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떤 세상에 가든 우편물에는 발신인이 있어야 한다.
광고 전단이라도 그렇다. 하다못해 '월급을 올려주겠다'는 거짓 공약도 누가 했는지는 알아야 욕을 하지 않겠는가.
그런데 내 이름으로 도착한 편지에는 발송 지시자가 공란이었다. 발송 예약은 내 소환 열이틀 전. 도착은 어제. 이쯤 되면 우체국에 항의해야 할지 시공간 관리 부서에 항의해야 할지 모르겠다.
“열어 보시면 안 됩니까?”
피코가 아침부터 안절부절못했다.
“열긴 열어야지.”
“그런데 왜 안 여셨어요?”
“증거 봉투를 뜯으면 누가 언제 뜯었는지 남겨야 하잖아.”
피코는 깨달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몰트 실장이 옆에서 작은 상자를 꺼냈다. 봉투의 외관, 밀랍의 흠집, 전달 일시를 기록하는 마법 상자였다.
“천이백 년 동안 보관 일을 하면서 이런 물건은 많이 썼네.”
“그런데 마왕성 장부는 왜 그렇게 엉망이었습니까?”
“물건을 보관하는 일과 물건에 돈을 낸 이유를 확인하는 일은 다르지 않나.”
틀린 말이 아니라는 게 더 괴로웠다.
전령도 입회했다. 그녀의 이름은 리베. 중립 교역로 소속 우편 기사라고 했다. 근무 명패와 전달 장부는 있었지만, 편지의 예약자가 누구인지는 조회 권한이 없다고 했다.
“모르는 건 모른다고 해 주세요. 추측은 나중에 하죠.”
“대부분은 자기들이 아는 사람 이름을 말해 달라고 하는데요.”
“아, 저도 마음은 그래요. 하지만 괜히 찍었다가 남의 인생 망치는 데 익숙해지고 싶진 않아서요.”
리베가 조금 웃었다. 그리고 자신의 장부를 펼쳐 보였다. 같은 봉투에 대한 기록이 두 줄이었다. 최초 접수 예약과 실제 인계 기록. 예약 줄에 있던 빨간 기호는 '본인 수령 불가 시 반송 금지'를 뜻했다.
“수신인이 이 세상에 없으면요?”
“계속 보관합니다.”
“얼마나요?”
“보관료가 지급되는 동안요.”
나는 머리가 띵했다.
“그럼 누가 열두 해 동안 요금 내고 있었을 수도 있겠네요?”
“날짜상 열이틀 전 예약이지, 열두 해 전은 아닙니다.”
“아, 맞다.”
부끄럽다. 회계 담당자가 숫자를 헷갈리다니. 내 평생의 업적이 무너질 뻔했다.
우리는 봉투를 개봉했다. 안에는 얇은 필름 같은 종이와 작은 청동 열쇠가 들어 있었다. 편지는 짧았다.
[수취인은 본인의 계약 원문 열람을 요청할 수 있다. 요청권은 제3자에게 위임되지 않는다. 공관 원본 보관실의 접수대에서 청동 표식을 제시할 것.]
서명도 없고 발신 조직의 이름도 없다.
좋은 소식은 내 권리를 주장할 문구가 하나 나왔다는 것. 나쁜 소식은 누가 보내줬는지 모르겠다는 것.
청동 열쇠에는 작은 홈이 세 개 있었다. 성검을 가까이 가져가자 홈 하나에 푸른빛이 잠시 스쳤다.
[계약 열람 가능성: 미확인.]
정말 도움이 안 된다. 하필 이런 순간에는 스킬도 '미확인'이다. 회사 전산실에 문의했더니 '현재 원인 파악 중'이라는 답을 받은 기분이었다.
“함정일 수도 있겠네요.”
루시아가 열쇠를 보며 말했다.
“그럴 수도 있죠. 하지만 편지 자체는 보관하고 출처를 추적해야겠어요.”
“내가 대신 가서 문을 부수겠다.”
