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문 읽기 시험의 첫 번째 문제는 한국어가 아니었다.
[본인임을 확인할 수 있는 서류를 제출하십시오.]
나는 시험지를 내려놓았다.
"이건 천계 공용어잖아요."
"시험 시작 전 안내입니다."
"그럼 저한테 어떤 서류가 필요하다는 말씀이죠?"
시험 감독관은 서류 묶음을 넘겼다. 날개 끝이 책상에 닿을 때마다 빛나는 가루가 떨어졌다. 이 사람은 청소하기 정말 힘들겠다.
"신분 확인서, 소환 당시 물품 보관증, 귀환 보류 접수증, 성검 동반 확인서입니다."
"마왕성 재직증명서는요?"
"필수는 아닙니다."
"왜요? 현재의 제 신분을 확인하는 데 가장 직접적인 자료인데요."
감독관은 잠시 고민하더니 '선택 제출' 칸에 적었다. 훌륭하다. 서류가 하나 늘었다. 천계에서 내가 할 수 있는 가장 확실한 성과가 이런 것이라면 조금 서글프다.
시험 장소는 제7서고의 작은 독서실이었다. 은색 서가에는 내용이 봉인된 책들이 줄지어 꽂혀 있었다. 책마다 자물쇠가 달려 있었는데, 열쇠 구멍 옆에 '열람 자격이 없으면 만지지 마시오'라는 문구까지 있었다.
루시아가 그것을 보고 물었다.
"함정인가?"
"행정입니다."
"그게 더 위험하지 않나?"
요즘 루시아는 쓸데없이 정확한 말을 한다.
원문 읽기 시험은 익명의 한국어 문서에 접근하기 위한 추가 확인이었다. 기존 본인 확인은 완료했지만, 작성자는 별도의 안전장치를 남겨 두었다고 했다. 내가 읽을 수 있는지 검사하되 시험 중에는 원문 전체를 보여 주지 않는다. 상당히 조심스러운 방식이었다.
"왜 시험 결과를 확인하는 데 한 달이나 걸리죠?"
내가 묻자 언어 보존 담당 엘리온은 난처하게 웃었다.
"기존 규정이 그렇습니다. 실패하면 본인 확인에 문제가 있을 가능성이 있기 때문에요."
"그럼 실패 사유가 답안 오기인지, 자료 오류인지도 구분해야죠. 한 달 동안 사람을 기다리게 하는 근거가 뭡니까?"
그는 곧바로 답하지 못했다. 좋지 않다. 이유를 알 수 없는 대기 기간은 아주 쉽게 사람을 포기하게 만든다.
나는 먼저 감독관에게 시험 목적과 결과 처리 방식을 문서로 요청했다. 내가 잘못 답해도 귀환 권리가 사라지지 않는다는 확인도 받았다. 그다음에야 의자에 앉았다.
시험지 위로 작은 한글 문장이 나타났다.
[오늘은 비가 오지 않습니다.]
무슨 의미지?
나는 조용히 읽었다. 감독관은 눈을 크게 떴다.
"발음이 기록되어 있던 소리와 비슷합니다."
"한국 사람이 읽으면 이 정도는 읽죠."
"문장 뜻도 아십니까?"
"오늘 비가 안 온다는 뜻입니다."
"정확합니다."
다음 문장은 조금 이상했다.
[서랍 속에 있는 연필을 꺼내고, 다른 사람이 시켰다고 말하지 마십시오.]
나는 종이를 들여다봤다. 장난처럼 들리지만 시험의 목적이 언어 능력만은 아닐 수 있었다. 도구를 갖다 놓고 지시를 따르는지 확인하려는 걸까.
"여기엔 서랍이 없는데요."
감독관이 웃었다.
"그것도 확인 항목입니다."
"그럼 '실행할 수 없는 지시'라고 답하겠습니다."
그가 표를 적었다. 내가 궁금한 건 점수보다 누가 이런 문장을 골랐느냐는 문제였다.
마지막 문장은 아주 짧았다.
[누군가 대신 결정하겠다고 하면?]
나는 오래 생각하지 않았다.
