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쟁으로 돈을 번다는 말은 흔하다.
무기를 파는 상인이 돈을 벌고, 말먹이를 납품하는 업체가 돈을 벌고, 전쟁이 길어질수록 장군의 명성이 높아지기도 한다.
하지만 전쟁을 *끝내지 않는 것*만으로 돈을 벌 수 있다면?
그건 좀 다른 문제다.
나는 피코가 발견한 통행료 자동 갱신 기록을 들여다보다가 이상한 공통점을 찾았다.
검문소, 채석장, 보급 거점, 폐쇄된 제8호 공방.
서로 다른 거래였지만 갱신 조건에 한 줄이 반복됐다.
[분쟁 상태 유지 시 계약 기간 자동 연장]
“이거 왜 다 같죠?”
피코가 물었다.
“원래 공통 규정일 수도 있지.”
“근데 전쟁이 끝나면 어떻게 돼요?”
“그때는 갱신이 멈춰야 정상이지.”
우리는 옛 휴전 협약의 체결 시점과 자동 갱신 명세를 나란히 놓았다. 분쟁이 잠시 멈춘 해에도 갱신된 기록이 있었다. 하지만 바로 범죄라고 볼 수는 없었다. 휴전 중에도 국경 관리나 구조 장비 유지 비용은 발생하니까.
“돈이 나간다고 다 나쁜 건 아니죠?”
“그렇지. 중요한 건 실제 일을 했느냐, 누가 동의했느냐, 요금이 적정했느냐야.”
내가 설명하자 피코는 알겠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초짜 때라면 서류 한 장 보고 당장 도둑이라고 외쳤을 텐데. 기특했다.
우리는 세 건을 표본으로 골랐다. 첫 번째는 검문소의 야간 경비. 두 번째는 성벽 방호용 철제 연결대의 유지 관리. 세 번째는 이미 폐쇄된 제8호 공방의 인장 인증료였다.
“왜 하필 이 세 건입니까?”
라델이 물었다.
“각각 실제 제공 여부를 다른 방법으로 확인할 수 있으니까요.”
야간 경비는 근무표와 교대 기록으로, 철제 연결대는 현물과 수리 이력으로, 폐쇄 공방 인증료는 계약 해지와 실제 서비스 제공 기록으로 확인할 수 있다.
라델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비교 결과가 나오겠군요.”
“적어도 계약별로는요. 전체 규모는 표본만으로 단정하지 않겠습니다.”
첫 번째 조사지는 왕국과 마계의 경계에 있는 작은 검문소였다. 루시아와 라델이 함께 동행했다. 둘은 아직 서로 친하다고 보기 어려웠지만, 적어도 똑같은 시간을 서로의 시계에 적을 정도로는 가까워졌다.
“왜 꼭 제가 가야 합니까?”
라델이 물었다.
“왕국 쪽 근무표는 재무관님이 있어야 볼 수 있으니까요.”
“적국 기사단장과 같이 걷는 건 처음입니다.”
“저도 처음입니다.”
루시아가 대답했다.
“원하시면 결투를 신청하셔도 됩니다.”
“사양하겠습니다.”
우리는 검문소에 도착해 늙은 경비병을 만났다. 그가 보여 준 근무표에는 정말로 야간 경비가 적혀 있었다. 세 교대로 돌아가며 국경을 지킨단다. 교대자들의 서명과 실제 출입 기록도 대체로 맞았다.
“그럼 이 비용은 정상인가요?”
피코가 물었다.
“제공된 서비스는 확인했어. 다만 금액의 적정성과 계약 승인은 별개야.”
나는 비용을 기록했다. 오늘 본 것은 범죄 증거가 아니라 실제로 필요한 비용의 증거였다. 이런 걸 빼먹으면 감사는 사람을 괴롭히는 일이 된다.
