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락 요청서를 쓰는데 상대방 이름을 적는 칸이 없었다.
이상하게도 그게 마음에 들었다.
대신 적어야 하는 칸은 많았다. 연락을 원하는 이유, 상대에게 공개할 정보, 답장을 받는 방법, 거절했을 때 기록을 얼마나 남길지. 맨 아래에는 아주 중요한 문장이 있었다.
[수신자가 동의하지 않으면, 발신자는 수신자의 신원을 알 수 없습니다.]
나는 펜을 내려놓고 피코를 봤다.
"이거 만든 사람은 좀 똑똑하네."
"왜요?"
"답장하기 싫은 사람은 안 해도 되니까."
"그럼 누군지 영원히 못 알 수도 있잖아요."
"그럴 수도 있지."
피코는 아쉬운 얼굴이었다. 녀석도 오래된 한국어 기록의 작성자가 누군지 궁금한 모양이다. 나는 이해했다. 나 역시 이세계에서 내 고향의 글씨를 처음 봤을 때 숨이 멎을 뻔했다. 그런데 바로 그렇기 때문에 더 조심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상대가 누구든, 그 사람이 여기까지 살아온 사정은 내가 모른다.
오늘 회의는 왕국과 마계, 천계, 중립 공관의 공동 후속 조치 점검이었다. 외부 고용 상태값 때문에 직원이 자동 퇴직 처리된 문제와, 환급 심사료 같은 부당한 추가 청구를 다뤘다. 제르칸도 참석하겠다고 했지만, 이동 중 자신의 망토를 세탁소에 맡겼다는 이유로 늦었다.
나는 그 소식을 듣고 조금 안심했다. 늦게 오는 사람을 기다리는 동안 민감한 개인 정보 안건을 끝낼 수 있기 때문이다.
"첫 번째 보고부터 하겠습니다."
내가 말하자 라델이 문서를 펼쳤다.
"마왕성 직원 세 명의 자동 종료 표시 가운데 세 건 모두 원본 근무 자료와 불일치한 것으로 확인됐습니다. 인사 상태 정정은 완료됐습니다."
"급여 누락은요?"
"한 건은 지급 대상에서 빠질 위험이 있었으나 마감 전에 바로잡았고, 다른 두 건은 정상 지급됐습니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출근한 직원의 기록을 복구했다는 것과 이미 빠져나간 돈을 돌려받았다는 것은 다른 사건이다. 이 경우는 다행히 아직 급여 누락이 실제로 발생하기 전이었다.
몰트가 전송 구슬을 통해 회의에 참석했다. 그의 얼굴이 푸르게 떠올랐다.
"앞으로 외부 귀환 기록은 참고 항목으로만 쓰기로 했네. 퇴직·해고 확정에는 내부 승인과 당사자 확인을 분리하도록 고쳤어."
"감사합니다. 그리고 출근 기록 변경 이력도 보존해 주세요."
"이미 해 뒀네."
역시 몰트다. 뼈만 남은 얼굴에서 저런 든든함이 느껴질 줄이야.
두 번째 보고는 세르도의 환급이었다. 피코가 직접 나섰다.
"검문소 중복 납부 두 닢은 실제 수취 계좌에 입금됐고, 수취인도 확인했습니다. 추가 환급 심사료 은화 다섯 닢은 청구되었지만 납부되지 않았습니다. 현재 신규 청구가 중단됐습니다."
"아주 좋습니다."
내가 말했다.
피코는 뿌듯한 얼굴로 자리로 돌아왔다. 아우렐이 녀석에게 엄지손가락을 들어 보였다. 천계 기록사가 고블린 회계 직원에게 칭찬을 보내는 모습은 내가 처음 마왕성에 입사했을 때 상상도 못 할 광경이었다.
세 번째 보고는 가장 복잡했다. 대리번호 0003의 발급 체계였다. 우리는 번호가 사용된 상황을 셋으로 나눴다. 오래된 접수 대행, 자동 상태 변환, 원문 열람 승인. 각각 발행 기관과 권한 범위가 달랐다.