“단장님, 함정인지 확인하는 중에 문을 부수면 우리가 함정을 만든 사람이 될 수 있어요.”
루시아가 입술을 삐죽였다. 검으로 해결되지 않는 문제가 많아지는 세상이 그녀에게는 영 못마땅한 모양이다.
점심 무렵 사절단의 정식 답신이 도착했다.
참석자는 네 명. 대표 세라핀, 기록사 아우렐, 호위장 미르단, 참관인 한 명. 소속을 확인할 수 있는 천계 관문 통과증도 첨부되어 있었다. 나는 먼저 문서의 발급기관을 확인했다.
“천계 관문 관리처라고 되어 있는데, 이곳이 실제로 존재합니까?”
몰트 실장이 옛 지도를 펼쳤다.
“천계 관문은 오래전부터 있었지. 관리처도 기록에 나타나네.”
“그곳에서 발급했다는 사실은요?”
“그건 저쪽과 대조해야겠지.”
맞다. 회사 로고가 찍힌 명함을 들고 왔다고 그 사람이 인사팀 직원이라는 보장은 없다.
라델에게 확인 요청을 보냈더니 반나절 만에 답이 왔다. 왕국 성전청이 알고 있는 문서 양식과 거의 일치하지만, 발급번호의 마지막 글자가 예전 방식이란다. 발급기관의 시스템이 오래된 것인지 위조한 것인지는 현물 검증을 해야 한단다.
“거의 일치한다니 정말 애매하네요.”
피코가 투덜거렸다.
“업무에선 그 말이 제일 무섭지.”
일반적으로 '거의 일치'는 일치가 아니다. 그렇다고 위조라는 증거도 아니다. 숫자를 확인하는 내 직업에서는 참 귀찮은 상태였다.
나는 봉투에서 나온 청동 열쇠를 다시 상자에 넣었다. 정작 필요한 건 열쇠의 모양이 아니라 어느 문을 열 권리가 있는지였다. 우편 기사가 줬다는 이유만으로 아무 문이나 열었다간 증거를 훼손할 수 있다.
“도윤 님, 참 답답하네요.”
피코가 중얼거렸다.
“뭐가?”
“열쇠도 있고 문도 있는데 못 열잖아요.”
“우리 성 금고에도 열쇠가 있지?”
“네.”
“그럼 네가 그 열쇠를 주웠다고 금고를 열어도 될까?”
“안 되죠.”
“똑같은 거야.”
그는 입을 삐죽였다. 충분히 이해한다. 나도 답답했다. 이세계에 와서 검을 뽑으면 찬송이 울리고, 장부를 보면 붉은 실이 나타나는 신기한 일을 겪었다. 그런데 내 이름이 적힌 계약서 하나 확인하려면 매번 승인 도장을 받아야 했다.
“그럼 최소한 열쇠를 사용하지 않은 상태라는 건 적어 두자.”
나는 봉인 상자에 현재 상태를 적었다. 열쇠 하나, 홈 세 개, 사용 흔적 확인 불가. 성검과 접촉했을 때 빛난 사실은 나만 관찰한 현상이라 참고란에만 넣었다. 나중에 다른 사람이 다시 시험할 수 있도록 동일한 조건도 적었다.
몰트가 내 기록을 보더니 말했다.
“자네는 정말 꼼꼼하군.”
“실장님도 천이백 년을 장부와 함께 사셨잖아요.”
“그래서 말하는 걸세. 오래 버티는 것과 제대로 하는 건 별개라고.”
나는 그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이 성에서 일하며 가장 즐거운 순간은 늙은 해골이 가끔 젊은 회계 담당자보다 더 솔직한 말을 할 때였다.
방문객을 맞기 전에 마지막 회의가 열렸다. 제르칸은 새 망토를 입고 나타났다. 검은색 천에 은실로 문양이 새겨져 있었다.
“어떻느냐!”
“멋집니다.”
“비용은?”
“전하 개인 의복비로 처리했습니다.”
“외교비가 아니라?”
