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사 생활을 하다 보면 가끔 이상한 부탁을 받는다.
“한 대리, 일단 서명부터 해. 내용은 나중에 채울게.”
그 말을 실제로 하는 사람이 있다. 놀랍게도 있다. 그것도 꽤 자주.
나는 언제나 같은 대답을 했다.
“내용부터 채워 주세요.”
그러면 상대는 어김없이 눈썹을 찌푸렸다. 사람을 못 믿느냐고. 사람을 믿지 않아서가 아니다. 종이를 너무 잘 믿는 인간들이 많기 때문이다. 종이는 한 번 적히면 말을 안 바꾼다. 바꾸는 건 종이를 들고 있는 사람이지.
그런데 지금 내 앞에는 내용도 서명도 채워지지 않은 계약서가 기다리고 있었다.
심지어 내가 태어나 살던 세계에 있을 때부터 누군가 나를 위해 준비했다는 계약서였다.
“정말 본인 기록부터 열람하시겠습니까?”
에브란이 물었다.
“예.”
“원본에 타인의 정보가 섞여 있을 수 있습니다.”
“그 부분은 가리고 보여 주세요. 제 기록을 보려는 거지, 남의 인생까지 구경하려는 건 아니니까요.”
제3감리 후계 보존관인 에브란은 생각보다 신중했다. 낡은 안경을 코끝에 걸치고 원본 보존함을 만질 때마다 손을 두 번 씻었다. 회계 담당자로서는 마음에 드는 유형이다. 물론 손을 씻는 횟수만큼 일이 빨라지지는 않아서, 나는 회의실에서 세 번째 차를 마셔야 했다.
“이 세상 원본 열람은 원래 이렇게 오래 걸립니까?”
“기록이 오래돼서요.”
“천계 기록사는 백 년이 짧다던데.”
“그들에겐 그렇겠지요. 저희에겐 하루가 급합니다.”
아. 드디어 시간 감각이 비슷한 사람을 만났다.
원본 보관실에는 라델과 아레인, 몰트, 사절단 대표 세라핀이 입회했다. 루시아는 문밖에서 기다렸다. 전투 담당자가 계약서를 보지 말아야 한다는 뜻은 아니었다. 본인 자료에 대한 입회 범위를 내가 정했을 뿐이다.
“왜 저는 못 들어가요?”
루시아가 입술을 내밀었다.
“단장님이 싫어서가 아니라 제 이름이 걸린 계약이라서요.”
“그럼 위험하면 나를 부르도록.”
“종이가 공격하면 바로 부르겠습니다.”
루시아는 진지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정말로 종이를 베러 달려올 것 같아서 잠시 걱정됐다.
에브란이 청동 표식을 접수대에 올렸다. 리베라는 우편 기사가 전해준 바로 그 열쇠였다. 표식의 홈 셋 중 둘만 빛났다. 나머지 하나는 끝내 어두웠다.
“완전한 개봉 열쇠는 아닙니다.”
“그럼 제가 받은 건 뭐죠?”
“원문을 요구할 자격이 있음을 표시하는 물건이죠. 열람 권한을 자동으로 주지는 않습니다.”
그래. 적어도 누군가는 신청과 승인을 구분할 줄 안다.
내 신원을 확인하는 과정도 웃겼다. 성검 반응, 소환 당시 기록, 왕국의 지명수배 문서, 마왕성 직원 명패까지 네 종류를 대조했다.
“지명수배 문서도 신원 증빙이 됩니까?”
아레인이 물었다.
“일단 왕국이 제가 저라는 사실만큼은 확신했던 모양이니까요.”
라델이 눈을 피했다.
나는 적절히 참아 주었다. 이미 여러 번 창피해한 사람을 다시 놀리는 건 업무 효율이 떨어진다. 물론 가끔은 꽤 즐겁지만.
마침내 상자가 열렸다.
