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의록을 읽다 보면 가끔 이상한 사람이 나온다.
그 사람은 회의에 참석하지 않았고, 발언도 하지 않았으며, 자기 의견에 동의한 적도 없다. 그런데 마지막 장의 서명란에는 그 사람이 ‘확인했다’고 적혀 있다.
이번에는 이름이 아니라 번호였다.
0003.
나는 새벽부터 그 번호를 째려봤다. 번호는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 숫자를 붙잡고 화를 내는 일은 회계사의 특권이지만, 이 정도면 나도 조금 피곤해진 것 같다.
“도윤 님, 눈 밑이 검어요.”
피코가 말했다.
“원래 조금 검어.”
“오늘은 마왕님 망토만큼 검어요.”
“그럼 꽤 심각하네.”
피코가 버섯차를 건넸다. 녀석은 언제부턴가 내가 밤새 기록을 읽으면 다음 날 아침 차를 가져왔다. 따뜻한 차가 필요한 이유를 알고 있는 것만으로도 좋은 동료였다.
우리는 공동 보증 회계소에서 전달한 ‘업무 규정 개정 승인 등본’을 다시 봤다. 제3감리 직접 서명은 없고, 구형 대리번호의 인계 확인만 있었다. 후대 시스템은 그것을 최종 승인으로 처리했다. 여기서 누가 잘못했는지 곧장 말할 수는 없었다. 개정 당시 규칙이 대리 인계를 허용했는지, 서명이 분실됐는지, 원래 문서가 따로 있는지 확인해야 했다.
“그래서 오늘은 원본을 보러 가는 겁니까?”
피코가 물었다.
“응. 이번엔 회계소 보존 창고.”
“출입증이 또 필요하겠네요.”
“필요하겠지.”
“그럼 제가 신청서 써 놨어요.”
녀석이 내민 신청서를 보자 나는 웃음이 났다. 목적란에는 ‘서류가 왜 서류를 승인했는지 알아보러 감’이라고 적혀 있었다.
“이건 조금 고쳐야겠다.”
“틀렸어요?”
“틀렸다기보다, 담당자가 읽으면 우리를 이상한 사람으로 볼 거야.”
“우리가 좀 이상한 일을 하는 건 맞잖아요.”
맞다. 더는 반박할 수 없었다.
회계소 건물은 왕국과 중립 지역 사이의 오래된 다리 위에 있었다. 건물 반은 왕국 석재로, 나머지 반은 중립 공관의 벽돌로 지어졌다. 누가 설계했는지는 모르지만 건물 자체가 비용 분담 협상을 끝내지 못한 결과처럼 보였다.
문 앞에서는 직원이 출입 확인을 요구했다. 나는 신분증을 보여 줬다. 직원은 내 소속을 읽고 놀란 눈으로 나를 봤다.
“마왕성 재정실에서 오셨습니까?”
“네.”
“여기서는 마왕성 업무도 맡습니까?”
“이곳에서 마왕성 관련 상태값이 변환됐다고 해서요.”
직원은 고민하다가 아레인에게 전송했다. 잠시 뒤 공동 입회 승인이 확인됐다. 문이 열렸다. 빠른 처리였다. 그런데 나는 입구에서 문구 하나를 발견했다.
[출입증 수령 시 시설 내 모든 보안 규칙 동의로 간주]
“이건 수정해야 하지 않을까요?”
직원이 난처한 얼굴로 물었다.
“왜요?”
“출입증을 받는 것과 모든 보안 규칙에 동의하는 건 구분해야 할 것 같아서요. 적어도 규칙은 보여 줘야죠.”
직원은 벽에 붙은 안내판을 가리켰다. 거기에는 규칙이 여러 언어로 적혀 있었다. 다행히 출입자는 미리 읽을 수 있었다. 하지만 마지막 문장에는 즉시 거절할 방법이 없었다.
