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로운 작품, 이어지는 이야기 · 페이루아에서 다음 페이지를 만나보세요
작품으로마왕성에 취업했더니 내가 제일 무섭단다 · 91화
PAYLUA ORIGINAL · 제91화

91화. 그 편지의 날짜는 세 개였다

마왕성에 취업했더니 내가 제일 무섭단다 · 6,570자

오프라인 책장
자동 안내문을 받은 다음 날, 나는 출근해서 가장 먼저 한 일을 남에게 말하지 않기로 했다. 편지를 또 읽었다. 정확히는 열두 번 읽었다. 마왕성 재정실 내 책상 한쪽에 문서를 펴 놓고, 커피 비슷한 검은 버섯차를 세 번 식혔다. 읽을 때마다 글자가 바뀌는 건 아니었다. 여전히 한글로 ‘한도윤’이라고 적혀 있었다. 그런데 열세 번째를 읽으려는 순간 피코가 고개를 내밀었다. “도윤 님, 그건 어제도 봤잖아요.” “숫자는 두 번 보면 실수가 보일 때가 있어.” “열두 번 보면요?” “마음이 조금 진정될 수도 있지.” 피코는 이해할 수 없다는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어린 고블린이 내 행동을 이해하는 날에는 내가 정말로 이 세계에 적응한 거라고 생각한다. 편지는 한 사람이 내 이름을 알고 있었다는 증거였다. 하지만 그 사람이 지금도 살아 있는지, 나를 직접 만났는지, 편지를 작성한 시점에 내가 이곳에 있었는지는 하나도 증명하지 못했다. 내 이름이 등록된 송-4189의 사전 예비 기록이 이미 있었다는 걸 알았으니까. 기록에서 이름을 가져오는 건 사람을 만나는 것보다 쉬운 일이다. 나는 옆 종이에 두 문장을 썼다. ‘이름을 아는 사람’과 ‘나를 아는 사람’은 다르다. 그리고 밑에 하나를 더 적었다. ‘자동 안내문은 답장이 아니다.’ 아침부터 기분을 굳이 망칠 필요가 있느냐고 누가 물으면, 대답은 간단하다. 희망은 좋지만 확정되지 않은 희망을 보고서의 첫 줄에 쓰는 사람을 나는 못 믿는다. 그 사람이 나일 때는 더더욱. “그래서 오늘은 뭐부터 합니까?” 피코가 수첩을 들었다. “편지가 언제 등록됐는지 확인하자.” “어디에요?” “중립 공관. 이 기록의 보관 책임자가 거기 있으니까.” “그 전에 급여 대장 확인해야 해요.” 나는 피코를 봤다. “너 이제 나보다 더 무섭다.” “지난번 자동 퇴직 처리 때문에 도윤 님이 지급 전에 확인하라고 했잖아요.” 맞는 말이었다. 나보다 무서운 사람이 생겼다고 한탄해 봐야 내 교육 성과일 뿐이다. 우리는 급여 대장을 펼쳤다. 천계 출장 후 자동 종료 처리됐던 직원 두 사람의 근무 상태가 정상으로 돌아왔는지부터 살폈다. 복구 승인 날짜와 실제 출근 날짜가 달랐지만, 둘을 같은 값으로 덮어쓰지 않았다. 출근한 날은 출근한 날이고, 복구 승인된 날은 승인된 날이다. “이번엔 누락 없네요.” 피코가 말했다. “지급도 됐어?” “지급일 전이에요. 정산 대상만 확정됐어요.” “그걸 꼭 구분해야 해.” “알아요. 도윤 님이 매일 말하니까요.” 내가 가르친 말이 잔소리로 돌아왔다. 마왕성의 교육 체계는 훌륭했다. 점심 무렵 중립 공관의 에브란과 연결됐다. 전송 구슬에 그의 얼굴이 뜨자 나는 편지를 흔들지 않았다. 그러면 꼭 항의하는 사람처럼 보일 것 같았다. 대신 접수번호를 읽어 줬다. “자동 안내문이 등록된 날짜만 확인하고 싶습니다.” “수신자의 신원은 조회하지 않으실 겁니까?” “조회할 수 없잖아요.” “그렇습니다.” “그럼 없는 권한을 신청해서 서류만 늘릴 이유가 없죠.” 에브란은 희미하게 웃었다. 