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존 담당자의 서명이 시험물보다 먼저 이동했다.
수현은 문장을 세 번 읽었다. 이해가 되지 않았다. 사람의 서명이 혼자 뛰어다닐 리 없었다. 적어도 이 세계에서 문서가 저절로 걷는 일은 아직 본 적이 없었다. 마법으로 작동하는 손목 고리도 계약서를 대신 읽어 주지는 않았다.
“서명이 먼저 도착했다는 게 정확히 뭘 뜻하죠?”
루세는 두 장의 시간표를 내밀었다. 한 장은 기술서고, 다른 한 장은 서쪽 물품 보존소에서 발행된 것이었다. 첫 번째 표에는 보존 담당자의 확인 서명이 적혀 있었고, 두 번째 표에는 유리구슬이 입고됐다는 시각이 적혀 있었다.
“시간이 거꾸로예요.” 수현이 말했다.
“표면상 그렇습니다.”
“이전에도 시간이 서로 다른 기준으로 기록됐잖아요. 동부 관측소처럼.”
“맞습니다. 그래서 신기한 현상이라고 결론 내리기 전에 시계부터 봐야 합니다.”
수현은 오랫동안 묶인 기록의 시간 순서를 따라 적었다. 시험 당일 서고의 물시계는 한 번 멈췄다. 보존소의 종시계는 계절에 따라 한 차례 교정했다. 두 기록이 같은 ‘오후 세 시’라고 적어도 실제로는 한두 시간 차이가 날 수 있었다.
“결국 서명이 먼저 간 게 아니라 시계가 다르게 움직였을 수도 있겠군요.”
“그럴 가능성이 있습니다.”
“그래도 실제 구슬이 어디서 왔는지 모르는 건 변함없고요.”
루세는 수현의 필기 위에 조그맣게 동그라미를 그렸다. “그래서 둘을 동시에 조사해야 해요. 서명이 누가 쓴 것인지, 구슬은 어디서 왔는지.”
***
수현은 물품 보존소의 옛 기록 담당자 가족에게 조심스럽게 연락했다. 당사자는 오래전에 세상을 떠났지만 기록 일부는 유족에게 남아 있었다. 유족에게 요구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수현은 자신이 조사하는 사건의 목적과 공개하면 안 되는 내용을 먼저 설명했고, 거절해도 불이익이 없다는 문장을 넣었다.
답장을 보낸 사람은 작은 세탁소를 운영하는 중년 여성이었다. 그녀는 부친의 옛 장부를 보존했지만 개인 편지는 열람할 수 없다고 선을 그었다.
“그럼 장부의 목차만 보여 주실 수 있을까요?” 수현이 물었다.
여자는 수현을 한참 바라보더니 말했다. “묘하게 아버지가 하던 질문이네요. 그분도 늘 내용보다 먼저 기록의 주인을 물으셨거든요.”
장부에는 구슬의 인수 날짜가 적혀 있었다. 그러나 그 옆에는 [확인 서명은 회신판에서 선행 전달]이라는 구절이 있었다. 물품의 이동과 별도로 보관 확인 내용만 먼저 수신실에 보냈다는 뜻이었다.
수현은 속으로 한숨을 내쉬었다. 또 한 번 ‘사람이나 물건이 움직였다’는 신비한 설명보다 행정 처리 방식이 더 그럴듯해졌다.
“아버님이 사고를 겪으셨나요?”
“아버지는 손이 아니라 허리를 다치셨어요. 부상 이후 그만두셨죠.”
수현은 할 말을 삼켰다. 옛 안전사고의 퇴실 확인관과 이 사람을 연결할 근거는 없었다. 그녀는 조심스럽게 목차 사본의 열람 동의를 받았다.
“원본은 여기 두겠습니다. 공개 보고서에는 이름을 빼도 될까요?”
“그렇게 해 주세요.”
유족은 잠시 망설이다가 옛 기록의 한쪽 구절을 가리켰다.
