옛 휴전항 제2공관으로 출장을 간다는 말을 듣자 제르칸이 먼저 물었다.
“이번에는 무엇을 찾아오는가?”
“승인 원본입니다.”
“그렇다면 내가 아끼는 왕실 인장을 가져가라.”
“인장으로 원본을 찾을 순 없습니다.”
“적어도 문이 쉽게 열릴 것이다.”
“그 문이 열리면 안 되는 문일 수도 있잖아요.”
제르칸은 한참 나를 내려다보다가 인장을 다시 넣었다.
“너는 정말 왕의 위엄을 필요로 하지 않는 남자구나.”
“출장비 결재할 때는 필요합니다.”
“……그렇겠군.”
마왕이란 존재는 위엄을 부정당하는 데 약하지만, 경비를 인정받으면 금세 기운을 차린다.
이번 출장에는 피코와 루시아 외에도 아레인이 동행했다. 중립 공관 기록관이 있어야 지하 보관실에 들어갈 수 있었기 때문이다. 보관실은 이른 아침부터 축축했다. 오래된 종이는 물기를 싫어한다는데, 이곳은 종이를 장기 보존하려고 일부러 습기를 모으는 것처럼 보였다.
“왜 이렇게 눅눅하죠?”
내가 묻자 아레인이 벽을 두드렸다.
“작년 폭우 뒤 배수관이 막혔습니다. 임시 보수는 했지만 완전 교체는 아직입니다.”
“예산이 없어서요?”
“예산은 배정됐습니다. 공사를 맡은 계약 업체가 사라졌습니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예산이 배정됐다고 공사가 되는 건 아니다. 저 문장을 내 이세계 명함 뒷면에 적어 둬도 좋겠다.
지하 계단 끝에는 봉인된 문이 있었다. 아레인이 권한 확인서를 내밀었고, 관리인은 일일 출입 명부와 대조했다. 누구의 이름으로 들어가는지가 먼저였다. 나는 서명 칸 아래에 ‘입회 열람’이라고 분명하게 적었다. 문을 여는 순간 나에게 내용 수정권까지 주어지는 일은 없어야 했다.
“여기까지 와서 수정을 안 하면 답답하지 않나요?”
피코가 속삭였다.
“저 안의 물건은 우리 회사 게 아니잖아.”
“그러면 틀린 숫자를 보면요?”
“틀렸다고 표시하고 정정을 요청하지. 남의 기록을 몰래 고치는 건 감사가 아니야.”
피코는 그 말을 수첩에 적었다. 녀석이 계속 내 말을 베껴 적는 걸 보면 나중에 회계 교본 하나가 나올지도 모른다. 제목은 아마 ‘도윤 님이 맨날 하는 소리’ 정도일 것이다.
보관실에는 오래된 인계 장부가 쌓여 있었다. 우리는 표지의 일련번호부터 찾았다. 자동 안내문 이관 승인은 본래 편지 보존 업무의 일부였다. 그런데 중간에 보존 책임 기관이 몇 번 바뀌었다. 제3감리 사무소, 임시 필사실, 중립 공관, 천계 제7서고. 이름은 거창했지만 장부의 실제 내용은 무척 사소했다. 누가 상자를 옮겼는지, 상자가 몇 개인지, 봉인을 누가 확인했는지.
“이런 건 잘 남겼네요.”
내가 말했다.
아레인이 대답했다.
“물건이 사라지면 책임을 물을 수 있어야 하니까요.”
“사람이 자신의 권리를 잃었을 때도 이렇게 적어 놨으면 좋았을 텐데요.”
아레인은 대답하지 않았다. 침묵이 동의라는 뜻은 아니었다. 다만 그도 지금 문제가 어딨는지 아는 듯했다.
우리는 장부를 한 장씩 넘겼다. 빈칸이 이상하게 많았다. 보관함 번호는 있고 보관 요청 이유는 없었다. 봉인 확인은 있는데 서명자 직위가 빠져 있었다. 그러나 오래된 업무 양식은 원래 그럴 수 있다. 없는 칸을 누군가 일부러 삭제한 것처럼 취급해서는 안 됐다.
