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왕 제르칸이 천계 출장비를 결재했다.
이 말을 들으면 사람들은 웃을 것이다. 마왕이 하늘나라 영수증에 서명하다니, 농담도 정도가 있지. 하지만 나는 실제로 서류를 들고 있었다. 그 위에는 검은 인장이 선명하게 찍혀 있었다.
[제7서고 공동조사 추가 체재비]
[승인 한도: 금화 3닢]
[승인자: 마왕 제르칸]
처음 신청한 출장비는 금화 여덟 닢이었다. 그런데 조사 시간이 늘어나 숙박과 자료 보존 비용이 추가됐다. 비용 지출이 확정된 건 아니었지만, 한도를 늘리려면 사전 승인이 필요했다. 나는 마왕성에 전송문을 보냈고, 제르칸은 뜻밖에도 아주 빠르게 답했다.
[직원 안전을 최우선으로 하라. 본왕의 위엄을 천계에 널리 알리라.]
앞부분은 좋다. 뒷부분은 지우고 싶다.
“전하께서 후원해 주셨군요.”
세라핀이 인장을 보고 말했다.
“후원이 아니라 출장비 승인입니다.”
“차이가 있습니까?”
“네. 후원은 선의를 강조하지만 출장비는 업무 수행에 필요한 지출입니다.”
“그렇군요.”
그녀는 고개를 끄덕였다. 천계에 와서 사절단 대표에게 법인카드 사용법을 가르치는 날이 올 줄은 몰랐다.
마왕성에서 함께 온 피코는 정산서를 열심히 작성했다. 숙박비는 인원별로 나눴고, 복사비는 실제 복사 장수만 기록했다. 루시아는 자신이 먹은 구름빵 세 개를 빠뜨렸다고 말했지만, 그건 공식 식대 한도 안의 간식이었다. 문제는 루시아가 구름빵을 먹고 나서 하얀 빛을 내는 날개 모양 장식을 하나 사겠다고 한 것이다.
“기념품은 개인 돈으로 사셔야 합니다.”
“이걸 착용하면 적들이 두려워할 텐데?”
“그럼 기사단 장비 예산으로 별도 신청하세요. 적이 실제로 무서워하는지 근거도 있어야 하고요.”
루시아가 물건을 내려놓았다.
“너랑 여행하면 돈 쓸 틈이 없다.”
“좋은 평가 감사합니다.”
그런 사소한 소동을 끝내고 우리는 긴급 공동회의에 참석했다. 제8보존실에서 발견된 변경 승인 금속판, 유니아가 제출한 화면 시험 기록, 보존위원회가 확보한 접근 로그가 의제였다.
마리엘이 먼저 말했다.
“오늘 오전 자동결재 구슬에서 원본 접근 승인이 발생했습니다. 현재 로그만으로 실제 명령자의 신원은 확인되지 않습니다.”
“그럼 기계가 자동으로 열어 준 걸 수도 있겠군요.”
아우렐이 물었다.
“가능합니다. 하지만 사람이 원격으로 명령을 내렸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습니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우선 승인 계정의 권한부터 정리합시다. 권한과 실제 사용자를 동일시하면 안 됩니다.”
내가 말을 마치자 루시아가 손을 들었다.
“그러면 대리번호 0003을 체포하면 안 된다는 뜻인가?”
“번호는 체포할 수 없어요.”
“구슬을 압수하면?”
“그건 증거 보존 절차에 따라 가능합니다.”
루시아가 아주 만족스럽게 고개를 끄덕였다. 적어도 물리적으로 할 수 있는 일이 생겼다.
우리는 문제가 된 자동결재 구슬을 즉시 파괴하지 않고 접근 권한 일부를 정지하기로 했다. 그러나 운영 중인 귀환 접수와 물품 보존까지 한꺼번에 멈추면 사람들이 피해를 볼 수 있었다. 특히 0층 창구에 대기 중인 귀환 예정자들에게는 보존 기한 확인이 중요했다.
