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에서 가장 난처한 면접이 무엇일까.
합격하면 출근해야 하는 면접? 연봉을 먼저 이야기하면 인성이 부족하다는 소리를 듣는 면접? 아니면 면접관 다섯 명이 둘러앉아 지원자 한 사람에게 가족관계까지 캐묻는 면접?
나는 지금까지 세 번째가 제일 싫었다.
오늘부로 순위가 바뀌었다.
“한도윤 씨가 계약의 거절권자인지 확인하러 왔습니다.”
가면 쓴 사람이 나를 가리켰다.
참관인의 목소리는 남자인지 여자인지 가늠하기 어려웠다. 가면에 붙은 얇은 금속판이 소리를 두 번 울리게 만드는 탓이었다. 어째서 신성한 계약을 다루는 사람이 신분부터 숨기는 건지는 모르겠지만, 명찰 대신 가면을 쓰고 온 사람에게 내 이름을 먼저 넘길 생각은 없었다.
“확인은 좋습니다. 그런데 누구시죠?”
“제3감리 참관인입니다.”
“직책 말고 성함이요.”
“직책으로 충분합니다.”
“그건 식당에서 ‘주문 담당’이라고만 소개하는 것과 같습니다. 계산서에 적을 이름은 따로 있어야죠.”
제르칸이 뒤에서 으르렁거렸다.
“정체를 감히 숨긴 채 본왕의 성에 들어왔단 말인가!”
“전하, 목소리 낮추세요. 아직 확인 중입니다.”
“본왕은 낮은 목소리도 위대하다!”
그건 인정한다. 가구가 덜 흔들리니까.
세라핀은 참관인보다 한 걸음 앞에 나왔다.
“우리 쪽 문서에도 이름은 비공개로 되어 있습니다. 오랜 보호 규정에 따른 조치입니다.”
“그럼 제가 보호 규정을 확인할 권리는 있습니까?”
“있습니다.”
“좋네요. 생각보다 말이 잘 통하네.”
솔직히 조금 뜻밖이었다. 천계 사절단이라기에 세상 모든 일을 신의 뜻이라고 설명하는 사람들일 줄 알았다. 왕궁에 처음 소환됐을 때 만난 사제들이 워낙 그랬으니까. 그런데 세라핀은 질문을 피하지 않았다. 다만 자신도 확인해야 할 부분이 있다고 했다.
몰트 실장이 커다란 서류함을 탁자에 올렸다. 천이백 년을 산 리치가 들고 다니는 상자인데도 겉에는 손때가 묻어 있었다. 원본을 보관하는 물건은 오래됐다고 함부로 버릴 수 없다. 그렇다고 오래됐다는 이유로 언제나 진짜인 것도 아니지만.
우리는 회의실 한가운데 긴 탁자를 설치하고 봉인 계정과 관계없는 문서부터 검증했다. 방문 허가, 출입 기록, 수권장, 비밀 유지 서약. 피코는 좌석마다 번호표를 올렸다. 제르칸 자리만 금박이었다.
“왜 전하 자리만 금박이야?”
“전하께서 직접 사비를 내셨어요.”
“그럼 인정.”
내가 재정실에서 얻은 교훈 중 하나는 남의 돈으로 꾸민 허세와 자기 돈으로 꾸민 허세는 다르다는 사실이다.
그런데 참관인의 좌석에는 번호만 있었다.
[제3감리 참관인 / 신원 비공개 / 입회 범위 미확정]
이건 정직한 표시였다. 모르면서 아는 척하지 않는다. 얼마나 아름다운 일인가. 회계 장부에 가장 흔히 쓰이는 거짓말이 ‘기타’라면, 가장 귀한 단어는 ‘미확정’이다.
“서약서입니다.”
피코가 참관인 앞에 잉크병과 깃펜을 놓았다.
참관인은 종이를 읽더니 조용히 돌려놓았다.
“서명할 수 없습니다.”
그 말에 루시아의 손이 칼집으로 갔다.
