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음엔 중복 청구 하나였다.
금화 천 닢.
그런데 이제는 금화 팔만 닢짜리 검 만 자루가 사라졌고, 중요한 운송 허가증까지 없어졌다.
이쯤 되면 면접 과제라기보다 회사 전체에 대한 특별 세무조사다.
나는 책상 위에 자료를 펼쳤다.
식량 납품서 두 장.
실물 인수대장 한 권.
검 구매 계약서.
운송 기록 사본.
그리고 오늘 새로 확보한 본진 창고의 실제 재고 기록.
피코가 옆에서 서류가 날아가지 않도록 눌렀다.
“도윤님.”
“네?”
“이거 정말 사흘 안에 끝낼 수 있어요?”
“글쎄요.”
“……그렇게 솔직하게 대답하셔도 돼요?”
“안 되는 걸 된다고 했다가 나중에 들키는 것보다 낫죠.”
피코가 고개를 숙였다.
“저는 그런 말이 무서워요.”
그 마음은 이해한다.
나도 한국에서 한참 막내였을 때는 그랬다.
하지만 숫자는 기분에 맞춰 변하지 않는다.
만 자루를 샀다고 적혀 있는데 받은 곳이 없다면, 누군가는 답해야 한다.
“우선 누가 돈을 받았는지부터 찾아봅시다.”
나는 지급 장부를 펼쳤다.
이쯤 되니 조사할 것이 너무 많았다. 나는 항목마다 작은 표시를 붙였다. 확인 완료는 동그라미, 추가 확인은 세모, 증빙이 없는 건 물음표. 보기 좋은 정리법은 아니었지만 지금 가진 자료 중 무엇을 믿을 수 있는지 구분하는 데 도움이 됐다.
흑철 검 만 자루.
구매처는 흑산 상단.
지급액 금화 팔만 닢.
금화 팔만 닢이나 되는 돈을 현금으로 주고받았을 리 없다.
이 세계에도 금융 기관 비슷한 게 있을 테니까.
실제로 거래 방식에는 이렇게 적혀 있었다.
[마계 상업금고 지급 확인.]
“피코 씨, 이 상업금고는 어디 있습니까?”
“성 동쪽 상업 구역에요.”
“그럼 거기로 갑시다.”
피코가 눈을 크게 떴다.
“지금요?”
“아직 낮이잖아요.”
“점심시간인데요.”
나는 잠깐 멈췄다.
아.
맞다.
여기는 야간 수당뿐 아니라 점심시간도 보장되는 곳이었지.
이 회사, 정말 적응하기 어렵네.
“그럼 밥 먹고 갑시다.”
피코가 환하게 웃었다.
***
마왕성의 식당은 생각보다 북적였다.
해골 병사들은 음식 대신 검은 기운이 든 병을 마셨고, 오우거는 커다란 고기 덩어리를 뜯고 있었다.
임프들은 작은 접시에 음식을 담아 서로 나눠 먹었다.
나는 콩 스튜와 빵을 받았다.
그런데 피코의 접시는 내 것보다 훨씬 적었다.
“피코 씨, 왜 그렇게 조금 받아요?”
“이번 달에는 식당 재료가 부족하대요.”
“임프 식단만요?”
“네. 높은 분들은 괜찮고요.”
나는 멀리 앉은 장교들의 식탁을 바라봤다.
고기 요리가 가득했다.
반면 일반 병사 쪽에는 수프 한 그릇이 전부였다.
전형적인 조직 문제다.
예산 부족을 제일 먼저 겪는 사람은 예산을 결정한 사람이 아니다.
실제 일을 하는 사람이다.
“제 빵 하나 가져가세요.”
나는 피코에게 건넸다.
“정말요?”
“네. 지금은 식욕이 별로 없어서요.”
거짓말이다.
배는 고팠다.
하지만 어린애처럼 보이는 임프가 눈치를 보며 음식을 조금씩 먹는 모습을 그냥 보고 있기는 어려웠다.