[서명하는 손과 확인하는 눈은 같은 자리에 있을 필요가 없다. 그렇지만 서로 누구인지 알 수 있어야 한다.]
수현은 그 말을 오래 바라봤다. 서로 다른 공간에서 문서를 확인할 수 있다는 사실은 흥미로웠다. 다만 확인자가 누구인지 모르면 그 기록은 아무것도 증명하지 못했다.
***
저녁에 기술서고로 돌아온 수현은 새로운 요청서를 작성했다. 안전하게 보존된 물품의 동일성, 독립 수신 경로의 신원 인증, 두 시설의 시간 기준을 따로 대조하자는 제안이었다. 위험 장치의 재가동은 신청하지 않았다. 실험을 하고 싶은 마음은 있었지만, 마음만으로 실험 요건이 채워지는 것은 아니었다.
세드나는 서류를 검토하다가 질문했다. “이렇게까지 분리하면 결론이 나오기까지 오래 걸리지 않겠어요?”
“그래도 누가 어느 부분에서 틀렸는지 알 수 있잖아요. 한 번에 답을 낸다고 해도 그 답이 틀렸다면 더 오래 걸릴 거예요.”
루세가 서명했다. 그는 관리 책임자가 아닌 기술 검토자로서 자신의 범위를 제한했다. 파르마는 작업자 안전 조건을 추가했다. 아르덴은 서고 측 기록 제공 여부에만 서명했다.
어느 누구도 수현 대신 귀환 실험에 동의하지 않았다.
서류가 완성됐을 때, 루세는 유리구슬의 기포 그림을 보여 주었다. 새로 발견된 작업 도면이었다. 내부 푸른 기포는 제작 당시 이미 존재했다. 기포가 같은 모양이라는 이유만으로 동일 물건이라고 보기는 어려웠지만, 제작 공정의 특이점 하나는 확인됐다.
“만약 유리구슬을 다른 곳에서 복제했다면 이 기포의 형태도 똑같이 만들 수 있을까요?” 수현이 물었다.
“고급 장치라면요. 그러나 만들어진 위치를 독립 기록으로 남겼다면 구별할 수 있겠죠.”
“그 독립 기록이 없군요.”
“아직 못 찾았습니다.”
***
기술서고의 시계 문제를 확인하던 날 수현은 낡은 시간 교정표 한 장을 받았다. 표에는 한때 사용하던 물시계의 하루 오차와 종시계의 계절별 보정값이 따로 적혀 있었다. 관리인 아르덴은 오래된 표식이라 이 수치가 실제 사건 당일에도 적용됐는지는 확신할 수 없다고 말했다.
“그럼 계산을 해 보더라도 가정이겠네요.”
“맞습니다. 원장 날짜가 어느 날까지 갱신됐는지를 먼저 확인해야 하죠.”
수현은 표를 일단 책상에 내려놓았다. 기술자를 따라 복잡한 식을 풀고 싶은 마음은 없었다. 자기에게 필요한 것은 무엇을 측정했으며, 누가 그걸 보고 기록했는지였다. 그 사실이 없으면 정확한 숫자도 신뢰하기 어려웠다.
루세는 종이에 두 줄의 시간선을 그렸다. 첫 번째 줄에는 구슬의 재검사실 반입, 두 번째 줄에는 확인 서명의 수신 시점을 적었다. 그리고 교정 범위를 넓게 잡아 본 결과를 두 가지로 나누었다.
“이 범위에서는 서명이 먼저 도착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다른 교정값을 적용하면 순서가 뒤집힙니다.”
“결국 시간만으로는 결정할 수 없네요.”
“네. 그리고 그걸 미확정이라고 표시하는 게 중요합니다.”
수현은 두 가지 가능한 순서를 서로 다른 색으로 표시했다. 마음은 하나의 답을 원했지만, 기록이 두 개의 답을 허용한다면 둘 다 남겨야 했다. 그래야 새로운 자료가 나왔을 때 어느 쪽이 틀렸는지 확인할 수 있었다.
