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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품으로마왕성에 취업했더니 내가 제일 무섭단다 · 86화
PAYLUA ORIGINAL · 제86화

86화. 대리번호 0003은 누구입니까

마왕성에 취업했더니 내가 제일 무섭단다 · 6,028자

오프라인 책장
마왕성 재정실에 새로 붙인 안내문은 다섯 줄이었다. [외부에서 온 직원 상태값은 참고만 할 것.] [본인 확인 없는 퇴직 처리는 금지.] [고용 종료 전 급여 미지급분 검토.] [사고 및 파견 중인 직원은 별도 확인.] [급여 담당자에게 '구슬이 그랬다'고 말하지 말 것.] 마지막 줄은 내가 넣었다. 직원들이 가장 자주 하는 말이기도 했다. 구슬이 그랬다. 신탁이 그랬다. 왕국이 그랬다. 이세계에선 책임을 떠넘기기 좋은 대상이 참 많다. 몰트는 안내문을 읽고 고개를 끄덕였다. "다 좋은데 마지막 줄은 조금 공격적이지 않나?" "지난달 급여 누락 사유서 일곱 건 가운데 네 건이 '구슬 오류'였잖아요." "그건 사실이네." "오류가 생겼으면 누가 확인하고 어떻게 고쳤는지도 적어야죠." 몰트가 파란 안광을 반짝였다. 나는 그 표정이 좋았다. 저 양반이 웃으면 부하들의 야근이 줄어든다. 오늘 할 일은 대리번호 0003의 사용 기록을 비교하는 것이었다. 천계의 자동결재 구슬, 중립 공관의 접수 대행, 공동 보증 회계소의 상태 변환 경유. 셋 다 비슷한 이름을 썼지만 동일한 사람이라는 근거는 없었다. 심지어 번호를 부여한 기관이 달랐다. "결론부터 내려 주세요." 제르칸이 성급하게 말했다. 그는 회의실에서 커다란 의자에 앉아 있었다. 어제 복직 소동을 겪은 뒤 내 얼굴을 확인하러 왔다고 했다. 마왕이 직원의 출근 여부를 직접 확인하러 다니는 조직이라니 조금 기묘하다. "현재 결론은 서로 다른 세 기록이 있다는 겁니다." "범인은?" "아직 모릅니다." "셋 다 같은 번호를 썼잖느냐!" "전화번호 뒷자리가 같다고 같은 사람은 아니잖아요." "전화가 무엇이냐?" 아. 한국의 비유가 여기서는 늘 통하지 않는다. "사람끼리 멀리서 이야기하는 도구요." "전송 구슬 같은 것인가?" "비슷합니다." "그럼 전송 구슬 번호 뒷자리가 같은 사람은 모두 같은 자인가?" "아닙니다. 그러니까요." 제르칸은 납득한 표정을 지었다. 나는 잠깐 승리감을 느꼈다. 마왕에게 책임 소재와 식별번호의 차이를 가르쳤다. 피코가 세 기관의 문서 세 개를 책상에 놓았다. 아우렐은 천계에서 인증된 사본을 보내 주었고, 아레인은 중립 공관 기록을 봉인했다. 공동 보증 회계소 자료는 아직 공개할 수 있는 범위가 좁았다. 우리가 확보한 건 상태값의 경유 시간과 도착 확인 기록뿐이었다. "도윤 님. 번호가 같은데 글씨체가 달라요." 피코가 말했다. "좋은 관찰이야." 하나는 `0003`, 하나는 `제0003호`, 나머지는 `대리-3`이라는 표기였다. 이것만으로 다른 사람이란 뜻도 아니고, 같은 사람이란 뜻도 아니다. 하지만 시스템 연결 과정에서 형식 변환이 있었음을 시사했다. 몰트가 기록을 대조했다. "천계에서는 열람 권한을 뜻하고, 공관에서는 접수 대행을 뜻하는군. 