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마왕성에 취업한 뒤 처음으로 회의 제목을 마음에 들어 했다.
[대리 동의로 발생한 피해를 당사자에게 확인하는 회의]
거창한 말도 없고, 신성한 의무도 없었다. 누구의 동의가 빠졌는지, 그 때문에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묻는 자리였다.
장소는 중립 공관의 낡은 회의실이었다. 왕국 조사관 라델, 천계 기록사 아우렐, 마왕성 재정실의 나와 피코, 공관 보존관 에브란이 참석했다. 세라핀도 사절단 대표 자격으로 앉았다. 제르칸은 올 수 없었다. 마왕성의 직원들에게 저녁 배식을 확인하라는 내 요청을 받았기 때문이다.
아니, 정확히 말하면 본왕의 위엄을 널리 알리기 위해 배식 현장을 방문하겠다고 자원했다. 그게 꼭 내가 원하는 방식은 아니었지만 어쨌든 직원들 밥을 챙기는 일엔 도움이 됐다.
"오늘은 증인들이 발표 순서를 정할 수 있습니다."
내가 말하자 참가자들이 나를 봤다.
"원래 그렇게 해야 하는 것 아닙니까?"
라델이 물었다.
"그랬으면 좋겠죠. 하지만 저희가 조사해 온 서류 중엔 당사자가 말하기도 전에 의견이 접수 완료로 표시된 경우가 너무 많아서요."
회의 시작 전, 한 젊은 상인이 접수창구 앞에서 망설이는 모습을 봤다. 그는 납품 허가증을 손에 들고 있었고, 얼굴에는 밤새 잠을 못 잔 흔적이 있었다. 피코가 먼저 다가갔다.
"도와드릴까요?"
"아니…… 여기서 이야기하면 거래처가 알까 봐요."
"공개 회의에서 말씀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내가 말했다. 우리는 공개 진술과 비공개 신고를 구분하는 창구를 마련해 뒀다. 당사자가 자기 신분을 숨길 권리가 있다고 해서 조사 자체를 포기해야 하는 건 아니었다.
상인은 납품 계약서를 보여 줬다. 거기엔 '회신이 없으면 계약 자동 연장'이라고 적혀 있었다. 실제로는 물건을 공급할 능력이 없다고 여러 번 말했지만, 시스템에는 신청 자체가 접수되지 않았다는 것이다.
"말씀하신 사실을 입증할 자료가 있습니까?"
"우편 발송 영수증이 있습니다."
"그럼 그걸 먼저 보존합시다. 거래처가 보낸 회신도 있나요?"
"없습니다."
"없다는 사실만으로 거래처가 일부러 무시했다고 단정하진 않겠습니다. 그쪽 접수 기록도 확인할게요."
상인은 고개를 끄덕였다. 접수증을 받아 간 뒤 얼굴이 조금 풀렸다. 나는 그에게 약속했다. 조사 진행 현황은 본인이 지정한 비공개 연락 경로로만 알리겠다고.
피코가 내 옆에서 물었다.
"도윤 님. 회의에서 이 사람 얘기를 해도 돼요?"
"개별 신상은 빼고, 비슷한 신고가 들어왔다는 정도만 이야기하자. 그것도 당사자가 허락한 범위에서."
"좋아요."
그날 회의에는 아레인이 새 문서 양식을 가져왔다. 원래 공관은 계약의 회신 여부를 '응답', '미응답' 두 종류로만 분류했다. 이제는 거절, 유보, 추가 정보 요청이라는 선택지를 별도 칸으로 만들고 있었다.
"이렇게 하면 자동 시스템이 더 복잡해집니다."
아레인이 말했다.
"맞습니다. 하지만 사람이 복잡한 건 원래 그런 겁니다."
나는 웃었다. 사람이 언제나 예 아니오 둘 중 하나만 고르는 존재였다면 아마 인생이 훨씬 쉬웠을 것이다. 하지만 내가 한국에 돌아갈 권리를 지니고도 당장 가지 않기로 결정한 것처럼, 사람에겐 판단을 미루거나 조건을 바꿔 달라고 할 권리도 있다.