조사가 길어지자 루세는 허리를 펴며 말했다. “이런 작업을 한다고 어디로도 갈 수 없다니 답답하지 않습니까?”
“답답해요. 그래도 잘못된 확신을 갖고 누군가를 위험하게 보내는 것보다는 나아요.”
루세가 잠시 그녀를 바라보았다. “언젠가 정말 사람을 안전하게 이동시킬 방법이 발견된다면 그때는 하시겠습니까?”
수현은 곧장 답하지 않았다. 과거였다면 무조건 그렇다고 했을 것이다. 자신이 돌아갈 수 있다는 말만 들어도 뛰어들고 싶었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은 동의해야 하는 내용이 무엇인지 묻는 일이 먼저였다.
“가능성을 입증한 자료부터 보고 싶습니다. 예상되는 위험과 돌아오지 못할 가능성도요. 그리고 제가 마음을 바꾸면 멈출 수 있어야 합니다.”
“까다로운 참가자가 되겠군요.”
“그게 건강한 참가자 아닐까요?”
두 사람은 웃었다. 웃을 수 있는 대화였지만, 수현은 질문의 무게를 잊지 않았다. 지금까지 자신은 우연히 여기 와서 살고 있었다. 돌아가는 선택만큼은 우연이 아니라 자신의 판단으로 하고 싶었다.
그날 오후 서고에서 작은 오류가 발견됐다. 실습생이 시간 교정표를 복사하며 오른쪽 여백의 부호를 빠뜨린 것이다. 수현이 본 사본과 원본의 숫자가 같았지만, '+'와 '-'의 차이는 큰 의미를 가졌다. 루세는 원본을 다시 가져와 설명했다.
“이 기호가 빠지면 보정 방향이 뒤집힙니다. 시각이 먼저인지 나중인지 판단이 달라져요.”
실습생은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죄송합니다. 일부러 그런 건 아닙니다.”
“알아요.” 루세가 말했다. “그래서 복사본에는 검토 서명이 필요합니다. 혼자 잘못했다고 책임지게 하는 규정이 아니라, 누구나 실수할 수 있으니까 함께 확인하는 규정이죠.”
수현은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원본을 훼손하지 않은 덕분에 오류를 발견할 수 있었다. 실습생은 수정 날짜와 이유를 적고 새로운 사본을 만들었다.
“전 다음부터 좀 더 주의할게요.”
“그것도 좋지만 검토 절차가 있으면 더 좋겠어요.” 수현이 말했다. “아무리 주의해도 실수는 하니까요.”
그날의 작은 사건은 수현에게 오래 남았다. 거대한 마법 장치의 위험보다 작은 부호 하나가 더 위험할 수도 있었다. 사람의 귀환을 논할 때는 특히 그랬다. 한 사람의 몸을 잘못된 목적지로 보낸 다음에는 서류를 정정하듯 되돌릴 수 없을지 모르니까.
***
수현이 시간표의 부호를 확인한 뒤 다시 살핀 것은 당시 근무자의 교대 기록이었다. 기록에는 새벽 점검과 낮 점검이 서로 다른 사람 이름으로 남아 있었다. 그러나 실제로 교대가 이루어졌는지는 확인되지 않았다. 이름 하나가 두 장소에 적혀 있는 날도 있었다.
“한 사람이 동시에 두 곳에 있을 수는 없잖아요.”
세드나는 조심스럽게 말했다. “그렇다고 곧바로 거짓 기록이라고 판단할 수는 없습니다. 대리 작성이나 사후 정리였을 수도 있으니까요.”
“맞아요. 그럼 작성 시점을 찾아야겠죠.”
루세는 장치실과 창고의 기록 위치를 비교했다. 한쪽 종이는 그날 현장에서 쓰였고, 다른 쪽은 일주일 뒤 묶음으로 정리됐다고 표시돼 있었다. 수현은 고개를 끄덕였다. 사건이 일어난 시점과 사람이 종이에 적은 시점은 다를 수 있었다.
