귀환 신청서 맨 아래에는 선택지가 세 개 있었다.
[귀환 요청]
[귀환 보류]
[귀환 거절]
마왕성에 온 뒤 이만큼 반가운 문장을 본 적이 있었나 싶다. 세 가지 선택지가 모두 있었다. 거절 버튼이 숨겨져 있지도 않았다. 이걸 확인하려고 왕국과 마계와 천계가 함께 감사보고서를 쓰고, 공방에서 오래된 도면을 뒤지고, 구슬 몇 개를 수동 검토로 돌렸다.
사람이 자기 인생에 대해 ‘아니요’라고 말할 수 있게 하는 데 이렇게 많은 서류가 필요하다니.
나는 펜을 들었다.
“정말 제가 선택하면 되는 거죠?”
마리엘이 고개를 끄덕였다.
“오늘 확인하는 건 귀환 권리의 행사 의사입니다. 신청과 실행은 별개이며, 실제 귀환에 필요한 좌표 검증은 추가 절차입니다.”
“좋습니다. 그 문구가 제일 중요해요.”
세라핀과 에브란이 양옆에 앉았다. 피코는 내 뒤에서 기록을 맡았고, 아우렐은 원문 대조를 준비했다. 루시아는 문을 지켰다. 이번에도 제르칸은 참석하지 못했다. 대신 마왕성 재정실 인장이 찍힌 출장 완료 확인서가 도착해 있었다. 나중에 비용 정산할 때 필요한 서류였다.
“도윤 님, 떨려요?”
피코가 속삭였다.
“조금.”
“왜요?”
“돌아갈 수 있을지도 모르잖아.”
“그럼 좋은 일 아닌가요?”
나는 웃었다.
“좋은 일이지. 그런데 좋은 일이라고 덜 떨리진 않더라.”
피코는 고개를 끄덕였다. 녀석이 내게 건넨 따뜻한 차가 손끝을 데웠다.
절차는 생각보다 꼼꼼했다. 먼저 보존위원회가 내 신원을 확인했다. 소환 전 등록 자료, 실제 마왕성 근무 기록, 왕국 소환 의식 참석 기록, 성검의 연결 상태를 각각 별도 증거로 검토했다. 그다음 나에게 현재 상황을 이해하고 있는지 물었다.
“귀환할 권리가 있다는 사실과 실제 귀환 방법이 확인됐다는 사실은 다르다는 점을 아십니까?”
“네.”
“귀환을 거절해도 지금까지 확보한 자료 열람권은 유지된다는 점을 아십니까?”
“네.”
“귀환을 요청한다 해도 당장 문이 열리는 것은 아니라는 점을 아십니까?”
“네.”
아이고. 이 정도면 면접보다 엄격하다. 하지만 이상하게 싫지 않았다. 누군가 내 동의를 얻기 위해 나에게 제대로 설명하고 있었다. 처음 왕국 알현실에서는 내가 무슨 질문을 하든 신의 뜻이라고만 했다. 지금은 적어도 모르는 건 모른다고 말하고 선택지를 보여 준다.
위원회는 예비 계약 원문을 내 앞에 펼쳤다. 내 이름, 이전 주소, 소환 전송번호 송-4189, 대리번호 0003. 본인 서명란은 여전히 비어 있었다. 대리 동의 처리 기록에는 별도의 이의 표시가 붙었다.
“이 사본에서 확인 가능한 점은 무엇입니까?”
위원이 물었다.
나는 천천히 답했다.
“제 이름으로 예비 등록이 있었고, 제 서명은 현재 확인되지 않았습니다. 대리번호를 사용한 자동 처리 기록은 확인됐지만 실제 사용자는 아직 모릅니다. 그래서 그 기록만으로 제가 계약에 동의했다고 주장할 수는 없습니다.”
마리엘이 고개를 끄덕였다.
“정확합니다.”
나는 펜을 내려놓고 잠시 숨을 고르려 했다. 그런데 위원회가 다음 질문을 던졌다.
“한도윤 씨는 오늘 귀환을 원하십니까?”
드디어 그 질문이다.
나는 눈을 감았다.
지구의 원룸이 떠올랐다. 부장님이 던져 놓은 보고서. 퇴근길 지하철. 편의점 삼각김밥. 엄마의 문자. 모두 마음에 걸렸다.
