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왕성에서 처음 월급을 받은 날, 나는 숫자가 맞으면 세상도 그럭저럭 돌아간다고 믿었다.
요즘은 생각이 달라졌다.
장부의 숫자가 맞아도 돈이 주인의 손에 들어가지 않으면 아무 소용이 없다. 반대로 아주 작은 차액 하나가 누군가의 한 달을 버티게 하기도 한다.
그날 아침 도르벤이 내 책상 앞에 앉았다. 드워프 장인의 손은 커다랗고 거칠었다. 그 손으로 성벽에 떨어질 돌을 받쳤고, 폭우가 쏟아지는 날 수문 옆 배수판을 고쳤다. 그런데 그는 내게 아주 작은 종이 한 장을 내밀었다.
“이게 실제로 들어온 돈이오.”
나는 지급 명세서와 수취 확인을 대조했다. 지난번 검수 완료된 성벽 보수 대금 가운데 일부가 실제로 도르벤 계좌에 입금돼 있었다. 나머지는 아직 지급 예정이었다. 나는 지급된 금액에만 체크했다.
“한 부분은 도착했네요.”
“그래. 그 돈으로 견습생들 품삯부터 줬소.”
“나머지는 언제 들어온다고 했습니까?”
“다음 지급일이라는데, 늘 그 말을 하니 걱정이오.”
“이번엔 담당 기관의 지급 지시 번호가 있습니다. 그래도 실제 도착 전까지 완료로 처리하진 않겠습니다.”
도르벤은 웃었다.
“자네는 좋은 소식을 전하면서도 꼭 한 숟갈씩 걱정을 넣는군.”
“그 걱정이 나중에 돈을 찾아 줍니다.”
그는 인정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피코는 옆에서 도르벤의 계좌 잔액을 보지 않도록 시선을 돌렸다. 남에게 필요한 숫자만 보는 법도 배웠다.
오전에는 중립 검문소 경비병들의 야간 근무 수당 확인서가 도착했다. 이전에 조사했던 차액 중 일부에 지급 지시가 내려왔고, 몇 명은 실제 수령을 확인했다. 그러나 모든 근무자의 확인이 끝난 건 아니었다. 나는 명단을 다시 세 부분으로 나눴다. 미검토, 지급 지시, 수취 확인.
“완료가 조금씩 늘어나네요.”
피코가 말했다.
“오늘은 이게 제일 좋은 소식이다.”
“한국어 편지보다요?”
“편지는 아직 답장이 없으니까.”
피코는 고개를 끄덕였다. 녀석은 내가 편지를 기다리는 동안 예민해졌다는 걸 아는 모양이었다. 하지만 기다림을 줄이겠다고 다른 사람의 급여일을 놓칠 순 없다.
정오가 되기 전 한 통의 짧은 전송문이 도착했다. 중립 검문소의 야간 근무 수당 중 추가 확인 대상자 두 명이 있다는 내용이었다. 두 사람이 명단에서 빠진 이유는 서로 달랐다. 한 명은 다른 교대조에 이름이 들어갔고, 다른 한 명은 비상 대체 근무가 기록되지 않았다.
“같이 빠졌는데 사유는 다르네요.”
피코가 말했다.
“그래서 한 번에 처리하면 안 되는 거지.”
우리는 현장 근무표, 당직 지시, 출입 기록을 대조했다. 두 사람의 이름은 비공개로 처리하고, 담당자에게만 원본을 전달하도록 요청했다. 그중 비상 대체 근무자는 출입 기록이 남아 있었다. 그러나 실제 야간 근무를 했다는 확인은 책임자의 증언이 더 필요했다.
“오늘 바로 지급할 수 없나요?”
피코가 물었다.
“근거를 갖춰 지급해야지. 물론 확인 절차를 이유로 무작정 미뤄서도 안 돼.”
우리는 담당 책임자가 다음 날까지 근무 확인을 제출하도록 기한을 정했다. 그 일자를 보고서에 적었다. 약속 날짜를 정하는 것만으로도 서류가 제자리에서 한 걸음 움직이는 기분이었다.