세라핀은 조금 신중하게 물었다.
"거절과 유보가 많아지면 천계의 계약 처리 속도가 늦어질 겁니다."
"그럴 수 있죠. 그래서 사람을 더 배치하고 안내를 바꿔야 합니다."
"예산이 문제군요."
"맞습니다."
나는 실무적으로만 답했다. 누구라도 할 수 있는 좋은 말이 아니라, 실제로 지킬 수 있는 조치가 필요했다.
회의 한가운데서 라델이 별도 안건을 올렸다. 왕국 측 소환 관련 행정 기록의 재검토였다. 내 지명수배는 공동조사 기간 동안 집행이 정지됐지만, 정식 취소는 아직 심사 중이었다.
"왜 취소가 늦어집니까?"
내가 물었다.
"소환 계약의 법적 효력과 본인 의사 확인 여부를 나눠 심사하고 있습니다."
"제 서명은 아직 확인되지 않았다고 기록됐죠?"
"그렇습니다."
"그럼 최소한 그 사실을 심사위원들에게 명확히 알려 주세요."
라델은 고개를 끄덕였다. 내가 원하는 건 무조건 무죄 선언이 아니었다. 내가 실제로 하지 않은 동의를 했다고 기록해 놓고 처벌하는 일이 없도록 하는 것. 적어도 그 정도는 요구할 수 있었다.
오후 회의에서는 천계 제8보존실의 익명 제보 보호 절차도 점검했다. 유니아의 신원은 공개되지 않았다. 보복 신고 창구는 작동 중이었고, 자료 원본의 접근 목록은 중립 공관이 따로 보관하고 있었다.
"진술서만으로 누군가를 징계할 수 있습니까?"
루시아가 물었다.
"아직은 어렵습니다. 진술 내용을 확인할 기록도 있어야 하니까요."
"그럼 그녀가 용기를 낸 게 헛수고가 될 수도 있나?"
나는 잠시 생각했다.
"아니요. 사실을 확인할 출발점이 됐습니다. 다만 누구든 진술만으로 처벌받는 일이 없게 해야죠."
루시아는 고개를 끄덕였다. 예전의 그녀라면 누가 의심된다는 말을 듣자마자 검을 들었을 것이다. 지금은 기다리며 증거를 확인하는 일을 조금씩 배워 가고 있었다.
회의가 끝날 무렵 세르도가 창구로 돌아왔다. 그는 자신의 환급 건 외에도 비슷한 청구서를 받은 상인 두 명을 데려왔다.
"이분들도 돈을 두 번 냈다고 하오."
나는 손을 내저었다.
"일단 각각의 영수증부터 확인합시다. 세르도 씨가 실제 환급을 받았다고 해서 다른 분들 건도 자동으로 확정할 수는 없어요."
상인 둘은 고개를 끄덕였다. 피코는 새 접수증을 발급했다. 오늘 세르도 건이 끝났다고 해도 이제 할 일은 더 많아졌다. 나는 어쩐지 예상했던 기분이었다.
이래서 좋은 감사가 끝나면 다음 감사가 시작된다.
회의 첫 발언자는 식량 상인 세르도였다. 그는 중복 통행료 납부 원본과 최근 청구된 환급 심사료를 들고 왔다.
"나는 돈을 두 번 냈소. 같은 길을 한 번 지나갔는데 말이오."
"그 사실은 확인됐습니다."
내가 말했다.
"그럼 왜 아직 못 돌려받았소?"
"환급 승인 권한이 중복 지정돼 있어서요. 오늘은 그 경로를 바로잡는 일까지 논의하려고 합니다."
세르도는 화가 난 얼굴이었다. 나는 그가 화를 내는 게 당연하다고 생각했다. 돈을 빼앗긴 사람이 화내는 것도 원래 세상에서는 민원 사항으로만 기록되곤 한다. 하지만 그 속에 당연한 이유가 있다는 사실까지 지워서는 안 된다.