그 안에는 검은 가죽으로 묶인 얇은 장부와 빛을 거의 잃은 수정판 하나가 들어 있었다. 내 이름이 맨 앞 장에 적혀 있었다.
[예비 당사자: 한도윤]
[전송 묶음: 송-4189]
[등록 상태: 식별 보존]
[계약 체결 상태: 미확정]
“미확정.”
나는 그 단어를 두 번 읽었다.
세상에서 가장 반가운 미확정이었다. 적어도 눈앞의 문서에는 ‘계약 체결 완료’라고 쓰여 있지 않았다.
“이걸로 제가 계약에 동의하지 않았다는 게 증명됩니까?”
에브란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동의 기록이 이 문서에 확인되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다른 원본이 존재할 가능성까지 지우지는 못합니다.”
“좋습니다. 그렇게 적어 주세요.”
피코에게 보여주고 싶었다. 확인된 사실 한 줄과 미확인 사실 한 줄을 제대로 나누는 사람을 만났다고.
문제는 다음 페이지였다.
[업무 범위: ]
[보수 지급 책임자: ]
[귀환 조건: ]
[위험 수당: ]
[동의 확인자: ]
전부 비어 있었다.
나는 웃음이 나왔다.
“이야. 제가 왕궁에서 받은 계약보다 더하네요.”
“어떤 뜻입니까?”
세라핀이 물었다.
“왕궁 계약은 없는 항목을 설명이라도 했습니다. 이건 칸만 있네요.”
그리고 맨 아래, 유일하게 또렷한 문구가 적혀 있었다.
[예비 등록은 권리 보호를 위한 보존 조치이며, 신성 의무의 승낙으로 간주하지 않는다.]
나는 손가락으로 그 문장을 짚었다.
“이거 복사해도 됩니까?”
“해당 항목에 한하여 가능합니다.”
“열 장만요.”
“왜 그렇게 많이 필요합니까?”
“왕궁에 세 장, 제 책상에 두 장, 혹시 모를 경우를 대비해 다섯 장이요.”
몰트가 어깨를 들썩였다. 루시아가 있었다면 왜 열 장밖에 안 되느냐고 물었을지도 모르겠다.
세라핀이 조용히 말했다.
“천계 측 기록에는 이 예비 등록이 계약 발효를 위한 절차라는 해석도 있습니다.”
나는 그녀를 바라봤다.
“누구 해석이죠?”
“관리 규정의 일부 판본입니다.”
“그 판본의 날짜와 작성자, 원본을 보여 주실 수 있습니까?”
“검증이 필요합니다.”
“그럼 검증 전까지는 해석일 뿐이네요.”
세라핀은 반박하지 않았다. 오히려 기록사 아우렐을 불러 문서 번호를 적게 했다. 그녀가 무엇을 감추고 있는지는 몰라도, 적어도 기록을 남기는 일에는 협조적이었다.
그때 나는 장부 앞쪽에 작은 도장 하나가 찍힌 걸 발견했다.
[대리 접수 자격번호: 0003]
“또 너냐.”
나도 모르게 중얼거렸다.
아레인이 가까이 다가왔다.
“그 번호는 지금 조사 중인 공용 접수함 번호일 수 있습니다.”
“예. 범인 이름이라고 생각하진 않습니다. 다만 이 페이지에 왜 적혔는지 알고 싶네요.”
우리는 보관함에서 접수 번호 대장을 가져왔다. 0003은 원래 공동 접수창구 번호였다. 예전에는 이름 없는 신고서를 접수할 때 쓰던 번호였다고 한다. 그런데 조직 통합 후에는 누군가 그 번호를 승인 권한처럼 활용한 정황이 있었다.
이번 장부에는 '대리 승인'이 아니라 '대리 접수'라고 적혀 있었다. 글자 하나 차이. 하지만 그 차이 때문에 누군가는 사람의 목숨에 관한 서류를 처리할 수 있다고 생각했을지도 모른다.
