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구 서쪽 우편관에는 우편물이 없었다.
대신 의자가 많았다.
한때 이곳에서 수십 명이 편지를 분류했던 모양이다. 좁은 방마다 낡은 의자가 줄지어 놓였고, 벽에는 색이 바랜 번호판이 남아 있었다. 문 위에는 '마지막 접수 뒤 삼십 일 안에 반송'이라는 문구가 붙어 있었다. 삼십 일이 아니라 삼십 년 넘게 방치된 것처럼 보였지만.
"왜 의자가 이렇게 많죠?"
피코가 물었다.
"직원들이 여기서 일했겠지."
"지금은 아무도 없는데요."
"그래서 더 이상하지."
브라딘이 앞장서서 낡은 보관함을 열었다. 그는 이 건물이 문 닫을 때 일부 장비를 수리했다고 했다. 우편 수신함 중 대부분은 비어 있었지만, 몇 개는 아직 봉인돼 있었다.
"여기 있는 건 전부 열어 볼 수 있습니까?"
내가 묻자 아레인이 고개를 저었다.
"수취인이 확인되지 않은 편지는 원칙적으로 개봉할 수 없습니다. 조사 목적이라도 통신 비밀 보호 규정이 적용됩니다."
"좋습니다. 그럼 봉투 외부의 배송 내역과 함 번호만 확인합시다."
브라딘은 한쪽 벽의 큰 판을 가리켰다. 작은 구멍 수백 개 사이로 금속 줄이 지나가 있었다. 편지가 들어오면 받는 사람의 보관함 번호가 표시되는 장치라고 했다.
"예전에는 어떤 방식으로 인증했습니까?"
"사람이 직접 인장을 확인했소."
"그다음에는요?"
"보관함 번호만 맞으면 전달하는 자동 방식이 들어왔지."
나는 한숨을 쉬었다. 천계 제7서고의 대리번호와 비슷한 전개였다. 사람을 확인하던 절차가 어느 순간 번호를 확인하는 절차로 바뀐 것이다.
"왜 바꾸셨습니까?"
"전쟁 중에는 통행이 막히니까. 직접 오지 못하는 사람들이 많았거든."
그 말에 나는 쉽게 비난할 수 없었다. 먼 나라의 가족과 연락하는 일, 포로가 자기 생사를 알리는 일, 전선의 병사가 귀환 의사를 남기는 일. 모두 직접 찾아와서 서명하기 어려웠을 것이다.
자동화는 어쩌면 그들을 돕기 위해 시작됐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은 그 편리함이 누군가의 의사를 지워 버리고 있었다.
브라딘은 옛 운영 장부를 펼쳤다. 나는 미수령 봉투의 겉면에 남아 있던 연락함 번호와 비교했다. 숫자 자체는 일치했다. 다만 수취 방식이 '대리 접수'로 바뀐 시점이 기록돼 있었다.
"여기서 대리 접수가 시작된 건 언제입니까?"
"필사실 폐쇄 직전이오."
"그럼 송-4189 기록이 접수됐던 때보다 나중이네요."
"그렇소."
이 차이는 중요했다. 처음부터 자동 접수로 등록한 문서는 아닐 수 있었다. 나중에 옮겨지는 과정에서 번호가 새로운 권한을 가진 것처럼 처리됐을 가능성이 있었다.
피코가 옆에서 종이를 들었다.
"도윤 님, 옛날에는 본인이 직접 받았다고 서명한 칸이 있는데요?"
"그렇네."
"지금은 그 칸이 없어요."
"옮길 때 빠졌을 수도 있겠어."
나는 아레인에게 원본의 수령 확인란과 현행 전산의 대리 완료 표시를 서로 다른 필드로 보존해 달라고 했다. 어쩌면 이번 사건의 가장 중요한 불일치가 여기에 있을지 몰랐다.
우리가 창고 목록을 한참 대조하고 있을 때 낡은 수납함 한 곳에서 작은 소리가 났다. 딸깍. 피코가 깜짝 놀라 나를 붙잡았다.