공동 보증 회계소에서는 상태 변경 경유 번호로 사용했네." "세 개가 전부 인사발령권을 뜻하는 건 아니죠?" "그렇지." "그럼 그 번호를 가진 계정이 마왕성 직원들을 퇴직시킬 권한은 더더욱 없어요." 그 말에 마왕이 주먹을 꽉 쥐었다. "무례한 놈들!" "일단 누군지부터 알아내야 무례하다고 말하죠." 루시아는 아쉬운 얼굴로 검을 꺼냈다가 도로 넣었다. 여긴 요즘 이상하게 전투원들이 심심해하는 회사가 됐다. 식당 소동이 있기 전, 우리는 구형 접수번호의 역할을 실제 사례로 검증해 보기로 했다. 공동 보증 회계소가 공개를 허가한 익명 사례 세 건이었다. 한 건은 편지 보관, 한 건은 관문 통행료 조정, 다른 한 건은 부상자 생계 지원 신청이었다. "세 건의 접수번호가 다 0003이네요." 피코가 말했다. "그렇다고 같은 처리자가 담당했다고 할 수는 없지." 나는 각 서류의 마지막 칸을 가리켰다. 오래된 편지 보관에는 우편 대행인의 직무 인장이, 관문 통행료에는 회계소의 수납 확인 도장이, 생계 지원 신청에는 의료 지원 담당자의 서명이 있었다. "목적도, 승인권자도 다릅니다." 몰트가 말했다. "그런데 통합 화면에서는 셋 다 '대리 완료'로 나와요."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첫 기록은 단순히 종이를 대신 받아 보관한 것이다. 두 번째는 돈을 받았다는 확인에 가깝다. 세 번째는 지원 신청서를 접수한 상태였다. 하지만 나중에 만든 화면에서는 같은 번호가 있다는 이유로 세 문서를 '당사자가 동의한 절차'로 읽을 위험이 생겼다. "이건 마치 우체국에서 편지를 받아 준 사람한테 집을 팔 권한까지 준 것 같네요." 내 말에 제르칸이 눈썹을 찌푸렸다. "집을 팔 권한은 집주인에게 있지 않느냐?" "정확합니다." "그런데 왜 우편 담당자가 팔려고 하느냐?" "그러니까 잘못된 거죠." 제르칸은 자신이 드디어 회계 문제를 이해했다는 듯 크게 웃었다. 나는 반박할 이유가 없었다. 독특한 비유지만 본질은 맞았으니까. 아우렐은 이번 실험에서 한 가지 더 확인했다. 구형 대리번호는 원래 고정된 사번이 아니었다. 각 부서가 자기 내부에서 사용하던 세 번째 접수함을 뜻하는 경우도 있었다. 번호가 통합될 때 구분자까지 함께 옮겨야 했는데, 일부 구형 자료는 그 부분이 비어 있었다. "그럼 이건 해킹이라기보다 설계 문제일 수도 있겠군요." 피코가 물었다. "그럴 가능성이 커졌지." 나는 답했다. "하지만 설계 문제를 알면서 일부러 악용한 사람이 있는지는 따로 확인해야 해." 몰트가 의미심장하게 웃었다. "자네는 늘 마지막에 다른 일을 하나 더 만드는군." "제가 만드는 게 아니에요. 원래 있던 문제가 드러나는 겁니다." "알겠네, 알겠어." 우리는 새 시스템에 다음 규칙을 제안했다. 예전 번호는 그대로 보관하되 발급 기관과 업무 종류를 함께 표시하고, 다른 계약의 동의 여부를 판단할 때는 재사용하지 않는 것. 기록 보존을 위해 번호를 삭제하지 않으면서도 현재 권한을 부여하는 근거로 삼지 않는 방식이었다. 라델은 왕국에서도 같은 규칙을 검토하겠다고 했다. 왕국과 마계가 서로 다른 인사 시스템을 쓰는 데다 천계 기록이 섞였으니 당장 모든 곳을 고치기는 어려울 것이다. 그때 몰트가 아주 작은 말을 했다. "첫 마왕 시대에는 이런 문제가 드물었네." "왜요?" "서류가 모두 종이였거든. 