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상 청구라는 말은 참 편리하다.
'네가 대신 내라'는 뜻을 길고 점잖게 표현할 수 있으니까.
공동 보증 회계소가 보낸 통지서를 읽는 동안 나는 한국에서 받은 억울한 업무 지시들을 떠올렸다. 다른 팀이 실수해서 생긴 비용인데 우리 팀 예산으로 처리하라는 말. 담당자가 그만뒀으니 남아 있는 사람이 책임지라는 말. 그런데 이세계에서는 그런 말을 좀 더 화려하게 한다.
[신성 보증 체계 훼손에 따른 손실 보전 요청]
아주 그냥 성스럽다. 금액까지 성스럽게 천정부지였으면 더욱 감동적이었을 것이다.
“청구 금액이 얼마라고?”
몰트 실장님이 물었다.
“금화 사십이 닢입니다.”
“어제 우리가 지급한 긴급 인력비보다 많군.”
“네. 그중 서른 닢은 장치가 가동됐더라면 받을 예정이었다는 인증 수익입니다.”
“예정된 수익도 손실인가?”
“일부 계약에서는 그렇다고 주장하죠. 문제는 그 계약이 유효한지부터 확인해야 한다는 겁니다.”
나는 답신 초안을 작성했다. 실제 지출 증빙과 계약 조항을 보내 달라, 인증 중단 지시 시각이 우리 지급 보류보다 빠른 이유를 설명해 달라, 필수 물자의 지연을 막기 위한 공동 검수 비용이 있었다는 점을 반영해 달라.
피코는 그걸 읽더니 말했다.
“이런 말을 써도 괜찮아요? 화내지 않을까요?”
“화낼 수는 있지.”
“그러면요?”
“서류로 화내라고 하지 뭐.”
몰트가 웃었다. 종이 위에서는 호통도 작은 글씨로 남는다. 그게 좋은 점이다.
그런데 답신을 보낼 주소부터 찾기가 어려웠다. 공동 보증 회계소는 길드 명부에 있었다. 하지만 실제 사무실 주소는 '제3경유지'. 연락 담당자는 '순환 감독관'. 지급 계정은 중립 적립금 계정 하나로 이어져 있었다.
“대체 사무실은 어디 있는 거야?”
“우편물을 보내면 일단 중립 공관에 쌓인대요.”
피코가 설명했다.
“그다음 공용 구슬이 알아서 전달한대요.”
“공용 구슬이 알아서. 참 편리하다.”
내가 빈정거리자 피코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도윤 님은 공용 구슬을 싫어하세요?”
“아니. 누가 책임지는지 모르는 공용 구슬이 싫은 거야.”
그 차이는 중요하다. 도구는 편리할수록 좋다. 다만 도구를 핑계로 사람이 사라지면 안 된다.
우리는 제8호 공방의 정기 청구 내역과 공동 보증 회계소의 계정을 대조했다. 중립 정산대행이 송금을 처리하고, 회계소가 인증 서비스를 제공하며, 그 위에서 어떤 기관이 수수료를 받는 구조였다. 돈은 여러 갈래로 나뉘었다.
“이거 우리나라 카드 결제 수수료보다 복잡하네.”
내가 중얼거리자 피코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카드가 뭔데요?”
“작은 플라스틱 한 장.”
“마법이 있나요?”
“있지. 쓰면 다음 달에 내가 울어.”
피코는 한참 고민하다가 노트에 '지구의 저주받은 지불 도구'라고 적었다. 그냥 놔뒀다. 틀린 말은 아니니까.
돈의 경로에서 이상한 부분을 찾았다. 제8호 공방의 정기 청구금 중 원래 수리 기술자 인건비로 표시된 금액이 있었는데, 실제 지급받은 기술자가 확인되지 않았다. 수취 계정만 존재하고 이름은 '관리 대행'으로 처리돼 있었다.
“사람을 찾아야 하겠네요.”
피코가 말했다.
“맞아. 먼저 돈 받은 기록의 접근 권한부터 확인하자.”
