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계의 원문 보존 창고에는 서랍이 천이백 개 있었다.
나는 그중 하나를 열어 보려다가 곧바로 손을 뗐다. 손잡이 옆에 적힌 숫자가 무려 열일곱 자리였다. 마법 세계에 와서도 자리 수가 긴 번호는 사람을 불안하게 한다.
"이런 건 대체 누가 찾습니까?"
내가 묻자 엘리온이 대답했다.
"분류 구슬이 자동으로 찾아 줍니다."
"그 구슬에 문제가 생기면요?"
"수기로 찾습니다."
"그럼 분류표는 있습니까?"
"창고 안쪽에 있습니다."
아, 또 시작이다. 자동화가 완벽하다고 자랑하는 조직일수록 자동화가 고장 났을 때 사람이 더 고생한다. 천계가 마계와 달라 보이지만 퇴근을 못 하는 이유는 서로 비슷할지도 모르겠다.
우리가 창고에 온 이유는 단순했다. 한국어 원문의 판본 이력을 확인하기 위해서다. 누군가 실제로 문장을 쓴 건지, 저장 장치가 잘못 번역한 건지, 아니면 여러 원본을 합쳐 버린 건지 알아야 했다.
아우렐이 먼저 세 개의 기록판을 책상 위에 올렸다.
첫 번째는 입력 언어 보존 기록, 두 번째는 송-4189의 최초 접수 시각, 세 번째는 제7서고 이전 내역이었다.
"이 셋은 서로 다른 부서에서 관리합니다."
"그렇군요."
"그런데 이동 시점은 동일합니다."
나는 눈썹을 들었다.
"동일하다는 게 정말 같은 시각이라는 뜻입니까?"
"서류상으로는 그렇습니다."
"천계 시계와 중립 공관 시계가 같은 기준을 쓰나요?"
아우렐이 멈칫했다. 그 질문이 중요했다. 내가 여기 온 뒤 몇 번이나 접수일을 비교하다 엉뚱한 오해를 겪었는지 모른다. 어떤 곳은 해가 뜰 때 날짜를 바꾸고, 어떤 곳은 종이 여섯 번 울릴 때 날짜를 바꾼다.
엘리온이 구석의 낡은 시계판을 가져왔다. 서로 다른 시계를 변환하는 도구였다. 천계 기준과 중립 공관 기준을 맞추자 세 시각 사이에 작은 차이가 드러났다. 이 정도면 한 사람이 자료를 순서대로 옮기는 데 걸리는 시간과 비슷했다.
"그럼 일괄 복제인가요?"
"가능성은 있습니다. 하지만 각 부서에 제출된 원본이 동일했는지는 아직 모르죠."
나는 피코에게 표를 그리라고 했다. 녀석은 깔끔하게 세 줄을 그리고 각 줄의 출처를 적었다. 예전에는 큰 숫자만 봐도 겁을 먹었는데, 이제는 문서를 보고 먼저 질문을 한다.
"도윤 님. 여기 '작성 언어'랑 '입력 언어'가 달라요."
"어떻게?"
"작성 언어는 비공개인데 입력 언어는 한국어래요."
녀석이 정확히 짚었다. 누가 한국어를 썼는지 알 수 없는 상태에서, 시스템에는 한국어라는 표식만 남아 있었다. 이 차이를 무시하면 우리는 누군가를 한국인이라고 잘못 지목할 수도 있다.
"잘 봤어. 나중에 보고서에 그 문장 넣자."
피코가 활짝 웃었다. 루시아가 옆에서 나직이 말했다.
"피코도 이제 사람을 말로 벨 수 있겠군."
"기사님. 서류 검토는 결투가 아니에요."
"적어도 상대가 먼저 무기를 꺼내진 않겠지."
문득 몰트가 떠올랐다. 마왕성 재정실장인 그 리치는 어떤 계약서든 첫 장보다 뒷장부터 읽는다. 처음 그 모습을 봤을 때 음침하다고 생각했는데, 요즘은 그 습관이 꽤 그립다.