"도윤 님!"
루시아가 즉시 앞에 섰다. 나는 먼저 수납함 옆의 장치를 봤다. 금속판에 희미한 빛이 돌고 있었다.
"누가 작동시킨 거죠?"
브라딘이 당황했다.
"오래전에 마력이 끊겼을 텐데."
그때 문밖에서 항구의 정오 종이 울렸다. 빛이 다시 한 번 반짝였다.
"정기 점검 신호일 수도 있습니다."
아레인이 말했다. 우리는 장치를 만지지 않고 감지 판에 남은 시각을 기록했다. 마력이 들어온 건 맞았지만 누가 보냈는지는 확인되지 않았다.
잠시 뒤 우편관의 유지보수 기사가 달려왔다. 그는 옛 장치가 완전히 정지된 건 아니라고 했다. 다른 기관의 표준 시계 신호를 받으면 일부 번호판이 잠깐 살아날 수 있다는 설명이었다.
"그럼 누군가 저희를 보고 작동시킨 건 아닐 수도 있겠군요."
"그렇습니다."
나는 무의식적으로 웃었다. 이세계에서 오래 일하면 모든 이상 현상이 곧바로 음모처럼 보일 때가 있다. 하지만 실제로는 정비하지 않은 설비와 낡은 코드가 훨씬 많은 문제를 만든다.
수납함 번호의 마지막 네 자리는 `0418`이었다. 송-4189와 비슷했지만 완전히 같진 않았다. 브라딘은 보관함 번호와 접수번호 체계가 다르다고 설명했다. 우리는 혼동하지 않도록 문서에 두 번호를 별도로 적었다.
그 순간 피코가 상자 바닥에서 얇은 목판 하나를 발견했다.
"이거 목록에 있어요?"
목판에는 기묘한 글씨가 새겨져 있었다. 마법 언어가 아니라 아주 익숙한 자모였다.
[받는 사람이 없으면 버리지 말 것.]
나는 숨을 멈췄다.
한국어다.
이 문장도 번역 마법을 끄고 읽을 수 있었다. 서울에서 누군가 택배 상자에 써 놓을 법한 말투였다. 그런데 왜 중립 공관의 우편함에서 이런 말을 보는 걸까.
"이건 발견 경위부터 적어야 합니다."
내가 말했다.
피코가 자기 수첩에 위치와 시간을 적었다. 아레인은 목판을 원래 놓였던 자리에서 촬영에 해당하는 투영 기록으로 남긴 뒤 손대지 않고 봉인 담당자를 불렀다. 나는 목판을 주머니에 넣고 싶었다. 내 세계의 글자가 눈앞에 있다는 사실이 이상하게 반가웠다.
하지만 가져가면 안 된다. 발견한 장소가 중요한 증거니까.
"이 글을 읽을 수 있어요?"
브라딘이 물었다.
"네. 우리 언어입니다."
"무슨 뜻이오?"
"받는 사람이 없더라도 버리지 말라는 뜻이요."
브라딘이 입을 다물었다. 그의 표정은 기쁨보다 후회에 가까웠다.
"그때도 그 뜻을 알았다면……"
"그때 무슨 일이 있었습니까?"
"이상한 문자로 된 쪽지가 많았소. 내용이 뭔지 몰랐으니 버려도 되는지 논쟁을 했지. 결국 원문 보호 규정이 만들어졌고, 일부만 남겼소."
나는 그를 탓할 수 없었다. 읽을 수 없는 글자를 만났을 때 그 의미까지 짐작하긴 어렵다. 다만 누가 어떤 결정을 했는지 기록을 남겨 두었다면 좋았을 것이다.
"버린 편지가 얼마나 되는지 아십니까?"
"정확히는 모릅니다. 폐기 목록은 있을 거요."
"그 목록이 필요합니다."
브라딘은 고개를 숙였다.
"좋은 소식이 아니겠군."
