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원래 의자를 좋아했다.
오래 앉아 일했으니까. 허리 받침이 있는 의자와 없는 의자는 다음 날 아침 허리 상태를 결정한다. 회사에서 의자 교체 예산이 삭감됐을 때 내가 얼마나 슬펐는지 누가 알까.
그런데 이세계에 와서 의자 하나 때문에 이렇게 많은 시간을 쓸 줄은 몰랐다.
“이것이 옛 휴전 협정의 회의실입니다.”
에브란이 문을 열었다.
회색 경계 제2공관의 낡은 회의실. 벽에는 왕국과 마계의 문장이 나란히 걸려 있었고 가운데에는 긴 탁자가 놓여 있었다. 문제는 의자가 세 개뿐이라는 점이었다.
“왕국 대표, 마계 대표, 그리고 제3감리인.”
에브란이 설명했다.
“세 사람만 앉는 회의였습니까?”
“당사자들은 별도의 대기실에서 차례로 들어왔지. 중요한 건 누구의 동의가 빠졌는지 확인하는 일이었어.”
나는 가운데 의자를 살폈다. 오래된 나무 의자였다. 등받이에는 원 세 개와 세로줄 하나가 새겨져 있었다.
“혹시 이 의자가 대리번호 0003의 원래 자리입니까?”
“번호 자체는 나중에 붙은 것일 수 있네. 원래는 제3감리라는 직책만 있었지.”
이런 부분이 중요하다. 숫자가 같다는 이유로 모든 것을 하나로 묶으면 정답이 아니라 미로가 된다.
몰트는 회의실 탁자에 기록판을 놓았다. 아레인과 라델도 왕국 대표로 도착했다. 루시아는 문 가까이에 섰고, 피코는 누구의 말도 놓치지 않으려고 펜을 들었다.
회의가 시작되기 전에 에브란은 오래된 출입 명부를 보여 줬다. 거기에는 수백 년 전 이 의자에 앉았던 보존관들의 이름이 줄지어 적혀 있었다.
“열두 명밖에 없네요.”
피코가 말했다.
“직책이 자주 바뀌지 않았거든.”
에브란이 답했다.
“왜요?”
“일이 썩 인기 있지 않았어.”
“뭐 하는 일인데요?”
“왕국과 마계 양쪽에서 미움을 받는 일.”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감사 담당자의 현실도 비슷하다. 회사 돈을 낭비하는 사람은 감사실을 싫어하고, 낭비하지 않은 사람도 서류를 요구받으면 감사실을 싫어한다. 늘 감사가 끝난 뒤에야 조금 좋아해 준다.
에브란은 명부 마지막에 손가락을 올렸다.
“이 사람이 내 스승이었네. 이름은 오르세.”
“아직 살아 계십니까?”
“아니. 오래전에 돌아가셨지.”
그의 목소리가 잠시 낮아졌다.
“그분은 언제나 이렇게 말했어. 우리는 옳은 결정을 내리는 사람이 아니라, 다른 사람이 자기 결정을 내렸는지 확인하는 사람이라고.”
나는 그 말을 천천히 생각했다.
왕국은 내가 용사라는 이유로 목숨을 걸어야 한다고 했다. 마왕성은 계약을 쓰고 월급을 줬다. 그 차이를 경험하고 나니 에브란의 말이 더 크게 들렸다.
“원래는 정말 좋은 제도였네요.”
“그래서 잃어버린 게 더 아픈 거지.”
에브란은 조용히 명부를 덮었다.
바로 그때 복도에서 소란이 들렸다. 젊은 왕국 사제가 중립 공관 직원과 말다툼을 하고 있었다.
“왜 제가 참관할 수 없다는 겁니까? 신성 계약은 사제단의 관할입니다!”
직원은 난처한 표정이었다.
“당사자 동의가 필요한 열람 구역이라서요.”
“신의 뜻에 무슨 인간의 동의가 필요합니까!”
아.