이세계의 모습도 떠올랐다. 처음 마왕성 면접에 들어갔을 때 덜덜 떨던 몰트, 회의록을 너무 열심히 쓰던 피코, 말보다 검이 먼저 나가던 루시아, 금칠을 못 해서 억울해하던 제르칸.
돌아가고 싶다.
그런데 지금 당장 내가 어떤 문을 통과해 어디에 도착하는지도 모른 채 귀환을 승인할 수는 없었다.
“귀환할 권리는 보존하고 싶습니다.”
나는 입을 열었다.
“하지만 오늘 이 자리에서 실제 귀환을 승인하지는 않겠습니다.”
위원회가 조용해졌다.
“그렇다면 귀환 보류를 선택하시겠습니까?”
“네. 다만 이미 제 이름으로 자동 승인된 기록은 거부합니다. 그것과 제 귀환 권리 자체를 포기하는 건 별개로 남겨 주세요.”
마리엘은 신청서 위에 새로운 보충 칸을 열었다.
[기존 대리 동의 처리에 대한 이의: 제출]
[현재 귀환 집행 의사: 보류]
[향후 귀환 신청권: 보존]
나는 하나씩 확인했다. 이 문구는 내 마음과 같았다.
“여기 서명하시면 됩니다.”
펜을 들었다.
드디어 내가 직접 서명하는 순간이었다.
한도윤.
익숙한 세 글자가 낯설게 보였다. 지구에서는 계약서와 비용 승인서에 수도 없이 적던 이름이다. 그런데 이세계에 온 뒤에는 누군가 내 이름을 먼저 적어 두고 나중에 동의를 구하는 일이 너무 많았다. 오늘은 달랐다. 내 손으로, 내 선택을 확인하고 있었다.
서명을 마치자 양피지가 은은하게 빛났다.
[본인 의사 확인 완료]
[대리 동의 자동 처리 제외]
[귀환 집행: 보류]
나는 긴 숨을 내쉬었다.
“끝난 겁니까?”
“오늘 신청 절차는 완료됐습니다.”
마리엘이 대답했다.
루시아가 입구에서 손뼉을 쳤다.
“좋았어! 적을 이긴 건가?”
“아니요. 서명을 했습니다.”
“그게 이긴 거지.”
이번에는 그녀의 말이 마음에 들었다.
우리는 곧바로 공동 예비 감사보고서의 두 번째 부속서를 작성했다. 제7서고의 원문과 운영 화면 사이의 차이, 자동 대리 동의 기능의 임시 정지, 귀환 예정자에게 보내야 할 안내문, 수수료 청구의 검증 필요성을 정리했다. 나는 그중에서도 적용 범위를 엄격히 구분했다. 내 서명이 확보됐다는 이유로 다른 사람의 계약까지 일괄 처리할 수는 없었다.
“다른 귀환 예정자에게도 이런 선택지를 보여 줄 수 있습니까?”
나는 마리엘에게 물었다.
“가능합니다. 다만 모든 사람의 원본 상태가 같지는 않을 겁니다.”
“그렇죠. 각자 확인해야죠.”
그날 오후 첫 번째 새 안내문이 귀환 창구에 붙었다.
[귀환을 원하지 않거나 아직 결정하지 못했다면 보류를 선택할 수 있습니다. 응답이 없다는 이유만으로 동의한 것으로 처리하지 않습니다.]
나는 그 문장을 읽고 작게 웃었다.
별것 아닌 안내문 같지만, 내겐 천계의 어떤 황금 건물보다 값져 보였다.
수로 기술자 노인도 와서 읽었다. 그는 한동안 아무 말이 없다가 내 어깨를 두드렸다.
“젊은이. 난 아직 고향에 돌아갈 문을 못 찾았소.”
“저도요.”
“그래도 이제 기다리는 동안 내 의사를 물어보겠다는군.”
“네.”
그는 환하게 웃었다.
“그거면 오늘은 됐소.”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노인이 떠난 뒤 피코가 내게 물었다.
“도윤 님은 아쉽지 않으세요? 바로 돌아갈 수도 있었잖아요.”
“아직 좌표가 확인되지 않았는데 바로 돌아갈 수 있었던 건 아니야.”
“그래도 문이 열릴 가능성은 있잖아요.”