우리는 법적 근거를 갖춘 공동 조회를 신청했다. 라델과 아레인이 열람 범위를 검토했고, 몰트는 마왕성 계약의 지급 근거를 확인했다. 다들 귀찮아했지만 이제 서류를 건너뛰는 사람은 없었다.
사흘 뒤 조회 결과가 도착했다. 관리 대행 계정에서 지급한 대상 중 실제 이름이 있는 기술자 세 명이 발견됐다. 모두 열세 해 전에 일했지만 최근에는 돈을 받지 않았다고 했다. 그중 한 명은 오래전에 은퇴했고 한 명은 다른 지역으로 이주했다. 마지막 한 명은 해골이었다.
“살아 있는 분들이 아니군요.”
피코가 작게 말했다.
“해골도 일할 수 있어.”
몰트가 엄숙하게 말했다.
“죄송합니다, 실장님!”
나는 웃음을 참았다.
해골 기술자의 이름은 도르벤이었다. 그는 지금 마왕성 남쪽에서 작은 기계 수리점을 운영하고 있었다. 손가락 뼈에 기름이 묻어 있었고, 작업복에는 '고장은 거짓말하지 않는다'라는 문구가 새겨져 있었다.
“돈을 받으셨냐고?”
도르벤은 내 질문을 듣자 눈구멍의 불꽃을 치켜올렸다.
“난 공방이 문 닫은 뒤 한 닢도 받은 적이 없어.”
“계속 수리한 장치도 없습니까?”
“없어. 마지막 장치 하나는 내가 직접 철거했지.”
“철거 기록이 남아 있습니까?”
“있지. 내 가게에서 가장 오래된 영수증이다.”
그는 상자 하나를 뒤졌다. 먼지 속에서 나온 양피지는 끝이 찢어져 있었지만 날짜와 품목은 읽을 수 있었다. 여기에 또 하나의 기록이 붙어 있었다.
[정기 인증 수수료 자동 갱신: 철거와 무관]
“이게 왜 붙어 있습니까?”
“나도 몰라. 계약을 끝냈다고 하니까 앞으로는 장비가 없어도 인증비가 나간다고 하더군.”
그는 손을 탁 쳤다.
“내가 그때 장치 없는 데 무슨 인증비냐고 소리쳤지.”
“상대는 뭐라고 했어요?”
“고객 권리 보호를 위한 보관 비용이라더군.”
나는 잠시 말문이 막혔다.
고객의 권리를 보호하려고 고객 몰래 돈을 받는다.
대체 누구의 권리를 보호하는 거지?
하지만 우리는 영수증 한 장으로 전체 제도를 불법이라고 결론 낼 수는 없었다. 실제 보관 서비스를 제공했을 수도 있다. 계약이 연장된 경위와 당사자 동의 여부를 확인해야 했다.
도르벤의 수리점 앞에는 낡은 마차가 한 대 세워져 있었다. 바퀴는 세 개뿐이었다.
“한 짝은 어디 갔습니까?”
내가 묻자 도르벤이 대수롭지 않게 대답했다.
“수리 중이지.”
“그럼 마차가 움직입니까?”
“못 움직이지.”
“바퀴 세 개면 힘들겠네요.”
“뭘 당연한 말을 하시오?”
아, 그렇다. 이분에게는 당연한 일이다. 그런데 우리의 계약 시스템은 마차에 바퀴가 몇 개 있는지조차 모르면서 계속 통행 인증료를 청구하고 있었다.
수리점 안에는 젊은 고블린 견습생이 있었다. 그는 이름이 케로라고 했다. 도르벤 옆에서 조심스럽게 나사를 조이며 작업하는 모습이 꽤 진지했다.
“장인님, 이 볼트는 어디에 끼웁니까?”
“그거 말고 옆에 있는 걸 써. 힘 받는 방향이 달라.”
“똑같이 생겼는데요.”
“겉모양만 보고 고르면 나중에 바퀴가 빠진다.”