“손님이 오지 않아도 입으실 옷이잖아요.”
“하긴.”
마왕이 순순히 동의했다. 믿기 어렵지만 진짜였다. 몇 달 전까지만 해도 이 성에서 가장 어려운 일이 마왕에게 결재 기준을 설명하는 것이었는데, 지금은 천계 사절단의 진위 파악이 더 어렵다.
그런데 사절단을 들이기 전에 또 하나의 문제가 생겼다. 중립 우편 기사 리베가 자기 근무장부의 이상한 부분을 발견한 것이다.
“제가 어제 보여드린 송장 있잖습니까.”
“제 앞으로 온 편지요?”
“예. 발송 예약과 실제 인계 기록에 기록자 필체가 다릅니다.”
나는 송장을 다시 살폈다. 마법 잉크라 필체보다는 글자가 기록된 깊이와 빛의 파장이 중요했다. 리베는 우편 기사로 일하며 그런 차이를 눈으로 알아볼 수 있다고 했다.
“그럼 누군가 나중에 수정한 겁니까?”
“아직은 모르겠습니다. 예약 시스템이 바뀔 때 자동 변환됐을 수도 있습니다.”
좋다. 이 사람도 모르는 걸 모른다고 한다. 마음에 든다.
우리는 송장을 한 장씩 펼쳐 날짜와 인계 장소를 대조했다. 최초 예약 장소는 옛 휴전항 제2공관, 최종 인계 장소는 왕국 북부 우편 거점이었다. 두 곳 사이의 운송 경로는 세 번 바뀌었다.
“왜 이렇게 돌아왔습니까?”
“직접 전달하면 수신인이 없는 상태일 수 있다고 적혀 있었습니다.”
“수신인이 없을 거라고 미리 알고 있었다는 뜻인가요?”
“그런 해석도 가능하지만, 해외 배송의 일반 조건일 수도 있습니다.”
리베는 오래된 예약 서식 하나를 보여 주었다. 거기에도 ‘수신인 부재 시 반송 금지’라는 항목이 있었다. 이 특별한 편지에만 붙은 조건은 아니라는 뜻이다. 조금 실망스럽기도 했다. 세상에서 제일 어려운 건 대단해 보이는 단서를 평범한 사실과 구분하는 일이었다.
“그럼 이 편지는 누가 비용을 냈습니까?”
“보관료는 정산 대행 계정에서 빠져나갔습니다.”
“계정 이름은요?”
리베는 잠시 망설였다.
“제 권한으로는 확인할 수 없습니다. 다만 수납 장부의 식별번호는 드릴 수 있습니다.”
나는 번호를 받아 적었다. `00-성전`과 동일한지는 알 수 없었다. 당장 같은 돈이라고 취급할 근거가 없기 때문이다.
“도윤 님, 이거 엄청 중요한 증거죠?”
피코가 신나서 물었다.
“중요한 단서지. 아직 증거라고 부르기엔 확인할 게 많아.”
“차이가 뭐예요?”
“단서는 따라가 볼 이유가 있는 거고, 증거는 어떤 사실을 뒷받침하는 자료야. 같은 종이가 둘 다 될 수도 있지만 역할은 달라.”
리베가 미소를 지었다.
“우편물 하나가 이렇게 복잡한 일에 쓰일 줄 몰랐습니다.”
“저도요. 원래는 개인 편지면 그냥 읽고 말았을 텐데.”
나는 속으로 덧붙였다. 원래라면 서울 원룸에서 전기요금 고지서를 뜯고 있었겠지. 그때는 배송 추적이 안 되면 택배회사에 전화하면 됐는데, 여기서는 시간이 다르게 흐르는 두 나라의 서고를 뒤져야 한다. 우편 하나 찾는 데 마왕과 천사가 필요하다니. 정말 규모가 지나치게 커졌다.
리베는 공식 전달 확인서에 내 서명을 받아 갔다. 나는 편지 내용에 동의한다는 문구가 없는지 세 번 읽었다. 수령했다는 사실과 그 안의 계약에 동의했다는 사실은 완전히 다르다.