“감히?”
“단장님, 이건 칼을 뽑을 일이 아닙니다.”
나는 대신 종이를 가져왔다. 서약서에는 ‘열람한 모든 자료를 제3자에게 유출하지 않는다’는 문구가 있었다.
“어떤 부분 때문에 서명 못 하시죠?”
“제가 보관 중인 권리자의 거절 기록과 충돌할 수 있습니다.”
“비밀 유지가 거절 기록과 무슨 관계가 있습니까?”
“누군가 동의했다고 잘못 적힌 문서를 본다면, 그 오류를 권리자에게 알려야 합니다. 그런데 서약서대로라면 제3자 통보가 금지됩니다.”
아.
그 말은 일리가 있다.
우리는 잠깐 서로를 바라봤다. 입사 면접에서 지원자가 근로계약서의 문제 조항을 지적하면 인사담당자는 대개 두 가지 반응을 보인다. 불쾌해하거나, 그 사람을 채용하거나. 내 경우엔 왕궁에서 쫓겨났고 마왕성에서는 채용됐다.
“피코, 문구 좀 바꾸자.”
“어떻게요?”
“권리자에게 자신의 기록 오류를 통지하는 행위는 예외로 둬. 다만 타인의 정보는 가리고.”
몰트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야 본래 제3감리의 목적에 맞겠군.”
수정본을 건네자 참관인은 다시 읽었다. 이번에는 펜을 집었다. 그러나 이름 칸 앞에서 멈췄다.
“개인명 대신 보관 자격번호로 서명하겠습니다.”
“그 번호를 확인할 수 있는 원본은요?”
“중립 공관에 있습니다.”
“그럼 원본 대조가 끝날 때까지 임시 접수만 하겠습니다. 자료 열람권은 아직 없습니다.”
참관인은 잠깐 나를 응시했다.
“거절하시겠다는 뜻입니까?”
“아뇨. 보류하겠다는 겁니다. 거절은 확인이 끝난 뒤에도 할 수 있고, 승인은 확인이 끝난 뒤에야 할 수 있죠.”
사실 이 간단한 말을 이해하지 못해서 지난 몇 달 동안 얼마나 많은 사람이 고생했는지 모른다. 마왕군은 검이 없다는 이유로 장부를 지웠고, 왕국은 신성하다는 이유로 내 계약을 만들었다. 누가 보류 버튼을 지워버렸는지 모르겠지만 그 사람과는 꼭 만나 보고 싶었다.
사절단의 기록사 아우렐이 두루마리를 펼쳤다.
“제3감리 참관 자격은 예전 평화 협약 부속서에 있습니다. 다만 지금 제출한 사본은 서식이 오래됐습니다.”
“오래됐다는 게 언제쯤입니까?”
“약 백삼십 년 전입니다.”
“와, 이쪽도 서식 개정이 늦군요.”
“천계에서는 백 년이 짧은 편입니다.”
“재정실에서 그 말 하면 몰트 실장님이 좋아하시겠는데요.”
몰트는 이미 미소를 짓고 있었다. 해골의 미소를 알아보는 데 익숙해졌다는 사실이 조금 슬펐다.
우리는 서식의 효력과 보관 자격을 구분했다. 옛 부속서에 직책이 적혀 있다고 해서 지금 가면을 쓴 사람이 자동으로 그 직책의 권한을 갖는 것은 아니다. 왕국 측 아레인이 중립 공관에 정식 대조를 요청했고, 사절단은 그동안 참관인에게 원본 열람을 시키지 않겠다고 약속했다.
회의가 끝나려는 순간 세라핀이 새 질문을 던졌다.
“한도윤 씨. 귀하의 소환 계약 원문을 열람하실 생각이 있습니까?”
공기가 조금 달라졌다.
제르칸의 뿔이 움직임을 멈췄다. 루시아는 내 얼굴을 바라봤다. 피코는 펜끝을 종이 위에 올려둔 채 가만히 있었다.