우리는 오래된 이전 목록을 한 장씩 확인했다. 맨 아래에 작은 항목이 있었다.
[언어 표본 채택. 출처: 중립 공관 임시 필사실]
"임시 필사실이요?"
엘리온이 설명했다.
"옛날에 여러 나라의 계약서를 보존할 때 쓰던 곳입니다. 지금은 폐쇄됐어요."
"거기서 한국어를 다뤘다는 뜻인가요?"
"그렇게 해석할 여지가 있지만, 실제로 누가 한국어를 입력했는지는 여기 기록에 없어요."
나는 '출처'라는 말에 동그라미를 그렸다. 언어를 배운 사람의 정체를 바로 알아내진 못해도, 그 문서가 거쳐 온 장소는 추적할 수 있다.
문제는 임시 필사실이 이미 폐쇄됐다는 점이었다.
"폐쇄 사유가 뭡니까?"
"서고 통합으로 역할이 없어졌다고 합니다."
"기물과 종사자 기록은요?"
"중립 공관에 이관됐을 겁니다."
"그 '겁니다'가 좀 무섭네요."
엘리온이 웃었다. 그는 내 농담이 왜 무서운지 이해하는 데 잠깐 시간이 걸렸다.
분류 목록을 찾던 중에 엘리온이 오래된 기록 열람 규정을 꺼냈다. 원문에 쓰인 언어를 모르는 사람이 해당 문서의 효력까지 결정할 수 없다는 조항이었다. 나는 그 문장을 두 번 읽었다.
"왜 이런 규정이 생겼습니까?"
"옛 전쟁 때 서로 다른 나라의 계약서를 강제로 번역한 뒤 문제가 생겼다고 합니다."
그가 설명했다. 어떤 곳은 '동의하지 않는다'는 말을 '추후 검토한다'로 바꿨고, 어떤 곳은 '가족에게 알려 달라'는 요청을 '보호자에게 통지했다'로 처리했다. 번역하는 사람이 반드시 나쁜 의도를 가졌다는 뜻은 아니었다. 다만 한 글자의 차이가 사람의 생사에 영향을 줄 수도 있었다.
나는 서울에서 읽던 약관들을 떠올렸다. 작은 글씨로 쓰인 항목을 잘 읽지 않다가 낭패를 본 적이 있었다. 여기 사람들은 언어까지 다르니 얼마나 답답했을까.
"그래서 원문을 남겨야 한다고 정한 거군요."
"네. 처음엔 비용 문제로 반대가 많았습니다. 보관함이 모자랐으니까요."
"그럴 만하네요. 하지만 보관 비용이 아깝다고 당사자 말을 없앨 수는 없잖아요."
엘리온은 미소를 지었다. 그런 당연한 말을 법으로 만들기 위해 누군가 오랫동안 싸웠을 것이다.
우리는 원문 대조 담당자의 직무 기록도 확인했다. 기록사들은 문서가 생기면 몇 가지 표시를 붙였다. 직접 서명을 확인했는지, 통역인이 읽어 줬는지, 보존만 요청했는지. 그러다 보니 이상한 항목도 눈에 띄었다.
[원문 보호 요청. 당사자 미도착.]
피코가 그 부분을 가리켰다.
"도윤 님. 아직 오지도 않은 사람의 문서를 왜 보관해요?"
"미리 보내 두는 편지일 수도 있고, 나중에 도착할 물건의 보관증일 수도 있지."
"그럼 그 사람의 동의를 받은 건 아니잖아요."
"그렇지. 바로 그게 중요한 차이야."
엘리온은 이 항목이 사용된 역사를 설명해 줬다. 배편이 끊겨 서로 만나지 못하는 가족들을 위해 원본을 미리 보호하던 관행이었다고 했다. 누군가 도착하지 않더라도 그의 권리가 사라지지 않게 하는 취지였다.