누군가 승인하려면 펜을 들어야 했지." "그럼 처리 속도는 엄청 느렸겠네요." "그랬지. 그래도 누가 펜을 들었는지 확인하기는 쉬웠네." 나는 생각에 잠겼다. 세상의 모든 문제를 과거 방식으로 되돌린다고 해결할 수는 없다. 사람들은 편지 한 통을 받으려고 며칠씩 기다리고 싶어 하지 않는다. 나도 당연히 그렇다. 하지만 새로운 기술이 빠르다고 해서 오래된 권리까지 함께 지워도 되는 건 아니다. "그럼 이렇게 합시다." 나는 회의록을 돌렸다. "빠른 처리는 유지하되, 사람의 동의가 필요한 마지막 한 단계만큼은 확인합시다. 확인을 기다리는 동안 필요한 급여나 치료가 멈추지 않도록 예외 절차도 만들고요." 몰트가 고개를 끄덕였다. "느린 구석은 살리고 빠른 구석도 살리자는 거군." "네. 양쪽 장점만 살릴 수 있으면 좋겠죠." "그렇게 말하니 쉬워 보이는군." "막상 개발하면 엄청 어렵습니다." 나는 웃었다. 내가 한국에서 들었던 가장 잔인한 업무 지시는 '좋은 부분만 합치면 되잖아'였다. 이세계에서 같은 말을 직접 하게 되다니. 과거의 개발자 동료들이 내게 원망스러운 눈길을 보내는 것 같았다. 공동 보증 회계소에 제출할 공식 자료 요청서를 작성했다. 내가 혼자 서명할 수 없는 부분은 왕국 조사관 라델의 협조가 필요했다. 그는 이미 왕국 소환 관련 수배 상태를 재검토하고 있었다. 왕국이 마왕성 직원 인사 기록을 보는 일이 가능하겠냐 싶었지만, 공동 감사에서 정해 둔 절차가 있었다. 잠시 뒤 라델이 중립 전송 구슬로 답했다. [대리번호 식별 체계의 원본·변경 이력은 공동조사 자료로 요청 가능. 다만 개인정보 및 군사 관련 정보는 분리해야 함.] 나는 그 문장을 읽고 무릎을 쳤다. "좋습니다. 필요한 것만 요청합시다." 피코가 내용을 받아 적었다. 요청 항목은 네 개였다. 번호를 발급한 기관, 최초 사용 목적, 변경 승인 판본, 특정 시각에 누가 어떤 권한으로 상태를 변환했는지. 실제 이름까지 반드시 공개하라고 요구하지는 않았다. 정식 증거도 없는 상태에서 모든 직원의 개인 정보를 내놓으라고 하면 정당한 조사가 아니니까. 그날 오후, 공동 보증 회계소로부터 처음으로 제대로 된 답변이 왔다. 나쁜 답은 아니었다. 원본 로그를 보존하겠고, 자동 인사 종료 신호는 공동조사가 끝날 때까지 중단하겠다는 내용이었다. "그러면 끝난 거 아닌가요?" 피코가 물었다. "급한 불 하나는 껐지." "나머지는요?" "이미 잘못 처리된 직원 기록을 확인해야 하고, 그 번호가 왜 서로 다른 기관에서 같은 방식으로 쓰였는지도 봐야 해." 우리가 한창 이야기하는데 식당에서 고함이 들렸다. 취사병이 오늘 식재료 인수표를 놓고 납품상과 다투고 있었다. "양파가 반밖에 안 왔잖아요!" "대금이 절반만 나와서 그렇습니다!" 나는 관자놀이를 눌렀다. 어제 복직 처리에 정신이 팔려 주방 납품 대금까지 전부 확인하지 못했다. 정비공과 취사병의 급여는 해결했지만, 자동 종료된 주문 담당자의 발주 승인 기록도 일부 보류돼 있었다. "누구 잘못인지부터 따지지 말고 실제 납품과 지급 상태를 확인합시다." 납품상은 물건을 두 상자 가져왔다고 했고, 취사병은 네 상자를 신청했다고 했다. 원본 발주서는 네 상자였다. 결제는 두 상자 분량만 확정돼 있었다. 나머지 대금은 미결이었다. 사라진 양파는 없었다. 