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회사에 다니면서 가장 싫어했던 말은 '이번 한 번만'이었다.
이번 한 번만 야근하자.
이번 한 번만 규정을 건너뛰자.
이번 한 번만 책임을 대신 지자.
그런 말을 하는 사람은 대개 다음번에도 같은 부탁을 한다. 그래서 나는 마왕성에 취업한 뒤 작은 규칙 하나를 만들었다. 이번 한 번만이라는 말이 나오면 그 이유를 반드시 문서에 남긴다는 규칙이었다.
“이번 한 번만, 이 서류를 그냥 처리해 주게.”
몰트 실장님이 말했다.
나는 고개를 들었다.
“실장님.”
“알고 있네. 농담이었어.”
천이백 년 근속하신 분의 유머도 점점 직장인답게 변하고 있다. 조금 불안하지만 성과라고 생각하자.
그날의 안건은 분쟁 예방 적립금이었다. 제8호 공방에서 시작된 자동 인증료가 중립 정산대행을 거쳐 공동 보증 회계소로 들어가고, 그중 일부가 `00-성전` 계정으로 귀속된다는 기록이 나왔다. 물론 장부의 '귀속'이 실제 송금을 의미하는지는 확인이 필요했다.
“그럼 계정을 열면 되지 않나?”
제르칸이 물었다.
“봉인돼 있습니다.”
“마왕의 명령으로도?”
“전하의 명령으로 열면 다른 나라가 원본 조작을 주장할 겁니다.”
“그럼 왕국 국왕도 같이 명령하면?”
“당사자 보호와 제3감리 절차도 필요합니다.”
“귀찮군.”
“맞습니다.”
나는 웃으며 대답했다.
“하지만 귀찮아서 필요한 겁니다. 힘센 사람 둘이 남의 계약을 마음대로 열어 보는 걸 막는 절차니까요.”
제르칸은 잠시 침묵했다. 그러다 의외로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좋다. 본왕의 국고도 누군가 그렇게 지켜 준다면 나쁘지 않겠군.”
“이미 지키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네가 제일 무섭다는 거다.”
또 그런 말씀을 하신다. 내가 무서운 게 아니라, 영수증을 확인하는 사람이 너무 드물었을 뿐이다.
우리의 계획은 두 단계였다. 첫째, 봉인 계정의 실체를 확인하기 전까지 신규 수수료의 불필요한 이중 청구를 차단한다. 둘째, 이미 모인 적립금은 당사자의 동의와 수취 기록을 확인해 처리를 결정한다. 돈을 함부로 가져오지도, 가만히 두고 피해를 키우지도 않는 방식이었다.
몰트는 결재선이 길다고 불평했다.
“이러다 한 장의 서류에 왕국과 마계와 중립 공관의 이름이 다 들어가겠네.”
“그럴 것 같습니다.”
“서명란이 부족한데?”
“종이를 더 붙이죠.”
“숲이 남아나지 않겠군.”
“마법 양피지 재활용 제도도 같이 만들까요?”
실장님은 잠시 고민하다가 진지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또 업무가 생겼다. 내 입이 방정이다.
청문회가 열리기 전날 밤, 나는 재정실에 혼자 남았다.
창밖에서는 해골병사들이 교대 근무를 하고 있었다. 멀리서 루시아의 고함이 들렸다. 아마 검술 훈련 중일 것이다. 마왕성이 조용한 날이 얼마나 드문지 이제 알 것 같았다.
내 앞에는 종이 세 장이 놓여 있었다. 하나는 내가 왕궁에서 받았던 무급 용사 계약서의 사본. 하나는 마왕성 정식 고용계약서. 마지막 하나는 소환 열하루 전에 내 이름으로 작성됐다는 예비 등록증이다.
세 장 모두 내 이름이 적혀 있었다.
그런데 내 동의를 받은 건 마왕성 고용계약서뿐이었다.
참 이상한 일이다. 인간을 구하겠다는 왕국보다 마왕의 성에서 내가 더 사람 대접을 받았으니.
물론 마왕성도 처음부터 좋은 직장은 아니었다. 정산도 엉망이고 횡령 의혹도 쌓여 있고, 사장님은 보라색 용암차를 대접하는 회사다. 그래도 적어도 여기서는 내가 계약서를 보여 달라고 하면 누군가 가져온다. 가끔은 그게 전부일지도 모른다.
“아직도 안 자나?”
몰트가 문을 열었다.
“실장님도 퇴근 안 하셨네요.”
“나는 잘 필요가 없네.”
“그 말이 제일 무섭습니다.”
몰트가 웃었다.
“보고서를 검토하다가 네가 남긴 메모를 봤네.”
그는 한 장을 펼쳤다.
[계약 동의 확인 없는 자동 갱신: 일시 중지 및 실제 피해 방지 조치 병행]
“이렇게 길게 적어야 하나?”
“줄일 수는 있지만 의미가 바뀌면 곤란하죠.”
“더 간단한 말은 없겠나?”
나는 잠시 생각했다.
“당사자에게 물어보자, 정도요?”
몰트는 한참 웃었다.
“그래. 결국 그 말이었군.”