"그럼 같은 번호가 나온 건 전부 우연이라는 겁니까?"
세라핀이 물었다.
"아니요. 체계 통합 과정에서 번호가 이어졌을 가능성이 확인됐다는 겁니다. 누군가 그 허술함을 이용했는지는 계속 조사해야 합니다."
"그럼 누가 책임집니까?"
"제도를 만든 기관의 관리 책임과 실제로 잘못된 명령을 내린 사람의 책임을 나눠서 봐야죠."
라델이 고개를 끄덕였다. 왕국도 그 번호를 근거로 도윤을 소환했다는 의혹을 완전히 피해 갈 수 없었다. 천계도 자동 동의 장치가 문제를 만들었다는 사실을 부정하기 어려웠다. 마계는 그 값을 믿고 인사 기록을 바꿨다.
셋 다 얼굴을 찌푸렸다.
나는 참 이상한 기분이었다. 예전엔 마왕성만 엉망인 줄 알았다. 지금은 왕국과 천계까지 회의실에 모여 서로 자기 양식에 적힌 날짜를 확인하고 있었다. 세상을 구하는 거창한 사명보다 업무 절차부터 정리할 일이 이렇게 많을 줄은 몰랐다.
"후속 조치는 세 가지로 제안합니다."
나는 칠판에 적었다.
첫째, 본인 동의가 필요한 업무는 자동 완료 신호만으로 처리하지 않는다.
둘째, 실제 지급된 돈과 아직 청구만 된 돈을 구분해 환급·보류를 진행한다.
셋째, 기존 원본 기록과 변경 기록을 함께 보존하고 책임 기관을 명시한다.
세라핀이 손을 들었다.
"긴급한 경우에는요?"
"긴급 상황은 예외 절차가 필요하겠죠. 하지만 그 예외를 누가 승인했고 당사자에게 언제 알렸는지 남겨야 합니다."
에브란이 덧붙였다.
"당사자가 의식을 잃은 경우와 단순히 답하지 않은 경우도 구분해야 합니다."
"맞습니다."
나는 그 말 옆에 별표를 쳤다. 내 소환 계약에서 가장 이상했던 부분이기도 했다. 답이 없다는 이유로 '예'라고 처리해 버린 시스템. 그 단순한 오류가 왕국의 용사 소환부터 천계 귀환 명부까지 멀리 연결돼 있었다.
회의가 끝나갈 때 제르칸이 들어왔다. 아주 긴 망토가 새것처럼 반짝였다.
"본왕이 도착했다!"
나는 먼저 망토를 봤다.
"세탁비 영수증은요?"
제르칸의 표정이 일그러졌다.
"……정말 인사를 그렇게 해야겠느냐?"
"출장비 정산 중이니까요."
모두가 웃었다. 마왕만 웃지 않았다. 그래도 그의 망토가 상당히 깨끗해진 건 사실이었다.
"직원 급여 문제는 해결됐느냐?"
그가 물었다.
"네. 임시 재발 방지 조치도 마련했습니다."
"잘했다."
짧은 말이었다. 그런데 나는 그 말이 조금 좋았다. 영웅이 되라는 명령이 아니라, 직원이 제대로 일했다고 인정받는 말이었다.
회의 뒤에는 한국어 문서 작성자에게 보내는 연락 요청서가 남았다. 나는 한참 고민하다가 아주 짧게 적었다.
[저는 한도윤입니다. 소환 전에 작성된 한국어 기록을 확인했습니다. 그 문서를 작성하거나 보존을 요청하신 분이 계시다면, 원하실 때 이야기하고 싶습니다. 응답하지 않으셔도 괜찮습니다.]
그 아래 공용어 번역문을 덧붙이고 원문을 별도 봉인했다. 작성자의 언어가 정말 한국어라면, 번역본보다는 원문을 먼저 볼 수 있도록 해 주고 싶었다.
"개인 정보를 얼마까지 공개하시겠습니까?"
