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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품으로마왕성에 취업했더니 내가 제일 무섭단다 · 96화
PAYLUA ORIGINAL · 제96화

96화. 장부보다 먼저 구할 것

마왕성에 취업했더니 내가 제일 무섭단다 · 6,189자

오프라인 책장
비가 이렇게 많이 오면 장부도 젖는다. 당연한 말이다. 그런데 나는 이세계에 와서 처음으로 그것이 중요한 관리 기준이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성벽 아래 작은 마을에는 비를 피할 곳이 부족했고, 그곳에서 보관하던 계약 원본도 지붕이 샌 창고 안에 있었다. 사람부터 대피시켜야 했다. 서류는 그다음이다. “도윤! 왼쪽 집부터 살펴라!” 루시아가 빗소리를 뚫고 외쳤다. “제가 들어가도 되는 곳입니까?” “집주인이 도움을 요청했다!” 그렇게 말하면 허락은 받은 셈이었다. 나는 피코와 함께 낮은 돌집으로 달려갔다. 안에는 노부부와 손자가 있었다. 무릎까지 차오르는 물을 피해 의자 위에 올라가 있었다. 할아버지는 큰 상자를 끌어안고 있었다. “우선 사람부터 나가셔야 합니다.” 내가 말하자 할아버지가 상자를 가리켰다. “이걸 잃어버리면 땅을 잃소.” “무슨 상자인데요?” “집 문서요. 우리 할아버지 때부터 가진 거요.” 나는 상자와 노부부를 번갈아 봤다. 사람부터 나가야 한다고 말하고 싶었지만, 이들에게 문서가 어떤 뜻인지 이해했다. 서류를 잃으면 집을 잃게 될 수 있다는 두려움이 있었을 것이다. “사람을 먼저 데려다드리고, 상자도 안전하게 옮기겠습니다. 제가 기록을 남길 테니 같이 확인하세요.” 피코가 곧바로 봉인 끈을 꺼냈다. 녀석은 어느새 계약 문서 구조보다 문서를 지키는 방법을 더 잘 알게 됐다. 우리는 상자 겉면을 마른 천으로 감싸고 옮길 물품 목록을 적었다. 상자 안은 열지 않았다. 침수 구역에서는 그럴 시간도, 권한도 없었다. 루시아는 노부부를 업고 나갔다. 나는 손자의 손을 잡고 뒤따랐다. 어린아이가 내 쪽을 올려다봤다. “아저씨, 저기 성이 정말 마왕성인가요?” “응.” “마왕님도 비 맞아요?” “아마 지금 창문에서 비를 보고 계실 거야.” “마왕님은 우산이 커요?” “망토가 커.” 아이의 얼굴이 조금 밝아졌다. 나는 속으로 제르칸이 그 말을 들으면 얼마나 좋아할지 생각했다. 심지어 자신의 망토를 공공 우산으로 지정할지도 모른다. 대피소는 성문 안쪽의 옛 보급창고였다. 도르벤이 이미 방수 판자를 가져와 바닥을 높이고 있었다. 그는 우리를 보더니 손짓했다. “임시 배수로가 무너졌소. 성벽 쪽 수문을 조금 열어야 물이 빠질 거요.” “안전한가요?” “현장 기술자들이 검토 중이오. 지금 당장 열면 다른 골목으로 물이 쏠릴 수도 있지.”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예산을 가진 사람이 현장 기술자의 판단을 대신하면 사고가 난다. 도르벤은 지도 위에 물길을 그렸고, 경비병들은 주민들의 이동 경로를 표시했다. “식량 창고는 괜찮습니까?” 내가 물었다. “일단 안전하다.” 루시아가 답했다. “제르칸 폐하는?” “성문 위에서 자신의 망토를 천막으로 쓰자고 하셨다.” “정말요?” “측근들이 말렸지.” 아쉽다. 그 장면은 조금 보고 싶었다. 