“도윤 씨.”
몰트가 조용히 불렀다.
“자네 소환 전에 등록됐다면, 누군가 자네를 미리 알고 있었다는 뜻인가?”
“그렇게 보일 수는 있겠죠.”
나는 종이를 내려다봤다.
“하지만 제가 실제로 소환되기 전에 쓰였다는 걸 증명하려면 날짜 자체가 믿을 만해야 합니다.”
우리는 시간 기록부터 대조했다. 왕국의 소환진 기록은 소환일을 기준으로 열하루 전 예비 등록으로 계산했다. 우편 보관장에는 발송 예약이 열이틀 전이라고 나왔다. 딱 하루 차이가 났다.
“이상하군요.”
아우렐이 말했다.
“천계 관문은 해가 바뀌는 시간을 정오로 계산합니다. 왕국은 자정을 쓰고요.”
“그럼 같은 순간도 날짜가 다르게 적힐 수 있겠네요.”
“그럴 가능성이 있습니다.”
나는 숨을 내쉬었다.
열이틀 전과 열하루 전이 모두 정확히 다른 날이라는 보장은 없어진 셈이다. 하지만 소환보다 앞서 등록됐다는 점은 여전히 남아 있었다. 시간대 문제만으로 설명하기엔 날짜 차이가 너무 컸다.
에브란은 등록 원장의 하단을 확인했다.
“접수 창구에 남아 있는 원본 인장은 진짜 옛 공관 것입니다.”
“그렇다면 등록자는요?”
“원본 인장을 사용할 수 있는 사람이 여러 명 있었습니다.”
“그중 누가 제 이름을 적었는지는 모른다.”
“맞습니다.”
미스터리가 한꺼번에 풀릴 거라는 기대는 하지 않았다. 그래도 속은 좀 답답했다. 서울에서는 누가 내 야근을 지시했는지 적어도 부장님 이름을 알았다. 여기서는 열이틀 전부터 내 이름을 가지고 누군가 일을 벌였는데 그 이름조차 없다.
나는 잠시 손을 떼고 물었다.
“여기서 제 기록을 더 열어 보려면 어떻게 해야 하죠?”
“원문 연관 색인을 신청하셔야 합니다.”
“또 신청서요?”
“예.”
“제가 여기 왜 온 것 같습니까?”
“서류 때문에 오신 거 아닙니까?”
에브란의 표정은 진지했다.
아, 반박할 수가 없네.
우리는 연관 색인 신청서를 작성했다. 내가 동의한 범위를 넘는 타인의 계약 이름은 가리기로 했고, 성검의 반응은 참고 정보로만 기록했다. 세라핀은 천계의 예비 계약 등록 규정 원본을 가져오겠다고 약속했다.
보관실을 나올 때 라델이 조심스럽게 말했다.
“왕궁에서 계약을 요구하셨을 때 이 장부를 알고 있었다면 일이 달랐겠군요.”
“모르죠.”
나는 웃었다.
“폐하께서 읽으셨을까요? 제 질문도 못 들으셨는데.”
라델은 고개를 숙였다. 잠깐 미안해졌다. 그는 지금 협력하고 있고, 잘못된 지시를 내렸던 건 국왕이다. 책임을 정확히 따지는 게 내 일인데 사람의 표정을 보고 감정적으로 굴어서는 안 된다.
“재무관님. 다음 회의에서는 서로 문서부터 보여 주죠.”
“그러겠습니다.”
늦은 오후에는 세라핀이 가져온 천계 쪽 색인과 중립 공관의 색인을 비교했다. 두 장부의 열 제목은 같았지만 정렬 순서가 달랐다. 천계에서는 당사자 식별번호를 먼저 적고, 중립 공관에서는 최초 접수 장소를 먼저 적는다고 했다.
“그게 무슨 문제가 있습니까?”
아우렐이 물었다.
