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 번째 장부를 펼친 날이라고 생각했다.
아니, 실제로 백 번째는 아닐 것이다. 마왕성에 취업한 뒤 내가 펼친 장부가 몇 권인지 세다가는 회계사가 아니라 장부 전문 수집가가 될 테니까. 다만 오늘은 유난히 중요한 숫자를 확인할 예정이었다.
송-4189에 딸린 보존 보증 항목.
그것이 실제로 예치된 돈인지, 단지 문서에 만들어 놓은 빈 계정인지를 확인하는 날이었다. 오래된 한국어 안내문을 누가 썼는지 바로 밝혀 주지는 않겠지만, 그 편지가 왜 버려지지 않았는지 설명해 줄 수는 있을 것이다.
“도윤 님, 이거 되게 비싼 편지인가 봐요.”
피코가 말했다.
“아직 돈이 있는지 모르잖아.”
“그래도 보증금을 걸고 지켰잖아요.”
“보증 항목이 있다는 건 확인했지. 돈이 실제 들어왔다는 증거는 아직 없어.”
피코가 내 얼굴을 물끄러미 보았다.
“도윤 님은 감동을 받으면서도 숫자를 확인하네요.”
“그게 내 장점이자 단점이지.”
“장점은 뭔데요?”
“남의 돈 안 잃어버리는 거.”
“단점은요?”
“내가 감동을 늦게 받는다는 거.”
피코는 웃었다. 녀석이 나를 이해하기 시작했다는 게 조금 무서웠다.
오늘 회의에는 중립 공관 기록관 아레인, 보존관 에브란, 공동 보증 회계소 담당자와 천계의 아우렐이 참석했다. 라델도 왕국 조사관 자격으로 기록 열람 범위를 확인했다. 기관들이 모두 한자리에 앉는 모습은 마왕성 식당의 인기 메뉴를 정하는 회의보다 훨씬 진지했다. 그러나 결론을 내기까지 시간이 많이 걸린다는 점은 똑같았다.
“우선 계정 항목의 생성과 실제 예치 여부를 구분하겠습니다.”
내가 말하자 회계소 담당자가 두 원장을 꺼냈다.
첫 번째 원장에는 보증 항목의 개설 기록이 있었다. 두 번째에는 오래된 예치 거래 기록이 있었다. 두 기록은 같은 번호를 가리키고 있었다. 하지만 두 번째 기록의 수취 은행은 이미 오래전에 통합돼 이름이 바뀌었다.
“그럼 실제로 돈이 들어온 겁니까?”
피코가 물었다.
“기록상 입금 거래가 있습니다. 현재 잔액과 인출 가능 상태는 별도로 확인해야 합니다.”
담당자가 말했다.
나는 그 말을 듣고 기뻤다. 여기 사람들도 점점 내 말투를 닮아 간다. 언젠가는 ‘기록상’이라는 말을 듣고 모두 박수를 칠지도 모르겠다.
예치 거래는 오래전 한 번 이루어졌다. 금액은 놀라울 정도로 작았다. 금화가 아니라 은화 열 닢이었다. 편지를 몇십 년 동안 지키는 비용으로는 너무 적어 보였다.
“이렇게 적은 돈으로 어떻게 보존을 유지했습니까?”
내가 물었다.
담당자는 다음 항목을 가리켰다.
[원본 보존 공익 보증 전환]
단순 개인 예치가 아니라 특정 서류의 보존을 위해 여러 기관이 비용을 분담하는 제도로 이관됐다는 뜻이었다. 그렇다고 모든 비용이 정상 집행됐다는 증거는 아니었다. 우리는 연도별 비용과 실제 지급 자료를 나눠 보기로 했다.
“돈 맡긴 사람 이름은 없습니까?”
피코가 물었다.
“예치 요청자 식별 번호는 있습니다. 하지만 실제 인물이 누구인지는 비공개입니다.”
에브란이 말했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이 계정의 목적이 익명 원문 보존이었다면 이름을 공개하지 않은 데 이유가 있을 수 있다. 누가 고향 글씨를 지키려 했는지 궁금한 건 사실이지만, 궁금하다는 이유로 보호 규칙을 깨뜨릴 수는 없었다.
