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로운 작품, 이어지는 이야기 · 페이루아에서 다음 페이지를 만나보세요
작품으로마왕성에 취업했더니 내가 제일 무섭단다 · 69화
PAYLUA ORIGINAL · 제69화

69화. 거절 버튼이 사라졌습니다

마왕성에 취업했더니 내가 제일 무섭단다 · 6,188자

오프라인 책장
내가 마왕성에 와서 가장 많이 사용한 단어는 세 가지다. 확인. 증빙. 그리고 거절. 이쯤 되면 사람들은 내가 무엇이든 거절하는 인간이라고 생각할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생각해 보라. 세상에는 거절해서는 안 되는 부탁도 있고, 거절할 권리가 반드시 있어야 하는 부탁도 있다. 예를 들어 내가 아픈데 병원에 가겠다는 걸 누가 거절한다면 곤란하다. 반대로 누군가 내 이름으로 목숨을 건 계약을 체결하려 한다면, 내가 거절할 수 있어야 한다. 그 간단한 원칙을 증명하는 데 무려 이토록 긴 싸움이 필요했다. “도윤 님! 중복 통행료가 다시 청구됐어요!” 피코가 뛰어 들어왔다. “지난번 보류 신청 넣었잖아.” “넣었어요. 접수증도 있어요!” 그가 종이를 펄럭였다. [청구 취소 요청 접수] [접수 시각: 오전 9시 12분] 그런데 같은 계약에는 다른 기록이 붙어 있었다. [자동 갱신 완료] [처리 시각: 오전 9시 13분] 딱 1분 차이. 신청서는 사람 손으로 접수됐고, 갱신은 기계가 처리한 셈이다. “어떤 장치가 갱신했지?” 피코가 지도를 펼쳤다. “중립 보관소 뒤편에 있는 자동 인장 구슬이요.” 우리는 몰트와 루시아를 데리고 곧장 중립 보관소로 향했다. 천계 사절단도 같은 장치의 수수료를 조사하던 중이라 합류했다. 세라핀은 성을 나서기 전 자신들이 원본을 만지지 않겠다고 서약했다. “그렇게까지 하실 필요가 있습니까?” 내가 물었다. “나중에 저희가 증거를 바꿨다는 의혹을 받지 않으려면 필요합니다.” 훌륭하다. 천계 사절단에 호감이 가기 시작했다. 물론 사람을 좋아하는 것과 그 사람이 내 계약을 해명해 줄 수 있다고 믿는 건 다른 문제다. 보관소 뒷마당에는 돌로 만든 둥근 탑이 있었다. 그 아래에 오래된 구슬 여섯 개가 돌아가고 있었다. 각 구슬에는 작은 글씨로 계약 상태가 떠 있었다. [유효] [갱신] [보류] [유효] [유효] [갱신] “보류 상태도 있네요.” 피코가 말했다. “그렇네. 그럼 기계가 보류를 전혀 못 하는 건 아니군.” 우리는 장치 관리자 토베르를 불렀다. 그는 전에 공용 구슬 지시를 받아 서류를 반출하려다 문제가 됐던 직원이다. 그 후로도 자기 잘못이 아닌 일을 뒤집어쓸까 봐 늘 불안해하고 있었다. “저는 아무것도 안 눌렀습니다!” “그럴 수 있습니다. 그래서 기록을 보러 왔어요.” “정말 저를 벌주려는 게 아닙니까?” “현재로선 그럴 근거가 없습니다.” 그제야 토베르는 구슬의 관리 기록을 펼쳐 주었다. 마법 장치의 핵심 기능은 단순했다. 계약 기간이 끝나면 다음 기간으로 갱신할지 확인한다. 권리자가 동의하면 갱신하고, 거절하면 보류한다. 아무 응답이 없으면 기다린다. “정상이네요.” 내가 말했다. 그런데 사용자가 보는 화면은 달랐다. [계약 갱신] [대리 갱신] [자동 처리] 거절 항목이 보이지 않았다. “왜 거절이 없죠?” 