오크 경비병 한 명이 전송 구슬로 감사 인사를 해 왔다. 그는 지급된 야간 수당으로 오래된 신발을 바꿨다고 했다.
“그렇게 비싼 신발은 아니오. 다만 발이 덜 아프게 됐소.”
나는 웃으며 말했다.
“잘됐습니다. 다음 급여일도 확인하겠습니다.”
그는 고개를 끄덕였다. 큰 돈을 벌게 해 준 게 아니었다. 일한 만큼 받게 된 것뿐이다. 그런데 그런 당연한 일이 누군가에게 기쁜 소식이 되는 세계라면, 아직 손볼 장부가 많다는 뜻이었다.
잠시 뒤 도르벤에게서 다시 연락이 왔다. 그는 견습생 한 명이 폭우 당시 초과 근무한 시간을 별도로 적어 두었다고 했다.
“정식 계약 범위에 포함되는지 모르겠소. 확인 좀 해 주겠나?”
“작업 명령과 승인 주체부터 확인하겠습니다.”
나는 무조건 추가 지급을 약속하지 않았다. 대신 근무 사실이 사라지지 않도록 원본 자료를 보존해 달라고 했다. 그런 간단한 말만으로도 도르벤의 목소리가 한결 가벼워졌다.
피코가 내게 물었다.
“도윤 님, 이런 일을 하면 편지 생각이 덜 나요?”
“덜 나진 않지. 다만 오늘 해야 할 일도 잊지 않게 돼.”
녀석은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숨을 길게 내쉬었다. 누군가의 편지를 기다리는 시간은 생각보다 길다. 그 사이에도 다른 사람들의 생활은 하루하루 흘러간다.
점심 무렵 공동 보증 회계소에서 회신이 왔다. 구형 상태 승계 규정의 최종 승인 자료가 발견됐다는 내용이었다. 우리는 중립 공관 기록관 아레인, 왕국 조사관 라델, 천계 사절단의 아우렐과 함께 원격 회의를 열었다. 이번에는 비공개 개인 자료를 빼고 업무 규정만 공유하기로 했다.
“승인 자료가 원본입니까?”
내가 물었다.
회계소 담당자는 조금 망설였다.
“원본의 공인 등본입니다. 원본은 별도 보관 중입니다.”
“그럼 등본이라는 표시를 붙여 주십시오.”
그는 고개를 끄덕였다. 우리는 첫 장을 펼쳤다. 거기에는 놀랍도록 평범한 문장이 있었다.
[자료 이관의 효율을 위해 유사 상태값을 통합함.]
“이게 문제의 시작인가 보군요.”
라델이 말했다.
“시작인지는 모르지만 중요한 변경입니다.”
내가 답했다.
서류 아래에는 통합 대상이 나열돼 있었다. 물품 수령, 서류 인수, 계약 변경 접수, 귀환 상태 연계, 고용 상태 종료 통지. 업무 종류가 어지럽게 섞여 있었다. 나는 그걸 보자 한숨이 나왔다. 누군가 개발자의 일을 조금 덜어 주려다가, 세상 모든 ‘받음’을 ‘동의’에 가까운 값으로 모아 버린 것이다.
“이럴 때 테스트를 해야 하지 않습니까?”
내가 물었다.
회계소 담당자가 다른 장을 펼쳤다.
“시험 기록은 있습니다.”
시험 항목의 제목은 ‘성공 전송률’이었다. 입력한 상태값이 목적지에 도달하는지 검사한 기록이었다. 하지만 그것이 실제 동의였는지는 확인하지 않았다.
“전송은 성공했고, 의미는 틀렸군요.”
피코가 말했다.
모두가 잠깐 조용해졌다. 나는 녀석을 자랑스러운 눈으로 봤다.
“그래. 바로 그거야.”
회계소 담당자는 표정을 굳혔다.
“당시에는 승인된 설계였습니다.”
“설계 승인이 있었다는 것과 피해가 없다는 것은 다릅니다.”