“정지 범위를 정확히 해야 합니다.”
나는 지도처럼 펼쳐진 마법 장치 연결도를 가리켰다.
“자동 동의 생성 기능과 미확인 수수료 청구 기능은 수동 검토로 돌리고, 본인 신청 접수와 기본 기록 보존은 유지합시다.”
마리엘이 고개를 끄덕였다.
“가능한지 기술팀과 확인하겠습니다.”
네르온이 호출됐다. 지난번 천계 관문의 정비 횟수와 청구 기록을 대조해 줬던 바로 그 정비사였다. 그는 장치를 꼼꼼히 살펴본 뒤 말했다.
“보존 회로와 승인 회로는 분리 가능합니다. 다만 예전 연결선 한 곳이 공용입니다.”
“분리하면 정전됩니까?”
“일시적으로 관련 창구의 인증 속도가 느려질 수 있습니다.”
“그럼 예비 창구를 열어야겠네요.”
“사람이 필요합니다.”
세라핀이 손을 들었다.
“천계 직원 두 명을 임시 배치하겠습니다.”
에브란도 중립 공관에서 기록 검증 인원을 지원하기로 했다. 왕국에서는 아레인이 서류 판본 대조를 맡겠다는 전송문을 보냈다. 마왕성에서는 몰트가 외부 지급 원장을 확인하기로 했다.
묘한 광경이었다. 서로 적이라고 불리던 진영들이 구슬 하나의 잘못된 버튼을 고치기 위해 인력을 나눠 내고 있었다. 처음 이 세계에 왔을 때 누가 이런 장면을 보여줬다면 나는 사기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네르온은 작업 전 모든 상태를 복제했다. 우리는 시간과 담당자를 기록했고, 에브란이 입회했다. 장치가 잠깐 어두워졌다가 다시 밝아졌다.
[자동 대리 동의: 임시 중지]
[비승인 수수료 청구: 검토 대기]
[본인 접수 및 기본 보존: 정상]
피코가 양손을 번쩍 들었다.
“됐어요!”
“임시 조치는 됐어.”
내가 바로잡았다.
“아직 원인도, 과거 기록에 미친 영향도 다 확인한 건 아니야.”
피코는 고개를 끄덕였다.
“네. ‘조치 완료’가 아니라 ‘임시 차단 완료’라고 적을게요.”
나는 피코가 적은 처리 내역을 다시 읽었다. 단어 하나가 걸렸다.
[자동 승인 중지]
“피코, 이건 중지 말고 신규 자동 승인 중지라고 적자.”
“왜요? 중지된 건 맞잖아요.”
“기존 승인 건이 사라졌다는 뜻으로 오해할 수 있으니까.”
그는 문장을 다시 썼다.
[신규 자동 승인 일시 중지. 기존 승인 및 지급 이력은 별도 조사.]
“이렇게요?”
“완벽해.”
말로는 간단하다. 하지만 실제로는 아주 큰 차이다. 잘못된 절차를 멈추는 순간 사람들이 이미 입은 피해가 자동으로 회복되는 건 아니다. 재심사를 받고 싶어도 기록이 없어 어려운 사람도 있을 것이고, 이미 돈을 냈지만 증빙을 잃어버린 사람도 있을 것이다.
“그 사람들은 어떻게 하죠?”
피코가 물었다.
“자료를 모으고 신청을 받아야겠지. 누락이 없도록 접수창구도 필요하고.”
“일이 많네요.”
“그러게. 이젠 마왕성 말고 천계에서도 야근하겠다.”
피코가 웃었다. 나는 웃기만 할 수는 없었다. 중지 조치가 진짜 성과가 되려면 복구 절차까지 길을 내야 한다. 누군가 나중에 ‘그때 잘못된 걸 알면서 왜 그냥 뒀느냐’고 묻지 않도록.
좋다. 네가 내 후임이다. 정식 발령은 아직 없지만 마음속으로는 이미 정했다.