“있습니다.”
나는 망설이지 않았다.
“누가 내 이름을 적었는지 알아야 하니까요.”
“그 원문은 `00-성전` 계정의 일부와 연결되어 있을 가능성이 있습니다.”
“가능성이라는 건 확인된 사실이 아니죠?”
“그렇습니다.”
“그럼 당사자 기록부터 열람하고, 적립금 거래는 별도 범위에서 확인하겠습니다.”
세라핀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날 우리에게 허용된 건 계정의 겉표지와 색인 번호뿐이었다. 원본 지급 내역이나 다른 계약자의 이름은 보이지 않았다. 그저 기록의 종류와 보관 위치만 확인할 수 있었다.
[00-성전]
[분쟁 예방 적립금 관리대장: 열람 승인 필요]
[용사 소환 관련 당사자 계약 보존함: 당사자 요청 시 제한 열람]
[제3감리 거절 기록: 후계 보존관 확인 필요]
세 줄을 보면서 나는 조금 웃었다.
“이 세계에는 진짜 별게 다 장부에 있네요.”
“불편합니까?”
세라핀이 물었다.
“아뇨. 장부가 없었으면 더 불편했겠죠. 다만 누가 허락도 없이 제 이름으로 항목을 만들었는지 그게 불편합니다.”
세라핀의 표정이 아주 잠깐 굳었다.
나는 그걸 놓치지 않았다. 하지만 표정이 바뀌었다고 죄가 생기는 건 아니다. 누가 웃음을 참는다고 꼭 사기를 친 건 아닌 것처럼.
사절단이 임시 객실로 돌아간 뒤, 피코가 참관인의 좌석을 치우려 했다.
“그 의자는 놔두자.”
“왜요?”
“아직 주인을 확인하지 못했잖아.”
“그럼 언제까지요?”
“확인할 때까지.”
피코는 혀를 내둘렀다.
“도윤 님은 의자 하나에도 장부를 붙이실 분이에요.”
“당연하지. 의자도 재산이거든.”
“마왕님이 그 말씀 들으시면 좋아하실까요?”
“전하께는 사비로 금박한 의자 이야기부터 하지 마.”
피코가 킥킥 웃었다.
회의가 끝나고도 나는 정리해야 할 서류가 산더미였다. 방문자 네 사람의 명단과 실제 출입 시각은 일치했다. 그런데 ‘제3감리 참관인’이라는 직책만을 내민 사람이 정식으로 서명한 건 비밀 유지 서약서가 전부였다. 개인명은 없고 자격번호만 있었다.
“이대로 두어도 되나요?”
피코가 물었다.
“규정상 허용되는 임시 접수라면 가능하겠지. 다만 그 기록으로 원본을 열어 줄 수는 없어.”
“그럼 대표 세라핀 님은요?”
“그분이 가진 수권 범위만큼만 보시면 돼.”
“둘이 같은 사절단인데도 다르네요.”
“같은 회사에 다닌다고 전 직원이 급여 파일을 볼 수 있는 건 아니잖아.”
피코는 이해했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마왕성도 처음엔 누구든 마왕의 인장만 빌리면 창고 물자를 가져갈 수 있었지만, 요즘은 담당 업무와 승인 범위를 따로 정리하는 중이다. 불편하다고 투덜대는 사람도 많다. 하지만 불편함이 모두 나쁜 건 아니다. 문에 자물쇠가 있으면 열쇠를 챙겨야 하는 만큼 귀찮아진다. 그렇다고 집 문짝을 떼어 버릴 수는 없지 않은가.
나는 회의 도중 가장 마음에 걸렸던 질문을 적었다.
[제3감리 참관인은 누구의 권리를 지키려는가?]
참관인은 한도윤이 거절권자인지 확인하러 왔다고 했다. 그렇다면 적어도 내 계약이 그의 업무와 연결돼 있다는 뜻이다. 그런데 본인의 정체를 확인할 권한은 아직 제시하지 않았다. 보호가 필요해서 신원을 숨길 수 있다. 다만 권한을 행사하는 순간에는 검증 절차가 따라야 한다.