그 말을 듣는 순간 나는 발걸음을 멈췄다. 왕궁에서 들었던 말과 똑같다. 신의 뜻이라면 모든 의무를 무급으로 떠맡아야 한다던 사람들.
“무슨 일입니까?”
내가 다가가자 사제의 표정이 굳었다.
“배신자 용사!”
“안녕하세요. 배신자라니 좀 그렇네요. 아직 고용계약을 맺은 적 없었는데.”
“신의 사명을 거부한 자가 무슨 낯으로 여기 왔느냐!”
“서류 보러 왔습니다.”
그가 다시 말을 꺼내려는 순간 에브란이 다가왔다.
“참관을 원한다면 정식 신청서를 제출하시오.”
“나는 사제다!”
“신분은 확인했네. 신청서는 별개야.”
사제의 얼굴이 붉어졌다. 나는 그에게 조용히 말했다.
“열람이 금지된 게 아닙니다. 필요한 범위를 적고 왜 필요한지 설명하시면 돼요.”
“지금 나를 가르치려 드느냐?”
“그건 아닙니다. 절차 안내입니다.”
그는 한참 노려보다가 결국 신청서를 받아 들었다. 손이 부들부들 떨렸다. 사제에게 이런 경험은 처음인 모양이었다.
“이름이 뭐죠?”
그가 마지못해 물었다.
“한도윤입니다.”
“그건 알고 있다. 신청서에 적을 서류 담당자 이름 말이다.”
“아, 그건 에브란 님입니다.”
사제는 신청서를 작성하기 시작했다.
피코가 내게 속삭였다.
“도윤 님. 저분은 왜 그렇게 화가 났어요?”
“자기가 가진 권한이 무엇인지 처음 확인받으니까.”
“그런 것도 화가 나나요?”
“사람마다 다르지. 어떤 사람은 기분 나빠하고, 어떤 사람은 오히려 안심해.”
나는 사제가 문항마다 멈춰 서서 질문하는 모습을 지켜봤다. 목소리는 조금씩 잦아들었다. 필요한 서류를 적는 일이 생각보다 어렵다는 걸 깨달은 듯했다.
다 작성한 신청서를 에브란이 받았다.
“검토 결과는 정식으로 통지하겠네.”
“얼마나 걸리오?”
“요건이 충족되면 늦지 않게.”
그제야 사제는 돌아갔다.
루시아는 그 뒷모습을 보며 감탄했다.
“검을 한 번도 뽑지 않았는데 이겼군.”
“이긴 건 아니죠. 싸우지 않고 신청서를 받았을 뿐입니다.”
“그게 이긴 거 아니냐?”
나는 웃었다.
가끔은 정말 그렇기도 하다.
“당사자의 동의 여부를 확인하는 제도라면 왜 지금은 동의 없는 갱신이 계속되는 거죠?”
내가 묻자 에브란이 한숨을 쉬었다.
“그걸 알기 위해 원래 기록을 보려는 거네.”
서랍 깊은 곳에서 오래된 계약 절차서가 나왔다. 표지에는 '휴전기 거래 분쟁 공동 조정 규칙'이라고 적혀 있었다. 처음 조항은 간단했다.
[어느 한쪽도 부재 당사자의 의사를 대신 작성할 수 없다.]
좋다.
두 번째 조항도 마음에 들었다.
[동의를 확인할 수 없을 때는 행위의 집행을 유예한다.]
이것도 좋다.
문제는 세 번째였다.
[동의 기록의 존속 여부는 후계 보관 체계에 따라 별도 관리한다.]
“후계 보관 체계라는 게 지금의 자동 갱신 장치일까요?”
피코가 물었다.
“가능성은 있습니다.”
아레인이 말했다.
“하지만 이 규정만으로 지금 장치가 합법이라는 결론은 내릴 수 없어요. 당시 규칙과 현행 계약을 연결하는 근거가 있어야 합니다.”
그 말은 맞았다.
