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왕성에 편지가 한 통 왔다. 보낸 사람의 이름은 없었다.
그런데 제르칸이 그것을 열려고 했다.
“왕의 궁전에 온 편지라면 왕이 열어야 하지 않느냐!”
“수신인은 저입니다.”
“궁전 주소로 왔다.”
“저희 직원들도 회사 주소로 편지 받습니다.”
“그럼 회사가 먼저 열어도 되는가?”
“안 됩니다.”
마왕은 입술을 삐죽였다. 이쯤 되면 그는 언젠가 ‘직원의 편지를 읽을 권리’라는 제목으로 법안을 제출할지도 모른다. 나는 그때 반대 의견서를 스무 장쯤 준비해 둘 생각이다.
편지는 중립 공관에서 보내온 접수 확인서였다. 송-4189 관련 익명 연락 요청이 보류함에 정상 보관 중이며, 수신자 확인을 위한 추가 접근은 없다는 내용이었다. 원하던 답장은 아니었다. 하지만 답장인 척하지 않는 공문이라 오히려 믿을 만했다.
“좋은 소식인가?”
제르칸이 물었다.
“아직 소식은 없습니다.”
“그런데 왜 편지를 보냈지?”
“소식이 없다는 사실을 알려 주려고요.”
“그런 데에도 종이를 쓰다니.”
“폐하께서 지난주 망토 색상 선호도 조사를 하신 것보다는 유익합니다.”
“검은색이 99퍼센트였단 말이다!”
“응답한 사람이 폐하 한 분이셨잖아요.”
제르칸은 갑자기 다른 업무가 생각났다며 나갔다. 왕을 상대할 때 가장 효과적인 무기는 숫자다. 특히 표본 수.
나는 회계실 책상에 앉아 후대 전환표 자료를 펼쳤다. 옛 ‘인수 확인’ 도장을 새 시스템에서 ‘동의 승인’으로 바꾼 여섯 사례가 보고됐다. 이 중 하나가 마왕성 납품 기록과 닿아 있었다. 그렇다고 여섯 건이 전부 피해가 발생한 사건이라는 뜻은 아니다. 우리는 실제 기록을 대조해야 했다.
몰트는 첫 사례를 가져왔다. 식당의 양파 공급 계약이었다.
“또 양파입니까?”
내가 묻자 몰트가 해골 머리를 기울였다.
“왜 양파가 문제지?”
“피코가 시험 계정 이름으로도 썼거든요.”
“양파는 오래 보관하기 좋다.”
“그건 장점이죠.”
“계약도 오래 보관하면 좋지 않으냐.”
“썩기 전에 확인해야죠.”
몰트는 더는 묻지 않았다. 현역 리치와 양파를 놓고 진지하게 토론하는 데 익숙해지는 날이 올 줄은 몰랐다.
양파 공급 계약의 원본에는 납품 수량과 인수자의 서명이 있었다. 하지만 후대 전환표에는 ‘장기 보관 및 분류 서비스 동의’가 붙어 있었다. 그 서비스는 물량의 일정 비율을 수수료로 가져가는 구조였다. 실제 청구서는 있었으나, 금액이 자동 차감됐는지는 확인되지 않았다.
“계약서 옆에 도장이 하나 더 있습니다.”
피코가 말했다.
“어떤 도장?”
“접수번호 3번.”
나는 확대 렌즈를 썼다. 거기 찍힌 숫자는 분명 셋이었다. 그러나 문구는 ‘중립 공관 제3창구’였다.
“번호만 같군.”
“0003이랑 달라요?”
“같을 수도 있지만 증거가 없어. 이건 창구 번호야.”
피코는 조금 실망한 얼굴이었다. 나는 일부러 녀석의 수첩을 덮었다.
“숫자가 같다고 모든 양파가 같은 양파는 아니잖아.”
“양파는 보통 비슷하게 생겼는데요.”
“……그건 그렇지.”
내 비유가 실패했다.