토베르가 어깨를 움츠렸다. “언젠가부터 그렇게 됐습니다.” “언제부터요?” “조직 통합 뒤였습니다. 예전에는 아래쪽에 붉은 버튼이 있었는데, 화면이 바뀌면서 사라졌어요.” 아. 이제야 알겠다. 원래 장치에는 거절 기능이 남아 있을지 모른다. 그런데 사용자 화면에서 거절 버튼을 감춰 버리면 대부분의 직원은 그 기능이 있다는 것조차 알 수 없다. 겉으로는 자동화다. 실제로는 선택지 하나를 없앤 것뿐이다. “옛 화면 기록이 있습니까?” 토베르가 낡은 도면을 꺼냈다. 붉은 버튼이 분명 그려져 있었다. 그 옆에는 작은 설명이 적혀 있었다. [당사자 거절 또는 확인 불능 시 집행 유예] “이 도면은 누가 승인했습니까?” “제8호 공방에서 만들었다고 들었습니다.” 메르넬이 증언한 옛 도면이었다. 그러면 원래 설계에는 거절 버튼이 있었다. 그런데 실제 장치는 다른 화면을 사용하고 있었다. 우리는 최신 화면의 변경 이력을 요청했다. [화면 변경 승인: 제3교역 감독관] [변경 사유: 이용 편의 개선] 이용 편의 개선. 나는 한숨을 쉬었다. 세상에서 제일 무서운 말 중 하나다. 누군가 사용자 편의를 개선한다면서 사용자에게 필요한 기능을 삭제한다. 그리고 문제가 발생하면 ‘원래 그런 기능은 없었다’고 설명한다. “이걸 다시 돌릴 수 있습니까?” 내가 묻자 토베르가 고개를 저었다. “관리자 권한이 필요합니다.” “누가 갖고 있죠?” “제3교역 감독관이라고 적혀 있습니다.” 그 이름 없는 사람은 죽지도 않고 계속 나온다. 이쯤 되면 사람이라기보다 시스템 오류의 화신 같다. 세라핀이 화면 가까이 다가왔다. “저희 관문에도 비슷한 장치가 남아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럼 천계에서도 거절 버튼이 없어졌을까요?” “확인해야 합니다.” “좋습니다. 다만 이 장치부터 멈춰야겠네요.” 문제는 이 구슬이 단순 계약 갱신만 하는 게 아니라 보급 거점의 보호 구슬과도 연결돼 있다는 점이었다. 아무 생각 없이 전원을 꺼 버리면 어제 겨우 복구한 안전장치가 다시 멈출 수 있었다. “부숴 버리면 안 되나?” 루시아가 물었다. “안 됩니다.” “그럼 검으로 연결선만 자르면?” “그것도 안 됩니다.” “그럼 내가 왜 왔지?” “호위요.” 루시아는 입술을 삐죽였다. 하지만 금방 다시 주변을 살폈다. 전투광이라도 맡은 일이 호위라면 충실하게 해내는 사람이다. 우리는 장치를 끄는 대신 잘못된 자동 갱신 구간만 임시 수동 검토로 돌리기로 했다. 토베르는 담당 직원 두 명과 함께 구슬 하나를 분리했고, 아우렐이 그 과정을 기록했다. 몰트는 마계 측 비용 계정을, 라델은 왕국 측 지급 계정을 동결해 중복 청구가 실제 지급되지 않도록 했다. “이제 끝났습니까?” 피코가 물었다. “아직. 테스트를 해봐야지.” 테스트 대상은 실제 계약이 아니라 별도의 빈 연습 계약이었다. 누구에게도 비용이 청구되지 않고, 권리자가 누구인지도 존재하지 않는 문서였다. 우리는 먼저 갱신을 눌렀다. 정상적으로 갱신됐다. 다음에는 거절을 눌렀다. 보류로 변경됐다. 마지막으로 응답하지 않고 기다렸다. 그런데 여기서 문제가 발생했다. 아무도 버튼을 누르지 않았는데 갱신 완료 표시가 뜬 것이다. “이건 왜 이러지?” 토베르가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우리는 기록을 다시 봤다. [미응답 처리: 대리 동의] [대리 처리 권한: 0003] “미응답이 어떻게 동의가 됩니까?” 