"모르는 것보단 낫습니다."
우리는 원문 보호 규정의 초기 초안을 찾아냈다. 놀랍게도 '언어를 모른다는 이유로 개인정보를 소각하지 않는다'는 문장이 있었다. 그 규정을 제안한 직원의 이름은 공란이었다. 공란 옆에는 '보호 요청에 따라 비공개'라는 표시가 있었다.
나는 한참 그 칸을 봤다.
과거의 누군가도 내 귀환 선택권을 지키려고 했을까. 아니면 훨씬 많은 사람을 위해 만들어진 규정이 우연히 나를 지킨 걸까.
어느 쪽이든 이걸 함부로 '운명의 서신'이라고 부르고 싶진 않았다. 그랬다가 내가 선택해야 할 일을 또 누군가 정해 준 이야기로 만들고 싶지 않으니까.
낡은 우편관의 구석에는 폐기 대상 목록을 보관하는 작은 방도 있었다. 문을 열자 먼지 냄새가 났다. 루시아는 이곳에 적이 숨어 있을 가능성을 의심했지만, 내 눈에는 정리 안 된 창고로만 보였다. 물론 창고는 재정실 직원에게 그 자체로 위험한 곳이다.
"목록에 없는 상자가 많네요."
내가 말하자 브라딘이 머쓱하게 웃었다.
"폐쇄될 때 정리할 사람이 없었소."
나는 그를 탓하지 않았다. 문 닫는 부서에 일을 마무리할 인력이 제대로 배정되는 경우는 드물다. 대신 어떤 상자가 공식 목록에 있고, 어떤 상자는 출처부터 확인해야 하는지 구분했다.
피코는 상자에 임시 번호표를 붙였다. 그 번호가 영구적인 소유권이나 내용물 확인을 뜻하는 건 아니라는 설명도 적었다. 나중에 누군가 이 번호만 보고 우편물을 함부로 열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였다.
아레인은 폐기 기록의 표본을 보여 줬다. 오래된 분류 사유는 대개 세 종류였다. 수취인 불명, 주소 오류, 훼손으로 원문 판독 불가. 문제는 훼손되지 않은 문서도 '판독 불가' 항목에 들어 있는 경우가 있다는 점이었다.
"직원이 읽을 수 없다는 뜻이었을 수도 있습니다."
아레인이 말했다.
"문서 자체가 훼손됐다는 뜻과는 다르죠."
나는 별도로 구분해 달라고 요청했다. 한국어처럼 다른 세계의 언어를 쓰는 사람에게는 큰 차이였다. 누군가 내 편지를 읽지 못한다고 해서 내 편지가 망가졌다고 처리하면 안 된다.
그때 피코가 작은 상자 하나를 들어 올리려다가 멈췄다.
"도윤 님. 이거 무거워요."
"들지 마. 내용물부터 확인하자."
상자에는 오래된 금속 압착판이 들어 있었다. 사람의 필체를 종이에 그대로 옮기는 장치였다. 브라딘은 그 판이 원문을 보존할 때 쓰였다고 설명했다.
"사람 손글씨를 마법 장치가 베끼는 겁니까?"
"그렇소. 다만 작동할 때 글씨가 조금 달라질 수 있지."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면 제7서고의 한국어 문서와 이 우편관의 목판을 글씨 모양만 보고 같은 작성자의 작품이라고 단정할 수는 없다. 둘 다 필사 장치를 거쳤을 수 있기 때문이다.
"기계가 베꼈는지, 사람이 직접 새겼는지는 확인 가능합니까?"
"표면에 눌린 흔적으로 일부는 알 수 있소. 정확한 판별은 보존 기술자가 해야 할 게요."
우리는 목판의 재질 검사와 필사 장치 사용 기록을 함께 요청했다. 작은 흔적을 너무 크게 해석하지 않기 위해서였다.
점심이 되어 외부 식당에 갔다. 항구의 빵집 주인이 우리 얼굴을 기억하고 빵을 하나 더 건넸다.