다만 망토의 비상용 천막 효율에 대한 예산이 따로 붙을까 봐 걱정되기도 했다. 대피소에는 사람들이 속속 도착했다. 가장 부족한 건 담요와 마른 양말이었다. 제르칸은 보급창고의 겨울용 군수 담요를 풀겠다고 했다. 나는 즉시 재고를 확인했다. 민간 지원으로 임시 전용하는 범위를 적고, 군수 물자 결산 시 별도 보충해야 한다는 사실을 명확히 했다. “왜 지금 이런 걸 적고 있소?” 물에 젖은 병사 하나가 물었다. “나중에 담요가 없다고 병사들한테 책임 묻지 않게 하려고요.” 병사는 잠깐 나를 쳐다보더니 고개를 숙였다. 그는 젖은 담요를 하나 더 들고 대피소 안으로 들어갔다. 피코는 대피소 접수대에서 사람들의 이름을 적었다. 그런데 노부부의 손자가 이름을 말하려다 멈췄다. “왜 그래?” 내가 묻자 아이가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아빠가 사람들한테 이름 말하지 말랬어요.” 나는 잠깐 당황했다. 재난 때 사람을 찾아야 하니 기록은 필요하지만, 불필요한 곳에 신상 정보가 퍼져서는 안 됐다. “그럼 여기 있는 어른 한 분과 같이 비공개로 등록하자. 밖에 붙이는 명단에는 번호만 적어도 돼.” 아이는 노부부를 돌아봤다. 할머니가 고개를 끄덕였다. 피코가 번호표를 건넸다. 녀석은 요즘 무엇을 적지 말아야 하는지도 잘 알고 있었다. 피코가 대피소 한쪽에 접수함을 만들었다. 실종 신고나 긴급 도움 요청이 들어오면 담당자를 연결하려는 것이었다. 처음에는 모든 요청서를 한 상자에 넣었는데, 금세 문제가 생겼다. “도윤 님, 고장 난 지붕을 고쳐 달라는 요청이랑 가족을 못 찾겠다는 요청이 섞였어요.” “그럼 긴급성과 담당자를 나눠야겠네.” 우리는 요청서를 네 종류로 분류했다. 사람의 안전과 관련된 긴급 요청, 식량·물품 배부, 주거 상태 확인, 서류·권리 문제. 물론 분류 결과만 보고 우선순위를 기계적으로 정하진 않았다. 물품 배부 중에도 어린아이가 약이 필요하다고 하면 안전 요청으로 즉시 연결해야 했다. 대피소에는 손녀를 찾는 노인이 있었다. 그는 노란 천을 들고 문 앞에서 기다렸다. 나는 그에게 이름과 마지막 위치를 비공개 접수대에 알려 달라고 했다. 경비대의 수색 담당자와 연결한 뒤, 외부 게시판에는 개인 이름 대신 접수번호와 연락 창구만 적었다. “사람을 찾는데 이름도 못 적습니까?” 노인이 답답한 얼굴로 물었다. “필요한 사람에게는 알려 드리겠습니다. 다만 누구나 볼 수 있는 벽에 개인정보를 붙이지 않으려고요.” 노인은 처음에는 납득하지 못했다. 하지만 수색 담당자가 자신의 이름을 확인하고 곧바로 움직이는 걸 보자 안도했다. 한참 뒤 경비대에서 연락이 왔다. 손녀는 다른 대피소에서 안전하게 보호받고 있었다. 노인은 눈물을 훔쳤다. 나는 접수 기록에 ‘소재 확인, 보호자 연결 진행’이라고 적었다. 실제로 만나기 전까지 ‘가족 상봉 완료’라고 쓰지 않았다. “도윤 님은 왜 기쁜 일도 반만 기뻐해요?” 피코가 물었다. “사람이 안전하다는 건 아주 기쁜 일이야. 다만 다음 단계가 남아 있으면 그것도 잊지 않으려고.” 우리는 안내 담당자를 통해 두 대피소가 서로 확인하도록 했다. 조금 뒤 노인은 손녀를 만나러 떠났다. 그는 나가기 전에 피코의 작은 손을 잡았다. “고맙다. 정말 고맙다.” 피코는 귀까지 빨개졌다. 녀석은 웃으면서 나에게 속삭였다. “이건 진짜 완료라고 써도 되죠?” “직접 만났다는 확인을 받으면.” “그때까지 기다릴게요.” 