그 말을 듣자 가슴이 조금 먹먹해졌다. 내 소환 전에 남은 편지도 그럴 수 있을까. 내가 도착할지 모르는 상태에서 누군가 내 선택을 지켜 달라고 보냈을 수도 있겠다.
하지만 감동해서 증거의 차이를 잊을 수는 없었다. 나를 기다린 사람의 선의인지, 나를 이용하려고 미리 수단을 준비한 것인지 아직 모른다.
나는 원문 보존 업무가 왜 필요했는지 기록한 규정 요약을 사본으로 요청했다. 엘리온은 우리에게 공개 가능한 판본만 주었다. 그중 맨 마지막 항목이 눈길을 끌었다.
[권리자 미도착을 이유로 원본을 폐기하거나 대리 승낙으로 전환할 수 없음.]
"이건 정말 중요하네요."
아우렐이 내게 물었다.
"마왕성에도 비슷한 규정이 있습니까?"
"지금 만들고 있는 중입니다."
"아직 없다고요?"
"예전엔 직원이 출근 안 하면 해골 병사로 바뀌었는지부터 확인하던 회사거든요."
아우렐은 무슨 말인지 이해하지 못했다. 피코는 웃음을 터뜨렸다. 루시아는 누가 해골 병사로 바뀌었냐며 진지하게 물었다.
나는 손을 내저었다.
"농담이에요. 정말로 그런 인사 절차가 있었던 건 아닙니다."
아우렐은 여전히 의심스러운 얼굴이었다. 천계에서 농담하기가 이렇게 어려울 줄은 몰랐다.
작업실 벽에는 일곱 가지 언어를 적은 작은 표본판이 있었다. 번역되지 않은 단어들이 모여 있는 곳이었다. 그중 내 눈에 들어온 건 낯익은 한국어 두 글자였다.
[거절]
나는 그 글자를 보며 오래 서 있었다. 누군가 그 단어를 번역하지 않고 그대로 남겼다는 뜻이다. 거절할 권리가 언어가 달라진다고 사라지면 안 된다는 생각이 내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다.
"도윤 님. 무슨 뜻이에요?"
피코가 물었다.
"싫다고 말하는 거야."
"왜 그 글씨가 특별해요?"
"특별한 건 글씨보다도 누군가 그 말을 보존하려고 했다는 사실이지."
나는 표본판을 손으로 만지지 않았다. 대신 엘리온에게 보존 목록 번호를 적어 달라고 했다. 내가 오늘 본 걸 내일도 같은 자료에서 확인할 수 있도록.
나는 표본판에 적힌 글자를 다시 읽었다. 한 번 더 읽어도 의미는 같았다. 낯선 곳에서 모국어가 이렇게 무겁게 느껴질 줄은 몰랐다.
점심 무렵 우리 일행은 창고 옆 보존 작업실에서 소란을 들었다. 작은 날개를 가진 견습 서기 둘이 낡은 종이 상자를 끌고 있었다. 상자 한쪽이 찢어져 안의 종이가 바닥에 쏟아졌다.
"괜찮아요?"
피코가 먼저 달려갔다. 견습 서기는 곤란한 얼굴이었다.
"분류 구슬이 멈춰서 직접 옮기고 있었는데요. 상자가 너무 무거워요."
나는 함께 종이를 주웠다. 종이를 줍는 일에는 특별한 마법이 필요하지 않았다. 대신 손목과 허리가 조금 아팠다.
"몇 상자나 더 있습니까?"
"열두 개요."
"둘이서?"
"네. 오늘까지 끝내라고 하셨어요."
나는 아우렐을 돌아봤다. 아우렐은 모처럼 매우 난처한 얼굴이 됐다.
"업무 지시를 누가 내렸는지 확인하겠습니다."
"그것도 좋고요. 우선 카트부터 하나 가져오죠."
천계에는 구름으로 움직이는 자동 운반대가 있었다. 그런데 그 운반대는 고위 기록물에만 사용할 수 있다고 했다. 일반 분류용 상자를 옮기기엔 너무 비싼 장비라는 거다.