우리는 실제 공급업체 대표를 불렀다. 중년의 오크 여성이었다. 이름은 카르마. 그녀는 장화에 묻은 흙을 털어 내며 의자에 앉았다. 마왕성 직원들이 그녀를 두려워한다는 이야기를 들었는데, 이유를 알 것 같았다. 카르마는 양파값을 흥정할 때 도끼를 든 오크보다 무섭게 눈을 좁혔다.
“양파를 받았으면 받은 거지, 뭘 더 받았다는 거요?”
“보관 서비스 동의로 변환됐습니다.”
“누가 동의했는데?”
“그걸 찾고 있습니다.”
“난 양파를 팔았소. 창고 맡긴 적 없고.”
“서명 원본을 보여 드리겠습니다.”
카르마는 자기 글씨를 확인했다. 납품 건별 서명은 맞다고 했다. 하지만 장기 보관 서비스 신청서에 서명한 적은 없었다. 나는 진술과 원본 대조 결과를 따로 기록했다. 당사자가 부인했다고 해서 무조건 위조가 입증되는 건 아니지만, 충분한 조사 사유는 된다.
“수수료가 실제로 빠져나간 적이 있습니까?”
“없소. 돈 받을 때마다 내가 직접 셌으니까.”
우리는 마왕성 지급 장부를 확인했다. 해당 기간에는 추가 보관 수수료가 실제 지급되지 않았다. 청구서만 존재했다. 나는 보고서에 ‘지급 없음 확인, 청구 발생’이라고 적었다.
카르마는 안도했지만 금세 얼굴을 찌푸렸다.
“그럼 왜 자꾸 이런 청구서가 오는 거요?”
“인수 확인 도장이 동의 표시로 바뀌는 경로를 추적 중입니다.”
“고치시오. 우리 가게 사람들은 글씨가 느려도 바보는 아니오.”
그 말이 마음에 남았다. 글씨를 빨리 읽지 못하는 사람에게 제멋대로 문장을 추가해 놓고, 그 사람이 서명했다고 말하는 건 너무 편리한 사기 수법이다. 물론 아직 누가 의도적으로 그랬는지는 알 수 없지만.
카르마가 돌아간 뒤, 피코는 우리 창고의 양파 가격표를 확인했다.
“도윤 님, 이번 달 양파값이 올랐어요.”
“얼마나?”
“한 자루당 은화 한 닢.”
“작황이 안 좋나?”
“폭우가 예고돼서요.”
루시아가 창밖을 봤다. 검은 구름이 모이고 있었다.
“폭우라면 성벽 연결대가 걱정이군.”
“임시 보강한 곳이요?”
“그래. 도르벤의 정식 수리가 아직 다 끝나지 않았다.”
나는 곧바로 도르벤에게 연락했다. 그는 검수 완료분의 지급 지시를 받았지만, 일부 금액은 아직 계좌에 도착하지 않았다고 했다. 우리는 송금 담당자에게 실제 지급 예정일을 확인해 달라고 요청했다. 확인되지 않은 상태에서 ‘지급 완료’라고 말하지 않았다.
피코가 오후 회의 자료를 가지고 왔다.
“자동 승인 규칙을 만든 부서가 나오나 봐요.”
그는 공동 보증 회계소에서 보낸 작은 문서를 내밀었다.
[전산 이관반 업무 규정 개정 이력 조회 가능]
하지만 조회에는 조건이 붙어 있었다. 구형 서명 원본을 직접 열람하려면 이전 관할 기관과 현 관할 기관의 공동 입회가 필요하다는 것이었다. 즉 중립 공관과 천계, 필요하면 왕국의 동의까지 받아야 했다.
“복잡하네요.”
피코가 말했다.
“복잡한 이유가 있을 수도 있어.”
“그렇지만 그 사이에 비가 와요.”
나는 창밖을 봤다. 정말로 굵은 빗방울이 떨어지기 시작했다. 천계 사절단에 서류를 보내는 것보다 성벽 아래 사는 사람들의 지붕부터 확인할 때였다.