“그러면 이 표에서 눈에 보이는 시간 순서는 실제 작업 순서가 아닐 수 있겠네요.”
“그렇습니다.”
수현은 종이에 [작업 시점]과 [기록 작성 시점]을 따로 적었다. 오래된 사건을 조사할 때에는 그 두 시점을 구분하는 것만으로도 불필요한 오해를 줄일 수 있었다.
세드나는 잠깐 미소 지었다. “처음에는 복잡한 기계 때문에 일이 어려울 거라고 생각했는데, 사람의 기억과 기록도 만만치 않네요.”
“그렇죠. 그런데 기계가 위험할수록 사람의 기록은 더 정확해야 할 것 같아요.”
수현은 다시 교대표를 덮었다. 자신이 돌아갈 수 있는 장치가 언젠가 생긴다 해도, 누가 언제 무엇을 확인했는지 알 수 없다면 그 장치를 믿기는 어려울 것이다.
***
루세는 끝으로 빈 시간표를 가리켰다. “여기 실제 점검이 있었는지 기록이 없습니다.”
수현이 물었다. “그럼 기록이 없다는 사실도 그대로 적죠. 점검을 안 했다고 단정하지 말고요.”
세드나가 그 말을 받아 적었다. 수현은 조용히 창밖을 보았다. 기록으로 확인되는 사실과 실제 있었던 일을 혼동하는 순간, 다시 누군가의 책임이 엉뚱한 곳으로 향할 수 있었다. 그 구분을 끝까지 유지하는 일이 지금 자신이 할 수 있는 가장 중요한 조사 방식이었다.
***
그날 밤 메이의 소식도 도착했다. C-47 심사관 키아가 잔여 치료비 중 마석의 실제 사용량을 다시 확인하기로 했다는 내용이었다. 메이는 강제 징수 보류가 이어지고 있다는 사실을 확인했고, 고리의 글자는 완전히 지워지지 않았다.
[당장 물약값을 대신 내라고 하지는 않았어요. 그런데 언제까지 보류되는지 모른다고 하니 답답해요.]
수현은 편지를 읽고 길게 답장을 쓰려다가 멈췄다. 자신이 모든 절차를 설명하는 건 의미가 없었다. 메이는 이미 어떤 부서에 질문해야 하는지 알고 있었다. 그녀는 대신 수현 자신이 겪는 기다림을 적었다.
[저도 결과를 기다리는 일이 많아요. 요즘은 기다리는 동안 확인할 수 있는 것과 없는 것을 나누려고 합니다. 기다리는 시간이 전부 헛된 건 아니지만, 충분히 설명받을 권리는 필요하죠.]
수현은 편지를 접었다. 두 사람은 서로 다른 문제를 겪고 있었지만, 누가 대신 결론을 내려 주는 것보다 자신의 속도로 확인하는 일이 중요하다는 건 같았다.
책상 위에는 구슬 도면과 서고 서명표가 남아 있었다. 수현은 손바닥을 문지르며 생각했다. 어쩌면 자신이 돌아가는 길은 사람 한 명을 작은 구슬처럼 옮기는 기술이 아닐지도 모른다. 자신이 어떻게 이곳에 도착했는지 설명하는 기록을 복원해야, 돌아갈 방법을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그때 문밖에서 루세가 말했다.
“내일 오전에 최초 시험의 독립 관찰 기록을 볼 수 있게 됐습니다. 다만 한 장이 통째로 비어 있답니다.”
수현은 고개를 들었다.
“누가 떼어 갔다나요?”
“아니요. 애초에 적히지 않았을 수도 있습니다.”
수현은 펜을 들었다. 빈칸이 언제나 삭제의 증거는 아니었다. 그러나 왜 비어 있는지는 물을 수 있었다.
제107화 댓글 0
댓글·공감·신고는 로그인 후 이용할 수 있습니다. 이전 익명 댓글은 그대로 표시됩니다.
댓글을 불러오는 중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