"제가 직접 결정하겠습니다."
그렇게 말하자 독서실의 벽 한쪽에서 작은 종소리가 났다. 감독관이 허둥거리며 수정판을 확인했다. 빨간색 불빛이 두 번 깜박였다.
"무슨 문제입니까?"
"시험 종료 표시는 아닙니다. 원문 접근 요청이 접수됐다는 뜻입니다."
"제가 요청한 적이 없는데요."
그가 입을 다물었다.
마리엘과 아우렐이 서둘러 안으로 들어왔다. 피코는 문 앞에서 참관자 명단을 확인했고, 루시아는 슬쩍 검 손잡이에 손을 얹었다가 내 눈치를 보고 내려놓았다.
"답안을 낸 직후 어떤 요청이 생겼습니까?"
아우렐이 물었다.
감독관은 수정판에 나타난 문장을 읽었다.
[원문 제2층 열람 준비. 접속 경로: 대리번호 0003.]
내가 의자에서 일어났다.
"저는 시험에 응시했지 대리권을 부여하지 않았습니다."
마리엘은 즉시 대리 접속 경로를 차단했다. 이미 자동결재 구슬의 신규 승인 기능을 막아 놓았는데도 다른 구역에서 반응이 나온 것이다. 두 장치가 같은 구슬인지, 독립된 절차인지 확인해야 했다.
"누가 열려고 했는지는 모르죠?"
"네. 자격번호가 표시될 뿐입니다."
"그럼 제 응시 기록과 자동 열람 신호가 발생한 시각을 따로 보존해 주세요. 시험이 끝났다는 이유로 한 기록으로 묶지 말고요."
엘리온이 고개를 끄덕였다. 감독관은 여전히 식은땀을 흘리고 있었다. 이 사람도 자기 앞에서 이런 일이 벌어질 줄은 몰랐던 모양이다.
우리는 시험지 원본을 봉인하고, 사전에 안내된 범위 내에서 원문 접근을 계속할지 다시 논의했다. 세라핀은 신속한 열람을 원했지만, 에브란은 속도를 늦추자고 했다.
"누군가 응시자의 답안을 신호로 이용했다면 같은 방법으로 다시 접근할 수 있습니다."
"그럼 오늘 알아낸 정보는요?"
"보존하되 자동 열람은 잠시 멈추겠습니다."
나는 찬성했다. 여기까지 와서 봉인에 칼을 들이밀었다가 누군가 다른 사람의 기록까지 지우게 만들 수는 없다.
시험이 끝났다고 바로 밖으로 나갈 수는 없었다. 마리엘은 원문 접근 경고가 뜬 수정판을 봉인하느라 분주했고, 아우렐은 기록사를 한 명 더 불렀다. 나는 책상에 앉아 감독관에게 물었다.
"조금 전 질문은 누가 선택했습니까?"
"옛 시험지에 들어 있던 문구입니다."
"그럼 모든 응시자가 같은 문제를 풀었나요?"
"언어마다 다릅니다. 본인 확인용 언어 표본이 여러 개라서요."
"한국어 표본은 몇 명이 봤습니까?"
감독관은 난처한 얼굴로 자료를 확인했다.
"이곳에 남아 있는 통계상으로는 이번 응시가 처음입니다. 다만 옛 필사실 기록까지 확인한 건 아닙니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처음이라는 말이 내 인생을 특별하게 만드는 건 아니었다. 서고 통계에 처음 기록된 것과 실제로 세상에서 처음 있었던 일은 다르다. 숫자를 좋아하는 사람일수록 그런 차이를 잊으면 안 된다.
작은 독서실 밖에서는 견습 서기 둘이 방문객들을 안내하고 있었다. 그중 한 명이 우리에게 물을 가져왔다. 떨리는 손으로 잔을 건네다가 물을 조금 흘렸다.
"죄송합니다!"
"괜찮습니다."
서기는 잔을 치우려다 말고 내 앞의 시험지를 바라봤다.
"이상한 글씨네요."
"제 나라 글씨입니다."
"처음 봅니다."
