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현은 다음 날 아침 잠에서 깨자마자 종점 확인자라는 말을 적었다.
여관 방 벽에는 지도와 서류 사본이 붙어 있었다. 처음에는 카이렌의 휴식 시간표가 가장 큰 자리를 차지했는데, 지금은 여러 기관의 기록이 빼곡했다. 수현은 지도 가운데에 작은 빈 원을 하나 그렸다.
[송신지 — 경로 — 수신지.]
그리고 빈 원 옆에 덧붙였다.
[수신지에 누가 있는가?]
세드나는 아침 식사 전에 여관을 찾아왔다. 서고의 참조 메모가 과거에도 검증됐던 것인지 확인해 보자는 제안이었다. 오래된 연구자의 의견일 뿐일 수도 있었다. 수현은 기꺼이 동의했다.
“그 사람이 종점 확인자를 찾지 못했다고 해서 실제로 다른 세계가 있었다는 뜻은 아니겠죠.”
“맞습니다. 다만 절차가 정지된 이유를 이해할 수는 있을 겁니다.”
두 사람은 남문 공동기술서고로 걸었다. 길가에서는 작은 빵집이 새로 문을 열고 있었다. 수현은 가게 앞에서 잠깐 멈춰 빵 두 개를 샀다. 낯선 세계에 처음 떨어졌을 때만 해도 이 길에서 간식을 살 마음의 여유가 생기리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그렇게 웃을 만큼 기쁜 일입니까?” 세드나가 물었다.
“빵이 맛있어 보여서요. 오늘 할 일이 많지만 밥은 먹어야죠.”
세드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 말은 카이렌에게도 꼭 해 주십시오.”
“이미 너무 많이 했는데요.”
***
아르덴은 옛 메모의 출처를 찾는 데 시간이 걸릴 거라고 했다. 작성자 서명은 식별할 수 없었고, 필적을 비교할 수 있는 원본도 부족했다. 그럼에도 메모의 문장이 기술서고 전체 규칙을 설명하는 방식과 잘 맞아떨어진다는 사실은 확인됐다.
제0경로. 종점 확인자 미배정. 서류의 겉모습만 보면 마법이나 신비한 차원 문 같았다. 그러나 실제 기술서는 매우 건조했다.
[수신 기관 또는 수신 담당자의 신원이 특정되지 않은 경우 시험을 금지한다. 잘못된 수신점은 자료 유실·오발송·동의 없는 노출을 일으킬 수 있다.]
“이건 회신을 잘못 보내지 말라는 이야기네요.” 수현이 말했다.
루세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게 읽는 것이 가장 안전합니다. 경로가 있다는 말과 사람이 이동할 수 있다는 말은 다릅니다.”
수현은 실망하지 않으려고 애썼다. 익숙해졌다고 해도 쉽지 않았다. 매번 문 앞까지 도달한 것 같다가, 문은 원래부터 사람을 위해 만들어진 것이 아니었다는 걸 확인했다.
“제 서울 주소를 종점으로 적으면 확인자가 배정될까요?”
세드나가 바로 말했다. “확인할 수 없는 주소라면 오히려 위험합니다.”
“알아요. 그냥 잠깐 그런 생각이 들었어요.”
루세는 부드럽게 말했다. “그 생각이 드는 건 당연합니다. 하지만 지금까지 알아낸 원칙을 버리지 말아요.”
수현은 숨을 고르고 고개를 끄덕였다.
***
같은 날 메이의 잔여 치료비 심사 결과 일부가 도착했다. 실제 사용된 마석 비용 가운데 길드의 운영 경비와 환자 개인 청구가 혼재돼 있다는 사실이 확인됐다. 그러나 누가 최종 부담할지는 아직 결정되지 않았다. 강제 징수 보류는 연장됐고 손목 고리는 해제되지 않았다.
메이는 이번에는 수현에게 어떤 서류를 써야 하느냐고 묻지 않았다. 대신 자신이 정리한 설명을 보냈다.
[실제 치료에 쓰인 물품과 제가 개인적으로 부담해야 한다는 금액은 다를 수 있다는 점을 심사관이 받아들였습니다. 다음에는 운영비와 개인 부담 근거를 각각 확인하겠습니다.]