루시아가 갑자기 벌떡 일어섰다.
“나가자. 성벽부터 봐야 한다.”
“제가요?”
“네가 예산을 쥐고 있으니 수리 도구를 들고 가려면 같이 가야지.”
나는 책상에 놓인 영수증들을 봤다. 회계사가 현장에 나가는 게 틀린 일은 아니었다. 다만 안전 장비와 실제 수리 자격은 구분해야 한다.
“저는 비용과 기록을 확인하겠습니다. 수리는 도르벤과 기사단이 합니다.”
“좋다. 그럼 네가 지휘하라.”
“그건 또 아닙니다.”
루시아는 웃었다. 그녀는 늘 내 말을 반쯤만 들었다.
성벽 쪽으로 나가기 전 나는 비상 물자 창고에 들렀다. 담당자는 목록을 보여 주며 담요와 횃불, 간이 침상 재고가 얼마나 남았는지 설명했다. 마왕성은 전쟁을 위해 비축한 물자가 많았지만, 비가 온다고 민간인에게 바로 줄 수 있는 물자는 생각보다 적었다.
“이 담요는 군수품이라 꺼내면 절차가 복잡합니다.”
담당자가 말했다.
“지금은 비상 상황입니다. 다만 꺼낸 수량과 어디에 지급했는지는 적어 둡시다.”
“누가 승인합니까?”
“비상 권한을 가진 당직 책임자에게 확인받죠.”
직원은 제르칸에게 전송했다. 몇 분 뒤 검은 문양이 찍힌 승인서가 왔다. 문장 중간에는 ‘본왕의 무한한 자비’라는 표현이 세 번 있었다. 나는 그것이 법적 효력을 늘려 주지 않는다고 생각했지만 굳이 지우지는 않았다.
피코가 작은 목소리로 물었다.
“도윤 님, 저 문장이 세 번이나 있어요.”
“왕의 자존심도 재고처럼 쌓이는 모양이야.”
“그럼 소진하면요?”
“오늘은 소진하지 않겠지. 다들 도와주고 있으니까.”
우리는 부상자가 누울 수 있는 공간과 아이들이 기다릴 수 있는 자리를 따로 표시했다. 대피소 인원에 비해 식량이 부족할 수 있어 식당장에게 추가 조리 가능 여부를 물었다. 식당장은 오늘의 메뉴가 양파 수프라고 했다.
“또 양파네요.”
내가 말하자 식당장이 의아하게 봤다.
“비 오는 날 따뜻한 수프가 제일 좋잖소.”
“맞습니다. 양파엔 아무 잘못이 없죠.”
문제는 양파에 이상한 계약을 붙이는 시스템이었다. 나는 직접 수프를 먹는 사람의 수를 예상하지 않고, 대피가 시작된 뒤 실제 인원에 따라 추가 배식을 결정하자고 했다. 몇 인분을 만들든 나중에 정산할 수 있도록 재료와 조리 시간을 기록했다.
그때 루시아의 전송이 왔다. 성벽 아래 수로가 급격히 불어나고, 주민들이 작은 집에 갇혀 있다는 내용이었다. 나는 비상 물자 목록의 마지막 줄에 이렇게 적었다.
‘지금은 지급 승인 여부보다 안전한 전달이 먼저. 지출 증빙은 현장 확인과 함께 사후 정리.’
물론 아무 절차 없이 물건을 가져가도 된다는 뜻은 아니었다. 누가 무엇을 가져갔는지 최소한의 기록은 필요하다. 하지만 침수된 집 앞에서 배식 신청서 세 장을 쓰게 만드는 게 더 위험했다.
피코가 내게 장화를 건넸다.
“도윤 님, 제 장화보다 커요.”
“네 발이 작아서 그렇지.”
“그럼 제 장화는요?”
“너한테 맞는 걸 신어.”
녀석은 고개를 끄덕였다. 우리는 드디어 제대로 된 준비를 마쳤다.
멀리서 비상 종소리가 다시 들렸다.