"저도 여기 와서 처음 본 글씨가 많아요."
그가 멋쩍게 웃었다. 나는 종이 끝에 내 이름 세 글자를 적어 보여 줬다. 한도윤. 서기는 그걸 자기 언어로 옮겨 읽으려 했다. 발음이 심하게 어긋났다.
"한……도……온?"
"비슷해요."
"어려워요."
"저도 천계 사람 이름 아직 많이 틀립니다."
서기는 안심한 얼굴로 물 잔을 정리했다. 나는 그 장면을 보며 새삼 생각했다. 글자를 읽을 수 있다는 것만으로 무슨 죄가 증명되지는 않는다. 그저 서로 다른 곳에서 살던 사람들이 한 문장을 공유할 수 있다는 뜻이다.
우리는 감독관의 업무 기록도 확인했다. 시험장 앞에는 출입 인증 구슬이 있었고, 구슬의 고장 여부를 점검하는 직원이 정오마다 지나간다고 했다. 시험 중 원문 접근 경고가 울린 시간과 정비 시간이 일부 겹쳤다.
"그럼 정비 직원이 조작한 건가요?"
피코가 물었다.
"그럴 수도 있지만, 아직 근거가 없어."
"그냥 우연일 수도 있고요?"
"맞아. 그러니까 출입 기록과 구슬 작동 기록을 각각 봐야지."
정비 담당 직원이 오자 우리는 그의 입회하에 장치의 최근 점검 목록을 확인했다. 작은 균열이 발견되어 마력 공급을 잠시 바꾼 적은 있었지만, 원문 열람 권한을 직접 실행한 기록은 없었다. 그는 설비 상태를 확인한 것만 증언할 수 있다고 했다.
"혹시 그 시간에 특이한 일을 보셨습니까?"
아우렐이 물었다.
"구슬이 잠깐 붉게 빛났습니다. 보통 누군가 잘못된 명령을 입력하면 그렇죠."
"누가 입력했는지는요?"
"알 수 없습니다. 저는 뒤쪽 배선실에 있었습니다."
나는 그의 설명을 적었다. '붉은 경고 확인. 입력 주체 미상.' 시험 답과 자동 접근이 시간상 이어졌다고 해도, 누가 손을 댔는지 없는 사실을 만들어 낼 수는 없었다.
마리엘은 위험을 줄이기 위해 다음 시험부터는 응시자 신호와 원문 보관 장치의 연결을 분리하겠다고 했다. 그 말에 나는 하나를 더 물었다.
"그렇게 분리하면 시험 결과를 직접 기록해 주는 사람은 누구입니까?"
"서고 직원이 수동으로 확인해야 합니다."
"추가 근무가 생기겠네요."
그녀가 웃었다.
"그렇겠죠."
"그 인원과 근무시간을 예산에 넣으세요. 직원들이 공짜로 더 일하는 해결책은 오래가지 못합니다."
마리엘이 수첩에 메모했다. 천계에서 한국어 시험을 보다가 직원 근무표까지 고치고 있었다. 이쯤 되면 나는 어디를 가든 감사 보고서를 쓰도록 저주받은 게 아닐까.
잠시 뒤 피코가 감독관에게 별도 질문을 했다.
"시험에서 틀리면 정말 한 달 기다려야 해요?"
"원래는 그렇습니다."
"그런데 도윤 님이 틀린 게 아니라 기계가 이상해서 시험이 멈추면요?"
감독관은 대답하지 못했다. 피코는 작은 손을 뻗어 안내문의 귀퉁이를 가리켰다.
"여기에는 그런 경우가 없어요."
나는 속으로 박수를 쳤다. 훌륭하다. 이 녀석은 벌써 예외 처리의 중요성을 안다.
결국 마리엘은 장치 오류로 시험이 무효가 된 경우에는 재응시 대기 기간을 적용하지 않도록 임시 안내를 추가했다. 담당 감독관도 동의했다. 아직 최종 규정 개정은 아니었지만 불합리한 지연을 조금 줄일 수 있었다.
"도윤 님. 제가 잘했어요?"
피코가 물었다.