나는 정정을 요청했지만 오늘 출입을 취소하진 않았다. 기록관과 확인한 임시 출입 절차로 필요한 열람만 진행하기로 했다. 사람의 실수를 찾겠다고 지금 일하는 직원에게 불합리한 짐을 씌우고 싶지는 않았다.
보존실에는 회계소의 옛 직원들이 남긴 업무 일지가 있었다. 직접 서명 원본은 안전 금고에 보관돼 있었고, 우리는 사본을 먼저 대조했다. 페이지마다 서로 다른 색깔의 결재인이 찍혀 있었다. 왕국의 청색, 천계의 금색, 중립 감리의 녹색. 그런데 문제의 개정 문서 마지막 장에는 녹색이 없었다.
“이게 누락된 겁니까?”
라델이 물었다.
“원본에도 없는지 확인해야 합니다.”
내가 말했다.
아우렐이 원본 봉인을 검사했다. 세 명의 보존관이 입회했고, 서명 대상 페이지를 제한해 열람했다. 원본에도 녹색 도장은 없었다. 대신 구형 0003 인계 확인장이 붙어 있었다.
“이건 분명히 승인 효력이 없다는 표시입니다.”
아레인이 말했다.
그의 손가락이 작은 글씨를 가리켰다.
[문서 수령 사실만 확인. 개정 권한 비포함.]
나는 가볍게 눈을 감았다. 오래된 장부의 인수 확인과 같은 표현이었다. 후대 시스템이 수령과 승인을 섞어 버린 문제는 실재했다. 하지만 승인 도장이 없다는 이유만으로 개정 전체가 당연히 무효가 되는지는 별도 판단이 필요했다. 그 사이 수많은 거래가 이 시스템을 거쳐 갔으니까.
“이 문서를 만든 기술팀은 어디에 있죠?”
내가 물었다.
회계소 직원이 말했다.
“해산됐습니다. 일부는 다른 부서로 이동했고, 일부는 퇴직했습니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역시 담당자 없는 시스템이다. 다만 옛 직원들을 죄인 취급할 순 없었다. 누가 어떤 역할을 맡았는지 확인해야 했다.
기록의 마지막 페이지에는 반대 의견 하나가 있었다.
[거절 표시가 없는 자동 전환은 계약 효력 판단에 사용할 수 없음.]
나는 그 문장을 읽고 피코를 봤다. 녀석도 읽었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유니아가 보낸 자료에 비슷한 문장이 있었다. 한국어 원문에도, 옛 제3감리 규정에도 닮은 뜻이 있었다. 같은 사람의 글이라고 단정할 근거는 없지만, 여러 사람이 같은 위험을 보았다는 것은 분명했다.
“이 반대 의견의 작성자를 찾을 수 있습니까?”
내가 물었다.
“이름은 가려져 있습니다.”
회계소 직원이 답했다.
“작성자의 비공개를 보호해야 하는 사유가 있습니까?”
“당시 내부 직원 보호 요청이 접수됐습니다.”
나는 더 묻지 않았다. 익명의 반대 의견이 누구 것인지 알아내는 것보다, 그 의견이 왜 반영되지 않았는지 알아내는 게 먼저였다.
원본 봉인을 닫기 전에 보존관은 모든 참석자에게 열람 종료 확인서를 나눠 줬다. 나는 문구부터 읽었다. ‘원본을 확인했으며 사본을 수령했음.’ 여기까지는 괜찮았다. 그러나 아래쪽에 ‘내용에 이의 없음’이라는 별도 항목이 있었다.
“저건 선택적으로 체크하는 칸입니까?”
내가 물었다.
“네. 체크하지 않아도 열람을 마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좋네요.”
나는 첫 항목에만 표시했다. 피코도 내 손을 따라 하다가 멈췄다.
“저는 원본을 직접 만지진 않았어요. 화면으로만 봤는데요.”
“그럼 그렇게 적자.”