수현은 답장을 쓰며 웃었다.
[정확히 이해하셨네요. 이제 제가 더 설명할 게 없어요.]
메이가 곧바로 보낸 답장에는 커다란 글씨로 한 문장이 적혀 있었다.
[그래도 놀러는 와야 합니다.]
그걸 읽고 수현은 오래 웃었다. 처음 만난 날 메이는 불안한 얼굴로 자신에게 도움을 청했다. 이제는 쉬는 날 놀러 오라고 말할 수 있었다. 서로에게 필요한 역할이 달라지고 있었다.
카이렌에게서도 편지가 왔다. 자신의 봉인된 의료 기록 중 공개 가능한 일부를 의사와 함께 확인했고, 세 날의 의식 공백이 분명히 기록돼 있었다고 했다. 그러나 그것이 실제 소생이나 K형 장치 착용을 의미하는지는 의료진도 결론을 내리지 않았다. 카이렌은 급한 판단을 하지 않겠다고 했다.
[기록을 읽다 보니 무서웠습니다. 그래서 잠깐 쉬었습니다. 제게 가장 어려운 훈련이더군요.]
수현은 그 문장을 읽으며 미소 지었다. 영웅이 쉬는 법을 배웠다는 사실은 어떤 전설에도 기록되지 않을지 몰랐다. 하지만 그가 살아가기 위해서는 필요했다.
***
오후에 제7원정대 운영 평가 최종 초안이 도착했다. 그동안 시험 운영했던 휴게시간 기록, 보급 인수 확인, 부상자 업무 분장 절차를 계속 적용하자는 권고가 담겨 있었다. 왕국 전체의 법이 바뀐 것은 아니었다. 감독관 브레그도 모든 항목을 무조건 승인한 것은 아니었다. 인력과 예산을 추가 검토할 필요가 있었다.
하지만 초안의 서명란에는 카이렌과 데런, 메이, 젠, 오르카의 이름이 나란히 적혀 있었다. 브레그의 서명은 맨 마지막에 있었다. 수현은 그 순서를 오래 바라봤다. 처음에는 위에서 내려온 명령 때문에 대원들이 피를 흘렸다. 이제는 대원들이 기록한 사실과 요청을 근거로 상급자가 검토했다.
“제가 없어도 되겠네요.” 수현이 혼잣말했다.
세드나는 들은 척도 하지 않고 답했다. “원래도 수현 씨가 왕국 전체의 책임자였던 건 아닙니다.”
수현이 웃었다. “맞아요. 제가 가끔 그렇게 착각했을지도 모르겠네요.”
그녀는 초안에 자기 이름이 없는 것을 확인하고 마음이 한결 편해졌다. 그건 자신의 공이 아니라 원정대 사람들이 해낸 일이었다.
***
저녁 무렵, 기술서고의 사본 정리가 끝났다. 파르마는 제0경로 관련 기록 가운데 종점 확인자의 배정 여부를 추적할 수 있는 색인 하나를 제시했다. 다만 내용이 가려져 있어 처음에는 아무것도 읽을 수 없었다. 본인의 사건과 연결된 내용만 공개할 수 있다는 판단이 내려진 뒤에야 수현에게 제한 열람이 허용됐다.
가려진 글자 사이로 짧은 문장이 나타났다.
[종점 확인자: 응답 대기. 재확인 요청 주체: 미확정.]
수현은 문장을 천천히 읽었다. 즉시 서울에서 답이 왔다는 말도, 안전한 문이 열렸다는 말도 아니었다. 다만 이전에는 보지 못했던 질문의 방향이 있었다. 누군가에게 확인을 요청하려 한 흔적이다.
그 아래에는 작은 별표가 붙어 있었다.
[외부 계열에서 수신한 것으로 분류된 자료가 있을 경우, 자동 응답 원판과 분리하여 제4독립보존고에 보관한다.]
루세가 낮게 말했다. “제4독립보존고라면 동부 관측소 자료와 다른 경로일 수도 있어요.”
세드나가 곧바로 펜을 들었다. “그 보존고의 관리 주체와 열람 권한부터 확인하겠습니다.”