“단장님께 이 사람을 지켜보라고 할까요?”
피코가 물었다.
“호위 인원을 배치할 수는 있지. 하지만 범인 취급부터 하진 마.”
“혹시 위험한 사람이라면요?”
“그래서 일반 손님과 같은 출입 규칙을 적용하는 거야.”
결론은 별것 없었다. 일단 기록한다. 허가받지 않은 공간에는 들어가지 않는다. 따로 확인할 일이 생기면 양측 입회하에 처리한다. 누가 특별하다고 해서 예외를 만들지 않는다.
마지막으로 나는 참관인에게 직접 질문했다.
“당신이 보호하려는 당사자가 나입니까?”
가면 너머에서 잠시 숨소리가 들렸다.
“확인 중입니다.”
“그렇군요. 그럼 제가 보호받고 싶지 않다고 하면요?”
“그 의사도 보존되어야 합니다.”
나는 뜻밖에 고개를 끄덕였다. 문서 한 장의 처리보다 훨씬 중요하게 들리는 말이었다. 왕국 사제들은 내가 거절하자 신의 사명을 부정했다고 화를 냈다. 그런데 이름 없는 사람은 내가 거절한 사실을 보존해야 한다고 말한다. 같은 신성 계약을 다루는데 태도가 이렇게 다를 수도 있구나.
“그럼 내일은 그 말이 실제 규정에도 적혀 있는지 확인하겠습니다.”
참관인은 짧게 고개를 숙이고 돌아섰다. 그때 그의 오른쪽 장갑 안쪽에 오래된 실밥이 보였다. 금빛 실로 세 개의 점이 수놓여 있었다. 나는 그걸 기록하지 않았다. 장갑에 점 세 개가 있다고 대리번호 0003의 주인이라고 단정할 수는 없으니까. 이 세계에서 숫자 3이 겪는 억울한 의심도 이제 그만해야 한다.
나는 기록 담당자 아우렐에게 자격번호의 최근 열람 로그를 별도로 보관해 달라고 요청했다. 서로 다른 기관이 보관한 로그의 보존 시점이 다르면 나중에 누가 고쳤는지 확인하기 어려울 수 있다.
“사본은 몇 개가 필요합니까?”
“일단 기관마다 한 부씩요. 단, 서로의 봉인을 따로 유지해 주세요.”
“자료가 많아질 겁니다.”
“자료가 없는 것보다 낫죠.”
아우렐이 고개를 끄덕였다. 적어도 기록을 많이 남긴다고 벌금을 매기는 세상은 아니어서 다행이었다.
한밤중, 몰트가 나를 찾아왔다. 그는 새 문서 한 장을 내밀었다. 중립 공관에서 보낸 예비 대조 결과였다.
[참관 자격번호: 과거 실존]
[최종 승계 서명: 확인 불가]
[권한 상태: 보류]
“예상했던 결과네요.”
“그래. 그런데 이상한 칸이 하나 있네.”
몰트가 서류를 뒤집었다.
[동일 자격번호로 최근 열람 시도: 2건]
하나는 왕국 서고였다. 다른 하나는 마왕성의 `00-성전` 보관함이었다.
열람 시각은 오늘 오전.
가면 쓴 참관인이 그날 회의장에 들어오기 전이었다.
“실장님.”
“말해 보게.”
“우리 손님, 생각보다 바쁜 분이었나 봅니다.”
나는 문서의 시각 옆에 붉은 동그라미를 쳤다.
“그런데 아직 도착하지도 않은 사람이 뭘 어떻게 열람했을까요?”
성검이 허리춤에서 조용히 떨었다.
[당사자 권한을 가장한 접근: 검증 필요]
나는 검집을 손바닥으로 눌렀다.
“너도 봤구나. 근데 이번에도 일단 증거부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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