에브란이 물었다.
"제 이름과 현재 마왕성 재정실에서 일한다는 사실까지요. 한국에서 살던 상세 주소나 가족 정보는 제외해 주세요."
"좋은 판단입니다."
"답변 경로는 이 공관으로만 해 주세요. 직접 찾아오시거나 찾아가지 않겠습니다."
나는 서명을 했다. 이번에는 누군가 대신 써 둔 내 이름이 아니라, 내가 직접 적은 이름이었다.
피코가 신청서를 조심스럽게 봉투에 넣었다.
연락 요청서의 별첨에는 수신자의 권리를 설명하는 문장이 있었다. '답장 거절', '안내문만 전달', '대면을 원하지 않음'까지 따로 고를 수 있었다. 나는 그걸 읽다가 웃었다.
"왜 웃으십니까?"
에브란이 물었다.
"제가 지난번 천계에서 싸워서 되찾은 선택지들이 여기에는 원래부터 있어서요."
"이 연락함은 아주 오래된 규정을 따릅니다."
"요즘 시스템이 오히려 옛날보다 못한 구석도 있군요."
에브란이 고개를 끄덕였다. 새것이 언제나 나은 건 아니었다. 반대로 오래됐다고 무조건 좋은 것도 아니었다. 중요한 건 사람이 실제로 그 선택을 할 수 있느냐는 문제였다.
나는 연락함이 지금도 누군가에게 전달되는지 물었다. 에브란은 '수신 가능'이라는 표시가 실제 사람이 읽었다는 뜻은 아니라고 분명히 말했다. 장치가 살아 있고 우편을 받을 준비가 됐다는 뜻에 더 가까웠다.
"그럼 제가 보낸 편지를 누가 읽을지는 모르는 거네요."
"맞습니다. 회신이 없으면 받았는지도 확인할 수 없습니다."
"그것도 기록에 적어 주세요."
피코가 내 옆에서 가만히 종이를 봤다.
"답장을 안 해도 괜찮다고 진짜 적을 거예요?"
"응."
"도윤 님은 그렇게 기다리는 걸 잘 못하잖아요."
나는 웃었다.
"맞아. 회사 메일을 보내면 한 시간마다 확인했었지."
"그런데 왜요?"
"상대도 사정이 있을 수 있으니까. 그리고 누가 강제로 시킨 답장이라면 내가 믿을 수도 없잖아."
피코는 조금 생각하더니 수첩에 자신도 한 줄 적었다. '편지 답장은 강제하지 않음.' 녀석이 배우는 건 회계만이 아니었다.
에브란은 연락 요청서를 봉인하면서 서명 두 개를 확인했다. 하나는 나의 발신자 확인 서명, 다른 하나는 중립 공관의 접수 확인 서명이었다. 어떤 제3자의 대리 승낙도 들어 있지 않았다.
"이렇게까지 확인하면 시간이 걸립니다."
그가 말했다.
"괜찮습니다. 이건 빨리 끝나는 것보다 제대로 끝나는 게 중요합니다."
나는 종이를 맡기고 나서야 길게 숨을 내쉬었다.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여기까지였다. 나머지는 상대의 몫이다. 누군가 내 귀환을 대신 결정하려 한 것과 똑같은 실수를, 내가 다른 사람에게 하고 싶지는 않았다.
"도윤 님, 답장이 올까요?"
"모르지."
"기다려야겠네요."
"응."
나는 창밖을 봤다. 중립 공관의 하늘에는 희미한 붉은 노을이 깔려 있었다. 이세계의 노을은 서울과 조금 달랐지만, 해가 지는 모습을 보고 있으면 집 생각이 났다. 엄마가 마지막으로 보낸 메시지도 그랬다. 밥은 챙겨 먹고 다니라는 말. 그 말을 읽은 뒤 나는 내 식사를 조금 더 잘 챙기게 됐다.
그때 복도에서 낯익은 발소리가 났다. 루시아였다. 그녀는 나를 찾더니 손에 쥔 종이를 흔들었다.