나는 값을 물었다. 자동 운반대 한 대가 하루에 먹는 마력은 견습 서기 두 명의 하루 급식비보다 적었다.
"그럼 쓰는 게 더 싸잖아요."
아우렐이 머뭇거렸다.
"규정에 고위 기록물 전용이라고 되어 있습니다."
"그 규정을 바꾸는 비용도 계산해 봅시다. 사람이 허리 다치면 그때는 더 큰 비용이 나옵니다."
잠시 뒤 마리엘이 임시 승인서를 들고 왔다. 운반대는 상자를 한 번에 네 개씩 옮겼다. 견습 서기들은 넋을 잃고 바라봤다.
"이걸 원래 쓸 수 있었어요?"
"오늘부터 한시적으로요."
내가 말하자 둘 중 하나가 허탈하게 웃었다.
"그동안 왜 손으로 날랐을까요?"
"이유를 아는 사람이 한 명도 없는 규정은 가끔 사람을 잡습니다."
피코가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마왕성에도 그런 거 많았죠?"
"많았지. 지금도 있을걸."
우리는 분류 작업을 도우며 찾던 보존 목록의 복제본도 확보했다. 원본과의 일치 여부는 다른 기록사가 확인했다. 정비 중에 우연히 발견했다고 해서 함부로 소유할 수는 없었다.
그 목록에는 필사실의 폐쇄 전 마지막 업무가 있었다.
[비지정 언어 계약 조항 보호. 대상: 일곱 명]
일곱 명.
그 숫자는 낯익었다. 제7서고 귀환 대기 좌석의 마지막 번호도 일곱이었다. 그렇다고 일곱 명이 모두 지구인이라는 뜻은 아니었다. 숫자가 같다는 사실만으로 사건을 하나로 묶으면 안 된다.
"명단이 있습니까?"
엘리온이 고개를 저었다.
"목록은 따로 있습니다. 하지만 개인정보 열람권이 필요합니다."
"그럼 일단 명단이 존재한다는 사실만 적어 주세요."
마리엘은 자료를 정리하며 나를 바라봤다.
"왜 그렇게까지 조심하시는 겁니까? 한국어를 쓴 사람이 있으면 빨리 찾아보고 싶지 않으세요?"
"당연히 찾고 싶죠."
나는 손바닥의 종이 가루를 털었다.
"그런데 그 사람도 어딘가에서 자기 이름으로 이상한 서류가 만들어진 걸 모르고 있을 수 있잖아요. 그 사람에게도 선택권이 있어야죠."
마리엘은 그 말에 고개를 숙였다. 나는 잠깐 머쓱해졌다. 남의 선택권을 지키는 말을 멋있게 했지만, 현실에서는 내일도 새 신청서를 써야 한다.
서고를 나서기 전, 피코가 업무 목록을 접었다.
"도윤 님, 다음은 중립 공관 필사실이에요?"
"그래. 근데 출장비가 또 문제네."
"마왕님이 화내실까요?"
"망토 예산만큼은 못 쓸 테니까 괜찮을 거야."
그때 전송 구슬이 울렸다. 제르칸에게서 보낸 짧은 메시지였다.
[언제 돌아오느냐. 본왕의 망토가 아직도 승인되지 않았다.]
나는 한숨을 쉬었다.
다시 생각해 보니 괜찮지 않을 수도 있겠다.
다음 날 출발할 준비를 하던 중, 엘리온이 새 사실을 알려 왔다. 일곱 명의 계약 조항에는 공통적으로 같은 문구가 있었다고 한다.
[대리 동의를 허용하지 않음.]
그리고 그 문구만은 대부분 다른 언어에서 번역한 흔적 없이, 각자 원문으로 보존돼 있었다.
한국어는 그중 하나였다.
나는 기록을 조용히 접었다.
이건 내 이야기만은 아닐지도 모른다.
제83화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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