“그럼 보증의 수혜자가 누구였는지만 확인할 수 있을까요?”
“내용 수혜자는 특정 개인이 아니라 보존물입니다. 문서가 정해진 절차 없이 폐기되지 않도록 하는 조건이지요.”
아레인이 답했다.
그 말이 이상하게 마음에 남았다. 누군가는 편지를 읽어 줄 사람을 기다린 게 아니라, 편지가 버려지지 않을 조건부터 마련했다.
나는 문득 한국에서 회사 동료가 중요한 파일을 백업해 두던 일을 떠올렸다. 아무도 고마워하지 않는 작업이었다. 문제가 없을 때는 잘한 티가 나지 않았다. 하지만 어느 날 모든 게 망가졌을 때 마지막 백업본이 살아 있으면, 누군가의 하루가 돌아왔다.
그 편지 역시 그랬을까.
예치금 원장을 잠시 덮었을 때 피코가 조용히 물었다.
“보존한 문서를 나중에 아무도 읽지 않으면, 그 돈이 아깝지 않았을까요?”
아레인이 답했다.
“모든 보존 문서가 반드시 읽히는 건 아닙니다. 그렇다고 지울 필요가 있는 건 아니지요.”
나는 작은 은화 열 닢이라는 숫자를 바라봤다. 이 세계의 화려한 마법이나 거대한 성벽에 비하면 정말 보잘것없는 금액이었다. 그런데 오랫동안 누군가 그 작은 예치를 이유로 문서를 남겨 두었다.
“누군가가 언젠가 읽을 기회를 남겨 두려 했을 수도 있겠죠.”
내가 말했다.
피코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문서를 지킨 사람이 꼭 내용을 알아야 하는 건 아니네요.”
“응. 지켜야 한다는 규칙을 제대로 따르면 되지.”
나는 어머니에게 썼던 짧은 메모를 떠올렸다. 지금 당장 보낼 수 없는 말도 언젠가는 전해질 수 있을까. 보낼 수 없다고 해서 버리는 것만이 답은 아닐 것이다.
회계소 담당자가 다음 원장을 꺼내자 나는 다시 숫자 앞으로 돌아왔다. 감상은 마음속에 넣어 두고, 실제 지급 내역은 꼼꼼히 확인할 차례였다.
회의 중간에는 지난번 공동 회계소의 상태 승계 시험 결과도 검토했다. 귀환 의사와 고용 종료 상태가 자동 확정되지 않는 건 확인됐다. 다만 일부 오래된 연동 기관은 갱신해야 하는 상황이었다. 우리는 적용 완료 기관과 미적용 기관을 분리해 명단을 만들었다. 일괄 완료 표시를 하지 않기로 했다.
라델은 왕국 쪽에서 한도윤 지명수배의 정식 취소 절차가 아직 끝나지 않았다고 알려 줬다.
“집행 정지 상태는 유지됩니다. 최종 심사는 다음 회의에서 계속됩니다.”
“확인 감사합니다.”
내가 말했다.
피코가 얼굴을 찡그렸다.
“도윤 님이 도망친 것도 아닌데 왜 아직 그래요?”
“처음부터 좀 이상한 소환이었으니까.”
“그래도 빨리 끝냈으면 좋겠어요.”
“나도 그래.”
나는 쓴웃음을 지었다. 마왕성 정규직 직원인데 왕국에서 지명수배 심사를 받는다는 건 이력서에도 넣기 어려운 특기다.
오후에 마왕성에서 연락이 왔다. 도르벤의 성벽 보수비 중 남은 검수 완료분 일부가 추가로 지급됐고 수취 확인이 접수됐다고 했다. 나는 몰트에게 지급 내역을 따로 보내 달라고 요청했다. 그날 회의가 끝나고 확인할 생각이었다.
루시아에게서는 더 황당한 메시지가 왔다.