"도윤. 큰일이다."
"적이 나타났습니까?"
"아니다. 피코가 기사단 훈련비를 청구했다."
나는 종이를 받아 봤다. 루시아에게 배운 검술 훈련의 비용을 정식으로 계산한 것이었다. 훈련 시간, 소모된 나뭇가지 두 개, 간식 한 봉지. 마지막에 빨간 글씨로 '강사 수당 지급 여부 확인'이라고 적혀 있었다.
나는 웃음이 터졌다.
"잘 배웠네요."
"정말 지급해야 하나?"
"근무 중 업무 교육이라면 규정에 따라 보죠. 그런데 나뭇가지는 누가 부쉈어요?"
"……내가."
"그럼 비용 처리도 구분해야죠."
루시아는 검술 대회에서 패한 사람 같은 얼굴이 됐다. 나는 피코에게 교육비 정산 기준을 따로 알려 주기로 했다. 지금은 누군가의 신성 계약을 조사하는 사람도, 다시 돌아온 직장의 평범한 직원이었다.
그날 밤, 에브란에게서 연락이 왔다.
[한도윤 님의 비공개 연락 요청은 정상 접수됐습니다.]
나는 안도했다. 그런데 바로 아래에 예상치 못한 내용이 있었다.
[송-4189 원문 보존 담당 연락함의 수신 가능 상태 확인.]
[수신자 신원: 비공개.]
[회신 여부: 수신자 선택.]
수신 가능 상태라니.
누군가 아직도 그 연락함을 관리하고 있다는 뜻일까. 아니면 장치만 살아 있다는 뜻일까. 그 차이를 확인할 필요가 있었다. 나는 섣불리 기뻐하지 않기로 했다.
하지만 다음 문장은 조금 달랐다.
[서류 문의와는 별도로, 연락함 측에서 오래전에 설정한 자동 안내문이 있습니다. 수신자 신원 공개 없이 발신자에게 제공 가능합니다.]
나는 망설이다 안내문만 받아 보기로 했다. 자동으로 남겨진 메시지라면 상대의 현재 의사를 보여 주는 건 아닐 것이다. 그래도 과거에 왜 이런 연락함을 만들어 두었는지 알 수 있을지 모른다.
잠시 뒤 종이 한 장이 도착했다. 천계 공용어는 없었다. 익숙한 자음과 모음이 그 위에 있었다.
[여기까지 오셨다면, 문서를 그냥 버리지 않은 분이겠네요.]
나는 숨을 멈췄다.
[한도윤 씨에게 전해 주세요. 이 편지는 답장을 요구하지 않습니다.]
잠깐. 내 이름?
나는 종이를 다시 봤다. 한글로 적힌 세 글자가 분명했다.
[한도윤]
이건 누군가 내 이름을 알고 있었다는 뜻이다. 다만 이 안내문이 정확히 언제 등록됐고 실제로 누가 작성했는지는 아직 확인되지 않았다. 이름이 있다고 해서 나를 직접 아는 사람이라고 단정할 수도 없다.
마지막 줄은 더 짧았다.
[계약서의 빈칸보다 먼저, 당신이 오늘 한 선택을 지켜 주세요.]
나는 종이를 접었다.
이세계에 온 뒤 처음으로 누군가 내게 무언가를 강요하지 않는 문장을 남겼다.
그런데 그 사람이 누구인지 모른다.
심지어 아직 살아 있는지도 모른다.
이건 조금 불공평한 것 같았다.
나는 피코에게서 받은 작은 수첩을 펼쳤다. 새 페이지에 적었다.
'연락함의 자동 안내문 확인. 한도윤 이름 포함. 작성자·등록일 미확인. 상대 응답 여부는 아직 모름.'
그리고 그 밑에 아주 개인적인 문장을 하나 더했다.
'만나게 된다면, 먼저 고맙다고 말하자.'
서류를 통과하지 않은 감정이지만, 이것만큼은 당분간 그대로 두고 싶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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