출동하려는 순간 제르칸이 직접 성문 앞까지 나왔다. 그의 망토는 평소보다 두꺼웠고, 어깨에는 금빛 장식이 잔뜩 달려 있었다. 폭우 속에서도 빛나겠다는 의지가 대단했다.
“본왕이 직접 현장을 지휘하겠다!”
“폐하, 현장 기술자의 안전 판단이 먼저입니다.”
“그럼 본왕이 응원하겠다!”
“그건 좋습니다.”
제르칸은 제법 만족한 표정이었다. 나는 그에게 보급창고 열쇠를 가진 당직 책임자와 연락해 줄 수 있느냐고 물었다. 왕이 직접 서류를 쓰는 일은 드물지만, 이미 승인한 긴급 담요 출고가 실제로 이뤄졌는지 확인하는 일은 가능했다.
“네가 숫자를 맡으면 나는 사람들을 보겠다.”
그가 말했다.
“그 말씀은 마음에 드네요.”
“하하하! 역시 본왕의 위엄은 사람을 감동시키는군.”
나는 웃었다. 왕이 칭찬받을 틈을 찾는 건 그의 오래된 습관이었다. 하지만 오늘만큼은 그 습관도 도움이 될 것 같았다.
성문 바깥에는 주민들이 작은 짐을 챙기고 있었다. 한 여성이 문 앞에서 서성였다. 노모의 약을 놓고 나왔다고 했다. 루시아는 즉시 구조대에게 위치를 알렸고, 구조대장은 집의 접근 가능 여부를 확인했다. 나는 여성이 혼자 다시 들어가지 않도록 대피소로 안내했다.
“그 약 없으면 오늘 밤 힘들어요.”
“위치를 정확히 알려 주세요. 구조대가 안전하다고 판단하면 찾아올 수 있도록 하겠습니다.”
여성은 떨리는 손으로 집 위치를 가리켰다. 루시아가 구조대장에게 설명을 전달했다. 나는 재정실 직원이지만 오늘은 누군가의 약을 찾는 데 협조하는 사람이었다.
잠시 뒤 식당장이 수프 솥을 실은 수레를 끌고 왔다. 제르칸은 그것을 보며 망토를 펄럭였다.
“본왕이 준비한 양파 수프다!”
식당장이 투덜거렸다.
“준비는 내가 했는데.”
나는 재빨리 끼어들었다.
“폐하께서 재고 출고를 승인하셨고, 조리는 식당장님이 하셨죠. 두 분 다 수고하셨습니다.”
마왕과 식당장이 동시에 고개를 끄덕였다. 분쟁을 조정하는 데도 회계사의 기술이 쓰인다.
그런데 수프를 받는 사람들의 손이 덜덜 떨리는 걸 보니 농담할 마음이 조금 사라졌다. 나는 수레 옆에서 그릇을 나눠 줬다. 숫자를 세는 손으로 따뜻한 그릇을 건네는 일은 생각보다 어렵지 않았다.
폭우가 몰아치자 성문 앞의 비상 종이 울렸다. 잠시 후 야간 근무에서 빠진 경비병 하나가 숨을 헐떡이며 들어왔다.
“성벽 아래 물길이 바뀌었습니다. 인근 집들이 잠길 것 같습니다.”
나는 접수 중이던 서류를 덮었다. 오늘 조사하던 계약은 중요했다. 하지만 내일도 조사할 수 있다. 지금 젖은 바닥에서 밤을 보내는 사람들에게는 그런 여유가 없었다.
“현장으로 갑시다.”
내가 말하자 피코가 수첩을 품에 넣었다.
“도윤 님, 출장비 신청은요?”
“비상 출동이야.”
“그럼 급식비는요?”
“피코야, 나중에 계산하자.”
“아, 그렇죠. 다녀와서요.”
우리는 비를 뚫고 달렸다.
그날 밤만큼은 자동 승인보다 먼저 필요한 게 있었다.
젖지 않은 담요와 뜨거운 수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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