"아주. 오늘은 네가 내 선생님이네."
녀석의 얼굴이 붉어졌다. 천계의 복잡한 조사 가운데 가장 기분 좋은 순간이었다.
피코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도윤 님. 시험은 붙었어요?"
"글쎄. 일단 우리가 한국어를 읽을 수 있다는 건 확인했으니까."
"그거 원래 아시던 거잖아요."
"맞아. 하늘나라에 와서 내 모국어 시험을 봤다."
피코가 작게 웃었다.
"그런데 천계에서는 도윤 님이 한국 사람인 걸 모르니까요."
듣고 보니 그렇다. 나는 서울 출신이라고 계속 말했지만, 이쪽 사람들에게 서울은 지도에도 없는 도시였다. 그들이 확인할 수 있는 건 내 말과 물품, 등록 기록뿐이다. 어쩌면 나 역시 누군가의 말을 함부로 믿어서는 안 되는 이유가 거기에 있었다.
점심을 먹으러 가는 길에 우리는 시험장 밖 복도를 둘러봤다. 루시아는 발자국 소리를 기억하고 있었다. 복도 끝에서 두 차례 금속이 부딪히는 소리가 났다고 했다. 조사원은 그쪽에 정비 창고가 있다고 설명했다.
"그럼 왜 문이 잠겨 있죠?"
"오후 정비 시간 전이라서요."
"누가 마지막으로 들어갔습니까?"
경비병이 출입 대장을 내밀었다. 거기엔 세 사람의 이름과 하나의 무인 열쇠 번호가 있었다. 나는 그중 무인 열쇠가 실제로 사용됐는지 물었다. 경비병이 고개를 저었다. 단지 발급되어 있을 뿐이었다.
마리엘이 말했다.
"무인 열쇠가 사용되지 않았다면 안심하셔도 되지 않을까요?"
"아직은요. 소리가 난 이유도 모르고, 시험 신호와 창고가 관련됐다는 증거도 없잖아요."
루시아가 내게 속삭였다.
"의심하지 않는 것과 무시하는 것은 다른가?"
"완전히 다르죠."
나는 그 말이 마음에 들었다. 내 편이라고 무조건 믿지 않고, 수상하다고 범인 취급하지 않는 것. 이세계에서 생존하는 데 회계보다 중요한 습관일지도 모른다.
늦은 오후, 공식 시험 결과가 도착했다.
[언어 능력: 확인]
[작성자 동일성: 확인 불가]
[대리 열람권: 부여하지 않음]
이 정도면 나쁘지 않았다. 하지만 뒤에 작은 문구가 하나 더 있었다.
[최초 원문 보존자의 질문에 대한 응답: 일치]
나는 그 문장을 읽고 입을 다물었다.
내가 방금 대답한 말과, 오래전 누군가 준비한 답이 일치했다는 건가.
그렇다고 그 사람이 내 생각을 읽었다고 단정할 순 없다. '본인이 결정하겠다'는 대답은 다른 사람도 할 수 있으니까.
하지만 조금 이상했다.
원문 보존자는 대체 누구에게 그 질문을 남겼던 걸까.
그리고 그 답을 확인하는 순간, 왜 대리번호 0003이 움직였을까.
마리엘이 서류 하단을 살펴보다 덧붙였다.
"한 가지는 확인됐습니다. 이 시험 문제는 최근에 만든 게 아닙니다."
"언제 만들었죠?"
"당신이 소환되기 훨씬 전입니다."
나는 잠시 시험지의 마지막 문장을 떠올렸다.
누군가 대신 결정하겠다고 하면?
이건 나를 위한 질문일 수도 있고, 그저 수많은 사람에게 묻는 질문일 수도 있다.
어느 쪽인지 확인하려면 앞으로도 꽤 많은 서류를 봐야 할 것이다.
그날 저녁 나는 일지에 이렇게 적었다.
'천계에서 한국어 시험 합격. 자동 열람 시도 발생. 아직 범인은 모름.'
그리고 바로 아래 한 줄을 더했다.
'시험 응시료는 청구하지 말 것.'
그건 정말 중요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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