임시 차단 조치를 확인하는 동안 다른 문제가 생겼다. 자동결재 구슬을 멈추자 귀환 서류의 접수 속도도 함께 떨어지기 시작한 것이다. 대기실에서 불평이 터졌다.
“접수번호가 왜 안 나옵니까?”
“오늘 안에 확인받아야 하는데요!”
나는 창구 앞으로 나갔다. 상기된 얼굴의 천사들이 줄을 서 있었다. 어떤 사람은 어린아이의 손을 잡고 있었고, 어떤 사람은 낡은 보관증을 들고 있었다. 이들 중 대다수는 `0003`이라는 번호를 들어 본 적도 없을 것이다. 시스템을 만드는 사람의 편의를 위해 만들어진 코드 때문에 사람들이 하루를 통째로 잃고 있었다.
“접수 자체는 멈추지 않았습니다. 순서대로 확인하겠습니다.”
누군가 물었다.
“당신은 누구인데 그렇게 말합니까?”
정당한 질문이었다. 천계 직원도 아닌 내가 나서서 으스대면 곤란하지.
“저는 공동조사 방문자 한도윤입니다. 접수 창구는 이쪽 관리관이 책임집니다.”
나는 마리엘을 소개했다. 그녀는 한 발 앞으로 나와 임시 수기 접수 방법을 설명했다. 인원이 몰리는 동안 아우렐은 접수 시각을 기록했고, 피코는 대기 번호를 순서대로 나눠 주었다. 루시아는 처음에 자기 검으로 줄을 곧게 세워 주겠다고 했지만, 내가 정중하게 사양했다.
“줄을 세울 때 검을 쓰는 직장은 대체 어디입니까?”
“군대.”
“아, 그랬지.”
그렇게 두 시간이 흘렀다. 손이 아팠다. 천계에서 회계감사하러 왔다가 번호표 발권기 대체 인력이 되다니. 내가 분명 보고서에 ‘기타 잡무’ 항목을 추가해 둬야겠다.
마지막 접수자가 자리를 뜬 뒤, 마리엘이 말했다.
“이 정도면 수동 처리로 버틸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오늘은요. 앞으로 계속하려면 인력이 필요합니다.”
세라핀이 고개를 끄덕였다.
“추가 직원 배치를 요청하겠습니다.”
“좋습니다. 그리고 접수 대기 시간이 길어졌다는 사실을 기록에 남겨 주세요. 문제를 고치다가 생긴 불편까지 없는 일처럼 만들면 안 됩니다.”
마리엘은 내 말에 펜을 멈췄다.
“그렇게 적으면 제 실적이 나빠질 텐데요.”
“그럴 수도 있죠. 하지만 실제로 불편을 겪은 사람들 입장에서는 이미 일어난 일이잖아요.”
그녀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좋은 사람들은 대개 엄청난 결심보다 작은 인정 하나로 달라지곤 한다. 물론 그게 항상 쉬운 건 아니다.
피코는 수기 대장의 마지막 줄에 합계 숫자를 적었다. 접수 건수와 배포 번호표가 일치했다. 그는 조용히 웃었다.
“오늘은 숫자가 다 맞아요.”
“그러네. 수고했다.”
“저 어제까지만 해도 천계에 오면 천사들이 다 해 줄 줄 알았어요.”
“나도 그랬어.”
“그런데 우리가 더 많이 일한 것 같아요.”
그건 굳이 계산하지 않아도 맞는 말이었다. 나는 피코의 머리를 한번 쓰다듬었다.
막 돌아서려는데 대기실에 혼자 남아 있던 아이가 내 소매를 잡았다. 보호자를 기다리는 모양이었다.
“아저씨, 오늘 문 닫아요?”
“아니. 서류 창구만 잠깐 바꾼 거야.”
“우리 엄마가 어디로 갔는지 아직 모르는데.”
내가 할 수 있는 말은 많지 않았다.