“있지. 그걸 확인하려고 온 거고.”
나는 피코의 머리를 살짝 쓰다듬었다.
“근데 돌아갈 수 있다는 것과 지금 돌아가야 한다는 건 다르잖아.”
피코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 작은 얼굴에 안도감이 비쳤다. 나는 괜히 미안해졌다. 떠날 수도 있는 사람이 남아 있는 사람에게 희망을 주는 게 언제나 좋은 일은 아니다. 그래도 적어도 속이지는 않기로 했다.
“내가 언젠가 돌아가게 되면 미리 얘기할게.”
“약속이에요.”
“약속.”
우리는 손가락을 걸었다.
마왕성으로 돌아갈 준비를 하면서 나는 마지막으로 제7서고의 기록 요약본을 요청했다. 내가 실제로 가져갈 수 있는 건 승인된 사본 몇 장과 보존증뿐이었다. 휴대전화는 계속 안전하게 보관하기로 했다. 엄마의 메시지를 다시 볼 수 있는 열람권은 확보했다. 출입증의 신분란도 고쳐졌다.
하나하나 아주 작은 변화다. 그런데 그 작은 변화가 없었다면 나는 여전히 남이 만든 계약서에 끌려다녔을 것이다.
공식 기록을 끝낸 뒤 나는 제7서고 뒤뜰로 잠깐 나왔다. 해 질 무렵인데도 하늘은 여전히 밝았다. 여기서는 해가 어디로 지는지 알 수 없었다. 별로 중요하지 않은 질문 같지만, 돌아갈 날짜를 생각하면 괜히 자꾸 시간에 신경이 쓰였다.
세라핀이 내 옆에 섰다.
“귀환을 당장 요청하지 않으실 줄은 몰랐습니다.”
“왜요?”
“고향에서 가져온 물건을 보신 뒤에는 마음이 급해지실 줄 알았어요.”
“급하죠. 지금도 급해요.”
나는 난간에 팔꿈치를 걸쳤다. 아래쪽 구름 사이로 아주 먼 곳의 성벽이 희미하게 보였다. 마왕성이었다. 거기에도 오늘 저녁 식사가 차려지고 있겠지.
“그런데 제가 먼저 묻고 싶은 게 있어요.”
“말씀하십시오.”
“귀환 문이 열린다고 해도 정말 제가 원하던 지구의 그날로 돌아갈 수 있는 겁니까? 아니면 돌아간 뒤에 모든 게 사라져 있으면요?”
세라핀은 곧장 대답하지 않았다. 잠시 생각하더니 말했다.
“현재 확인된 기록만으로 도착 시점을 장담할 수 없습니다.”
“그렇죠.”
나는 웃었다. 오늘 들은 말 중 가장 반가운 대답이었다. 신성한 존재가 거창한 약속을 하지 않고 모른다고 인정한다. 이 정도면 꽤 믿을 만한 동료다.
“그렇다고 돌아가지 않겠다고 결정한 건 아닙니다. 도착 조건이 확인되면 그때 다시 선택하고 싶어요.”
“귀환 보류는 권리를 포기하는 것이 아닙니다.”
“맞아요. 그걸 확인하려고 여기까지 왔잖아요.”
피코가 멀리서 우리를 향해 손을 흔들었다. 루시아는 뒤에서 그 녀석에게 검술 자세를 가르치고 있었다. 피코 손에는 나뭇가지가 들려 있었다.
“저 둘은 왜 저러죠?”
“여기는 안전한 장소 아닙니까?”
“안전하다고 공부를 안 시켜도 된다는 뜻은 아니거든요.”
나는 피코를 불렀다. 녀석은 나뭇가지를 내려놓고 달려왔다.
“도윤 님! 제가 루시아 님한테 세 번이나 졌어요!”
“당연하지. 넌 회계 직원이잖아.”
“그래도 한 번은 이기고 싶어요.”
“그럼 계산으로 이겨.”
“계산이요?”
“훈련 비용을 청구해. 저 기사님이 내일도 가르쳐 주실지 먼저 물어보고.”
피코가 눈을 반짝였다. 루시아가 멀리서 얼굴을 찌푸렸다.
“전투의 값을 금화로 셀 셈이냐!”
“근무시간이면 당연히 세죠!”