주문이 절반만 승인된 것이다. "그럼 두 상자는 어디 있습니까?" "창고에 있죠. 돈이 안 들어왔는데 왜 보내요?" 납품상이 말하자 취사병이 어이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나는 양쪽 말을 들은 뒤 먼저 다음 식사에 필요한 최소 수량을 확인했다. 마왕성 수천 명이 양파 없는 수프를 먹는 건 꽤 위험한 사건이다. "이번 건은 마왕성 발주 쪽 문제입니다. 승인 대금을 먼저 처리하고, 남은 주문은 납품 시간을 다시 합의하시죠." 몰트가 바로 필요한 결재를 했다. 납품상은 한 시간 뒤 나머지 두 상자를 가져왔다. 취사병은 나중에 감사하다며 수프를 한 그릇 더 줬다. "출장 다녀온 사람한테 일이 자꾸 늘어나네." 내가 중얼거리자 루시아가 물었다. "그럼 내가 양파를 썰어 줄까?" "손 베지 마세요." "나는 검술의 달인이다!" "그래서 더 걱정됩니다. 양파가 반으로 잘릴 테니까요." 루시아는 진지하게 고개를 끄덕이더니 칼 대신 작은 부엌칼을 골랐다. 그날 주방에서는 양파가 너무 얇게 썰려 수프가 한층 맛있어졌다는 소문이 돌았다. 나는 그 소문을 감사 대상에서 제외했다. 저녁에 새로운 회신이 도착했다. 공동 보증 회계소의 번호 이력 일부였다. [기초 번호 0003: 구형 계약 접수 대행] [후기 전환 번호 0003: 자동 상태 정리] [동일성: 번호 체계 통합으로 중복 발생 가능] 나는 고개를 저었다. "이걸로 범인을 특정할 수 없습니다." 피코도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다른 서류가 필요하겠네요." "그래. 하지만 한 가지는 알게 됐어." "뭔데요?" "사람의 인생을 바꾸는 권한이, 옛날 접수번호와 새 자동번호 사이에서 아무 설명 없이 이어졌다는 거야." 몰트는 그 말을 듣더니 오래된 장부를 꺼냈다. 마왕성에도 비슷한 일이 있었다고 했다. 첫 마왕 시대에 만든 전장 의료비 계약이 시간이 지나며 자동 징병 등록과 연결된 적이 있다는 거다. "누가 그걸 승인했습니까?" "글쎄. 그게 문제였지." 나는 몰트의 장부와 공동 보증 회계소 자료를 나란히 놓았다. 두 기록에는 공통된 단어가 있었다. [상태 승계] 소름이 조금 돋았다. 서로 다른 사람을 하나라고 착각하는 게 아니라, 서로 다른 권한을 하나로 이어 붙인 문제일 수도 있었다. 그럼 지금 해야 할 일은 범인을 쫓는 것보다 먼저, 그런 권한이 더 이상 마음대로 넘어가지 못하게 끊는 일이었다. 나는 새 업무 목록을 적었다. '승계된 권한의 법적 근거 확인. 실제 피해 명세 확보. 원본 승인자 추적.' 그리고 마지막에 아주 중요한 항목을 덧붙였다. '내일 양파 주문 확인.' 회사가 돌아가려면 세상에 숨겨진 음모보다 양파가 먼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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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86화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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