내가 말했다.
“지금이라도 어떤 상태값이 어떻게 바뀌었는지 확인해야 합니다.”
다음 페이지에는 업무 규정 개정 승인자들이 적혀 있었다. 개인 이름 대신 기관별 직위가 있었다. 왕국 측 대리, 천계 측 관리인, 중립 감리 대행. 제3감리 사무소의 직접 서명은 없었다. 대신 작은 주석이 붙어 있었다.
[구형 대리번호 0003의 인계 권한으로 대체 확인.]
회의실 공기가 무거워졌다.
“대체 확인이라고요?”
라델이 물었다.
“동의 없이 대리 승인한 건 아닙니까?”
나는 손을 들었다.
“여기에는 인계 권한이라고 적혀 있습니다. 승인권과 같은 뜻으로 처리됐는지 아직 확인이 필요합니다.”
아우렐이 고개를 끄덕였다.
“제7서고에서 확인된 문제와 닮아 있군요.”
“닮았지만 아직 같은 변경이라고는 확정하지 않겠습니다.”
회계소 담당자는 기가 죽은 얼굴로 서류를 넘겼다. 나는 그를 범인처럼 몰고 싶지 않았다. 그는 지금의 기록을 설명하는 사람이지 과거 변경을 직접 지시한 사람이라고 확인된 게 아니었다.
잠시 휴회하는 동안 회계소 담당자가 나를 찾아왔다. 그는 직원으로 일한 지 얼마 되지 않았고, 오래된 전산 이관반이 어떤 방식으로 일했는지 실제로 본 적이 없다고 했다.
“제가 답을 못 드리는 게 많아서 죄송합니다.”
“모르는 건 죄가 아니죠. 모르는 걸 안다고 말하면 문제가 되고요.”
그는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요즘은 누가 잘못했냐는 질문을 너무 많이 받습니다.”
“당신이 지금 맡은 일을 정확히 설명하면 됩니다. 과거의 결정은 기록으로 조사해야죠.”
우리는 회의실 옆의 작은 창고로 들어갔다. 거기에는 업무 개정 당시 사용하던 입력 양식의 모형이 보관돼 있었다. 왼쪽에는 수십 개의 상태명이 있었고, 오른쪽에는 단 네 가지 상태만 있었다. ‘접수’, ‘승인’, ‘완료’, ‘취소’였다.
“왜 이렇게 줄였습니까?”
내가 묻자 그는 어색하게 웃었다.
“옛 설명서에는 화면 단순화라고 적혀 있습니다.”
“보는 사람은 편했겠지만 실제 뜻은 달라졌군요.”
모형에 ‘물품 인수’ 상태를 입력하자 오른쪽에 ‘승인’이 떴다. 피코가 얼굴을 찌푸렸다.
“이건 다르잖아요.”
“맞아. 정확히는 인수 사실이지.”
다음으로 ‘귀환 상태 통지 접수’를 넣자 또 ‘승인’이 떴다. 직원조차 당황한 얼굴이었다. 나는 입력 화면을 정지시키고 스케치로 남겼다. 모형에는 실제 효력이 없으므로 사람에게 영향을 주지는 않았지만, 설계가 어떤 위험을 만들었는지 보여 주는 자료였다.
“이제 이걸 고칠 수 있을까요?”
담당자가 물었다.
“기술적으로는 가능할 겁니다. 다만 제도가 받아들여야겠죠.”
나는 그에게 모형의 원래 상태 목록을 지우지 말라고 부탁했다. 나중에 누가 이 시스템을 고치더라도 왜 고쳐야 했는지 알 수 있게 해야 한다.
밖에서는 회의 시작 종이 울렸다. 나는 피코와 눈을 마주쳤다. 녀석은 진지하게 말했다.
“도윤 님, 이제 제가 이해했어요. 전송이 성공했다고 사람이 동의한 건 아니네요.”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 작은 차이 하나를 이해하는 데 이세계 전체가 이렇게 많은 시간을 써야 하다니. 참 대단한 교육비였다.