수현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나 가슴 한쪽에서 작은 떨림이 올라왔다. 지금까지 봤던 자동 경고문과는 다른 실제 입력이 있었을지도 모른다는 기대였다. 그 기대가 너무 크지 않도록 그녀는 자기 손등을 눌렀다.
“아직 어디에서 왔는지는 모르는 거죠.”
“모릅니다.” 루세가 답했다.
“그럼 확인하러 가죠. 다만 이번에도 사람이 움직이는 시험은 하지 않겠습니다.”
세드나는 그녀의 말 아래에 작게 서명을 했다.
***
제4독립보존고의 이름을 듣고 수현은 곧바로 떠날 채비를 하려 했다. 그러나 세드나가 먼저 서류를 펼쳤다.
“거기 보관된 자료가 우리 사건과 연결되는지는 아직 알 수 없어요. 방문해서 아무것도 못 볼 수도 있습니다.”
“그러니까 먼저 연락해야겠죠.”
“맞습니다. 그리고 이곳에서 만든 제한 열람 결정이 그곳에도 통하는지는 확인해야 합니다.”
수현은 잠시 웃었다. 이제는 자신보다 세드나가 먼저 조심스러운 사람이 되어 있었다. 처음 만났을 때 세드나는 권한이 없다는 이유로 수현을 돌려보내려 했다. 지금은 허가가 필요한 이유뿐 아니라 가능한 절차도 함께 설명했다.
“처음에는 세드나 씨가 무서웠는데요.”
“저도 처음에는 수현 씨가 무서웠습니다.”
“제가요?”
“나타난 경위도 모르는데 계약서를 보여 달라고 했으니까요. 무슨 일을 저지를지 몰랐죠.”
수현은 웃음을 참지 못했다. “저도 무서웠어요. 여기서는 틀린 말을 했다가 진짜로 감옥에 갈 수도 있다고 생각했거든요.”
“지금은요?”
“여전히 조심하고 있어요. 다만 혼자 겁먹지 않아도 된다는 걸 알았죠.”
세드나는 종이를 정리하며 말했다. “그러면 이번 신청은 혼자 하시지 않아도 되겠네요.”
그들은 제4독립보존고의 관리 부서에 확인 요청을 작성했다. 수현의 이름과 사건 접수번호는 필요 범위로만 적었다. 서울의 상세 주소나 아직 확인되지 않은 외부 계열 추정은 기재하지 않았다. 요청 범위는 보존고의 실재, 해당 색인의 소장 여부, 안전한 열람 조건 세 가지뿐이었다.
“이렇게 적으면 목적지가 다른 세계라는 걸 증명할 수는 없겠죠?” 수현이 물었다.
“아직 그 단계를 묻는 게 아니니까요.” 세드나가 답했다. “무엇이 보관돼 있는지부터 확인해야 하죠.”
수현은 서명했다. 불과 얼마 전까지만 해도 어느 기관에 보내는 서류인지도 모르면서 조급하게 신청서를 썼을 것이다. 이제는 자신이 어떤 사실을 알고 싶고 어떤 정보는 지키고 싶은지 구분할 수 있었다.
그날 오후 루세가 새로운 안전 점검표를 보여 주었다. 독립보존고는 기술서고와 달리 장치를 작동하지 않는 시설이었다. 종이와 기록판을 보존하는 곳이었다. 따라서 접근 위험은 장치의 폭발이 아니라 보존 상태와 개인정보 노출, 자료 훼손 등에 가까웠다.
“이번에는 누가 다칠까요?” 수현이 농담처럼 물었다.
루세가 진지하게 답했다. “종이가 다칠 수는 있겠죠. 그리고 누군가의 사생활이요.”
수현은 웃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것도 안전이네요.”
서고를 나오며 그녀는 거리에 서 있는 사람들을 바라봤다. 짐꾼은 마차를 밀었고 빵집 주인은 손님에게 잔돈을 건넸다. 누군가는 멀리 떠나고 누군가는 집으로 돌아왔다. 그 평범한 움직임들 사이에서 자신만 길을 잃었다고 생각한 시간이 길었다.