두 번째는 성벽 방호 연결대였다. 북부 채석장에서 조사했던 그 물건이다. 처음엔 흑철 검 만 자루로 청구됐다는 황당한 기록 때문에 문제가 됐지만, 실제 일부 물품은 성벽을 버티는 철제 부품이었다.
현장 장인 도르벤이 우리를 맞았다.
“이 부품은 아직 쓰고 있소.”
그가 두꺼운 연결대를 가리켰다.
“없으면 지난겨울에 세운 벽이 흔들리지.”
“수리한 기록은 있습니까?”
“여기.”
도르벤은 그을린 장부를 내밀었다. 날짜와 작업 시간이 적혀 있었다. 사인 대신 드워프 장인의 망치 문양이 찍혀 있었다.
그런데 수리 대금 중 일부가 지급되지 않았다.
“왜 못 받으셨습니까?”
“지급처가 바뀌었다는 말만 들었소.”
“누가 바꿨습니까?”
“제3교역 감독관 승인이라고 적혔지.”
또 그 이름이다.
우리는 도르벤의 기록을 복사했다. 실제로 필요한 일이 이뤄졌다면 대금 지급을 보장해야 한다. 누가 이름 없는 계정을 이용했다고 해서 장인의 손가락이 공짜로 움직인 건 아니니까.
세 번째는 폐쇄된 제8호 공방의 인증료였다.
메르넬이 운영하는 장난감 가게에는 아이들이 북적였다. 세상에서 가장 무서운 해골 장부와 씨름하다가 이곳에 오니 숨통이 트였다. 작은 목각 인형이 선반에서 손을 흔들었다. 마법을 쓰는 장난감이었다.
“저것도 인증료가 붙습니까?”
내가 묻자 메르넬이 웃었다.
“아니오. 이건 내가 직접 만들었소. 손님이 사고 나면 내 보증은 끝이오.”
“그럼 제8호 공방 이름으로 나오는 인증료는요?”
“폐업 뒤로는 내가 인증한 적이 없소.”
우리는 장치 철거 확인서와 현재 청구 내역을 대조했다. 장치는 철거됐고 인증 서비스도 중단됐다. 그런데 비용은 계속 청구되고 있었다.
“이건 중복 지급인가요?”
피코가 물었다.
“우선 근거 없는 청구 가능성이 높아졌지. 실제 지급과 최종 수취는 또 확인해야 해.”
그는 입술을 깨물었다.
“계속 확인, 확인이네요.”
“응. 세상에서 제일 귀찮은 일이지.”
“근데 누가 잘못했다고 단정할 때보다 사람들 표정이 좋아 보여요.”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메르넬도 도르벤도 자신들이 한 일을 인정받자 한결 편해진 얼굴이었다.
성으로 돌아와 결과를 정리했다. 서비스가 실제 제공된 두 건과 확인되지 않은 한 건. 같은 자동 갱신 규정을 썼어도 내용은 달랐다.
그런데 돈의 흐름을 붙여 보자 다른 그림이 나타났다.
세 계약 모두 일부 수수료가 공동 보증 회계소로 이동할 예정이라고 적혀 있었다. 그리고 그 회계소는 또 일부를 `00-성전` 분쟁 예방 적립금에 상위 귀속으로 표시했다.
“전쟁이 길어지면 자동 갱신도 길어지겠네요.”
피코가 조용히 말했다.
“그렇겠지.”
“그럼 누군가는 전쟁이 끝나지 않는 게 좋을 수도 있겠네요.”
나는 펜을 멈췄다.
가능한 추론이었다. 하지만 아직은 동기를 입증하지 못했다. 수수료의 수취인이 누군지도 확정하지 못한 상태였다. 회계 그래프는 돈의 길을 보여 줄 뿐, 사람의 속마음까지 보여 주지 않는다.
“그럴 가능성은 있어.”
나는 피코에게 말했다.
“그렇지만 보고서에는 적지 마. 대신 전쟁 기간과 수수료 규모의 상관관계를 확인하자.”