나는 두 사람을 지켜보다가 속으로 중얼거렸다.
저 말, 회계에도 그대로 적용되는구나.
겉으로 같은 금액이라도 비용의 성격이 다르면 다르게 처리해야 한다. 똑같이 금화 세 닢이 나갔다고 해도 약품 구입인지, 인장 관리료인지, 직원의 미지급 급료인지 구분하지 않으면 사람을 다치게 한다.
케로가 나를 알아보고 눈을 반짝였다.
“마왕성 회계 담당자 맞죠? 소문 들었어요!”
“무슨 소문?”
“마왕님이 금고를 열기 전에 허락받는 사람이 있다던데요!”
“그건 과장됐는데.”
루시아가 옆에서 말했다.
“과장이 아니다. 실제로 그러더군.”
아니, 단장님까지 왜 이러십니까.
케로는 부러운 얼굴로 내 성검을 바라봤다. 나는 조심히 칼집을 뒤로 돌렸다. 아이가 신기해할 만한 물건이지만 허락 없이 만지게 할 순 없다.
“그 검은 정말 말을 듣나요?”
“말보다 불빛으로 대답하는 편이야.”
“와. 저도 그런 도구를 만들어 보고 싶어요.”
도르벤이 웃었다.
“우선 바퀴부터 제대로 조립하거라.”
나는 그 말이 좋았다. 위대한 도구도 작은 나사 하나에서 시작한다. 이곳은 그래서 장부보다 실제 손으로 만든 물건이 더 중요한 순간이 많다.
케로는 잠시 뒤 나무 상자에서 오래된 전송 구슬을 꺼냈다.
“이건 버려진 구슬인데, 고쳐 보니까 아직 켜져요.”
“어디서 났어?”
“장인님이 폐기물 더미에서 가져오셨어요.”
도르벤이 고개를 끄덕였다.
“폐기 허가를 받은 물건이지. 케로가 내부를 보고 공부하라고 줬네.”
구슬을 켜자 낡은 계약 양식이 떴다. 이름은 가려져 있었고 상단에는 '관리 보관 모드'라는 글씨가 있었다. 케로가 신이 나서 버튼을 눌렀다.
“여기서 장치를 등록하면 가짜로 작동 시험을 할 수 있어요.”
화면에는 실제 지급 없이 인증 절차만 재현하는 기능이 있었다. 교육용 모의 모드였다.
“이걸 누르면 어떻게 돼?”
“구슬이 계약이 살아 있는 것처럼 표시해요. 실제 돈은 움직이지 않아요.”
“그렇구나.”
나는 문득 이상한 생각이 들었다.
사람들이 보고 있는 계약 화면 중 일부가 실제 계약이 아니라 모의 시험 화면이라면?
물론 가능성만으로는 아무것도 단정할 수 없다. 그러나 표시가 비슷하다면 누군가 착각할 수는 있다.
“케로. 이 모드에서 찍힌 기록과 실제 기록을 구분할 수 있니?”
“네. 시험 모드에는 맨 아래 작은 점이 하나 더 생겨요.”
그가 화면 끝을 가리켰다. 정말 작았다. 피코는 렌즈를 꺼내 들여다봤다.
“이런 걸 누가 알아봐요?”
“장인들은 알죠.”
케로가 어깨를 폈다.
나는 웃었다.
“맞네. 전문가가 필요한 이유가 있지.”
우리는 모의 기록의 모양을 기록했다. 이게 이번 사건과 연결되는지는 확인되지 않았다. 하지만 실제 계약과 시험 기록을 구별하는 방법을 배운 것만으로도 소득이었다.
도르벤이 나를 따로 불렀다.
“젊은이, 부탁 하나 해도 되겠나?”
“말씀하세요.”
“저 애가 언젠가 자기 기술로 먹고살 수 있게 해 주시오. 내가 가르치는 건 어렵지 않은데, 요즘은 계약 없이 장인을 부려먹는 곳이 너무 많아.”