회의 끝에는 사고 대응 방안도 논의됐다. 현재 자동 승계 규칙을 한꺼번에 끄면 배송 접수, 환급, 급여 상태가 동시에 멈출 수 있다는 기술 의견이 있었다. 나는 조건을 걸었다. 사람의 권리 변경에 해당하는 항목부터 자동 확정을 중단하고, 배송 완료 같은 단순 사실은 별도 검증을 거쳐 유지하자는 것이었다.
“그러면 업무가 늘어납니다.”
담당자가 말했다.
“그렇겠죠.”
“비용은 누가 냅니까?”
“그건 비용 협의를 해야 합니다. 다만 남의 퇴직과 귀환을 자동으로 결정하는 비용을 아끼는 게 정당한지는 따져 봐야죠.”
피코는 회의실 구석의 출석부를 가리켰다. 오늘 서로 다른 네 기관의 담당자가 참석했지만, 각자가 결정할 수 있는 범위는 달랐다. 나는 회의록 앞장에 그것부터 적었다.
“참석했다는 사실과 최종 승인권이 있다는 사실도 다른 거군요.”
피코가 말했다.
“맞아. 아주 중요해.”
누군가 자리에 앉아 있었다는 이유만으로 그 기관이 모든 결정에 동의했다고 해석되면, 우리는 오늘 조사한 문제를 스스로 되풀이하게 될 것이다.
몰트가 그제야 입을 열었다.
“마왕성 쪽 수동 검증 인력을 당분간 늘리겠다. 그러나 무제한은 아니다. 공동 시스템의 비용은 공동으로 분담해야 한다.”
나는 실장을 쳐다봤다. 천이백 년 근무한 리치가 비용 분담 원칙을 정확히 말하고 있었다. 대단한 성장이다. 다만 그가 내 월급도 그런 원칙으로 다뤄 주기를 바랄 뿐이다.
회의가 끝나자 루시아가 들어왔다. 그녀는 기사단의 훈련비 영수증을 들고 있었다.
“도윤, 피코가 만든 도장을 써도 되나?”
“어디에요?”
“내가 훈련 시간표를 받았다는 뜻으로.”
나는 문서를 봤다. 그 옆에는 ‘모든 훈련 시간에 참석할 의사가 있음’이라는 문장이 따로 있었다.
“시간표를 받은 것과 참석 동의는 다릅니다.”
“그렇군. 그럼 받았다는 것만 쓰겠다.”
“네. 참석 여부는 따로 선택하시면 됩니다.”
루시아는 만족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좋다. 난 전부 참석하겠다.”
“그건 기사단장님 선택이니까요.”
피코가 건네 준 도장을 찍은 루시아는 세상에서 가장 무서운 사람이 된 기분으로 방을 나갔다. 이제 칼 대신 도장을 휘두를 날이 머지않았다.
저녁 무렵 회계소에서 긴급 재검토 요청이 들어왔다. 구형 규정 개정 문서의 결재 경로에 이상한 흔적이 있다는 내용이었다.
[중립 감리 대행의 대체 확인: 0003]
[원래 제3감리 직접 서명: 미첨부]
[시행 상태: 완료]
나는 그 세 줄을 한참 바라봤다. 원래 있어야 할 직접 서명이 없는데 시행은 완료됐다. 그게 실수인지, 당시 규정이 대체 확인을 허용했는지, 누가 그렇게 처리했는지는 아직 몰랐다.
하지만 한 가지는 분명했다.
누군가 ‘문서를 인계받았다’는 사실을 ‘문서에 동의했다’는 뜻으로 읽게 만든 설계가 있었다.
그리고 그 잘못된 뜻이 오랜 세월 사람들의 생활 속으로 흘러 들어갔다.
나는 노트를 덮었다.
그날 밤 누군가에게 가서 물어야 할 질문이 생겼다.
“그때, 이 결재 경로의 빈칸을 보고 멈춘 사람은 없었습니까?”
제98화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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