피코가 빵을 받아 들었다.
“도윤님은 인간인데도 이상해요.”
“그 말은 칭찬입니까?”
“네!”
좋아.
오늘은 칭찬으로 치자.
***
마계 상업금고는 예상과 달리 매우 깨끗했다.
입구에는 검은 대리석이 깔려 있었고, 창구 직원들은 단정한 제복을 입고 있었다.
나는 괜히 고향 생각이 났다.
은행.
이곳만큼은 차원이 달라도 분위기가 비슷한 모양이다.
“무엇을 도와드릴까요?”
창구 직원이 정중하게 물었다.
“마왕군 재정실 조사입니다.”
나는 조사 명령서를 보여 줬다.
직원은 마왕의 인장을 확인하더니 곧바로 상사를 불렀다.
정식 권한이 있을 때 자료를 받는 일이 이렇게 편할 줄이야.
왕궁에서는 계약서 한 장 받기도 힘들었는데.
나는 흑산 상단의 지급 내역을 요청했다.
잠시 뒤 수정구에 거래 기록이 떠올랐다.
[지급일: 지난달 8일.]
[지급액: 금화 80,000닢.]
[수취 계좌: 흑산 상단 정산금고 04호.]
[지급 승인자: 그라즈.]
여기까지는 장부와 일치했다.
“그다음 출금 기록은요?”
직원이 망설였다.
“수취 상단의 계좌는 별도 보호 규정이 적용됩니다.”
좋다.
개인정보 보호도 있네.
나는 억지로 보여 달라고 하지 않았다.
“그럼 금고 측에서 보유한 지급 확인증의 진위만 확인해 주십시오.”
직원이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그라즈가 제출한 지급 확인서를 내밀었다.
직원은 한참 종이를 살펴봤다.
그리고 고개를 갸웃거렸다.
“이상하군요.”
“어떤 점이요?”
“수취 계좌 번호는 맞는데, 출금 확인 인장이 다릅니다.”
“다르다고요?”
“네. 이 인장은 금고에서 십 년 전에 폐기한 구형 인장입니다.”
오.
아주 중요한 정보다.
나는 미소가 나오는 걸 꾹 참았다.
이런 순간에 흥분하면 안 된다.
“폐기 사실을 증명하는 자료가 있습니까?”
“있습니다.”
“공식 확인서를 발급해 주시겠습니까?”
직원은 곧바로 문서를 작성했다.
나는 종이를 받았다.
드디어 첫 번째 독립 증빙이 나왔다.
그라즈가 제출한 서류와 마계 상업금고의 실제 기록이 일치하지 않는다.
그라즈의 기억이 흐릿하다는 변명으로는 설명할 수 없는 부분이었다.
***
상업 구역에서 돌아오는 길에 루시아가 합류했다.
그녀는 검집을 어깨에 걸친 채 다가왔다.
“인간. 뭔가 찾았나?”
“서류 하나요.”
“그걸로 놈을 잡을 수 있나?”
“아직은 어렵습니다.”
루시아가 혀를 찼다.
“답답한 놈.”
“증거도 없이 잡으면 풀려날 수 있잖습니까.”
“내가 붙잡으면 못 풀려난다.”
“그건 그것대로 무섭네요.”
그녀는 웃었다.
“너는 언제나 이상한 소리만 하는군.”
“전 오히려 기사단장님이 이상합니다.”
“뭐?”
“대체 왜 그렇게 싸우고 싶어 하십니까?”
루시아는 잠시 생각했다.
“강한 상대가 좋으니까.”
“저는 약한데요.”
“성검을 가지고 있지 않나.”
“엑셀 파일을 가지고 있다고 해서 그 사람이 회계사인 건 아니잖습니까.”
“그 엑셀이라는 게 도대체 뭐냐?”
아.
또 설명해야 하네.