나는 서류를 바라봤다.
처음 왕궁에서 국왕에게 물었던 것도 같은 질문이었다. 왜 내가 마왕과 싸워야 하느냐, 누구를 위해 하는 일이냐, 무슨 보상을 주느냐. 아무도 제대로 답하지 못했다. 그러자 그들은 내가 질문을 한다는 이유로 내쫓았다.
“실장님, 혹시 제가 이 세계에 잘못 온 걸까요?”
몰트는 한참 동안 대답하지 않았다.
“그럴 수도 있네.”
“위로는 안 되는데요.”
“하지만 이곳에서 네가 한 일이 잘못됐다고는 생각하지 않네.”
나는 고개를 들었다.
몰트의 눈구멍에는 작은 푸른 불꽃이 흔들렸다.
“네가 오기 전에는 우리 모두 오랫동안 하던 방식을 의심하지 않았지. 그런데 넌 왜 그러는지 물었네. 고작 일곱 해 일한 인간이 천이백 년 동안 쌓인 장부를 뒤집었으니 본래라면 대단히 괘씸한 일이야.”
“지금도 좀 괘씸해하시는 것 같습니다.”
“그렇네.”
우리는 함께 웃었다.
“하지만 네가 틀린 말을 한 건 아니었어.”
그 한마디에 가슴이 조금 먹먹해졌다.
직장생활을 하다 보면 누가 '수고했다'고 말하는 것보다 '네 말이 맞았다'고 해 주는 순간이 더 오래 남는다. 지난 7년 동안 내가 가장 듣고 싶었던 말일지도 모른다.
잠시 뒤 피코가 문틈으로 얼굴을 내밀었다.
“두 분 다 여기 계셨어요?”
“너도 왜 안 자?”
“내일 청문회 자리표를 만들었어요. 그런데 좌석이 모자라서요.”
나는 표를 받았다. 왕국 대표, 마계 대표, 중립 공관, 증인, 방청인. 그리고 한 칸이 비어 있었다.
[제3교역 감독관]
“이 자리는 누가 앉는 거야?”
피코가 물었다.
“아무도 모르는 걸.”
“그럼 비워 둘까요?”
나는 잠시 고민했다.
“응. 일단 비워 두자. 그 자리가 누구 것인지 확인하는 게 내일 회의 목적 중 하나니까.”
피코는 고개를 끄덕였다.
다음 날 회의실에는 정말 의자 하나가 비어 있었다.
그것이 가장 정직한 기록처럼 느껴졌다.
공동 청문회는 사흘 뒤 열렸다. 왕국에서는 라델과 아레인이 왔고, 중립 공관에서는 에브란이 참석했다. 제8호 공방의 마지막 장인 메르넬은 기록 구슬로 원격 참여했다. 그의 안전과 휴식을 위해 발언 시간을 제한했고, 수리공 도르벤도 동의한 범위의 영수증만 제출했다.
“오늘의 질문은 단순합니다.”
나는 서류를 펼쳤다.
“당사자가 거절한 계약이 왜 갱신됐는가. 그리고 갱신된 계약의 수수료가 실제로 누구에게 지급됐는가.”
라델은 첫 번째 질문에 답할 자료를 내밀었다. 중립 보관소의 자동 갱신 장치 사용 규정이었다. 아레인은 같은 규정의 왕국 사본을 펼쳤다. 문구는 비슷했지만 중요한 차이가 있었다.
왕국 사본에는 '거절 기록 확인 후 갱신 중단'이라는 조항이 있었다.
마계가 보관한 옛 사본에는 그 조항이 빠져 있었다.
“누가 삭제했습니까?”
루시아가 물었다.
“삭제했다고 단정할 수는 없습니다.”
나는 두 사본을 나란히 놓았다.
“처음부터 서로 다른 판본을 배포했을 수도 있죠.”
메르넬이 구슬 너머에서 말했다.
“우리 공방은 그 중간에 받은 도면으로 장치를 만들었소. 그 도면에도 거절 기록 확인 절차는 없었지.”
“그럼 당시 장치는 애초에 잘못 설계된 겁니까?”
피코가 물었다.
“그럴 수 있어. 하지만 제작자가 받은 도면대로 만들었다면 책임은 더 복잡해져.”
메르넬은 고개를 숙였다. 예전에는 자신이 만든 장치 때문에 누군가 피해를 봤을까 봐 두려워하는 듯했다. 나는 그에게 물었다.
“장인님, 도면을 변경할 권한이 있으셨습니까?”
“없었소. 안전 장치에 이상이 있으면 보고하도록 돼 있었지.”
“보고하셨나요?”
“했소. 세 번이나.”
그가 제출한 문서에는 짧은 도장이 반복돼 있었다.
[검토 완료 / 설계 변경 불필요]
승인자는 또 '제3교역 감독관'이었다.
나는 길게 숨을 내쉬었다.
이 정도면 이름을 모르는 사람 하나가 너무 많은 일을 한 셈이다.
하지만 공식 명의 뒤에 어떤 사람이 있었는지는 아직 알 수 없다. 계정이 여러 사람에게 공유됐을 가능성도 있고, 누군가 서류만 대신 처리했을 수도 있다.