나는 규정의 도입 시기부터 확인했다. 제3감리 제도는 전쟁 중에도 중립 상인과 부상자가 억울한 계약을 강요받지 않도록 만든 절차였다. 어느 쪽의 권력도 혼자 상대방의 약속을 대신 만들지 못하게 하는 일종의 안전장치였다.
“좋은 취지였네요.”
내가 말했다.
에브란은 웃지 않았다.
“취지는 늘 좋았어. 시간이 지나면서 관리하는 사람들이 목적을 잊었을 뿐이지.”
나는 그 말을 수첩에 적었다. 대한민국에서도 종종 들을 법한 이야기였다. 처음에는 직원을 보호하겠다며 만든 시스템이 나중에는 직원이 제때 퇴근했는지 감시하는 시스템이 되는 식이다.
회의는 오후까지 이어졌다. 라델은 왕국 측 정산이 제3감리 기록에 의존하는 영역을 목록으로 만들었고, 몰트는 마왕성의 자동 지급 계약을 정리했다. 양쪽 모두 상대편이 책임질 거라고 생각했던 부분이 많았다.
“이 항목은 왕국이 관리하는 줄 알았습니다.”
몰트가 말했다.
“우리도 마계가 관리하는 줄 알았습니다.”
라델이 대답했다.
나는 두 사람을 번갈아 봤다.
“그럼 아무도 관리 안 했다는 거네요.”
정적.
왜 내가 이 말을 할 때마다 회의실이 조용해지는 걸까. 사실 확인만 했는데.
제일 난처한 사람은 피코였다. 그는 빈칸을 무엇으로 채워야 할지 모르겠다며 펜을 든 채 멈춰 있었다.
“'현재 책임 주체 미확정'이라고 쓰면 돼.”
“그럼 누가 책임져요?”
“우리가 확인하고 지정해야지.”
“책임을 만드는 것도 일이군요.”
“중요한 일이야.”
오후에 우리는 제3감리인의 기록 보관소를 살폈다. 에브란은 오래된 문서를 한꺼번에 열지 않고 열람 대상 목록부터 보여 줬다. 과거 방문자의 사생활이 섞여 있다는 이유였다. 나는 동의했다. 나 역시 다른 세계에서 내 이름이 멋대로 등록됐다는 사실 때문에 이렇게 고생하고 있으니까.
목록에서 눈에 들어오는 항목 하나가 있었다.
[미종결 계약: 당사자 의사 확인 요청 / 누적 73건]
“이게 전부 용사 계약입니까?”
“아니. 중립 상인, 병사, 치료사, 노동자들의 계약이 섞여 있지.”
“그중 실제로 의사 확인이 완료된 건요?”
에브란이 별도 표를 가져왔다.
[확인 완료: 49건]
[거절 확인: 13건]
[확인 불능: 11건]
합계는 73이었다. 숫자는 맞았다. 그러나 그것으로 끝난 건 아니다.
“거절된 13건은 정말 집행이 멈췄습니까?”
에브란은 눈을 내리깔았다.
“원칙대로라면.”
그 대답이 마음에 걸렸다.
우리는 거절된 계약 중 외부 공개가 허용된 사례만 추렸다. 한 건은 군마 공급 계약이었고, 한 건은 수리 장치 유지 계약, 또 한 건은 상인의 통행 보증 계약이었다. 세 건 모두 분쟁 당사자의 동의를 얻어 정산 상태를 확인할 수 있었다.
가장 먼저 나온 군마 계약은 정상 종료돼 있었다. 두 번째 수리 장치 유지 계약은 특이했다.
[당사자 거절: 기록됨]
[갱신 인증: 계속됨]
“이런.”
나는 종이를 내려놓았다.
거절했다는 사실은 보존됐는데, 돈이 나가는 시스템은 그걸 무시했다. 제도가 원래 의도한 것과 정확히 반대다.
세 번째 통행 보증 계약에서도 비슷한 오류가 발견됐다. 누군가 거절을 했지만 새로운 인증은 자동으로 발행됐다. 다만 돈이 실제로 이동했는지 확인하려면 별도 지급 원장을 열어야 했다.