나는 한숨을 쉬었다.
그런데 루시아는 생각보다 귀 기울여 들었다.
숫자를 나열하고 자동으로 계산한다는 설명을 듣더니 눈이 빛났다.
“그걸 전투에 쓰면 어떨까?”
“전투요?”
“병력 이동과 보급품을 한꺼번에 계산하면 유리하겠지?”
나는 잠깐 말문이 막혔다.
오.
이 사람, 전투만 좋아하는 줄 알았는데 머리도 잘 돌아간다.
“가능합니다. 오히려 그런 용도로 아주 좋습니다.”
루시아가 환하게 웃었다.
“그럼 나중에 만들어 다오.”
“그 전에 채용부터 확정해야죠.”
“하하하!”
웃지만 마시고 추천 좀 해 주세요.
***
재정실에 돌아오니 몰트가 우울한 표정으로 기다리고 있었다.
해골도 우울한 표정을 지을 수 있느냐고?
나도 몰랐다.
그런데 눈구멍 속 불꽃이 축 처져 있으니 누가 봐도 우울해 보였다.
“무슨 일입니까?”
내가 물었다.
몰트는 봉인된 통신문을 내밀었다.
[제17군단장 베르가몬. 특별 감사 즉시 중단 요청.]
아.
상위 부서에서 연락이 왔다.
드디어.
“이유는요?”
“전쟁 준비에 방해가 된다는군.”
“감사가요?”
“그렇다네.”
“장부를 확인하는 게 전쟁 준비와 무슨 관계가 있습니까?”
몰트가 어깨를 으쓱했다.
“나도 모르겠네.”
나는 통신문을 읽었다.
그런데 마지막 줄이 걸렸다.
[본 사안은 군단장 권한으로 종결 처리되었음.]
종결?
누가 종결했는데?
마왕이 직접 승인한 조사를 군단장이 끝낸다고?
“실장님.”
“뭔가?”
“조사 중단 권한은 누구에게 있습니까?”
“마왕 폐하시지.”
“그럼 군단장한테는 없네요.”
몰트의 푸른 불꽃이 커졌다.
“……그렇군.”
천이백 년 일한 분이 이제야 깨달으시면 어떡합니까.
나는 다시 양피지를 펼쳤다.
“조사는 계속하겠습니다.”
“군단장 베르가몬은 성격이 거칠다네.”
“그래도 권한은 권한입니다.”
그때 문이 열렸다.
거대한 몸집의 마족이 들어왔다.
뿔 두 개가 뒤로 휘어 있고, 가슴에는 여러 전공 훈장이 달려 있었다.
그가 들어서자 몰트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베르가몬 군단장!”
아.
당사자 방문이다.
군단장은 나를 위아래로 훑어봤다.
“네가 그 인간 회계사냐?”
“네. 한도윤입니다.”
“내 군단을 쑤시고 다닌다고 들었다.”
“물자 기록을 확인하고 있습니다.”
“전쟁터에서 숫자 놀음이나 하는 놈이 뭘 안다고!”
그가 탁자를 내리쳤다.
서류들이 펄럭였다.
나는 떨어진 종이를 주워 가지런히 정리했다.
“숫자 놀음이라고 하셨는데요.”
“뭐?”
“군단장님 병사들은 숫자로 식사를 받습니다. 배급량이 0이면 오늘은 굶는 거고, 3이면 세 번 먹는 겁니다.”
베르가몬의 얼굴이 굳었다.
“감히 내 병사를 들먹여?”
“그래서 확인하는 중입니다.”
나는 자료 하나를 밀었다.
“전쟁터로 갔어야 할 건조육이 실제로는 백이십 상자만 도착했고, 검 만 자루의 지급 기록도 맞지 않습니다.”
“전쟁 중에는 손실이 있는 법이다!”
“맞습니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다면 손실 보고서를 확인하면 됩니다.”
군단장이 눈을 가늘게 떴다.