그때 피코가 낡은 끈 하나를 발견했다.
“여기 책이 묶여 있어요.”
“당기지 마. 먼저 번호를 보자.”
책등에는 ‘이관 불완전’이라고 적혀 있었다. 아레인은 장갑을 끼고 끈을 풀었다. 표지 안쪽에는 인계 당시 발생한 오류 목록이 있었다.
[송-4189 관련 안내문 연결 기록: 승인 원본 재확인 필요]
드디어 번호가 나왔다. 나는 말을 삼켰다. 피코도 알아차린 듯 조용히 내 소매를 붙잡았다.
“왜 재확인이 필요했던 걸까요?”
내가 물었다.
“사유 목록을 보겠습니다.”
아레인이 다음 장을 넘겼다. 사유는 뜻밖이었다.
[승인 기관 표시와 실물 보관 장소 불일치. 서식 구형. 권한 원장 대조 보류.]
그러니까 누군가 잘못된 서식을 썼거나, 이전 업무를 넘겨받는 과정에서 기록이 어긋났을 가능성이 있다. 아직 위조라고 부를 근거는 없었다.
“보류 상태는 언제 해제됐습니까?”
“여기에는 해제 기록이 없습니다.”
아레인이 말했다.
“그런데 안내문은 현재 작동하는 거잖아요.”
피코가 묻자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서 확인해야 해. 보류 중인데 기능은 연결됐는지, 아니면 나중에 다른 승인으로 해제됐는지.”
한편 반대편 장부에는 전혀 다른 문제가 있었다. 중립 공관이 맡은 보관실 배수관 수리비가 몇 해째 ‘완료’ 상태로 표시돼 있었다. 그런데 아까 입구에서 물이 떨어졌다. 나는 기록관에게 확인했다.
“이건 공사 완료 내역입니까?”
“기성 지급 승인 내역입니다.”
“그럼 실제 수리는 안 된 건가요?”
“일부는 했습니다. 계약이 중단되면서 나머지가 남았습니다.”
“그런데 전액 완료라고 표시하면 안 되죠.”
아레인은 고개를 끄덕였다. 우리는 장부를 다루는 손을 멈추고 관리인의 휴게실로 갔다. 기름 난로 하나가 오래된 방을 데우고 있었다. 관리인 할머니는 장부가 젖을까 봐 비 오는 날에는 밤새 계단에서 물을 퍼냈다고 했다.
“그런데 요즘은 손목이 아파요.”
“배수관을 언제 고칠 예정입니까?”
“예정표는 매년 나와요.”
그 말에 나는 할 말을 잃었다. 누군가는 서류에 ‘완료’라고 쓰고, 누군가는 실제로 밤새 양동이를 들고 있었다. 회계 숫자는 사람의 손목과 무관해 보이지만, 실은 매우 직접적으로 연결돼 있다.
우리는 중립 공관에 임시 배수 장비 구입비와 일시적인 인력 지원을 요청했다. 영구 수리 예산과 구분해 신청했다. 지금 필요한 건 오늘 밤 물이 들어오는 걸 막을 사람과 도구였다. 아레인은 관리인의 야간 추가 근무 기록도 가져오겠다고 했다. 수당이 지급됐는지 확인해 달라는 부탁은 내가 먼저 하지 않았다. 할머니가 직접 말했다.
“저번 달엔 밤에 세 번 나왔는데 수당은 한 번만 들어왔지요.”
나는 조용히 수첩을 열었다. 그분의 노동도 보관해야 할 원본이었다.
지하 보관실에서 잠시 쉬는 동안 관리인 할머니가 오래된 벽의 금을 보여 줬다. 지난겨울부터 조금씩 벌어진 틈이었다. 그녀는 재정실에 여러 차례 보고했지만 매번 ‘조사 예정’이라는 답을 받았다고 했다.
“그럼 언제부터 금이 갔는지는 기록이 있습니까?”