“여기 직원들이 기록을 찾아볼 수 있도록 도와줄 거야. 오늘 받은 번호표는 꼭 가지고 있어.”
아이는 번호표를 꼭 쥐었다. 루시아가 멀리서 그 모습을 지켜봤다. 그녀는 검 손잡이를 놓고 아이에게 자기가 쓰던 작은 빵 봉지를 건넸다.
나는 그 광경을 보고 조금 웃었다. 마왕성에서 보낸 기사 한 명이 천계 대기실에서 아이에게 빵을 나눠 주고 있었다. 세상이 이렇게 뒤집히기도 하는구나.
그때 수로 기술자 노인이 창구에 나타났다. 보존료 청구서를 들고 있었다.
“내가 내야 한다던 새 비용이 없어졌소.”
마리엘이 명세서를 확인했다. 과거에 낸 열 번의 금액이 환급된 건 아니었다. 다만 새로운 자동 청구가 ‘검토 대기’로 바뀐 상태였다.
“어르신, 아직 돈을 돌려받으신 건 아닙니다.”
내가 말했다.
“알아요. 그래도 이번에는 설명 듣고 결정할 수 있잖소.”
노인이 웃었다.
그 미소를 보니 이상하게 기분이 좋았다. 왕국을 구한 것도, 천계를 뒤집은 것도 아니다. 사람 하나가 무슨 돈을 왜 내는지 물어볼 수 있게 됐을 뿐이다. 하지만 그게 정말 중요했다.
회의가 끝나자 마리엘이 나를 따로 불렀다.
“한도윤 씨의 귀환 예약에도 같은 자동결재 경로가 연결돼 있었습니다.”
“그럼 제 예약도 수동 검토로 전환됐습니까?”
“네. 본인 의사 확인 전에는 자동으로 확정되지 않습니다.”
나는 숨을 길게 내쉬었다.
이제 적어도 갑자기 귀환 문으로 끌려갈 걱정은 줄었다. 물론 실제로 그런 일이 가능했는지도 아직 모르지만, 기록상 자동 승인이 멈췄다는 사실만으로도 조금은 안심됐다.
“감사합니다.”
마리엘이 미소 지었다.
“오늘 수고하셨습니다.”
“아직 끝난 건 아니죠.”
“그렇습니다. 내일 귀환 권리의 최종 확인 절차가 남았습니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때 피코가 다가왔다.
“도윤 님, 왕국에서 전송문이 왔어요.”
“무슨 일인데?”
“라델 씨가 보내셨어요. 도윤 님 지명수배 문서의 집행이 공동조사 기간 동안 정지됐고, 정식 취소 여부는 아직 심사 중이래요.”
나는 웃었다.
“좋네. 적어도 하늘에서 내려가다가 잡힐 일은 줄겠구나.”
피코도 웃었다. 루시아는 여전히 날개 모양 기념품을 아쉬워하고 있었다.
하지만 나는 잠시 뒤 마리엘의 마지막 설명을 떠올렸다.
귀환 권리의 최종 확인.
내가 정말로 지구로 돌아갈 수 있다면 어떡하지.
엄마의 문자가 떠올랐다. 밥은 꼭 먹고 다니라고 했던 그 한 줄.
그리고 마왕성의 피코와 몰트, 제르칸, 루시아의 얼굴도 떠올랐다.
서류로는 간단한 선택처럼 보일지 모르지만, 실제로는 어느 쪽도 쉽게 지울 수 없는 삶이었다.
나는 출입증을 가슴 주머니에 넣었다.
“좋아. 내일은 내 선택을 직접 확인하자.”
그날 밤, 마왕성에서 마지막 전송문 하나가 도착했다.
[제르칸 전하: 천계 출장 식대는 제대로 챙겨 먹고 있느냐?]
나는 그 문장을 세 번 읽었다.
마왕이 직원 밥을 걱정한다.
아이고, 세상이 정말 많이 변했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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