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존고는 성문 밖에 있었다.
수현은 왕도 남문을 나선 뒤 세 번이나 지도를 돌려 보았다. 길이 잘못된 게 아니었다. 문제는 그녀가 생각한 보존고라는 단어의 뜻이었다. 거대한 석조 건물과 무장한 문지기를 예상했는데, 눈앞에는 채소밭 사이에 있는 낮은 창고 세 채가 전부였다. 지붕 끝의 종은 녹이 슬어 있었고, 정문에는 벽돌로 막은 옛 우편 투입구가 있었다.
“비밀이란 건 대체로 이렇게 보관하나요?”
“아니요.” 세드나가 답했다. “예산이 모자라면 이렇게 보관하죠.”
루세가 웃음을 삼키다가 기침했다. 그는 오늘 실험을 하러 온 게 아니었다. 종이와 기록판을 열어 보지도 않고 살필 수 있는 범위, 즉 습도와 봉인 상태를 확인하러 왔다. 세드나 역시 왕립길드의 대리인이 아니라 제한 열람 절차를 설명해 줄 사람으로 동행했다. 이 차이를 적은 서류가 세 장이었다.
문지기 대신 나타난 사람은 빗자루를 든 중년 여자였다. 그녀는 세 사람을 위아래로 훑고는 가장 먼저 수현의 신발을 가리켰다.
“흙 털고 들어오세요. 이 안에서는 이름보다 진흙이 더 위험해요.”
수현이 발을 털자 여자는 문을 열었다. 자신의 이름을 디아라고 소개했다. 독립보존고 관리 책임자였다. 그녀는 신청서를 읽다가 이맛살을 찌푸렸다.
“외부 계열 제0경로, 종점 확인 관련 색인. 이건 기술서고 건인가요, 행정 이의 건인가요?”
“둘 다 연결되는지 확인하려는 겁니다. 연결됐다는 결론은 아닙니다.”
디아가 손가락을 멈췄다. “그 답은 마음에 드네요.”
그녀는 접수번호를 종이 한쪽에 옮겨 적었다. 수현은 그제야 정문 옆의 작은 판을 보았다.
[제4독립보존고. 보존은 접근의 허가가 아니다. 접근은 복제의 허가가 아니다. 복제는 공개의 허가가 아니다.]
“문구가 살벌하네요.”
“한 번 소송을 당하면 표어가 좋아집니다.” 디아가 말했다.
세드나가 작은 미소를 지었다. 수현은 조금 안심했다. 무슨 법을 적용하는지는 다르지만, 권한을 구분해 놓은 사람과는 대화할 수 있었다. 그녀는 신청서 끝의 추가 조건을 설명했다. 자신의 서울 주소와 가족 관계는 제출하지 않겠다. 다른 사람의 의료기록을 요구하지 않겠다. 봉인을 훼손하거나 작동 중인 장치를 만질 생각도 없다.
“그렇게 많은 걸 안 하겠다는 사람은 처음이에요.” 디아가 중얼거렸다.
“여긴 아무것도 안 하겠다고 약속하는 게 일을 시작하는 방법인가 봐요.”
“대체로 그렇습니다.”
접수 기록을 대조하던 디아의 눈빛이 바뀌었다. 제4독립보존고의 목록에는 독립 확인 자료가 있었다. 하지만 '독립'은 왕실 기관의 관리 체계에서 독립됐다는 뜻이지, 통신 회선이 물리적으로 분리됐다는 뜻은 아니었다.
“그럼 어디서 왔는지 확인되지 않은 기록도 있을 수 있겠군요.”
“보관 경로가 확인됐다는 사실과 생성 경로가 확인됐다는 사실은 다르죠.”
수현은 수첩에 그 문장을 적었다. 최근 몇 달 동안 그녀는 한 가지를 배웠다. 같은 단어가 다른 서류에 쓰였다는 이유만으로 같은 사실이 되지는 않았다. R-0가 그랬고, '배정 완료'가 그랬고, 이제는 독립이라는 단어가 그랬다.
디아는 보존함을 바로 보여 주지 않았다. 먼저 열람 이유와 이해관계를 확인했다. 수현은 자신이 왜 원래 세계로 돌아가고 싶은지 길게 말하지 않았다. 그녀가 동의하지 않은 이동이 이루어졌고, 누가 실행했는지 알아야 비슷한 일이 다시 생기지 않는다는 사실만 설명했다.