녀석이 웃었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기다림은 불편하지만, 그 불편함 덕분에 거짓된 안심이 줄어든다. 옆에서 루시아가 물에 젖은 지도를 들고 나타났다. 배수로 막힌 위치가 표시돼 있었다. 기술자가 직접 확인한 구역과 아직 가보지 못한 구역을 다른 색으로 표시해 두었다. “이렇게 하면 병사들이 어디로 가야 하는지 알겠지?” “좋습니다. 다만 안전 책임자의 지시에 따라 움직여야 합니다.” “그건 이미 설명했다.” 나는 루시아의 얼굴을 다시 봤다. 예전 같으면 먼저 검을 뽑았을 사람이 이제는 지도 위의 위험 표시를 먼저 보여 주고 있었다. 성장은 가끔 이렇게 젖은 종이에서 확인된다. 한밤중에 빗줄기가 더 세졌다. 옛 보급창고 옆 배수로가 막혀 물이 역류했다. 도르벤은 긴 막대를 들고 현장으로 나갔고, 루시아가 기사들을 불렀다. 나는 대피소에 남아 물자 배부와 출입 기록을 맡았다. 그게 내가 가장 잘할 수 있는 일이었다. “도윤 님, 담요가 열세 장 모자라요.” 피코가 말했다. “어디서 구할 수 있지?” “기사단 숙소에 여분이 있대요.” “지금 쓸 수 있는 재고인지 확인하고 가져오자.” “루시아 님이 그냥 가져가래요.” “그래도 수량은 적어야 해.” 피코는 고개를 끄덕이고 달려갔다. 덕분에 담요를 빌려 준 숙소에 다음 날 바로 반납 계획을 알릴 수 있었다. 사소한 기록 하나가 사람들 사이의 불필요한 다툼을 막는다. 새벽이 가까워져서야 비가 잦아들었다. 도르벤은 수문의 각도를 조정해 더 큰 침수를 막았다고 했다. 그는 힘없이 의자에 앉았다. “다들 괜찮습니까?” “큰 부상자는 없는 걸로 보고됐소. 다만 집 세 채는 당분간 들어가면 안 되오.” 나는 곧바로 ‘인명 피해 없음’이라고 쓰지 않았다. 아직 전 구역 확인이 끝나지 않았다. 대신 현재까지 확인한 범위를 기록했다. 피코가 그런 나를 보며 말했다. “도윤 님, 잠깐 자요.” “조금만 더.” “실장님이 오셨어요.” 몰트가 대피소 입구에 서 있었다. 그는 젖지도 지치지도 않은 얼굴이었다. 리치의 유일한 장점은 근무시간 제한을 걱정할 필요가 없다는 걸까. 아니, 그런 말을 하면 노동 착취의 길로 빠질 수 있다. “도윤. 사람들을 쉬게 해라. 기록은 내가 보겠다.” “실장님은 안 쉬십니까?” “나는 잠을 자지 않는다.” “그럼 야간 근무 수당은요?” 몰트의 눈빛이 가늘어졌다. “천이백 년 전에 계약서를 다시 쓰자고 했을 때 네가 있었어야 했는데.” 나는 피식 웃었다. 진짜 고생한 사람들을 쉬게 하라는 말을 더 하지 않았다. 그들이 피곤하다는 건 표정으로도 알 수 있었으니까. 대피소 구석에서 노부부가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할아버지는 젖은 손으로 내 소매를 잡았다. “상자를 지켜 줘서 고맙소.” “아직 내용물 상태는 모르니 안전한 곳에서 확인해야 합니다.” “그래도 상자를 버리지 않고 데려왔잖소.” 나는 그 말에 잠깐 멈췄다. 상자를 버리지 않았다. 옛 우편관의 한국어 문장이 떠올랐다. ‘받는 사람이 없으면 버리지 말 것.’ 누군가의 종이 한 장이 그 사람의 삶을 지탱할 수 있다는 걸, 오늘은 머리보다 몸으로 알게 됐다. 아침 식사 뒤 대피소에는 작은 다툼이 일어났다. 같은 집에서 나온 가족 두 명이 서로 다른 번호표를 받았고, 그 때문에 임시 숙소가 나뉘어 배정된 것이다. 