서로 목소리가 닿지 않을 만큼 떨어져 있었지만, 나는 그 말에 웃음이 터졌다. 내가 여기에 와서 만든 것 중 가장 큰 변화는 장부가 아닐지도 모른다. 일하는 사람이 자기 시간을 공짜로 넘기지 않아도 된다는 감각. 그런 것이었다.
잠시 뒤 작은 쪽지 한 장이 전송되어 왔다. 제르칸이 보낸 것이었다.
[귀환 관련 보고는 귀성 후 설명하라. 그리고 네가 없는 동안 몰트가 본왕의 망토 예산을 삭감했다. 항의한다.]
나는 쪽지를 보며 한숨을 쉬었다.
돌아갈 곳이 두 군데라는 건 행복한 일일까, 피곤한 일일까.
아마 둘 다겠지.
그래도 남의 손으로 정해진 일정 때문에 어느 한쪽을 포기하고 싶지는 않았다. 그건 내가 처음 왕궁에서 무급 계약을 거절하던 날부터 같은 생각이었다.
나는 마왕에게 답장을 보냈다.
[망토 예산 삭감은 정당합니다. 추가 사유가 있으면 증빙을 첨부해 주세요. 저녁은 먹었습니다.]
즉시 답장이 왔다.
[냉정한 놈. 그래도 무사히 돌아오너라.]
나는 한동안 그 글자를 바라봤다.
악의 화신이라는 사람도 직원 귀환을 기다린다. 그런데 세상을 구한다는 사람들은 내가 동의했는지 확인도 하지 않고 일정을 확정했다. 누가 선하고 누가 악한지 정말 쉬운 문제가 아니다.
이 생각을 누구에게 말하면 또 회계 장부를 가져와 설명할지도 모르겠다.
그때 바람이 불었다. 옷깃이 흔들렸다. 멀리서 아우렐이 손을 흔들었다. 원본 대조 결과가 나온 모양이었다.
잠시 뒤 마리엘이 서둘러 다가왔다.
“한도윤 씨. 원본 대조 과정에서 한 가지 더 발견했습니다.”
“이번에는 뭔가요?”
그녀는 오래된 기록 한 장을 보여 줬다.
[송-4189 예비 등록]
[권리 보존 요청자: 비공개]
[대리번호 0003]
[원문 작성 언어: 한국어]
나는 고개를 갸웃했다.
“한국어로 작성됐다고요?”
“네. 번역 마법으로 한국어처럼 보이는 게 아니라 원래 입력 언어가 그렇다는 뜻입니다.”
나는 종이를 다시 봤다.
내가 소환되기도 전에 누군가 한국어로 서류를 작성했다.
그럴 수 있나?
아니, 누군가 미리 한국어를 알고 있었다면 가능하겠지. 하지만 그 사람이 누구인지는 아직 확인되지 않았다.
마리엘이 마지막으로 봉투 하나를 내밀었다.
“원문 일부는 아직 봉인돼 있지만, 작성자에게 남겨진 안내 문구만은 확인됐습니다.”
나는 봉투를 펼쳤다.
아주 짧은 글이었다.
[당사자가 직접 선택하기 전까지, 누구도 귀환을 대신 결정하지 못하게 할 것.]
나는 한참 그 문장을 바라봤다.
내 이름으로 대리 동의를 처리한 사람과, 내 선택권을 지키라고 적어 둔 사람.
둘이 같은 사람일까?
아니면 서로 다른 사람이 이 계약을 두고 싸우고 있었던 걸까?
아직은 모른다.
다만 분명해진 게 하나 있었다.
내가 이세계에 떨어진 건 단순한 우연이라고만 보기에는 이상한 기록이 너무 많다는 사실.
나는 봉투를 접었다.
“좋아.”
피코가 내 얼굴을 올려다봤다.
“뭐가요?”
“돌아갈 길을 찾는 일은 계속하자.”
그리고 조용히 덧붙였다.
“누가 내 이름으로 이 모든 서류를 만들었는지도.”
천계 출장의 최종 성과는 어쩌면 바로 그거였다.
집에 돌아갈 가능성을 확인했지만, 남이 정한 날짜에 끌려가지 않게 된 것.
그리고 처음으로 내 계약서에 내 이름을 내가 직접 쓴 것.
마왕성에 취업하고 나서 가장 값진 결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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