“집이 어디냐고는 안 물으시네요.”
“주소를 적는 칸이 없어요. 그게 필요해지는 때에는 그 목적부터 알려 드릴 겁니다.”
말이 끝나자 수현은 목 안쪽이 조금 뻐근해졌다. 아무도 모르는 나라에서 자신이 집으로 돌아가고 싶다고 말하는 일이, 이제야 누군가의 정식 업무가 된 것 같았다.
***
디아가 건물 뒤편으로 수현을 데려갔을 때, 거기에는 둥근 우물이 하나 있었다. 우물은 막혀 있었고 그 위에는 돌판이 놓여 있었다. 돌판에 새겨진 연도는 독립보존고가 공식 문서에 적힌 설립연도보다 십 년쯤 앞섰다.
“이게 원래 우편 중계소였다는 뜻인가요?”
“처음부터 보존고였던 건 아닙니다. 전쟁 때 이곳으로 전달될 문서가 너무 많았어요. 도착했는지 알 수 없는 문서를 사람들이 찾아왔고, 어떤 문서는 사람이 죽은 뒤에야 도착했죠.”
디아는 정원 쪽의 벤치를 가리켰다. 거기에는 노인이 앉아 콩 껍질을 까고 있었다. 그는 부지가 보존고로 바뀌던 때의 일을 알고 있었다. 디아는 노인이 제 증언을 공개해도 되는지 먼저 물었다. 노인은 손을 털고 천천히 수현을 바라봤다.
“당신은 어떤 문서를 찾소?”
“누군가의 허락 없이 움직인 사람의 기록이요.”
노인은 놀라지 않았다. 대신 콩 한 알을 조심스레 집어 상자에 넣었다.
“옛날에 우리 딸에게도 그런 일이 있었지. 전염병 환자를 옮기는 인부가 부족하다고 징집 통지를 보냈다오. 딸은 그날 이미 다른 마을에 있었는데, 명부에는 통지를 받았다고 적혀 있었소.”
“그럼 실제로 일을 하러 갔나요?”
“가지 않았지. 그런데 가지 않았다는 이유로 대가를 깎였어. 딸은 통지서를 받지 않았다고 했지만 아무도 믿지 않았네. 기록에 도장이 있었거든.”
수현은 노인의 손을 바라봤다. 손가락 마디가 굵었다. 이런 이야기는 어느 세계에서든 닳지 않는 모양이었다.
“나중에 어떻게 해결했나요?”
“통지를 보냈다는 기록과 통지를 받았다는 기록이 다르다고 누군가 말해 줬소. 그때부터 싸움이 시작됐지. 끝내 돈의 일부는 돌려받았지만, 딸이 잃은 겨울은 안 돌아왔어.”
그 말은 수현의 가슴에 박혔다. 그녀는 원래 세계에서 시간을 잃고 있었다. 이곳에서의 하루가 서울에서도 하루인지 알 수 없었지만, 잃은 시간의 값을 누가 매길 수 있을지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노인은 콩 상자를 밀어 주었다. “먹어 보겠소?”
“이거 날로 먹어도 돼요?”
“구우면 더 맛있지.”
수현은 어색하게 웃었다. 노인은 자신에게 설명할 기회를 주었고, 그보다 오래된 속상함은 끝내 화내지 않았다. 수현은 노인의 증언을 정식 기록에 넣겠느냐고 묻지 않았다. 그것은 노인의 사건이지 자신의 증거가 아니었다.
디아가 우물 옆에 섰다. “이곳을 독립보존고로 만든 이유가 저런 일 때문이에요. 어떤 기관이 자기에게 유리하게 기록을 정정해도 최초 통지의 흔적만큼은 따로 남기자는 뜻이었죠.”
“그럼 정말 독립된 거예요?”
“완전하진 않아요. 예산은 결국 왕도에서 나오고, 직원은 여기서 채용해도 급여 승인은 다른 곳에서 받죠. 그래서 우리는 독립이란 단어보다 독립성을 확인하는 절차를 중요하게 생각합니다.”
수현은 수첩에 적었다.
[보관소가 따로 있다는 사실만으로 독립된 증거가 되는 것은 아니다. 누구에게 돈을 받고, 누가 열쇠를 갖고, 누가 기록을 고칠 수 있는지 확인할 것.]