“서명하기 전에 이렇게 오래 확인하시는 분은 처음 봅니다.”
리베가 말했다.
“제가 직업이 좀 그래서요.”
“무슨 일을 하셨는데요?”
“회계요.”
“그럼 마법사이십니까?”
“거의 비슷합니다. 남들이 숨기고 싶은 숫자를 보면 잠이 깹니다.”
리베는 웃음을 터뜨렸다. 그리고 돌아가기 전에 덧붙였다.
“발송 예약이 미리 되어 있었다는 건 사실입니다. 하지만 발송 지시자가 공란이라는 사실도 같이 적어 두세요. 누군가 추측으로 제 이름을 넣는 일은 없었으면 좋겠습니다.”
그 부탁이 마음에 남았다. 나도 내 이름을 대신 쓰는 사람이 누군지 알고 싶어서 여기까지 왔으니까.
그날 오후, 성문이 열렸다.
피코가 먼저 문 앞에서 출입 시각을 적었다. 네 명의 명찰은 모두 요청서의 숫자와 일치했다. 확인이 끝나자 루시아가 길을 비켜 주었다. 과잉 경비 없이도 손님을 맞을 수 있다는 사실에 나는 괜히 뿌듯했다.
네 사람이 들어왔다. 흰 망토, 옅은 금빛 장식, 먼지 하나 없는 장화. 천사라면 날개가 있을 줄 알았는데 적어도 겉으로 보이는 날개는 없었다.
맨 앞의 세라핀은 회색빛 머리를 어깨까지 내려뜨린 여성이었다. 그녀는 우리를 하나씩 바라보다가 마왕에게 고개를 숙였다.
“평화 협약상의 정식 열람 절차를 요청하러 왔습니다.”
“반갑소! 본왕은 마왕 제르칸이다!”
“알고 있습니다.”
세라핀이 조용히 웃었다.
“그리고 한도윤 씨.”
내 이름을 정확하게 불렀다.
“당신도 뵙고 싶었습니다.”
갑자기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 마왕성에서 가장 유명한 인간이 된 건 좋은데, 마왕도 아닌 천계 사람까지 나를 찾는다니. 유명세라는 건 아무래도 야근수당을 동반해야 한다.
나는 명패와 문서부터 요청했다. 세라핀은 표정 하나 바꾸지 않고 차례대로 내밀었다. 예상보다 협조적이었다.
“대표님. `00-성전` 계정의 어떤 항목을 보려는 겁니까?”
“최초 계약과 현재 권리자 명부입니다.”
“왜요?”
“승계 상태에 이상이 있다는 통보를 받았습니다.”
“누구에게서요?”
“그 점은 먼저 확인해야 합니다.”
오호. 우리 쪽만 모르는 게 아니었군.
그때 뒤에 서 있던 참관인이 천천히 한 걸음 앞으로 나왔다. 얼굴은 가느다란 가면으로 가려져 있었다. 명패에는 개인 이름이 아니라 '제3감리 참관인'이라고만 적혀 있었다.
“개인 신원을 확인할 수 있습니까?”
내가 물었다.
참관인은 잠시 망설였다.
“회의실에 들어가야 할 이유부터 말씀드리겠습니다.”
“좋습니다. 들을게요.”
“계약의 거절권자가 회의장에 있기 때문입니다.”
나는 주변을 돌아봤다. 몰트, 루시아, 피코, 라델, 제르칸. 거절권자라면 누구를 말하는 걸까.
참관인의 가면 너머에서 시선이 나를 향했다.
“한도윤 씨. 당신이 그 사람인지 확인하러 왔습니다.”
아이고.
이번에는 면접관이 아니라, 내 이름으로 된 계약이 나를 면접 보러 온 모양이다.
제62화 댓글 0
댓글·공감·신고는 로그인 후 이용할 수 있습니다. 이전 익명 댓글은 그대로 표시됩니다.
댓글을 불러오는 중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