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립 공관에 다시 들어가는데 입장료를 내라는 말을 들었다.
"공동조사단 출입증이 있습니다."
나는 목에 걸린 출입증을 들어 보였다.
문지기는 손을 내저었다.
"그건 출입 허가고, 입장료는 별도입니다."
"어떤 근거로 받습니까?"
"임시 출입객 시설 유지비입니다."
"제가 지난번에는 안 냈는데요."
"어제부터 새 규정입니다."
정말 감사가 사람을 바쁘게 만든다. 이틀만 자리를 비워도 새로운 돈 받을 방법이 생겨 있다.
피코가 뒤에서 명세서를 읽었다. 놈의 눈이 가늘어졌다.
"도윤 님. 이거 승인자가 제3교역 감독관인데요?"
문지기가 움찔했다.
"내가 만든 규정은 아니오. 위에서 내려왔소."
"알아요. 문지기님 잘못이라고 하지 않았습니다."
나는 줄 뒤에 서 있던 사람들을 살폈다. 짐을 지고 온 상인, 아이를 안은 부부, 무릎이 아파 보이는 노인까지 있었다. 그들이 전부 서 있는 동안 내가 고집스럽게 규정을 따지면 누가 가장 손해를 볼까.
"당장 출입은 막지 마시고, 기존 출입증 소지자 요금은 보류 처리할 수 있게 담당자를 불러 주세요."
문지기는 한참 머뭇거리다가 안으로 들어갔다. 잠시 뒤 중립 공관 보안 담당자가 나왔다. 에브란의 서명이 들어간 임시 조치 문서를 보더니 표정이 달라졌다.
"새 요금은 적용을 잠정 중지하겠습니다."
"이미 낸 분들은요?"
"명단을 확보해 확인하겠습니다."
"환급됐다고 미리 쓰지는 않으실 거죠?"
그가 웃지도 못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우리는 그렇게 새로 생긴 요금 하나를 잠시 멈춘 뒤 공관 안으로 들어갔다. 필사실은 정문에서 꽤 떨어진 낡은 동에 있었다. 돌바닥에는 먼지가 쌓였고, 문 위에는 '제4부 기록 협의실'이라는 새 명패가 붙어 있었다. 옛 필사실의 흔적을 일부러 덮어 놓은 것처럼 보였지만, 정말 그런 의도인지는 알 수 없었다. 기관이 문 닫으면 명패를 바꾸는 건 그리 놀라운 일이 아니다.
"여기가 맞습니까?"
루시아가 물었다.
"주소는 맞아요."
"안에 적이 있을 수도 있겠군."
"대부분 빈 서류일걸요."
"빈 서류가 더 무섭다는 건 나도 안다."
이젠 저 기사가 내가 좋아할 만한 말을 고르는 실력이 늘었다. 훌륭한 동료 교육의 결과라고 생각하자.
문을 열어 준 사람은 노년의 드워프였다. 그는 전직 필사실 관리인 브라딘이라고 자신을 소개했다. 지금은 이 건물의 보존 설비를 살피는 계약직이었다.
"오래된 필사 목록을 찾으러 왔다고?"
"네. 특히 다른 세계 언어 원문을 보호하는 업무요."
브라딘이 콧수염을 만지작거렸다.
"그 일은 많이 오래됐지. 처음엔 왕국이랑 마계가 서로 계약서에 사기를 치지 못하게 하자는 취지였소."
"좋은 취지네요."
"취지야 언제나 좋지."
정곡을 찔렀다. 나는 조용히 웃었다.
브라딘은 남아 있는 수기 접수 대장을 보여 줬다. 종이는 누렇게 바랬지만 페이지 사이에 가느다란 금속띠가 끼워져 있었다. 봉인이 찢어진 흔적은 없었다. 공관 기록사 아레인이 원본과 보관 내역을 대조했다. 우리가 건물에 찾아왔다고 무조건 옛 기록을 들여다볼 수 있는 건 아니었으므로, 개인 이름을 가린 업무 통계부터 열람했다.
그때 특이한 항목이 눈에 들어왔다.