피코가 따졌다. “원래는 안 됩니다.” 에브란이 단호하게 대답했다. “평화 협약 부속서에서도 확인 불능은 유예라고 명시돼 있습니다.” 그 말에 회의실이 조용해졌다. 지금까지 우리는 서류끼리 맞지 않는 기록을 추적했다. 하지만 이번에는 직접 눈앞에서 장치가 권리자 없는 계약을 갱신했다. 누가 악의적으로 만들었는지는 아직 모른다. 그래도 이 동작이 잘못됐다는 사실만큼은 확인됐다. “피코, 테스트 기록 저장해.” “네!” “토베르 씨, 관리자 권한으로 원본을 덮어쓰지 마시고 현재 상태를 보존해 주세요.” “알겠습니다.” “세라핀 대표님, 천계 장치에도 같은 문제가 있는지 따로 확인해 주시겠습니까?” “물론입니다.” 시험을 끝내고 나서는 실제 계약을 사용하는 직원들에게 먼저 알릴 내용을 정해야 했다. 잘못된 갱신을 바로잡는다고 계약 전체를 없애 버리면, 국경에서 일하는 사람들이 갑자기 보호를 잃을 수도 있었다. “그럼 당사자에게 어떤 통지를 보내야 합니까?” 토베르가 물었다. “우선 계약 상태가 확인 중이라는 사실부터 알려 주세요. 그리고 지금까지 제공되던 필수 서비스는 임시로 유지된다는 점도요.” “누가 책임진다고 적죠?” 라델이 중립 공관 쪽을 바라봤다. “각 기관이 책임질 범위는 공동 합의서에 적겠습니다.” 나는 종이에 세 구획을 만들었다. 이미 제공된 서비스, 지급을 보류할 청구 항목, 당사자에게 재확인할 동의 기록. 한 문서에 섞으면 누군가 ‘계약 보류’를 ‘식량 공급 중단’으로 오해할 수 있었다. 토베르는 우리 앞에서 시험 통지문을 작성했다. [귀하의 계약은 현재 원본 확인 중입니다. 별도 서명이나 동의가 확인되지 않은 자동 갱신은 재검토합니다. 기본 안전 보호 서비스는 공동 임시 운영 협약에 따라 유지됩니다. 이의를 제기하려면 중립 접수창구를 이용하십시오.] “너무 길지 않습니까?” 그가 물었다. “길지만 필요한 내용은 들어 있습니다. 대신 읽기 쉬운 요약문도 붙이죠.” 피코가 짧은 문장을 제안했다. [동의하지 않은 계약은 다시 확인합니다. 그동안 필수 서비스는 끊기지 않습니다.] 나는 엄지를 들어 보였다. 피코가 이제 회계 담당자뿐 아니라 안내문 작성자로도 성장하는구나. 우리 회사 홍보팀에 보내면 좋아하겠지만, 그건 또 인력 유출이다. 첫 통지 대상은 검문소 야간 경비 계약의 당사자였다. 그는 긴장한 얼굴로 구슬 앞에 섰다. “제가 계약을 거절하면 당장 직장을 잃습니까?” “아직 그렇게 결정된 건 없습니다.” 라델이 대답했다. “현재 제공 중인 업무와 과거 자동 갱신의 동의 여부를 구분해 확인할 겁니다.” 경비병이 천천히 숨을 내쉬었다. “그럼 제 이름으로 누가 대신 동의했는지도 알 수 있습니까?” “아직 조사 중입니다. 원본 요청은 접수할 수 있습니다.” 그는 한참 망설이다가 신청서를 작성했다. 손끝이 떨렸지만 서명을 마쳤다. 이번에는 그가 직접 펜을 잡았다. 나는 조용히 말했다. “지금은 그게 제일 중요합니다.” 토베르는 우리를 번갈아 보더니 갑자기 고개를 숙였다. “저도 예전에는 자동으로 갱신됐다는 말을 그냥 믿었습니다.” “그럴 수 있죠.” “사람들한테 물어보지 않았습니다.” “그건 앞으로 바꾸면 됩니다.” 나는 그에게 지난 기록을 보존하는 방법을 다시 설명했다. 