하지만 지금은 달랐다. 자신이 돌아갈 수 있는지 여전히 모른다. 그래도 누구의 말과 서류를 믿을지, 어떤 위험은 거절할지, 어떤 도움은 요청할지 선택할 수 있었다.
수현은 작은 종이봉투 하나를 꺼냈다. 서울에서 가지고 온 것은 아니었다. 지금 이 세계에서 산 평범한 봉투였다. 그 안에는 제4독립보존고에 보낼 신청서 사본이 들어 있었다.
“이번에는 봉투가 저 대신 어디로든 가 버리지 않으면 좋겠네요.”
세드나가 말했다. “우선 접수 창구까지는 제가 함께 가겠습니다.”
두 사람은 나란히 걸었다. 어느 문 뒤에 무엇이 있는지 몰랐다. 하지만 이번에는 누가 그 문을 열었고, 누가 들어가기로 선택했는지 확실히 남길 수 있었다.
***
신청서를 접수하기 전 수현은 마지막으로 한 가지를 더 물었다.
“이 보존고의 기록을 열람해도, 제 연락처나 고향의 상세한 주소를 제출하지 않아도 되는 거죠?”
세드나는 접수 규정을 다시 펼쳤다. “지금 단계에서는 사건 접수번호와 제한 열람 승인만으로 충분합니다. 특정 기록을 본인 정보와 대조해야 하는 상황이 오면 그때 필요한 범위를 따로 설명해야겠죠.”
수현은 고개를 끄덕였다. 자기 나라에서는 너무 자연스러운 개인 정보가 이곳에서는 위험한 단서가 될 수 있었다. 어딘지 확인되지 않은 수신점에 주소를 보내는 일은 집으로 돌아가는 것보다 먼저 자신이 사는 곳을 낯선 사람에게 알리는 일이었다.
“그럼 그 조건도 신청서에 적어 둘게요.”
“적으세요.”
수현은 [현재 열람 단계에서는 원래 세계의 상세 주소나 가족 정보가 필요하지 않음]이라고 썼다. 덧붙여 향후 다른 정보가 필요해지면 목적과 보존 기간을 설명받겠다고 적었다.
그녀의 서명은 전보다 조금 단단해 보였다. 동의할 일을 스스로 선택한다는 것은 기계 앞에 설 때만 필요한 일이 아니었다. 서류 한 장을 보내는 순간부터 필요한 일이었다.
***
밤이 깊어 여관 방으로 돌아왔을 때 수현은 오래된 휴대폰을 꺼냈다. 배터리는 여전히 죽어 있었다. 검은 화면에 비친 얼굴은 처음 이곳에 왔을 때와 다르게 보였다. 그때는 하루라도 빨리 돌아가야 한다는 생각밖에 없었다. 지금도 돌아가고 싶은 마음은 변함없었다. 다만 그 마음을 위해 다른 사람을 밀어낼 필요는 없다는 걸 배웠다.
그녀는 종이를 한 장 꺼내 자신의 이름을 적었다.
[이수현. 자발적 귀환 의사 유지. 원래 세계의 안전한 신원 확인 방법을 요청. 개인정보 전송 및 인체 이동 실험은 별도 동의 전까지 허용하지 않음.]
마지막 문장을 적고 펜을 놓으려는 순간, 창가에 놓인 작은 봉투가 눈에 들어왔다. 낮에 기술서고에서 돌아오며 세드나가 건넸던 보존고 위치 안내였다. 수현은 무심코 봉투를 뒤집었다.
그 뒤에는 펜으로 지운 흔적이 있었다. 종이를 비스듬히 세우자 희미하게 남은 세 글자가 보였다.
[반송 미정]
그 말이 무슨 의미인지 알 수 없었다. 누가 무엇을 돌려보내려 했는지도 몰랐다. 하지만 그녀는 이번에는 서둘러 뜻을 정하지 않았다. 우선 봉투의 출처를 확인하고, 다른 사람의 기록과 대조할 것이다.
그날 수현은 일기 맨 아래에 단 한 문장을 썼다.
[돌아갈 문을 찾는 일은, 누가 문을 열어 줄 수 있는지 묻는 일부터 시작된다.]
제110화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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