“문제라기보다는 확인할 이유죠. 같은 번호가 같은 계약을 뜻하는지 모르니까요.”
나는 두 장부에서 내 이름을 찾았다. 천계 색인에는 이름 옆에 조그만 삼각형이 있었고 중립 공관 색인에는 별표가 붙어 있었다. 설명을 듣고 나니 둘 다 ‘당사자 직접 확인 필요’라는 뜻이었다.
“이 두 기호는 언제부터 썼습니까?”
“관문 체계가 개정된 뒤부터입니다.”
“그럼 최초 등록 당시에도 붙어 있었나요?”
“아닙니다. 이전 기록을 옮기는 과정에서 표시됐습니다.”
아. 이거 중요하다.
처음부터 누군가 내 이름 옆에 위험 표시를 해 놓았다고 생각할 뻔했다. 실제로는 나중에 새 전산 시스템으로 옮기면서 붙인 안내 표시였다. 같은 문구도 언제 생겼느냐에 따라 전혀 다른 의미를 가진다.
우리는 최초 원본에 존재한 항목과 이후 변환 과정에서 생긴 항목을 따로 표시했다. 피코가 좋아할 만한 일인데 그 녀석은 다른 방에서 운송료 환급 자료를 정리하고 있었다.
“마왕성에 오기 전에도 이런 일을 하셨습니까?”
세라핀이 조심스럽게 물었다.
“비슷한 일은 했죠. 다만 그때는 상대가 마왕이나 천사가 아니라 외주업체 사장님이었습니다.”
“그런데 왜 지금도 그 일을 하고 계십니까?”
나는 잠시 대답하지 못했다.
왜일까. 이세계에 끌려온 것도 억울한데, 지금은 남의 회사 장부를 뒤지고 있다. 처음엔 계약이 마음에 들어서 취직했다. 나중에는 눈앞에서 실제 피해를 보는 사람들이 생겼다. 아무도 확인하지 않은 숫자 때문에 사람들이 밥을 굶거나 치료를 못 받는 걸 보면 그냥 넘어가기 어려웠다.
“숫자 뒤에 사람이 있어서요.”
내가 말했다.
“그리고 그 사람들 중 하나가 저 자신이기도 하고요.”
세라핀은 대답 대신 고개를 숙였다. 그 표정에서 무언가를 읽어내려 하지는 않았다. 천계가 나를 왜 소환했는지, 혹은 소환에 관여했는지조차 아직 모르니까. 지금은 함께 장부를 보는 상대일 뿐이다.
원본 열람이 끝나자 에브란이 서류함을 다시 봉인했다. 보관 시간과 입회자, 확인한 항목을 기록하고, 열람하지 않은 구획은 그대로 잠갔다.
“그렇게 하나하나 기록하는 이유가 있습니까?”
내가 물었다.
“나중에 누가 확인해야 할 때, 무엇을 보지 않았는지도 알아야 하니까요.”
그 말이 마음에 들었다. 나도 보고서에 ‘미확인’이라고 적는 습관을 들였지만, 한층 더 나아간 발상이었다. 확인하지 않은 것까지 확실하게 기록한다니. 이런 사람이 많았다면 이 세계의 장부가 조금은 덜 위험했을 것이다.
그날 밤, 성검에서 새로운 문구가 나타났다.
[예비 보존 상태 확인]
[신성 의무 승낙: 별도 확인 필요]
[권리 보호 기간 종료 시점: 기록 불일치]
마지막 줄이 눈에 걸렸다.
권리 보호 기간이 끝난다고?
언제?
검은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나는 침대에서 벌떡 일어나 장부를 꺼냈다.
내가 모르는 사이 누군가 내 이름으로 계약을 갱신하는 것도 싫지만, 내 권리를 지켜 준다는 장치가 언제 종료되는지 모르는 건 더 싫었다.
아침 첫 업무가 생겼다.
**내 보호 기간의 만료일을 찾아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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