“지난겨울엔 손가락 하나 들어갈 정도였어요. 봄에는 두 개가 됐지.”
그녀는 금을 직접 손으로 가리켰다. 도르벤이 가져온 계측표와 비교하자 실제로 벽 틈이 넓어졌다는 사실은 확인할 수 있었다. 하지만 그 원인이 배수관인지 건물 기초인지 확정하려면 구조 기술자의 검토가 필요했다.
“제가 판단할 수는 없지만 안전 점검은 요청해야겠습니다.”
“또 요청서만 쓰는 건 아니겠지요?”
그 질문에 나는 잠시 말을 잃었다. 그녀에겐 이미 요청서가 너무 많았다.
“오늘은 위험 구역을 임시 폐쇄하고, 관리인이 혼자 들어가지 않도록 하겠습니다. 공관 담당자가 여기 있습니다. 같이 결정하도록 하죠.”
아레인이 곧바로 다른 보관실의 빈 공간을 확보했다. 원본을 이동할 때 필요한 승인권은 보존관에게 있으므로, 임의로 옮기지는 않았다. 대신 긴급 안전 점검을 먼저 등록했다.
할머니는 우리를 향해 고개를 숙였다.
“서류가 많아도 상관없어요. 그 서류 때문에 내일 비가 들어오지 않으면 좋겠어요.”
나는 이상하게 가슴이 답답해졌다. 담당자들의 바쁜 사정도 이해한다. 하지만 기록을 보존한다는 명분 때문에 실제 기록을 지키는 사람이 위험해져선 안 된다.
잠시 뒤 루시아가 계단을 내려왔다. 그녀는 직접 벽을 두드려 보고 말했다.
“여긴 검으로 쳐서는 안 되는 곳이다.”
“그건 판단이 정확하네요.”
“아주 강한 검이면 벽이 더 부서지니까.”
나는 할머니를 돌아봤다. 그녀는 웃음을 참고 있었다.
우리는 임시로 통로에 굵은 줄을 걸었다. 피코가 ‘출입 금지’라고 써 놓으려다가 손을 멈췄다.
“도윤 님, 위험해도 안에 들어가야 하는 사람은 있잖아요.”
“맞아. 보존 담당자가 안전 장비를 갖추고 동행할 수는 있어야지.”
녀석은 글씨를 고쳤다.
[일반 출입 중지. 보존 작업은 안전 책임자 확인 후 진행.]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좋은 규칙은 누군가를 막는 데서 끝나지 않고, 필요한 일을 안전하게 할 방법도 남겨 둬야 한다.
돌아가려던 찰나 아레인이 할머니에게 야간 근무 내역을 물었다. 그녀는 ‘혼자 나온 날’을 굳이 적지 않았다고 했다. 잠깐 출근한 거라 생각했기 때문이다. 우리는 그 시간이 규정상 근무로 인정되는지부터 검토하기로 했다. 돈을 받으라는 말만 해 놓고 근거 없는 기대를 주고 싶진 않았다.
아레인은 관련 교대 표와 출입기록을 확보했다. 나는 할머니께 말했다.
“오늘 확인한 걸로 끝이라고 하진 않겠습니다. 담당 기관에서 실제 답이 올 때까지 확인하겠습니다.”
할머니는 가볍게 웃었다.
“약속 날짜도 적어 놔요. 나중에 바쁘다고 잊어버리지 말고.”
“네. 꼭 적겠습니다.”
나는 수첩을 꺼냈다. 어쩌면 이 세계에서 가장 무서운 건 마왕도 천사도 아니고, 약속 날짜를 정확히 기억하는 보관실 할머니일 것이다.
점심 이후 장부를 다시 살폈다. 이관 보류 표시는 남아 있었지만, 며칠 뒤 찍힌 별도 접수인이 있었다. 인장 모양은 제3감리 구형 장부에서 보던 것과 닮았다. 피코가 눈을 반짝였다.
“이게 그 0003이에요?”
“번호를 먼저 보자.”