[외부 언어 원문 대조: 7건]
[원문 작성자 미확인: 2건]
[당사자 직권 보존 요청: 5건]
일곱. 다시 그 숫자였다.
"왜 작성자를 확인하지 못한 서류까지 받았습니까?"
브라딘이 말했다.
"이름을 쓰면 위험한 때가 있었거든. 원문이 사라지지 않도록 남겨 달라는 요청도 있었지."
"그 요청이 실제 당사자 뜻이었는지 검증은 했나요?"
그는 잠깐 멈췄다.
"모든 건에 대해선 모르겠소. 그때는 전쟁이 심해서 급히 들여온 서류가 많았어."
괜히 화를 낼 일이 아니었다. 옛날 직원이 당시 모든 계약을 정확히 처리했을 리 없다. 그렇다고 모른다는 대답을 면죄부로 삼을 수도 없었다.
우리는 기록을 세 층으로 나누었다. 제출 사실이 있는 것, 제출자의 신분이 확인된 것, 당사자 본인의 동의까지 확인된 것. 어느 항목도 자동으로 다음 항목을 의미하지 않도록 했다.
피코가 내가 만든 표를 보고 물었다.
"왜 칸을 셋이나 나눠요?"
"누가 서류를 냈다고 해서 그 사람이 주인이라는 뜻은 아니니까."
"그러면 도윤 님 대신 다른 사람이 서류를 냈을 수도 있고요?"
"맞아. 하지만 그 사람이 내게 나쁜 일을 하려고 했다고 바로 결론 내릴 수도 없어."
브라딘은 중립 공관에 남아 있던 직원 식권 명부를 꺼내 보여 줬다. 폐쇄된 필사실에 마지막까지 남아 있던 직원들의 이름이 적혀 있었다. 대부분은 이미 퇴직했고, 일부는 다른 기관으로 옮겼다고 했다. 하지만 명부의 맨 끝에는 이름 대신 '대행 근무'라고만 적힌 줄이 있었다.
"이건 누구입니까?"
"알 수 없소. 필사 업무가 밀릴 때 다른 부서에서 와서 돕던 사람이었지."
"정식 고용은 아니었나요?"
"임시 지원 형태였소."
나는 한참 명부를 봤다. 정식 고용도 아니고 이름도 없는 사람. 그런 사람이 한때 원문 보존 업무를 맡았을 수도 있다는 말이었다.
"급여는 지급됐습니까?"
브라딘이 어깨를 으쓱했다.
"급여 명부에는 따로 없소. 다른 부서에서 받았겠지."
"그럼 그 다른 부서를 확인해 볼 수 있을까요?"
"지금은 남아 있지 않을 수도 있소."
나는 요청서를 적었다. 거창한 음모 때문만은 아니었다. 실제 일을 한 사람이 이름조차 남기지 못하는 건 어딘가 이상하다. 어떤 사람은 서류에만 존재하고, 어떤 사람은 서류에서 아예 사라진다. 둘 다 마음에 들지 않았다.
한참 뒤 우리는 옛 필사실의 작업복 한 벌을 발견했다. 작은 천 주머니에 금속 펜촉이 들어 있었다. 브라딘은 그 펜촉이 이계 언어를 모양 그대로 베끼는 데 사용됐다고 했다. 통역인이 내용을 몰라도 원본을 남길 수 있게 해 주는 도구였다.
"그럼 한국어를 모르는 사람이라도 한국어 문장을 그대로 베낄 수 있었겠군요."
"그렇소. 필사본이라면 가능하지."
"원래 작성한 사람과 이 펜으로 베낀 사람은 다를 수 있겠네요."
나는 그 가능성을 명확히 적어 두었다. 문장이 한국어로 남아 있다고 해서 그것을 직접 쓴 사람이 한국 사람이라는 증거는 아니다. 원문을 보존하려고 누군가 애썼을 가능성까지 열어 두어야 했다.
피코는 펜촉을 바라보다가 자신의 연필을 꺼냈다.
"그럼 저도 한국어를 베껴 쓸 수 있어요?"
