다. 인체 이동과는 다르죠.”
“그런데 제 사건 기록에도 대상 확인이 비어 있었어요.”
“같은 기술인지 확인할 증거는 아직 없습니다.”
“알아요. 그래도 공백을 무조건 작업 실패로 생각하지는 말아야겠네요.”
루세는 그녀의 표정을 보더니 신중하게 말했다.
“만약 대상이 지정되지 않았는데 누군가 이동했다면, 가장 먼저 봐야 할 것은 대상 정보가 어디에서 끼어들었는가입니다. 그러나 이런 건 과거 기록을 확인하는 이야기이지 지금 재현해 보자는 뜻은 아닙니다.”
“당연하죠. 제 몸으로 시험하자는 제안이 나오면 사퇴합니다. 이미 고용된 것도 아니지만.”
모두 피식 웃었다. 웃음이 잦아들자 수현은 종이 뒷면을 살폈다. 거기에 작업자의 서명이 아니고 ‘조 정지 요청 접수’라는 작은 표식이 있었다.
“제2조 안에서 누군가 중단을 요청했네요.”
“그렇습니다.”
“그 사람의 요청이 받아들여졌나요?”
리카가 마지막 장을 보여 줬다. ‘요청 수령’, 그리고 그 옆의 공란. 수현은 오늘 수문에서 본 장면을 떠올렸다. 신호를 보냈지만 받은 사람이 없던 작업자. 오래전 장치도 그랬을까.
다음 날, 그녀는 정식으로 제2조의 안전 정지 요청 처리 결과를 확인해 달라고 신청했다. 이번에는 작동 성공 기록보다, 멈추라는 말을 누가 받았는지가 더 궁금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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