찍힌 것은 ‘인수 확인 3호’였다. 숫자는 같아도 같은 권한이라는 뜻은 아니었다. 나는 확대경을 가져왔다. 인장 아래 작은 글씨가 있었다.
[기록물 인계만 확인. 내용 승인 효력 없음.]
아레인이 낮게 휘파람을 불었다.
“이 문구가 살아 있어서 다행이군요.”
“왜요?”
“이 도장을 콘텐츠 승인이라고 해석한 시스템이 있었거든요.”
“그건 어디서 확인했습니까?”
“후대 전환 목록에 그렇게 적혀 있습니다.”
나는 느리게 숨을 들이켰다. 보관함을 받았다는 도장이, 보관함 속 문서에 동의했다는 뜻으로 바뀌었다면. 그러면 연락함뿐 아니라 여러 사람의 계약에도 같은 문제가 생겼을지 모른다.
“후대 전환 목록을 볼 수 있을까요?”
“개인 식별 정보를 가린 범위에서요.”
우리는 그날 가장 오래된 장부와 가장 새로운 요약표를 나란히 펼쳤다. 원본에는 ‘인계만 확인’, 새 표에는 ‘승인 완료’라고 적혀 있었다. 같은 사건의 이름이 달라졌다. 누가 그 변환을 설계했는지는 나오지 않았다. 작성자 칸에는 부서명만 있었다.
[공동 보증 회계소 전산 이관반]
“또 회계소군요.”
내가 중얼거렸다.
아레인은 억측하지 말라고 손짓했다.
“회계소가 만든 표인지, 회계소가 전달받아 보관한 표인지는 확인해야 합니다.”
“알고 있습니다.”
나는 곧바로 수정했다.
‘회계소 명의의 전산 이관반 표시. 책임 범위 미확정.’
지하에서 올라왔을 때 이미 저녁이었다. 관리인 할머니는 우리가 가져온 물막이 판자를 보고 활짝 웃었다. 영구 수리가 아니니 과장하고 싶지 않았지만, 적어도 오늘 밤에는 할머니가 계단에서 양동이를 들고 밤을 새우지 않아도 될 것 같았다.
돌아오는 마차에서 피코가 내게 물었다.
“도윤 님, 그 안내문은 언제 누가 쓴 거예요?”
“아직 몰라.”
“오늘 원본 찾은 거 아니에요?”
“인계 기록을 찾은 거야. 원문 작성자 기록은 아니지.”
“그럼 하나만 물어볼게요.”
“응.”
“인수 도장만 찍었는데 왜 나중엔 승인했다고 바뀌어요?”
나는 창밖을 봤다. 대답하기 참 어려운 질문이었다.
“어떤 사람은 두 단어를 같은 뜻이라고 생각했겠지. 어떤 사람은 그래야 일이 빨리 끝난다고 생각했을 수도 있고.”
“누가 이득을 봤을 수도 있잖아요.”
“맞아. 그건 조사를 해야 해.”
마차 바퀴가 자갈을 밟았다. 나는 어릴 때 어머니가 학교 가기 전 우산을 챙기라고 하던 말이 생각났다. 어떤 서류에 서명할 때까지 내가 무슨 일을 당할지는 아무도 모른다. 그래도 비가 올지 안 올지 모르는 사람에게 우산을 주는 건 중요하다.
그날 밤 재정실에 돌아오자 아레인에게서 전송이 와 있었다.
[구형 보관함 ‘인수 확인’ 인장이 후대 전환표에서 ‘동의 승인’으로 치환된 사례 최소 6건. 이 중 송-4189 포함 여부 별도 확인 중.]
나는 한참 그 문장을 바라봤다.
여섯 건.
우리가 전에 본 외부 언어 보호 목록도 일곱 건이었다. 숫자가 가까워 보인다고 같은 사건이라고 결론 내려서는 안 된다. 나는 마음속에서 너무 빨리 달리는 생각을 붙잡았다.
나한테 필요한 건 전설적인 예언자가 아니었다.
원본의 ‘확인’과 전산표의 ‘승인’을 구분해 줄, 제정신 박힌 담당자 한 명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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