“네가 내 보고서를 믿지 못한다는 거냐?”
“믿으려면 확인해야죠.”
그가 한 걸음 다가왔다.
무서웠다.
아까 그라즈와는 비교할 수 없는 위압감이었다.
하지만 나는 오늘 확보한 상업금고 확인서를 떠올렸다.
증거가 있다.
최소한 이제는 단순한 추측만 하는 게 아니다.
“군단장님.”
나는 손을 뻗어 서류를 내려놓았다.
“흑철 검 지급 확인서에 찍힌 인장이 십 년 전에 폐기된 것이라고 합니다.”
베르가몬의 눈빛이 달라졌다.
“……누가 그런 말을 했지?”
“마계 상업금고가 공식으로 확인했습니다.”
군단장은 한참 나를 노려봤다.
그러더니 낮게 웃었다.
“인간. 넌 모르는 게 있군.”
“무슨 말씀이십니까?”
“군단이 전쟁을 하려면 보고서보다 중요한 게 있다.”
“뭔데요?”
그의 얼굴이 내 코앞까지 다가왔다.
“명령이다. 내가 없으면 제17군단은 움직이지 않아.”
아.
그렇구나.
숫자가 틀려도 군단장이 명령하면 맞는 걸로 해야 한다는 뜻이네.
나는 그 말을 양피지에 그대로 적었다.
베르가몬이 눈을 부릅떴다.
“지금 뭘 적는 거냐!”
“말씀하신 내용을요.”
“왜!”
“정확히 기억하려고요.”
그는 내 양피지를 노려봤다.
그러고는 갑자기 손을 뻗어 종이를 낚아챘다.
찌익!
양피지가 반으로 찢어졌다.
아.
내가 가장 싫어하는 행동이다.
서류 훼손.
나는 입을 다물었다.
베르가몬이 비웃었다.
“이래도 기록이 남나?”
잠시 침묵.
나는 찢어진 양피지 조각을 내려다봤다.
서류가 찢어진 건 아까웠지만 원본만 가지고 있는 것도 아니었다. 자료를 받을 때마다 피코에게 사본을 남기라고 시킨 게 이럴 때 도움이 되겠지.
그런데 이상한 일이 벌어졌다.
조각 위 글자들이 희미하게 빛나기 시작했다.
그리고 빛이 허공에서 서로 이어졌다.
[기록의 연결이 유지됩니다.]
[불일치 항목의 수정 이력을 추적합니다.]
뭐야?
내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는데 글자가 떠올랐다.
나는 한순간 말을 잃었다.
성검이 아니었다.
양피지 자체에서 빛이 나고 있었다.
베르가몬도 그것을 봤는지 손을 멈췄다.
“무슨 마법이지?”
나도 모르겠다.
하지만 지금 모른다고 대답하면 왠지 지는 기분이다.
나는 조용히 양피지 조각을 주웠다.
“기록은 찢는다고 없어지지 않습니다.”
군단장의 얼굴이 굳었다.
그때 문밖에서 루시아의 목소리가 들렸다.
“맞는 말이군.”
그녀가 검집을 두드리며 들어왔다.
“베르가몬. 마왕 폐하께서 직접 부르신다.”
군단장이 고개를 돌렸다.
“왜?”
루시아가 웃었다.
“누가 군단 예산을 가지고 장난쳤는지 궁금하시다더군.”
아이고.
이제 회의실에서 끝장을 보겠네.
그런데 내 손의 양피지가 다시 빛났다.
아주 작은 붉은 줄 하나가 검 구매 확인서와 찢어진 메모를 이어 주었다.
[절대 감사: 승인 시점 불일치 감지.]
나는 숨을 멈췄다.
승인 시점?
그렇다면 검의 실제 행방과는 별개로, 누군가 구매 기록을 나중에 만들어 넣었다는 뜻일까?
막연한 의심이 비로소 하나의 방향을 가리키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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