우리는 실제 납부 영수증 두 장과 검문소 수입 장부를 대조했다. 왕국과 중립 공관이 각자 받은 금액이 아닌, 같은 관문을 지나며 두 번 청구된 동일 통행료였다. 아레인이 앞서 확보한 원본 기록도 일치했다.
에브란은 기존 규정에 따라 중복 부분에 대한 반환을 승인할 수 있다고 말했다. 다만 지급을 실행하는 담당자는 공관 재무실이었다. 나는 세르도에게 그 차이를 설명했다.
"오늘 승인서가 나와도 실제 입금은 재무실에서 확인해야 합니다."
"그건 또 얼마나 걸립니까?"
"오늘 중 지급 지시를 넣고, 입금 영수증까지 확인하겠습니다."
아우렐이 나를 빤히 보았다. 천계 기록사가 인간 회계 직원의 말에 이 정도로 집착하는 걸 보니 조금 부담스럽다. 하지만 실지급 여부를 확인하는 건 마땅히 해야 할 일이었다.
두 번째 증인은 성벽 수리 장인 도르벤이었다. 그는 검사가 끝난 작업분에 대해서만 지급을 요구했다.
"나는 받지도 않은 돈을 받았다고 하려는 게 아니오. 다만 고쳐 놓은 부분의 대금은 줬으면 좋겠소."
라델이 현장 투영 기록을 제출했다. 수리된 연결대 일부는 실제로 확인됐다. 나머지는 바깥쪽 균열 검사 결과가 아직 나오지 않았다.
"검사 완료분부터 지급해도 될까요?"
내가 묻자 도르벤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게 좋소. 작업반 사람들 급료부터 줘야 하니까."
기다리던 답이었다. 계약 전체가 의심스럽다고 진짜 일한 사람의 임금을 모두 묶어 둘 수는 없다.
세 번째로 나온 사람은 수로 기술자 노인이었다. 이름을 밝히는 건 원하지 않았다. 그는 오래된 귀환 권리를 유지하기 위해 수년간 보존료를 냈다고 했다.
"난 돌아갈 생각이 없었던 게 아니오. 아직 못 돌아가는 거요. 그런데 서류에는 내가 스스로 포기했다는 표시가 한 번 나왔소."
마리엘이 보낸 기록에는 그 표시가 실제로 존재했다. 다만 노인의 직접 서명은 없었다. 자동 갱신 장치의 표시와 실물 원본을 대조할 필요가 있었다.
"아직 포기 효력은 확정된 게 아닙니다."
내가 말했다.
"그걸 확인하려고 여기까지 왔습니다."
노인은 손바닥을 펴 보였다. 오래된 화상 자국이 있었다.
"난 예전에 문을 고치는 사람이었소. 기계가 멈추면 사람을 불렀지. 그런데 이 문은 사람한테 말을 안 묻더군."
아무도 대답하지 않았다.
루시아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이 자리에 앉은 사람들 가운데 그가 가장 평범한 말을 했을지도 모른다.
오후에는 공관 재무실에서 연락이 왔다. 세르도의 중복 납부 두 닢 가운데 환급 대상 금액이 최종 확정됐고 지급 지시가 발행됐다는 내용이었다. 나는 즉시 세르도에게 말했다.
"지급 지시는 나왔습니다. 실제로 받으셨는지는 잠시 뒤 확인하죠."
"이번에도 기다려야 하오?"
"네. 하지만 오늘은 마지막 단계입니다."
세르도는 미심쩍은 표정을 지었다. 나는 그 마음을 이해했다. 여러 번 기다려 본 사람은 '곧 됩니다'라는 말을 쉽게 믿지 못한다.