담당자는 규정대로 번호를 발급했다고 했지만, 어린아이가 혼자 다른 구역으로 갈 뻔했다. “잠깐만요. 가족 단위로 함께 배정할 수 있는지 다시 확인합시다.” 내가 말하자 담당자는 미안한 얼굴로 장부를 열었다. “번호표가 자동으로 나오니 같은 집인지 몰랐습니다.” “그럴 수 있습니다. 하지만 번호가 다르다고 보호자가 다른 건 아니잖아요.” 우리는 당사자 확인을 받은 뒤 가족 묶음 정보를 별도로 적었다. 아이의 이름을 공개 게시판에 올리지는 않았다. 숙소 배정 담당자에게 필요한 정보만 전했다. 실제 배정이 조정된 뒤 가족들은 같은 방으로 들어갔다. 피코가 번호표를 보며 물었다. “그럼 번호표는 필요 없는 거예요?” “필요하지. 다만 사람을 돕는 도구여야 해. 사람을 도구에 맞추면 안 되지.” 녀석은 종이를 한참 바라보다 작은 글씨로 ‘가족 확인’이라는 칸을 더했다. 나는 그 칸을 임의로 채우지 말고 본인에게 묻도록 했다. 주민 한 명이 내게 물었다. “언제 집에 돌아갈 수 있습니까?” “구조 점검 결과가 나온 뒤에요. 오늘 바로 가능한 집도 있을 수 있지만, 위험한 집에는 들어가면 안 됩니다.” “그럼 우리 가게는요?” 나는 대답하지 못했다. 지금 필요한 건 장부상의 예정 날짜가 아니라 실제 안전 점검이었다. 도르벤에게 검토 일정을 확인하고, 주민들이 결과를 직접 확인할 수 있도록 게시하겠다고 약속했다. 그날 대피소의 가장 중요한 기록은 대피 인원 수가 아니었다. 각 사람이 다음에 무엇을 해야 하는지 알 수 있게 한 안내문이었다. 오전 회의에는 예상치 못한 문제가 올라왔다. 침수 주택 세 채가 ‘계약 종료 예정’으로 표시됐다는 것이다. 이유는 단순했다. 임시 대피소로 주소가 옮겨지자 외부 거주 확인 장치가 빈집으로 판단한 것이다. “또 자동 처리입니까?” 내가 물었다. “아직 계약 종료까지 확정된 건 아닙니다.” 몰트가 답했다. 나는 한숨을 내쉬었다. “오늘은 집 잃은 사람에게 서류까지 잃게 만들 순 없어요.” 우리는 긴급 정지 요청을 보냈다. 현장 거주 기록과 침수 보고서를 첨부해 임시 대피가 권리 포기로 처리되지 않도록 했다. 각 주택의 소유나 임차 관계는 다를 수 있으므로 일괄 복원은 하지 않았다. 다만 본인 확인 전 자동 종료가 진행되지 않게 막았다. 그때 우편관 쪽에서 아레인의 전송이 왔다. [폭우로 옛 휴전항 제2공관 지하 배수 시설 경고. 원본 이동 여부 검토 중.] 나는 메시지를 다시 읽었다. 어제 우리가 들어갔던 보관실이었다. 배수관이 제대로 고쳐지지 않았다는 이야기를 들었는데, 결국 문제가 생겼다. “원본부터 옮겨야겠군요.” 피코가 말했다. “안전 확보가 먼저야. 거기서 일하는 사람들도 있고.” 나는 다시 출장을 신청하려다가 펜을 내려놓았다. 오늘은 출장보다 구호에 가까웠다. 그런데 아무도 내게 서류를 내지 말라고 할 필요가 없었다. 왜냐하면 나는 이미 장화를 신고 있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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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96화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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