그가 보내 준 안내에는 항목이 세 개 있었다. 원본 보존일, 안내문 연결일, 현재 장치 상태를 마지막으로 확인한 날. “이 셋은 같은 날짜가 아닙니다.” 그가 말했다. “원본 보존일은 편지 내용이 처음 작성된 날입니까?” “아닙니다. 해당 보존함에 물품을 등록한 날입니다. 그 물품의 작성일과는 다를 수 있습니다.” “안내문 연결일은요?” “보관함에 자동 응답 기능을 묶은 날입니다.” “마지막 확인일은 장치가 작동했는지 확인한 날이겠군요.” “맞습니다. 누가 읽었다는 증거는 아닙니다.” 나는 말을 끝까지 듣고 기록했다. 늘 비슷한 숫자들 사이에서 일이 꼬인다. 날짜 세 개를 한 칸에 넣고 ‘등록일’이라고 부르면 보기엔 편하지만, 나중에는 그 한 칸이 누군가의 과거를 만들어 버린다. 피코가 옆에서 조심스럽게 물었다. “그러면 편지 쓴 사람도 모르고, 날짜도 모르는 거예요?” “확실히 아는 날짜와 모르는 날짜를 구분하는 거지.” “무슨 차이예요?” “모른다는 걸 알고 있으면, 남한테 거짓말은 안 하게 되거든.” 에브란은 개인정보를 가린 상태로 장치 관리 기록의 열람을 허락했다. 실제 기록을 보는 일은 다시 중립 공관에 가야 했다. 나는 출장 신청서를 열었다. 어제 돌아왔는데 오늘 또 출장이라니, 마왕성 인사 담당자가 나를 모험가로 잘못 채용한 게 아닐까. 그때 재정실 문이 쾅 열렸다. “도윤!” 마왕 제르칸이었다. 검은 망토가 문틀에 걸리는 바람에 등장하는 모습이 조금 우스워졌지만, 그는 위엄을 잃지 않기 위해 그대로 앞으로 걸어 나왔다. 망토만 뒤에 남았다. “네가 천계의 비밀 편지를 받았다는 소문이 사실이냐?” “누가 그런 소문을 냈습니까?” “내가 방금 만들었다.” 그럴 줄 알았다. “편지는 받았지만 비밀이 뭔지는 모릅니다.” “그럼 비밀이 아니지 않느냐!” “모르니까 비밀이죠.” 마왕은 잠시 생각하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 말도 맞군.” 나는 출장 승인 이야기를 꺼냈다. 제르칸은 심각한 표정으로 서명란을 들여다봤다. “중립 공관 방문이라. 저번에는 천계에서 돌아온 지 얼마 안 됐다고 하지 않았느냐.” “그래서 이번에는 가까운 곳입니다.” “가까운 곳에도 출장비는 드는가?” “네.” “그럼 가까운 곳이 아닌 것 아니냐?” 나는 무어라 답할 말을 찾다가 포기했다. 이 세계의 마왕은 가끔 비용과 거리를 같은 단위로 생각한다. 제르칸이 서명하려는 순간, 그의 손이 멈췄다. “도윤. 네가 원한다면 그 편지의 내용을 왕의 권한으로 열어 줄 수도 있다.” “그 권한은 없습니다.” “왕인데도?” “마왕성 안에서도 직원 개인 편지는 왕이 마음대로 열 수 없습니다.” 제르칸은 입술을 삐죽였다. “그런 법을 누가 만들었지?” “지난달에 폐하께서 승인하셨습니다.” “아, 그랬지.” 망토를 되찾은 그는 서명하고 나갔다. 왕이 법을 기억하지 못한다는 건 걱정스러운 일이지만, 기억하지 못하는 법이라도 지킨다면 나름 발전이다. 중립 공관으로 향하는 마차에는 나와 피코, 루시아가 탔다. 루시아는 오늘도 검 두 자루를 챙겼다. “문서 조사에 검이 둘이나 필요합니까?” “상대가 갑자기 공격하면 필요하지.” “상대는 날짜가 찍힌 장부입니다.” “그럼 한 자루면 되겠군.” 피코가 웃음을 참느라 어깨를 들썩였다. 나는 창밖을 보면서 낡은 원문 보존 기록을 떠올렸다. 내가 소환되기 전, 누군가는 내 귀환을 대신 결정하지 말라는 한국어 문장을 남겼다. 왜 그랬을까. 나를 알고 있었기 때문일까, 아니면 나 같은 사람이 또 나올 거라고 예측했기 때문일까. 