시스템 문제를 발견했다고 현장 직원에게 모든 책임을 돌려서는 안 된다. 그렇다고 문제를 알게 된 뒤에도 아무것도 하지 않는 건 옳지 않다. 토베르는 장치 옆에 새 안내문을 걸었다. [권리자 응답 없음 = 자동 동의 아님] 짧은 문장이었다. 그런데 그 한 줄을 붙이는 데 왕국과 마계와 천계의 서명이 필요했다. 정말 대단한 세상이다. 우리는 각자 서명했다. 왕국, 마계, 천계, 중립 공관. 원래 서로 싸우던 사람들이 작은 구슬 앞에서 같은 문서를 보는 광경이었다. 나는 주변의 얼굴을 하나씩 살폈다. 누군가는 서둘러 기계를 멈추고 싶어 했고, 누군가는 기록을 지우면 책임을 피할 수 있을까 걱정하는 듯했다. 하지만 오늘 가장 중요한 건 누가 잘못했는지 곧장 결론을 내리는 일이 아니었다. 같은 오류가 반복되지 않게 막고, 이미 영향을 받은 사람들에게 알려 주는 일이었다. 그걸 하지 못하면 우리는 또 다른 잘못된 서류만 만들 뿐이다. 그때 성검이 갑자기 뜨겁게 달아올랐다. [대리 동의 경로 식별] [당사자 거절권 보존 요청 대기] “이번엔 드디어 도움이 되는 소리네.” 내가 중얼거리자 검이 한 번 반짝였다. 그런데 곧 새로운 문구가 나타났다. [동일 경로로 처리된 계약: 다수] [권리자 통지: 미실시] 나는 입을 다물었다. 한 건이 아니다. 이 방식으로 처리된 사람이 더 있다는 뜻일 수 있다. “오늘은 여기까지만 하자.” 나는 모두에게 말했다. “아무도 확인하지 않은 계약을 일괄 취소하지는 않겠습니다. 당사자를 찾고, 통지하고, 실제 피해부터 막죠.” 피코가 고개를 끄덕였다. 해 질 무렵 토베르는 시험 구슬을 다시 확인했다. 수동 검토로 돌린 뒤에는 미응답 계약이 임의 갱신되지 않았다. 우리는 그 결과를 별도 저장했고, 이전 자동 갱신 기록은 건드리지 않았다. “그럼 오늘은 고친 겁니까?” 토베르가 물었다. “당장 같은 오류가 반복되지 않게 막은 거죠. 근본 원인은 아직 못 찾았습니다.” “그걸 보고서에도 적어야겠죠?” “네. 임시 조치와 완전한 해결은 다르니까요.” 그는 크게 고개를 끄덕였다. 실무자가 가장 듣고 싶은 말 중 하나는, 임시로 막아놓은 장애를 영구 해결했다고 보고하지 않아도 된다는 것이다. 나도 그 마음을 너무 잘 안다. 보관소 밖으로 나오자 저녁 바람이 차갑게 불었다. 루시아가 내게 물었다. “그럼 누가 이런 짓을 한 거냐?” “아직 몰라요.” “언제 알 수 있지?” “증거가 충분해지면요.” 그녀는 한숨을 쉬었다. “검으로 싸울 적이었다면 훨씬 쉬웠을 텐데.” 나는 웃었다. “저도 그랬으면 좋겠습니다.” 그 순간 중립 공관에서 급한 전송이 도착했다. [공동 청문회 긴급 개최 요청] [사유: 무응답 대리 동의로 처리된 계약 목록 발견] 목록의 첫 줄에는 익숙한 이름이 있었다. [한도윤] 아이고. 내가 왜 여기 있나 했더니, 계약서에도 아주 성실하게 출근해 있었네.

PAYLUA 소설 본문은 인쇄가 제한되어 있습니다.

제69화 끝

읽은 위치는 이 브라우저에 저장되며 로그인 중에는 계정에도 동기화됩니다.
READER DISCUSSION

제69화 댓글 0

댓글·공감·신고는 로그인 후 이용할 수 있습니다. 이전 익명 댓글은 그대로 표시됩니다.

댓글을 남기려면 로그인해 주세요.로그인회원가입

댓글을 불러오는 중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