"할 수 있지."
나는 종이에 '한도윤'이라고 적어 줬다. 피코는 자음을 하나씩 따라 그렸다. 글자는 삐뚤빼뚤했지만 세 글자의 모양이 제법 나왔다.
"이게 도윤 님 이름이에요?"
"응."
"그런데 제 글씨는 좀 못생겼어요."
"처음엔 다 그래."
나는 피코의 종이를 구겨 버리지 못하게 했다. 녀석이 처음 쓴 한국어 이름이었다. 문서와 달리 아주 개인적인 기념품이었으니 업무 증거와는 분리해 주머니에 넣어도 괜찮았다.
오후에 브라딘이 공관 보관 규정을 살피다 작은 사실을 발견했다. 필사실 폐쇄 당시 미수령 우편물은 전부 일괄 반송된 게 아니었다. 반송 주소 확인이 안 되는 것들은 별도 보관함으로 옮겼다. 그중 일부는 제3감리인 명의의 정기 보존 요청을 받고 있었다.
"보존료는 누가 냈습니까?"
"처음엔 공관 예산이었소. 나중에는 공동 보증 회계소에서 지원받았다고 기록돼 있지."
"실제 지급 확인은 할 수 있습니까?"
"돈이 들어온 기록은 남아 있소. 하지만 어떤 보관함을 위해 얼마를 썼는지까지는 아직 모르겠구먼."
나는 그 내용을 별도로 적었다. 오래된 우편물을 남겨 둔 누군가가 있었다. 지금은 그 보존 활동이 자동 회계와 연결됐을 수도 있다. 그렇다고 보관함에 편지를 보낸 사람과 돈을 댄 사람이 같은 인물이라고는 할 수 없다.
브라딘은 우리가 떠날 준비를 하는 동안 작게 말했다.
"그 시절에는 어제 받은 편지를 오늘 태워 버리기도 했소. 안전 문제도 있었고, 물건을 보관할 돈도 모자랐으니까."
"그랬겠죠."
"그런데 누가 와서 그러더군. '읽을 수 없다고 의미가 없는 건 아니다.'"
나는 걸음을 멈췄다.
"그 사람이 누구였는지 기억하십니까?"
브라딘은 고개를 저었다.
"젊은 사람이었는지 늙은 사람이었는지도 가물가물해. 다만 그 말은 기억하오. 나중에 후회하지 말라고 했거든."
나는 그에게 더 묻지 않았다. 기억이 흐릿한 사람을 몰아세우면 그가 사실과 추측을 섞어 대답할 수도 있다. 대신 브라딘이 기억하는 말을 그의 증언으로 남겨 두었다. 말한 사람의 신원은 미확정이라고 분명히 적었다.
브라딘이 오래된 장부의 뒤표지를 들었다. 거기에 작은 수납봉투 하나가 붙어 있었다.
"이건 뭐죠?"
"필사실이 폐쇄될 때 반송하지 못한 우편물이오."
봉투에는 발신지가 없었다. 대신 수신처가 있었다.
[제7서고 언어 보존실]
[원문 반환 불가 시 당사자 수취처 확인]
봉투 겉면의 날짜는 송-4189 최초 보존 신청보다 며칠 뒤였다. 반송 기록이 붙어 있으나 배달 완료 표시는 없었다.
"열어도 됩니까?"
브라딘이 묻자 나는 고개를 저었다.
"당사자 이름이 없잖아요. 공관의 미수령 우편물 처리 규정대로 하죠."
아레인이 열람 승인 절차를 확인했다. 당사자가 특정되지 않은 편지는 내용물을 공개할 수 없지만, 겉면의 우편 경로와 접수 기록은 조사 목적으로 보존할 수 있었다. 우리는 봉투를 그대로 봉인하고, 당시 배달 담당 부서와 접수 대장을 찾기로 했다.
루시아가 봉투를 빤히 봤다.
"악마의 저주가 들었을지도 모르는데?"
"그럼 더 열면 안 되죠."
"맞군."
내가 그런 식으로 맞장구치자 루시아는 매우 만족한 듯했다.