공관에 도착하자 아레인이 우리를 맞았다. 그는 곧바로 연락함으로 가지 않았다. 먼저 다른 방으로 안내했다. “원본이 아니라 관리용 등본부터 확인하셔야 합니다.” “수신자 동의를 받지 않은 부분은 볼 수 없다는 뜻이군요.” “그렇습니다. 등록 관리 내역만 보여 드립니다.” 벽에는 아주 작은 구슬들이 날짜별로 끼워져 있었다. 한 줄은 고대 문자로, 다른 줄은 중립 공관의 공용어로 적혀 있었다. 아레인은 세 개의 날짜를 보여 줬다. 원본 보존함 개설. 자동 안내문 연결. 장치 유지 시험. 셋 중 첫 번째는 내 소환보다 한참 앞이었다. 마지막 것은 며칠 전이었다. 그리고 중간 날짜는 유독 이상했다. “자동 안내문 연결일이 왜 비어 있죠?” 내가 물었다. “기록이 없다는 뜻입니까?” 아레인은 고개를 저었다. “이관 당시 숫자가 손상돼 판독 보류 상태입니다. 사라진 날짜를 임의로 채울 수 없어서 빈칸으로 뒀습니다.” 피코가 엎드려 유리판을 살폈다. “그런데 여기 옆에 점이 세 개 있어요.” “어디?” “아주 작게요. 하나, 둘, 셋.” 아레인이 작은 확대 렌즈를 건넸다. 판 위에는 희미한 눌림 자국이 있었다. 숫자 옆인지, 뒤에 따로 찍힌 부호인지 알 수 없었다. 제7서고의 구형 판본에 남아 있던 마침표 뒤 작은 표시가 떠올랐다. “같은 표시일까요?” 피코가 물었다. “모양이 닮았다는 건 확인할 수 있지. 같은 장치에서 만든 건지는 따로 검사해야 해.” 그런 말을 할 때마다 내가 재미없는 어른이 되는 것 같았다. 하지만 소문 하나로 나를 모르는 사람을 범인으로 만들고 싶지는 않았다. 아레인은 구슬의 압착 흔적을 기술 검사할 수 있다고 했다. 다만 기계가 오래돼 원본을 손상시킬 수 있어 사본부터 비교해야 했다. 나는 동의했다. 그때 연락함 관리 책임자가 작은 종이를 가져왔다. “방금 새 알림이 왔습니다.” 심장이 철렁했다. “답장입니까?” 직원은 고개를 저었다. “아닙니다. 발신자에게 안내문을 전달한 사실을 시스템이 재확인했습니다. 사람이 읽었다는 기록은 없습니다.” 나는 종이를 받아 들었다. 확인 문구는 딱 한 줄이었다. [자동 안내문 1회 제공. 별도 회신 없음.] 피코가 내 얼굴을 살폈다. “실망했어요?” “조금.” “그래도 도윤 님 이름이 적힌 이유는 알아낼 거죠?” “알아내려고 노력은 해야지. 다만 다른 사람이 말하기 싫다는 걸 증거로 취급하면 안 돼.” 피코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고는 내 소매를 잡아당겼다. “근데 도윤 님, 이거 정말 특이해요.” “뭐가?” 녀석은 관리 등본의 맨 아래 줄을 가리켰다. [자동 안내문 사용 목적: 당사자 선택 기록 보존] 그 옆에 사용 승인 권한이 적혀 있었다. [승인 경로: 제3감리 구형 보관 체계] “이것도 0003일까요?” 나는 고개를 저었다. “그 번호가 어디서 나왔는지부터 확인해야지.” 두 기록이 같은 체계와 연결돼 있을 수는 있다. 하지만 같은 번호가 같은 사람을 뜻하지 않는다는 걸 우리는 이미 배웠다. 나는 등본 끝에 내 서명을 남기지 않았다. 대신 열람 사실 확인란에만 서명했다. ‘봤음’과 ‘동의함’은 다르기 때문이다. 관리용 등본을 모두 확인한 뒤 아레인이 우리에게 아주 낡은 서식 한 장을 보여 줬다. ‘자동 응답 기능 이전 작업표’였다. 표에는 알림의 글자가 아닌 전송 시험 횟수와 연결 장치의 번호가 적혀 있었다. “이 문서는 개인 정보를 포함하지 않는 관리 기록입니다. 내용은 읽을 수 없지만 기능이 실제로 언제 시험됐는지 대조할 수 있습니다.” 