우리는 서둘러 그 이름을 범인 칸에 적지 않았다.
대신 계정 접근 기록과 설계 변경 이력을 동결하도록 합의했다. 증거를 덮어쓰지 못하게 하는 조치였다. 사용 중인 필수 구슬은 긴급 운영 계정으로 전환해 계속 가동하기로 했다.
“그럼 돈은 누가 내나?”
제르칸이 물었다.
“계약당사자가 합의한 한도 안에서 임시 지급하고, 최종 책임은 조사 뒤 정하겠습니다.”
“또 임시인가!”
“전하, 영원한 임시를 만들지 않으려고 기한도 적었습니다.”
마왕은 문서를 보더니 흐뭇하게 웃었다. 일곱 날. 그 안에 중간 보고를 제출하기로 했다.
청문회가 거의 끝날 무렵 성검이 갑자기 미세하게 빛났다.
[당사자 의사 확인 절차 접근]
[기존 등록 건의 임의 집행: 보류 유지]
나는 검을 바라봤다. 이 문구는 내가 볼 수 있다. 다른 사람에게 그대로 읽어 준다고 공식 증거가 되는 건 아니다. 그래서 먼저 입을 다물고 확인 가능한 부분부터 찾았다.
“에브란 님. 제 이름으로 된 사전 등록 기록을 다시 조회할 수 있을까요?”
“당사자 본인의 동의가 있다면 가능하네.”
“동의합니다. 다만 제 기록만요.”
그는 원본을 개봉하지 않고 색인 상태를 조회했다. 등록 사유는 여전히 '분쟁 당사자 식별 전 임시 보존'. 그런데 이번에는 처음 보는 칸이 하나 더 나타났다.
[대리 등록 근거 문서: 미확인]
아레인이 말했다.
“누가 이름을 넣었는지도 모르는데 등록부터 된 거군요.”
“그렇습니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그 등록의 효력이 어디까지인지부터 따져야겠네요.”
제르칸이 팔짱을 꼈다.
“본왕이 도울 일은 없는가?”
“있습니다.”
“말하라!”
“제 이름으로 임의 서명하는 사람이 없도록 마왕성 내부 권한부터 정리해 주세요.”
“고작 그것인가?”
“저한테는 가장 중요합니다.”
그는 고개를 끄덕였다.
공동 조사 합의서에 서명하는 동안 라델이 조용히 내게 말했다.
“왕궁에서 처음 만났을 때는 당신이 모든 걸 돈으로 판단하는 사람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저도 재무관님이 모든 걸 명분으로 판단하는 사람인 줄 알았습니다.”
“그랬죠.”
우리는 어색하게 웃었다.
“그런데 지금은 조금 다르게 봅니다.”
“저도요.”
라델은 마왕성의 회의실을 둘러봤다. 인간과 마족이 서로의 서류에 서명을 하고 있었다. 누구도 상대의 의견에 반드시 동의하지는 않았지만, 적어도 한쪽이 다른 쪽의 이름을 대신 쓰지는 않았다.
“이번 일이 어디까지 갈지 모르겠군요.”
“저도 그렇습니다. 다만 끝내기 전에 확인해야 할 것들이 분명해졌죠.”
우리는 서로 손을 내밀었다. 처음 왕궁에서는 상상할 수 없었던 광경이었다.
그 순간 창문 밖에서 검은 종이 울렸다.
마왕성 재정실의 비상 신호였다. 누군가 봉인 계정 `00-성전`에 열람을 요청한 모양이었다.
피코가 전송 구슬을 들고 뛰어 들어왔다.
“도윤 님! 동의 없이 열려고 한 건 아니에요. 정식 열람 신청이 들어왔어요!”
“누가?”
피코는 낯선 문양이 찍힌 신청서를 펼쳤다.
[신청 기관: 천상 교역 관리단]
[열람 목적: 오래된 거래의 수익 배분 확인]
[입회 희망자: 천계 사절단]
나는 잠시 신청서를 바라봤다.
천계.
이제야 그 단어가 공식 문서에 나타났다.
“신청서가 진짜인지부터 확인하자.”
“상대가 내일 도착한대요!”
그 말에 제르칸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천계의 사절이 본왕의 성에 들어온다고?”
루시아는 검에 손을 얹었다. 라델은 얼굴이 하얗게 질렸고, 몰트는 긴 한숨을 쉬었다.
나는 조용히 신청서 아래쪽을 읽었다.
[방문 예정: 내일 오전]
[요청 사항: 회의실, 봉인 계정 사본, 다과 제공]
…다과?
나는 마지막 항목에 동그라미를 쳤다.
“피코.”
“네?”
“다과비부터 따로 잡아.”
“지금요?”
“응. 천계에서 와도 공짜는 안 되지.”
그러고는 성검을 내려다봤다.
“그리고 너. 내 이름으로 허락한 계약 있으면 미리 말해라.”
검이 조용히 빛났다.
[미확인 계약이 존재합니다.]
나는 입을 다물었다.
정말이지, 이 회사는 하루도 조용할 날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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