브라딘의 안내로 낡은 우편 창구에 갔다. 담당자는 지금은 퇴직한 사람의 명패가 붙은 책상을 보여 줬다. 누군가 정리하려다 만 듯 영수증이 여기저기 있었다. 나는 서류를 맘대로 만지지 않도록 동행자들에게 당부했다.
"이건 공관 자산입니다. 증거인 동시에 누군가의 근무 기록이니까요."
피코가 재빠르게 자신의 장갑을 벗었다.
"장갑도 안 끼고 만질 뻔했어요."
"잘 생각했어."
브라딘은 바닥의 구석진 상자를 가리켰다. 거기엔 외부 우편 접수표가 있었다. 번호 송-4189와 연결된 우편물이 하나 더 있었다. 수취처는 사람 이름이 아니었다.
[귀환 권리 보존 담당자 앞으로]
"담당자가 누구였습니까?"
"그건 기록에 없습니다."
"그럼 공관에서 누가 수령했나요?"
아레인이 대조했다. 수령란에는 오래된 직무 도장이 찍혀 있었다.
[제3감리 접수 대행]
대리번호 0003과 이름이 비슷했다. 하지만 한쪽은 직무 명칭, 한쪽은 번호다. 섣불리 같은 사람이라고 할 수 없었다.
나는 기록의 발행 날짜를 다시 확인했다. 임시 필사실 폐쇄는 그보다 훨씬 뒤였다. 즉, 누군가는 필사실이 살아 있을 때 정식으로 편지를 접수했고, 그 편지가 여러 곳을 돌다가 제7서고로 가지 못했을 수 있다.
"배달 실패 사유는 뭡니까?"
아레인이 작은 글씨를 읽었다.
"수취권자 불명. 회신 주소 불완전."
"반송 주소를 적지 않은 건가요?"
"적혀 있긴 합니다. 다만 존재하지 않는 장소로 확인됐다고요."
내가 받아 든 자료에는 아주 평범한 주소처럼 보이는 기호가 적혀 있었다. 마리엘이 천계 지도와 대조했다. 그런 지명은 없었다.
브라딘은 다른 뜻으로 놀란 얼굴이었다.
"이 주소는 땅 위의 주소가 아니오. 옛날 연락함 번호요."
"연락함이요?"
"공관을 쓰는 사람들이 서로 직접 만나기 어렵던 시절에 쓰던 것. 지금은 대부분 폐쇄됐소."
누군가 비밀리에 문서를 전달하려고 한 걸까. 아니면 개인정보를 숨기기 위한 합법적인 방식이었을까.
"그 연락함 관리 대장은 남아 있나요?"
브라딘은 고개를 끄덕였다.
"있다면 항구 서쪽 우편관에 있을 게요. 다만 그쪽은 작년에 문을 닫았소."
나는 피코와 눈을 마주쳤다. 녀석은 내 마음을 읽은 듯 작은 한숨을 쉬었다.
"또 출장비예요?"
"또 출장비지."
바로 그때 세르도라는 식량 상인에게서 전송문이 왔다. 예전 중복 통행료 2닢을 낸 사람이다. 공관에 납부 영수증을 제출했더니 환급을 심사하겠다는 답을 받았다고 했다. 하지만 심사 결과가 아니라 새 수수료 청구서가 왔다.
나는 그 메시지를 읽고 말문이 막혔다.
사람 돈 돌려주는 데에도 돈을 받겠다고?
"우리 일정 바꿉시다."
내가 말했다.
"우편관을 가기 전에 환급 창구부터 확인하죠."
브라딘이 물었다.
"귀한 문서보다 그게 급한 일이오?"
"귀한 문서를 제대로 읽는 이유가 그런 사람들한테 같은 일이 생기지 않게 하자는 거잖아요."
나는 다시 명세서를 들여다봤다. 환급 절차의 수수료 승인란에는 익숙한 번호가 있었다.
[대리번호 0003]
이번에는 웃을 수가 없었다.
지금도 그 번호는 사람들 돈을 붙잡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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