우리는 잠시 휴회하고 공관 재무실의 송금 구슬 기록을 확인했다. 금화 두 닢이 실제로 세르도의 상인 계좌에 도착했다. 세르도도 수취 확인서를 받았다. 나는 그제야 회의록의 '환급 완료' 칸에 체크했다.
그의 얼굴이 달라졌다.
"정말 왔소."
"네. 이젠 실제 지급까지 확인됐습니다."
"이런 걸 왜 이렇게 오래 기다렸는지 모르겠군."
"그 이유를 조사하는 게 저희 다음 일이죠."
피코가 기쁜 얼굴로 장부에 숫자를 적었다. 실제 납부 두 닢, 환급 두 닢. 차액은 영. 아주 단순한 숫자였다. 나는 그 단순한 결말이 좋았다.
회의는 끝나지 않았다. 유니아가 익명 진술서를 보내 왔기 때문이다. 천계 제8보존실의 자동결재 구슬을 관리하던 그녀는 0003이라는 번호를 사람이 아닌 '권한 묶음'으로 다룬 기록을 찾았다고 했다.
"권한 묶음?"
라델이 물었다.
"여러 부서의 서로 다른 작업 권한이 하나의 접수표로 합쳐진다는 뜻으로 보입니다."
나는 문장을 찬찬히 읽었다. 옛 기록에는 편지 수령 대행, 계약 판본 저장, 귀환 신청 접수 같은 업무가 따로 있었다. 후대 시스템에서 그 세 가지를 '상태 승계'라는 이름으로 연결했다. 그 과정에 사람의 동의 확인 절차가 누락됐을 가능성이 있었다.
"그럼 0003을 쓰는 사람이 한 명 있다는 뜻은 아니겠군요."
아우렐이 말했다.
"그렇습니다. 다만 누군가 그 권한 묶음을 이용했을 가능성은 아직 조사 대상입니다."
내가 답했다.
유니아의 진술에는 당시 내부 검토 의견도 있었다. 화면에서 거절 기능이 사라질 때 직원 한 명이 반대했다는 기록이었다.
[사용자가 응답하지 않았다는 사실은 동의한 사실과 다릅니다.]
이 문장을 보자 제7서고의 한국어 원문이 떠올랐다. 당사자가 직접 선택하기 전에는 누구도 귀환을 대신 결정하지 못하게 하라는 말. 뜻이 닮아 있었다.
"같은 사람이 썼을까요?"
피코가 속삭였다.
"그건 모르지."
"그래도 둘 다 좋은 말이에요."
"맞아. 좋은 말이라고 누가 썼는지 같은 건 아니지만."
나는 익명 진술의 진위 확인을 별도 절차로 남겼다. 당장 증인을 공개석상에 부를 수는 없었다. 보복 위험이 있고, 그녀가 본 원본 자료의 범위를 먼저 확인해야 했으니까.
그날 밤 회의 결과를 정리하는데 아레인에게서 우편관 자료의 추가 목록이 도착했다.
[미수령 우편함 보존 명령]
[원문 작성 언어: 한국어]
[보존 승인 요청 접수: 완료]
[수취인 식별: 미확인]
서류 끝에는 이름 대신 아주 짧은 표시가 남아 있었다.
[작성자 연락 요청: 가능]
나는 잠시 숨을 멈췄다.
누가 썼는지 모르는데 연락 요청은 가능하다니. 우습다.
그런데 웃음이 나오지는 않았다. 여기서 처음으로 내가 직접 질문을 보낼 수 있는 경로가 생긴 것 같았기 때문이다.
"연락 요청을 보내면 상대방 이름을 알 수 있습니까?"
내 질문에 아레인은 답했다.
[아닙니다. 상대방이 받기를 동의해야 합니다.]
나는 그 회신을 읽고 한참 동안 책상에 앉아 있었다.
이상하게 마음이 편해졌다.
누군가의 비밀을 억지로 열어젖히지 않아도 된다는 사실 때문이었다.
그 사람도 나처럼 선택할 수 있다면, 적어도 시작은 괜찮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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