"이건 서비스요."
"감사합니다. 근데 왜요?"
"지난번에 우편관 창고 문 고장 난 걸 알려 줬다고 들었소. 내 조카가 거기서 일하거든."
나는 피코를 봤다. 녀석이 그날 고장 난 손잡이를 발견해 수리 요청을 넣었던 게 생각났다.
"피코가 했습니다."
주인은 피코에게 따뜻한 빵을 건넸다. 녀석이 두 손으로 받아 들었다.
"고마워요!"
루시아가 부러운 눈으로 빵을 바라봤다. 나는 기사에게도 하나 사 줬다. 물론 개인 돈으로. 출장비에서 빼 달라고 할 순 없었다.
우편관으로 돌아오는 길, 피코가 말했다.
"도윤 님. 제가 일을 잘하면 가끔 빵도 받을 수 있네요."
"그렇다고 빵을 받으려고 일하면 안 되지."
"알아요. 그래도 기분 좋아요."
나는 웃었다. 오래전 편지를 남긴 사람이 누구든, 그 사람이 지키려고 했던 건 어쩌면 이런 소소한 선택과 일상이었을 것이다. 누가 시켜서가 아니라 스스로 한 일에 고맙다는 말을 듣는 것.
창고로 돌아오자 기술자의 예비 의견이 도착했다. 목판의 한국어 문장은 수동 필사 바늘을 사용했을 가능성이 높았다. 하지만 어느 사람이 언제 새겼는지는 여전히 알 수 없었다.
나는 기록을 정리하며 이렇게 적었다.
'목판의 원문 언어 확인. 작성자와 제7서고 문서의 동일성은 미확정.'
확실하지 않은 걸 적지 않는 일은 가끔 답답하다. 하지만 그 답답함이 누군가를 억울하게 만들지 않는 첫 단계라면 견딜 만했다.
오후 늦게 우편관 밖으로 나오자 항구 바람이 세차게 불었다. 루시아가 내 망토를 잡아 줬다. 기사단장에게 망토를 잡아 달라고 한 적은 없지만, 덕분에 날아가지 않았다.
"도윤. 넌 왜 그렇게 어두운 표정인가?"
"고향 글씨를 봐서요."
"그럼 좋은 일 아닌가?"
"좋은데, 좀 무섭기도 해요."
루시아는 고개를 끄덕였다. 이번에는 더 묻지 않았다. 내 고향이 얼마나 멀리 있는지 설명하기가 쉽지 않다는 걸 그녀도 아는 모양이었다.
그날 밤 임시 숙소에서 나는 어머니에게 쓰던 답장 초안을 다시 열어 보았다. 천계에서 보관된 휴대전화는 원본으로 돌아갔고, 전송은 여전히 되지 않았다. 나는 종이에 한 줄을 적었다.
'엄마, 나 잘 지내고 있어.'
그리고 잠시 뒤 그 아래 덧붙였다.
'여기서 한국말을 쓰는 사람을 찾는 중이야.'
아직 누구도 찾지 못했다. 단지 문장 두 개를 발견했을 뿐이다. 그래도 마음이 조금 흔들렸다.
잠들기 직전, 공관에서 추가 연락이 왔다.
목판의 재질은 이 지역에서 흔한 나무였고, 새긴 도구는 오래된 수동 필사 바늘과 같은 형태로 추정된다고 했다. 정확한 작성 시점과 작성자 신원은 알 수 없었다.
그런데 목판의 뒤쪽에는 작은 구멍이 둘 있었다. 우편함을 닫는 잠금장치와 모양이 맞았다.
즉, 그 문장은 누군가 사람에게 보내려고 쓴 편지라기보다, **받는 사람이 나타날 때까지 편지를 보존하라는 우편관의 업무 지시**였을 가능성이 컸다.
나는 문서를 덮었다.
한국어로 업무 지시를 남긴 사람.
그 사람이 정말로 있었다면, 대체 어떤 자격으로 여기서 일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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