보존관은 ‘입회 화면 열람’이라는 문구를 추가했다. 한 사람이 본 것과 다른 사람이 본 것까지 구분됐다. 작은 차이지만 나중에 누가 원본 훼손을 발견했을 때 책임 범위를 확인할 수 있을 것이다.
회계소 보존관이 덧붙였다.
“옛 직원들 가운데는 당시 서식이 잘못됐다고 생각했지만 바꿀 권한이 없었던 분도 있을 겁니다.”
“그분들의 의견이 남아 있나요?”
“일부는 내부 검토 기록으로 보관돼 있습니다. 다만 이름을 공개할 수는 없습니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진실을 찾는다고 모든 이름을 공개하는 건 좋은 방법이 아니다. 다른 방식으로 당시 반대 의견의 존재와 처리 결과를 확인할 수 있을 것이다.
피코가 낮게 물었다.
“도윤 님, 그때 누군가 반대했는데도 왜 규정이 바뀌었을까요?”
“모든 반대 의견이 맞는 건 아니니까. 하지만 왜 받아들이지 않았는지는 설명할 수 있어야겠지.”
“그럼 그 설명도 원본으로 남아 있을까요?”
“찾아봐야지.”
나는 기록관에게 심사 결과서의 존재를 문의했다. 답은 뜻밖이었다. 개정안에 대한 반대 의견 접수 기록은 있으나, 최종 결재 설명서의 일부 페이지가 다른 보존함으로 옮겨져 있었다. 예전 업무 인계 때 페이지를 분리 보관한 흔적이 있다는 것이다.
“그 보존함은 어디에 있습니까?”
“천계 제7서고의 보조 목록으로 넘어갔습니다.”
나는 피코를 봤다.
“또 제7서고네.”
“거긴 도윤 님 이름도 있었잖아요.”
“그래. 하지만 같은 장소에 있다는 게 같은 사건이라는 뜻은 아니야.”
피코가 살짝 웃었다.
“이젠 저도 알아요.”
그러면서도 녀석의 눈은 반짝였다. 나 역시 궁금했다. 지워진 결재 설명서가 그곳에 있는 이유를.
우리는 그 자리에서 서고 전체 열람을 요청하지 않았다. 관련 페이지의 목록 번호와 이동 기록만 보존관에게 문의했다. 피코가 신중한 얼굴로 수첩에 적었다.
‘새 단서 발견. 먼저 목록부터 확인.’
나는 그 문장을 보고 작은 미소를 지었다. 훌륭한 제자가 내 옆에서 자라고 있었다.
오후에는 공동 입회 회의가 열렸다. 나는 세 가지 제안을 냈다. 첫째, 당사자의 권리나 고용 상태를 바꾸는 자동 승계는 직접 확인 없이는 확정하지 않는다. 둘째, 단순 배송이나 보관 인수처럼 사실을 기록하는 업무는 필요한 범위에서 유지한다. 셋째, 과거 처리 내역의 시정은 피해 정도와 실제 지급 여부를 확인해 순차 진행한다.
라델은 첫 번째 제안에 동의했지만, 왕국 계약 중 일부는 기존 절차로 체결됐다며 소급 범위를 신중히 정해야 한다고 했다. 아우렐은 천계 내부 귀환 기록에 영향을 미치므로 별도 보존 승인 절차가 필요하다고 말했다. 나는 그들의 말을 회의록에 적었다. 반대는 때로 일을 늦추지만, 나중에 다시 다투지 않게 하는 유일한 길이기도 하다.
서로 다른 기관의 임시 조치를 정리하는 데 시간이 걸렸다. 왕국 측은 자기 기관의 법적 효력을 정식으로 검토해야 한다고 했고, 천계는 귀환 관련 기록에 별도 보존 절차가 필요하다고 했다. 중립 공관은 각 기관에서 보내 온 자료를 무조건 하나로 합치지 말자고 권했다.