그 말을 쓰던 수현의 눈에 우물 가를 맴도는 작은 고양이가 들어왔다. 고양이는 통지를 받지 않고 들어왔고 허가 없이 사람의 발목에 몸을 비볐다. 수현은 웃었다. 이곳에서 가장 자유로운 존재처럼 보였다.
***
창고 밖에 나왔을 때 수현은 문지기 같은 사람이 없다는 사실을 다시 떠올렸다. 사실 보존고를 지키는 것은 문지기가 아니라 접수원과 보존자의 기록이었다. 출입을 막는 높은 벽보다 누가 왜 들어왔는지 적어 두는 장부가 더 오래가는 방어가 될 수도 있었다.
그때 디아가 수현에게 한 장의 안내문을 건넸다. 최근 왕도의 기록 보관 규정이 바뀌어, 당사자에게 자신과 관련된 자료가 보존돼 있는지 묻는 권리가 생겼다고 했다. 하지만 그 권리가 모든 내용을 제한 없이 가져갈 수 있다는 의미는 아니었다.
“제가 제 이름이 있는지 물으면 대답해 주시는 건가요?”
“보존 여부는 가능한 범위에서요. 하지만 같은 문서에 다른 사람의 이름이 들어 있다면 그 부분은 따로 살펴야 합니다.”
수현은 고개를 끄덕였다. 계약서 한 장에도 여러 사람의 정보가 담길 수 있었다. 특히 소환 기록은 누가 진정서를 썼고, 누가 심사했으며, 누가 집행했는지 이어져 있었다.
“그럼 제가 지금까지 제출한 서류의 사본도 돌려받을 수 있나요?”
“접수 당시 받은 목록과 비교해 보세요. 보관 규정이 허용하는 범위에서 사본을 만들 수 있습니다.”
수현은 수첩을 열고 첫날부터 갖고 있던 종이봉투의 목록을 적었다. 여기까지 오는 동안 종이가 늘어나 가방 무게도 늘었다. 그러나 가방이 무거워질수록 마음은 조금 가벼워졌다. 더 이상 설명할 수 없는 사건을 그저 혼자 기억하고 있지는 않았기 때문이다.
“이 세계 사람들은 왜 이렇게 종이를 좋아하죠?”
디아는 웃으며 대답했다. “말만 남으면 누가 무슨 말을 했는지 다투게 되니까요.”
수현은 종이봉투를 가방에 넣었다. 그 말만큼은 어느 세계에서도 틀리지 않는 것 같았다.
창고 직원들의 점심이 늦어진 이유는 관리 책임자가 허가를 기다려서만은 아니었다. 두 직원이 오전 내내 상자를 나른 뒤 점심 담당이 없이 계속 일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디아는 그 사실을 알자 손을 들었다.
“십오 분씩 번갈아 쉬는 걸로 해요.”
페른이 난감해했다. “접수인들이 기다립니다.”
“기다리는 분들께 예상 순서를 설명하세요. 우리가 쓰러지면 대기 시간이 더 길어지니까.”
수현은 창고 앞의 사람들에게 안내문을 적어 붙이는 일을 도왔다. [자료 보존 및 근무 교대로 오늘 일부 접수 창구 처리 지연. 긴급한 의약·안전 관련 통지는 우선 전달.] 어느 누구도 그녀에게 그런 문장을 쓰라고 명령하지 않았다. 다만 직원의 쉬는 시간이 자연스레 업무 계획 안으로 들어갈 수 있다는 사실이 기뻤다.
기다리던 방문객 가운데 한 남자는 당장 상자를 열어 보자고 소리쳤다. 그의 아버지의 편지가 있을지도 모른다는 이유였다. 수현은 사정을 듣고 마음이 흔들렸지만, 디아가 침착하게 대응하는 모습을 지켜봤다.
“당신의 사연을 무시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다른 사람의 편지도 여기 있어요. 누가 보낸 건지 확인하지 않고 아무 상자나 열어 드릴 수는 없습니다.”
남자는 입술을 깨물었다. 그는 자기 신청서에 무엇이 부족한지 묻더니 조용히 접수표를 받아 갔다. 수현은 그가 돌아가는 뒷모습을 바라봤다. 창고가 더 빨리 일했으면 좋겠다는 생각과, 절차를 무너뜨려서는 안 된다는 생각이 동시에 들었다.
세드나가 옆에서 말했다. “기다리는 사람의 마음을 알게 되셨죠.”