나는 작업장 안의 케로를 바라봤다. 녀석은 바퀴를 맞추느라 땀을 뻘뻘 흘리고 있었다.
“제가 장담할 수 있는 일은 아니지만, 적어도 무슨 계약을 맺는지 모르는 채 일하게 두진 않겠습니다.”
도르벤은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우리 둘 사이에 그 정도 약속이면 충분했다.
도르벤은 서랍에서 추가로 종이 한 장을 꺼냈다. 직접 해지를 요청했을 때 받은 답신이라고 했다.
[갱신 중단 요청은 접수됐으나 대상자의 신성 등록 상태 확인이 완료되지 않음]
“신성 등록?”
내가 되묻자 그는 어깨를 으쓱했다.
“난 기계 고치는 기술자인데 말이야. 왜 신성 등록이 필요하다는 건지.”
“혹시 신성 계약을 맺으신 적은요?”
“없어. 그런 건 우리 같은 수리공하고 상관없는 일이지.”
그 대답을 듣는 순간 내 손에 들린 성검이 미세하게 떨렸다.
[정산 참조 정보 발견]
[당사자 신원 확인 없이 계약 상태 연결 금지]
나는 표정을 바꾸지 않으려고 애썼다. 성검의 문구는 나만 볼 수 있다. 다른 사람들이 증빙 없이 믿어줄 리도 없다.
“괜찮으십니까?”
피코가 물었다.
“응. 검이 좀 신경 쓰여서.”
“또 노래를 불러요?”
“아니. 오늘은 얌전해.”
우리는 도르벤에게 사본 제공 동의를 받은 뒤 수리점을 나왔다. 길가에는 빵 냄새가 퍼졌다. 루시아가 고기를 굽는 가게를 발견하고 발걸음을 멈췄다.
“저기서 쉬었다 가자.”
“좋습니다. 저녁 시간도 됐고요.”
피코는 주머니를 뒤졌다.
“출장비로 처리할 수 있겠죠?”
“업무 중 식사니까 기준 한도 안에서는.”
“그럼 단장님은 기준을 넘길 것 같은데요.”
우리는 동시에 루시아를 바라봤다. 그녀는 이미 고기 꼬치 여섯 개를 주문하고 있었다.
“그건 별도 식비로 처리하겠습니다.”
나는 한숨을 쉬었다.
고깃집 주인은 우리 일행의 계산서를 보더니 묘한 표정을 지었다. 루시아가 먹은 고기 꼬치 수가 정확히 열둘이었기 때문이다.
“혹시 대회 참가 선수입니까?”
주인이 물었다.
“기사단장입니다.”
“아, 그렇군요. 체력이 남다르네요.”
나는 영수증에 식사 목적과 참석자를 적었다. 피코가 웃었다.
“단장님이 드신 건 회계 처리를 못 하겠는데요.”
“개인 초과분은 본인 부담이지.”
“루시아 님이 화내실까요?”
그녀는 뜻밖에도 고개를 끄덕였다.
“내가 먹은 만큼은 내가 내지.”
나는 잠시 감동했다. 전투광 기사단장이 출장 식비 한도를 이해하다니. 이곳에서 내가 이루어 낸 가장 위대한 업적일지도 모르겠다.
돌아오는 길에 피코가 도르벤의 답신을 다시 읽었다.
“신성 등록 상태 확인. 이거 도윤 님 계약에서도 나온 말이죠?”
“비슷한 말은 나왔지.”
“그럼 장치 수리와 용사 소환이 연결된 걸까요?”
“그럴 가능성이 생겼어. 하지만 아직은 문구가 같다는 사실만으로는 부족해.”
성검은 다시 조용해졌다.
우리가 증명해야 할 건 점점 명확해지고 있었다.
없는 직원이 계약을 갱신하고, 없는 장치에 인증료가 붙고, 없는 동의를 확인한다며 사람의 길을 막는다.
돈이 새는 것만큼이나 더 큰 문제는 있었다.
누군가의 '동의했다'는 기록이 어떻게 만들어지는지, 당사자도 모르고 있다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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