나는 표를 받아 세 번째 줄을 손가락으로 짚었다. “시험이 세 번 있었네요. 이 세 번이 안내문 작성자와 연결되는 건 아니죠?” “네. 이전 작업자가 안내문을 읽지 않은 채 장치만 시험했을 수도 있습니다.” 피코가 고개를 갸웃했다. “읽지도 않고 어떻게 시험해요?” 아레인이 작은 전송 상자를 가져왔다. 안에는 아무 글자도 없는 연습 문서가 들어 있었다. 그는 상자를 봉인한 뒤 옆의 구슬을 눌렀다. 구슬은 내용이 아니라 ‘봉인물 한 건이 도착했다’는 상태만 표시했다. “이게 내용 비공개 전송 시험입니다.” 피코는 곧바로 따라 해 보았다. 연습 상자를 반대편 선반에 놓고 구슬을 눌렀다. 표시판에 ‘수취 대기’가 떠올랐다. “이제 받았다는 뜻이에요?” “아직. 보관함에 도착했다는 뜻이지.” “그럼 수신자가 열어 보면요?” “별도 기록이 있어야 해.” 피코가 표에 새 칸을 그렸다. 도착, 열람, 응답. 셋의 차이를 이해하고 있었다. 나는 아레인을 향해 고개를 숙였다. “설명 감사합니다. 다른 직원들에게도 이 시험을 보여 주면 좋겠네요.” 아레인은 당황한 얼굴로 웃었다. “오늘은 처음으로 기록관 교육을 외부 감사인에게 권고받는군요.” “권고라기보단 감탄에 가깝습니다.” 우리는 복도에서 잠시 걸음을 멈췄다. 벽에는 옛 우편관 직원들의 이름이 적힌 동판이 있었다. 그들 중 몇 사람은 수십 년 전에 세상을 떠났을 것이다. 안내문 연결 기록을 남긴 사람이 그 가운데 있을 수도 없을 수도 있었다. 나는 동판을 읽으려다 시선을 돌렸다. 무턱대고 이름을 하나 골라 ‘한국어를 아는 사람’으로 만들고 싶지 않았다. 그 사람이 살아 있다면 억울할 것이고, 세상을 떠났다면 더더욱 그렇다. “도윤 님, 왜 이름을 안 적어요?” “지금 조사하는 문서랑 연결된다는 근거가 없거든.” “그래도 궁금하잖아요.” “엄청 궁금하지.” “그럼 어떻게 참아요?” “대신 확인할 수 있는 걸 하나씩 확인하는 거야.” 피코는 잠시 생각하더니 동판 옆의 작은 안내문을 가리켰다. [기록관 직원에게 확인되지 않은 편지의 발신자를 추정하여 공개하지 마십시오.] “여기에도 비슷한 말이 있네요.” “그러네.” 나는 웃었다. 적어도 이 건물에는 오래전부터 같은 고민을 했던 사람이 있었다. 공관에서 나오자 해가 기울어 있었다. 피코는 길거리 빵집 앞에서 걸음을 멈췄고, 루시아는 경비병들의 검집을 눈으로 검사하고 있었다. 나는 주머니 속 한국어 안내문을 만져 봤다. 종이는 여전히 따뜻하지 않았다. 누군가의 현재 손길이 닿은 게 아니니까. 그런데 이상하게도 마음 한쪽이 조금 편했다. 오늘은 최소한 무엇을 모르는지 분명히 알게 됐다. 그때 아레인에게서 짧은 전송이 왔다. [구형 보관함 자동 안내문 연결 기록. 원장상 ‘직접 등록’ 아닌 ‘외부 이관 승인’으로 분류되어 있음. 실제 승인 원본 확인 필요.] 나는 마차 손잡이를 붙잡았다. 누가 편지를 썼는지도 모르는데, 누가 편지를 연결했는지조차 모른다. 이 세계는 정말 끝내주는 회사다. 서류 한 장을 읽으려면 먼저 조직도를 찾아야 한다니.

PAYLUA 소설 본문은 인쇄가 제한되어 있습니다.

제91화 끝

읽은 위치는 이 브라우저에 저장되며 로그인 중에는 계정에도 동기화됩니다.
READER DISCUSSION

제91화 댓글 0

댓글·공감·신고는 로그인 후 이용할 수 있습니다. 이전 익명 댓글은 그대로 표시됩니다.

댓글을 남기려면 로그인해 주세요.로그인회원가입

댓글을 불러오는 중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