“정말요. 그래서 더 정확한 안내가 필요하다는 것도요.”
창고의 서늘한 복도에 돌아오자 수현은 자신이 찾고 있는 종점 확인자가 더 이상 추상적인 직책으로만 느껴지지 않았다. 누군가는 여기서 손을 다치고, 누군가는 잃어버린 가족의 편지를 기다리고, 누군가는 도시의 승인을 받으려고 사흘을 허비한다. 그 모든 사람이 기록의 주인이었다. 자신도 그중 한 사람이었다.
첫 번째 창고에는 책 대신 상자가 있었다. 크기가 다른 상자마다 색 실이 묶여 있었고, 번호가 적힌 나무패가 달려 있었다. 디아는 상자에 손대기 전 장부와 출입 기록을 나란히 펼쳤다.
“우리가 가진 건 세 종류입니다. 종점 확인 기록의 사본, 그 사본이 만들어질 때의 접수 대장, 그리고 개봉 여부를 관리한 기록. 원본이라고 불리는 물건은 이 셋과 별도로 있어요.”
“원본은 여기 없나요?”
“있다는 목록은 있습니다. 다만 아직 어느 상자가 그 목록과 맞는지 확인한 단계예요.”
루세가 선반 높이를 살폈다. “아랫칸의 결로 흔적이 있네요.”
“지난 겨울 배수관이 터졌어요. 물은 기록보다 먼저 들어오죠.”
세드나가 기록 보존을 위해 상자의 위치를 옮길 수 있느냐고 묻자 디아는 고개를 저었다. “일단 두 사람이 함께 손을 대야 합니다. 이전할 때 사진과 위치를 적은 종이를 남겨야 하고요. 사진 찍는 장치는 없지만, 도면과 실측 기록은 할 수 있습니다.”
수현은 창고 바닥에 놓인 눈금줄을 들었다. “제가 도와도 되나요?”
“열람자가 원본을 건드리는 건 안 돼요. 대신 누가 어디에 옮기는지 보는 증인은 될 수 있습니다.”
그렇게 세 사람은 상자 한 개도 열지 않은 채 한참을 보냈다. 상자를 옮긴 직원의 이름, 이전 전 위치, 새 위치, 표면 습기 여부, 기록이 적힌 종이의 장수. 행정적으로는 지루하기 짝이 없는 일이었다. 하지만 수현은 이상하게 견딜 만했다. 어떤 사람이 들고 와서 어디에 놨는지 확인하지 못한 물건이라면, 그 안에서 나온 기적 같은 문장도 쉽게 믿어서는 안 됐다.
점심 무렵 디아는 냉소적인 얼굴로 말했다.
“오늘은 여기까지입니다. 접수 열람은 승인할 수 있지만 실물 대조는 내일 두 번째 보존자가 와야 해요.”
“그분이 오지 않으면요?”
“오지 않은 이유를 기록하고 일정을 다시 잡습니다.”
수현은 웃었다. “아무도 없는 자리의 서명을 채워 넣는 건 아니군요.”
디아의 웃음기가 사라졌다. “왜 그런 농담을 하죠?”
수현은 지금까지 발견한 빈 동의란과 자동 배정 기록에 관해 설명했다. 디아는 끝까지 듣더니 책상 밑에서 낡은 장부를 꺼냈다.
“그렇다면 이 항목을 확인해야겠어요.”
장부의 묵은 표지에는 [종점 확인·반송 판단 대기]라고 적혀 있었다. 마지막 장의 아래에는 짧은 메모가 있었다.
[회신지 미결. 반송 미정. 당사자 식별 전까지 전달 종료 불가.]
수현은 숨을 천천히 들이쉬었다. 전날 봉투에서 본 말과 같았다. 하지만 같다는 사실만으로 그 봉투와 이 장부가 같은 사건이라는 뜻은 아니었다.
“이 문장이 원래부터 여기 있었는지 알 수 있나요?”
“연도별 필체 대조부터 해야겠죠. 복사본도 찾고요.”
수현은 고개를 끄덕였다. 마법처럼 한 문이 열리기를 바라며 왔지만, 이곳에서 얻은 첫 번째 열쇠는 한 문장의 출처를 묻는 방법이었다.
집으로 가는 길은 아직 보이지 않았다. 대신 누군가가 그 길을 기록하는 도중 무엇을 생략했는지 확인할 수 있는 장소가 나타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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