마왕성에 돌아오자 제르칸은 우리가 가져온 표본 결과를 보고 흥분했다.
“이것 봐라! 역시 전쟁이 길어질수록 돈을 버는 놈들이 있구나!”
“전하, 아직 그렇게 확정하지 않았습니다.”
“아니, 그래프가 올라가잖느냐!”
“그 그래프는 청구 건수입니다. 순이익이 아니에요.”
제르칸은 그래프를 거꾸로 들었다.
“그럼 아래로 내려가는데?”
“거꾸로 드셨습니다.”
“알고 있었다!”
분명히 몰랐다. 마왕의 위엄이란 참 편리하다. 무슨 실수를 해도 위엄 있게만 말하면 없던 일이 되는 줄 안다.
나는 그래프 옆에 실제 제공 서비스 건수를 표시했다. 경비 인력이 늘어난 해에는 통행료 청구도 늘었다. 전투가 격렬해진 해에는 부품 수리 건수도 증가했다. 이 부분은 사람이 일한 대가로 볼 여지가 있었다.
“그러면 이 돈은 정상이라는 건가?”
“서비스가 제공된 건 맞습니다. 그 비용의 적정성은 또 확인해야 하지만요.”
“그럼 수상한 건 어느 쪽이지?”
나는 세 번째 그래프를 가리켰다.
폐업한 공방의 인증료였다. 장치 수가 줄어든 뒤에도 꾸준히 증가한 항목이었다. 자동 갱신 횟수는 늘었지만 실제 인증 서비스를 수행한 기술자나 공방은 찾지 못했다.
“이건 이상하군.”
“네. 다만 돈을 최종 수령한 사람도 아직 확인되지 않았습니다.”
제르칸은 잠시 침묵했다.
“그럼 누구를 혼내야 하느냐?”
“그 질문은 좀 뒤에 하시죠.”
마왕은 못마땅한 얼굴로 팔짱을 꼈다. 하지만 더 이상 범인을 지목하진 않았다. 제법 발전한 모습이다.
우리는 비용의 규모를 실제 공급 수량으로 나누는 계산도 해봤다. 같은 수수료라도 물자가 열 배 많아지면 건당 비용은 떨어질 수 있다. 반대로 물자는 줄었는데 수수료만 늘었다면 설명이 필요하다. 신기하게도 여러 구간 중 한 곳에서는 물류량이 감소하는데 정기 인증료만 오르고 있었다.
“이 계약의 요율표를 찾아야겠어요.”
피코가 말했다.
“좋아. 원래 계약 당시 요율과 지금 적용된 요율을 비교하자.”
그는 오래된 장부 더미에서 금박이 벗겨진 표를 꺼냈다. 최초 요율은 일정했지만 이후에는 ‘분쟁 등급’이라는 새 항목이 생겼다. 전쟁이 거세질수록 등급이 올라가고 수수료도 늘어나는 구조였다.
“이 등급은 누가 정합니까?”
라델에게 물었다.
“왕국 쪽 기록에는 공동 위험 평가 위원회라고 적혀 있소.”
“위원 명단은요?”
“추가 확인이 필요하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여기서부터는 숫자만으로 결론을 내릴 수 없었다. 누가 위험을 평가했는지, 어떤 기준을 썼는지, 실제로 위험이 늘었는지 확인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사람들은 전쟁을 이용해 돈을 벌었다는 의혹만으로 서로를 공격할 것이다.
그날 늦게 루시아가 찾아왔다.
“적이 누군지는 아직 모르나?”
“네.”
“그럼 다음엔 어디로 가야 하지?”
“위원회 명단부터 찾을 겁니다.”
“도윤, 넌 정말 싸움을 이상하게 하는군.”
“제가 검술을 못 하잖아요.”
“그래도 네가 움직인 뒤로 물자가 빨리 도착하고 병사가 덜 다치는 건 사실이야.”
그 말을 듣고 펜을 멈췄다. 루시아가 이렇게 길게 칭찬하는 일은 드물다. 조금 낯간지러웠다.