“그럼 누가 이걸 갱신한 거예요?”
피코가 물었다.
“아직 모른다. 다만 갱신 장치가 거절 상태를 확인하지 않았을 가능성이 있어.”
에브란은 오래된 목재 탁자를 손끝으로 두드렸다.
“이 의자는 거절을 기록하라고 놓은 건데.”
나는 그를 바라봤다.
“지금은 거절을 무시하는 장치에 의자를 빌려준 셈이군요.”
에브란의 표정이 어두워졌다. 후계 보존관으로서 책임을 느끼는 것 같았다. 그렇다고 그가 수백 년 전에 만들어진 장치를 직접 관리했는지는 별개다.
“자책하시기 전에 시스템 연결 기록부터 보죠.”
내가 말했다.
“당신이 지켜 온 원본 기록 덕분에 이 문제가 드러난 거니까요.”
에브란은 한참 뒤에야 고개를 끄덕였다.
해가 질 무렵 몰트가 이상한 서류를 가져왔다.
[제3감리 원본 보관 업무 이전 신청]
수취 기관은 낯익은 이름이었다.
[천상 교역 관리단]
“이게 진짜 있던 조직이라는 뜻입니까?”
피코가 물었다.
“신청서에 이름이 적혀 있다는 뜻이지.”
나는 마지막 줄을 읽었다.
[이전 신청 상태: 승인 거절]
“어?”
원본을 가져가려는 신청이 거절됐다.
“누가 거절했습니까?”
에브란이 기록을 살폈다.
“당시의 보존관이야. 이유도 남았네.”
그는 오래된 글씨를 소리 내 읽었다.
“당사자의 거절권을 보존하는 기관이 그 권리를 영리 거래 기관에 위임할 수 없음.”
나는 길게 숨을 내쉬었다.
누군가는 원본을 가져가려 했고, 누군가는 막았다. 그 사실만으로 천상 교역 관리단의 정체를 알 수는 없었다. 하지만 적어도 그 이름이 최근 쪽지에만 등장한 건 아니었다.
복도를 나오자 루시아가 물었다.
“이제 싸울 상대를 찾았나?”
“아뇨. 오늘은 의자 하나가 지켜야 했던 약속을 찾았습니다.”
“의자와 싸울 수는 없겠군.”
“그건 정말 그러지 마세요.”
돌아가기 전 에브란은 오래된 의자 세 개를 닦았다. 누가 시킨 일도 아닌데 한참 먼지를 털어냈다.
“새로 쓰실 생각인가요?”
내가 묻자 그가 고개를 끄덕였다.
“기록을 보호한다는 이유로 사람의 말을 듣지 못했던 것 같네. 의자가 비어 있으면 누구라도 앉아 자기 사정을 말할 수 있어야겠지.”
“그럼 허리 받침부터 보강하세요. 오래 앉아 있으면 힘듭니다.”
에브란은 웃음을 터뜨렸다.
“자네는 참 이상한 곳까지 신경 쓰는군.”
“그게 직업병입니다.”
나는 오래된 탁자를 마지막으로 바라봤다. 누군가의 거절을 듣기 위해 마련된 자리가 아직도 남아 있다는 것이 이상하게 든든했다.
마왕성으로 돌아가는 길에 나는 제3감리 규칙의 첫 문장을 다시 읽었다.
[부재 당사자의 의사를 대신 작성할 수 없다.]
내가 소환되기 열하루 전에 누군가는 내 이름을 썼다.
피코는 돌아오는 내내 명부의 이름들을 다시 읽었다. 그중에는 이름 대신 직책만 적힌 사람도 있었다. 원래는 그 사람들을 보호하려고 가린 것인지, 처음부터 기록하지 않은 것인지 알 수 없었다. 나는 그 명부를 덮었다. 이제 남의 이름뿐 아니라 내 이름이 쓰인 이유도 제대로 물어볼 차례였다.
그 종이는 누구의 의사를 대신한 것이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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