나는 그 의견들을 나란히 놓고 읽었다. 언뜻 다투는 것처럼 보여도, 각 기관의 책임이 다르다는 걸 인정하면 할 수 있는 일부터 정할 수 있었다.
“그럼 오늘 아무것도 못 정하는 건가요?”
피코가 낮게 물었다.
“아니. 우리가 실제로 확인할 수 있는 부분부터 바꾸는 거지. 권한 없는 결정을 하는 것보다 낫잖아.”
아레인이 회의록에 한 줄을 추가했다.
[각 기관별 임시 조치의 효력은 해당 기관의 권한 범위에 한정함.]
나는 그 말을 읽고 고개를 끄덕였다. 이런 문장이야말로 편지의 비밀 못지않게 오래 남아야 한다.
회의 도중 피코가 조심스럽게 손을 들었다.
“저도 말해도 돼요?”
“물론이지.”
녀석은 자기 손바닥만 한 나무 도장을 꺼냈다.
[받았음. 찬성하지 않았음.]
모두가 그것을 바라봤다. 아우렐이 웃음을 터뜨렸다.
“공식 서식은 아니겠군요.”
“아직은요.”
피코가 당당하게 말했다.
“그런데 이걸 보면 차이는 알 수 있잖아요.”
아레인이 진지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표현을 다듬으면 교육용 안내문에 넣을 수 있겠습니다.”
나는 피코의 어깨를 두드렸다. 고블린이 만든 장난감 도장이 국제 회계소 교육 자료 후보가 되는 걸 보게 될 줄은 몰랐다.
회의 결과는 최종 확정이 아니었다. 관계 기관이 각자 검토한 뒤 효력을 정해야 했다. 하지만 임시로 새 자동 승계 건은 당사자 확인 대기 상태에 두기로 합의했다. 그 조치가 실제 시스템에 적용됐는지는 별도 시험이 필요했다.
우리는 가상 계정을 만들어 귀환 상태, 퇴직 상태, 물품 인수 상태를 각각 입력했다. 앞의 두 건은 확인 대기로 멈췄다. 물품 인수는 정상적으로 기록됐다. 나는 그 결과를 공동 회의록에 첨부했다.
“오늘은 성공했네요.”
피코가 말했다.
“시험은 성공했지. 전체 시스템이 전부 고쳐졌다고는 아직 말 못 해.”
“도윤 님은 성공을 정말 조금씩만 좋아해요.”
“많이 좋아했다가 뒤통수를 맞은 적이 있어서.”
“한국에서요?”
“그것도 있고, 여기 와서도.”
녀석은 나를 불쌍한 사람 보듯 쳐다봤다. 나는 시선을 돌렸다. 고블린에게 위로받으면 이상하게 더 기운이 난다.
저녁에 마왕성으로 돌아왔을 때 새로운 공문이 기다리고 있었다. 옛 연락함의 한국어 자동 안내문에 연결된 별도 보존 보증 건이 있다는 내용이었다. 발급 기관은 중립 공관이었지만, 수취 확인 경로가 회계소에 남아 있었다.
[연락함 보증 항목: 최초 송달 실패 시 기록물 보존 유지]
[최초 보증 예치 상태: 확인 필요]
나는 잠시 멈췄다. 편지를 배달하지 못하면 버리지 말라고 남긴 문장. 그 문장을 지키기 위해 실제로 돈까지 맡겨 놓았을 수 있다는 뜻일까.
“보증금이요?”
피코가 물었다.
“예치가 있었는지부터 봐야지. 항목이 있다는 것과 실제 돈이 있다는 건 다르니까.”
나는 피코의 도장을 바라봤다.
문서를 받았다고 동의하지는 않았다.
그렇다면 누군가 돈을 맡겼다고 적혀 있어도, 정말 맡겼는지는 확인해야 했다.
그리고 그 돈을 누가 맡겼는지 알게 된다면, 편지를 남긴 사람에 대해 조금은 더 알 수 있을지도 몰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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