“단장님, 오늘은 왜 이렇게 좋은 말씀을 하십니까?”
“본왕이 널 칭찬하라고 시켰다.”
“아.”
감동이 살짝 줄었다. 그래도 마음은 고마웠다.
그래프를 만들기 전에 누락된 기간부터 표시했다. 왕국 기록은 몇 년 동안 전쟁 때문에 보관소가 폐쇄됐고, 마계 기록은 정산 담당자가 바뀌면서 일부 서식이 달라졌다고 했다.
“빠진 해는 어떻게 합니까?”
피코가 물었다.
“멋대로 채우면 안 되지. 비어 있다고 표시해.”
“그러면 그래프가 못생겨져요.”
“괜찮아. 예쁜 거짓말보다 못생긴 사실이 낫거든.”
나는 자료가 없는 기간을 점선으로 표시했다. 변동 추세를 설명할 수는 있어도 그 빈 기간에 돈이 얼마나 움직였는지 말할 수는 없다. 이런 단순한 규칙을 지키는 데도 의외로 용기가 필요하다. 사람들은 모르는 부분을 솔직히 적은 보고서를 보면 먼저 왜 빈칸이 있느냐고 화를 내니까.
라델은 왕국 기록관에 빈 기간의 원본 보존 위치를 물어보겠다고 했다. 몰트는 마계 창고의 폐기 서류 목록을 다시 확인하기로 했다. 그렇게 되면 앞으로 할 일이 늘어난다.
“정말 끝이 없네요.”
피코가 말했다.
“응. 그래서 야근 수당 규정을 만들어 둔 거야.”
“그럼 오늘도 야근 수당 받아요?”
“당연하지.”
피코가 기뻐했다. 노동의 가치를 아는 임프를 키운 보람이 있다.
그날 밤 우리는 20년치 자동 갱신 건수를 그래프로 그렸다. 숫자가 요동쳤다. 휴전 때도 비용이 줄지 않은 해가 있었고, 큰 전투가 벌어진 해에는 갱신 건수가 급증했다.
“정말 전쟁이랑 관계가 있네요.”
“관계는 있지. 원인은 아직 몰라.”
특히 이상한 건 지난 열세 해였다. 제8호 공방이 폐업한 뒤에도 인증료 청구 건수가 줄지 않았다. 오히려 증가했다. 장치는 줄었는데 돈은 늘어난 셈이다.
“왜죠?”
피코가 물었다.
“모르겠다.”
나는 이번에도 솔직하게 대답했다.
그때 세라핀에게서 전송문이 도착했다. 천계 측에서도 오래된 계약 명세를 조사해 보니 비슷한 현상이 나타났단다. 휴전이 지속된 해에도 위험 수당 관련 정산이 자동 연장됐다.
“천계도 모른다는 거군요.”
몰트가 말했다.
“아니요. 일부 담당자는 모르는 거죠. 전체 조직이 몰랐다고 할 수는 없습니다.”
나는 답신을 적었다.
[관계 확인. 계약별 제공 서비스와 수취 권리 검증 계속. 자동 갱신 권한의 원천 및 실제 승인자를 공동 확인 요청.]
보내려는 순간 성검이 미세하게 빛났다.
[분쟁 지속 보상 구획 접근]
[동의하지 않은 당사자 보상금 배분: 검증 필요]
이름이 참 불길했다.
분쟁 지속 보상.
누구에게 무엇을 보상한다는 걸까.
나는 아직 그 구획을 열람할 권리가 없었다. 그래서 성검의 문구를 마음속에만 담고, 정식 열람 신청서를 하나 더 작성했다.
피코가 뒤에서 중얼거렸다.
“도윤 님, 이제 신청서만으로 책을 만들 수 있겠어요.”
“제목은 정해 놨어.”
“뭔데요?”
“전쟁보다 무서운 결재선.”
그날은 둘 다 웃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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