[도윤, 피코가 내 검술 훈련 시간표에 ‘참석 여부 직접 선택’ 칸을 만들었다. 나는 전부 참석하기로 했다. 다만 식사 시간도 교육 시간인가?]
나는 답했다.
[식사는 휴게 시간입니다. 다만 필수 훈련으로 지정된 식사 교육이 있다면 별도 검토하겠습니다.]
잠시 후 루시아가 답했다.
[그럼 나는 식사 훈련을 만들겠다.]
나는 전송 구슬을 내려놓았다. 천상과 지상의 계약 질서를 바로잡는 동안 마왕성에서는 전투광 기사가 식사도 훈련으로 만들고 있었다. 이것이 내가 지키고자 했던 평화일까.
회의가 다시 시작됐다. 회계소 담당자는 오래된 예치금의 현재 상태를 확인했다.
[예치 원금: 은화 10닢]
[현재 잔액: 확인됨]
[임의 인출 가능 여부: 불가]
[보존 비용 지급: 별도 공동 예산에서 처리]
나는 그제야 원본의 생존 이유를 조금 이해했다. 작은 예치금이 문서를 붙들었고, 그 후로 다른 사람들이 제도를 통해 이어받아 지켰다. 물론 이 과정의 모든 비용이 정당했다는 뜻은 아니다. 하지만 누군가가 자기 시간을 들여 문서를 버리지 않은 건 분명했다.
“이 제도는 누가 만들었습니까?”
내가 물었다.
아레인은 오래된 공관 규정집을 펼쳤다.
“특정 개인이 아니라 당시 공동 감리 협의회가 승인했습니다. 그 안에 원문 보존 담당자의 의견도 있었다고 기록돼 있습니다.”
“그 사람 이름은요?”
“현재 공개 가능한 부분에는 없습니다.”
나는 더 묻지 않았다. 이 정도로도 충분히 중요한 정보였다.
오후 마지막 안건은 예치금이 아니라 자동 상태 승계의 임시 중단 지침이었다. 나는 오늘까지 확인된 시험 결과를 정리해 공동 권고안 초안을 읽었다.
“서류의 인수와 계약 당사자의 동의를 별개의 값으로 기록합니다. 당사자 권리 변경에는 명시적 의사 확인이 필요합니다. 과거 자동 처리로 발생한 피해는 원문과 실제 지급 내역을 확인해 개별 시정합니다.”
아우렐이 고개를 끄덕였다. 라델은 왕국 법제 검토가 필요하다고 했고, 에브란은 중립 공관 내에서는 즉시 교육 지침으로 배포할 수 있다고 했다. 몰트도 마왕성 내부에 적용할 수 있는 범위를 확인해 주겠다고 했다.
결의는 완전하지 않았다. 하지만 오늘 이후 접수되는 서류 가운데 적어도 일부는 더 이상 멋대로 동의 처리되지 않을 것이다.
회의를 마치려는 순간, 공관 직원이 조용히 들어왔다. 에브란에게 밀봉된 작은 봉투를 건넸다. 에브란은 봉투의 겉면만 확인하고 나를 봤다.
“한도윤 님. 비공개 연락 요청 건으로 전달 사항이 있습니다.”
심장이 쿵 내려앉았다.
“답장입니까?”
“수신자 본인의 회신인지 여부는 아직 확인되지 않았습니다. 다만 연락함에 지정된 별도 관리자가 접수 결과를 회신했습니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기대를 천천히 해야 한다. 이건 수신자 본인의 답장이 아닐 수 있다. 자동 안내문을 보낸 장치와 별개의 관리 절차일 수도 있다.
“제가 받을 수 있는 정보입니까?”
“발신자에게 제공하도록 승인된 범위입니다.”
에브란이 봉투를 내밀었다. 나는 서명하지 않고 먼저 제공 범위를 확인한 뒤 수령란에만 서명했다. 피코가 내 손을 바라봤다. 내 손가락이 조금 떨리고 있었다.
봉투 안에는 짧은 쪽지가 있었다. 공용어 설명이 한 장, 그리고 한글 원문 사본이 한 장.
설명에는 이렇게 적혀 있었다.
[연락함 관리 경로 확인. 수신자 본인 신원 및 현재 응답 의사 미확인. 보존된 안내 조각 중 요청자에게 제공 가능한 부분을 전송함.]
나는 한글 쪽지를 펼쳤다.
[한도윤 씨.]
단 세 글자였다. 내 이름을 다시 봤다. 그 아래 문장이 이어졌다.
[당신을 여기로 부른 사람이 누구인지는 이 종이에 적혀 있지 않습니다.]
나는 숨을 멈췄다.
[그러니 이 편지만 믿고 누군가를 찾아가지는 마세요.]
그것은 새로운 사실을 밝혀 주는 답이 아니라, 섣부른 추측을 막는 경고에 가까웠다. 종이 맨 아래에는 짧은 문장이 있었다.
[우선, 돌아갈지 말지를 스스로 결정할 수 있는 사람으로 남으세요.]
피코가 내 얼굴을 살폈다.
“뭐라고 적혀 있어요?”
나는 잠시 입을 다물었다. 목이 조금 메었다. 누군가는 아주 오래전부터 사람의 선택을 지키려 했고, 그 기록이 이제 내 손까지 왔다. 그 사람이 왜 그랬는지는 여전히 모르지만.
“나보고 마음대로 선택하래.”
“그건 좋은 말이네요.”
“응. 좋은 말이야.”
나는 쪽지를 조심스럽게 접었다. 작성자의 정체를 찾지 못한 건 아쉬웠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당장 누구를 만나는 게 아닐지도 모른다. 이 세계에서 내가 정말 선택할 수 있는 사람이 되는 것.
그때 피코가 종이 아래에 작은 부호가 있다고 말했다. 나는 확대경을 꺼냈다. 한국어 문장 끝에, 마침표와는 별도로 작은 점 세 개가 있었다.
제7서고 구형 판본에서, 공관 연결 기록에서 보았던 것과 닮은 자국이었다. 필사 장치가 남긴 압착 흔적일 수도 있고, 누군가 일부러 붙인 표식일 수도 있었다. 아직 확정할 수는 없었다.
“같은 사람이 쓴 건가요?”
피코가 물었다.
나는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
“그렇게 말하기엔 아직 일러.”
피코는 조금 아쉬운 얼굴이었지만 더 묻지 않았다.
나는 봉투를 수첩에 넣었다. 그리고 맨 뒤의 새 페이지를 펼쳤다.
'연락함 관리 경로에서 추가 보존 문구 수령. 발송 주체·작성 시점 미확정. 작은 점 세 개 발견. 원본 압착 흔적 대조 필요.'
오늘의 가장 중요한 문장은 장부 안에 없었다.
나는 그 밑에 이렇게 썼다.
'나는 오늘도 내 선택을 남에게 맡기지 않았다.'
마왕성으로 돌아가는 길, 피코는 내가 준 빵을 두 손으로 잡고 먹었다. 루시아는 전송 구슬로 식사 훈련을 준비하고 있었다. 제르칸은 아마 자신의 망토가 장마에 얼마나 유용한지 발표하고 있을 것이다.
나는 그들을 떠올리며 웃었다.
아직 고향으로 돌아갈 방법도, 편지를 남긴 사람의 이름도 찾지 못했다.
하지만 돌아갈지 말지 스스로 결정할 권리를 지키는 사람이 되었다.
마왕성에 취업한 뒤 내가 가장 무서워진 이유가 혹시 이런 것이 아닐까.
숫자를 모른다는 걸 두려워하지 않고, 모르는 숫자를 아는 척하는 사람을 그냥 지나치지 않게 된 것.
그때 전송 구슬에 새 알림이 떴다.
[제7서고 추가 조회 요청. 송-4189 연관 보존문서의 '원본 출처'가 기존 분류와 다르게 표시된 사실 확인. 상세 검토 예정.]
나는 창밖을 바라봤다.
이 세계는 참 친절하다.
한 가지 문제를 해결하면 정확히 다음 문제가 도착한다.
적어도 청구서는 아니니 다행이다.
제100화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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