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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품으로마왕성에 취업했더니 내가 제일 무섭단다 · 56화
PAYLUA ORIGINAL · 제56화

56화. 서명이 없으면 길도 막힙니다

마왕성에 취업했더니 내가 제일 무섭단다 · 6,038자

오프라인 책장
“인장에 묻은 잉크가 안 마른다고?” 몰트 실장님이 내 말을 듣더니 서류를 코앞에 들이댔다. 코가 없으신 분이 코앞에 가져간다는 표현도 이상하긴 하다. 하지만 아무튼. “이건 잉크가 아니네.” “네?” “갱신용 마법 안료야. 권한이 유효한 동안 표면이 계속 젖어 있는 것처럼 보이지.” 아. 그럼 오늘 찍은 게 아니라는 뜻이군. 나는 잠시 들떴던 마음을 내려놓았다. 잉크가 마르지 않았다고 오늘 범인이 다녀갔다고 단정할 뻔했다. 어떤 세계에서든 처음 보는 기술을 모르면 사람을 억울하게 만들기 쉽다. “그럼 찍은 시각을 어떻게 확인합니까?” “안료의 출고 기록을 보면 되겠지.” “실장님, 왜 진작 말씀 안 하셨어요?” “물어보지 않았잖나.” “…….” 틀린 말은 아니다. 살다 보면 천이백 년 묵은 상사에게도 배울 게 있다. 안료 기록을 조회하던 중 북쪽 국경에서 긴급 전송이 왔다. 마왕성과 왕국을 오가는 구호 물자 마차 여섯 대가 검문소에 묶였다는 소식이었다. 검사 구슬이 계약 명의를 확인하지 못해 통행 허가를 거절했다는 것이다. “누가 보내는 물건인데요?” 내가 묻자 피코가 명단을 읽었다. “방호벽 수리 부품, 채석장 치료소 약품, 그리고 겨울용 식량이에요.” 나는 바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현장에 연락해. 약품부터 긴급 보관 장소를 확보하고, 식량이 상하지 않도록 창고를 잡자.” “왕국 쪽 검문소인데 저희가 요청해도 되나요?” “라델에게 공동 협정에 따른 예외 절차가 있는지 물어봐.” 왕국은 적국이다. 하지만 얼마 전에는 주민에게 금화 열여덟 닢을 돌려주는 일도 함께 했다. 원수가 되었다고 매일 모든 일에서 원수처럼 굴 필요는 없지 않은가. 루시아는 내가 말을 끝내기도 전에 검을 챙겼다. “이번에는 가도 되지?” “호위는 필요합니다.” “좋아!” “단장님. 검을 뽑는 순간 공동 조사 협정이 날아갈 수도 있어요.” 그녀는 손을 멈췄다. “그럼 검집째로 때려도 되나?” “아니요.” “굉장히 까다롭군.” 그쪽은 늘 까다롭게 해야 한다. 검문소로 가는 마차 안에서 나는 피코와 이번 지연의 비용을 계산했다. 식량은 하루 더 보관하면 품질이 떨어지고, 약품은 냉각 구슬이 필요하며, 수리 부품은 늦을수록 임시 가설벽이 위험해진다. 숫자를 종이에 적으니 사건의 무게가 달라졌다. “도윤 님. 이건 그냥 통행료 문제보다 크네요.” “응. 사람 목숨이 걸린 물건은 먼저 살려야 해.” 검문소에는 왕국 병사와 마계 운송인이 각각 한 줄로 서 있었다. 가운데에는 누런 글씨가 떠올라 있었다. [제3교역 감독관의 확인이 없으면 공동 계약 물품 통과 불가] 나는 문구를 읽고 허탈하게 웃었다. 존재하지 않는 감독관의 확인을 기다리는 동안 약품이 상하고 있었다. 왕국 검문 책임자는 젊은 기사였다. 이름은 벨안. 갑옷은 반짝였지만 눈 밑에는 피곤이 가득했다. 그는 내 신분을 확인하더니 경계하는 얼굴로 말했다. “왕국에서 수배된 용사에게 검문소 업무를 맡길 수는 없습니다.” “맡기라는 게 아니라 공동 조사 요청을 드리러 왔습니다.” “절차가 있습니다.” “네. 그래서 절차를 여쭙는 겁니다.” 그는 대답 대신 손을 뻗었다. 내 성검을 보려는 듯했다. 나는 뒤로 한 걸음 물러났다. “강제 회수는 보류 중입니다. 관련 문서 가져왔습니다.” 그가 문서를 읽는 동안 피코가 라델의 회신을 내밀었다. [민간 필수 물자 긴급 통행 심의 가능. 공동 현물 검수 및 수령처 확인 필요.] 벨안은 곧바로 태도가 누그러졌다. “규정이 있다면 저도 협력하겠습니다. 다만 감독관 인증 장치는 계속 거부 표시를 내고 있습니다.” “그 장치가 사람을 대신해 결론을 내리게 하지는 맙시다. 저희가 같이 물건을 보죠.” 검문소 뒤편 창고에는 대기 중인 운송인들이 모여 있었다. 늑대인간 상인이었고, 인간 마부였고, 해골 운반병이었다. 서로 말도 잘 통하지 않는 사람들이 같은 문제로 발이 묶여 있었다. “언제 통과할 수 있습니까?” 늑대인간 상인이 거칠게 물었다. “원본을 확인하고 있습니다. 우선 긴급 물자부터…” “우린 긴급하지 않습니까? 이 화물의 절반은 하루만 늦어도 상해요.” 그가 천을 걷자 신선한 약초 꾸러미가 보였다. 공식 구호 물자는 아니었지만 병원에 납품하는 물건이라고 했다. 나는 피코와 주문서를 확인했다. 수령지는 작은 개인 치료소였다. “이것도 치료용이군요.” “네! 왕립 치료소가 아니라고 안 보내 주면 저희는 어떡합니까?” 상인이 입술을 깨물었다. 나는 벨안을 불렀다. 긴급 물자 기준이 공공기관 납품에만 적용되는지 확인했다. 규정은 의외로 폭넓었다. '부패하기 쉬운 필수 치료 물자'도 포함돼 있었다. 문제는 검문소 현장에서 그 조항을 아는 사람이 없었다는 것뿐이었다. “그럼 이분도 긴급 검수에 넣읍시다.” 벨안이 놀란 얼굴로 물었다. “명단에 없는데요?” “명단이 전부는 아니잖아요. 규정의 목적에 맞는지 확인하고, 왜 추가했는지 기록하면 됩니다.” 그는 잠시 생각하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늑대인간 상인은 손을 덥석 잡았다. “고맙습니다!” “아직 통과한 건 아닙니다. 물건을 확인해야 해요.” “아, 물론이죠.” 그는 급히 손을 놨다. 나는 그게 조금 웃겼다. 감사 담당자가 고맙다는 말을 들으면 늘 이렇게 어색하다. 우리는 약초 꾸러미를 하나씩 확인했다. 악취가 나는 마른 풀이 섞여 있었지만 품목에는 '해독 약초'라고 적혀 있었다. 담당 치료소에서 가져온 허가서를 대조하니 실제로 독을 빼는 데 쓰는 재료라고 했다. 루시아가 냄새를 맡고는 눈살을 찌푸렸다. “이걸 먹는다고?” “먹는 게 아니라 달여서 쓰는 거랍니다.” “대단하군.” “단장님은 천둥도마뱀 혀를 넣은 차도 드셨잖아요.” 그녀는 잠시 생각했다. “그건 맛있었다.” 정말 대단한 분이다. 검문이 길어지자 해골 운반병 하나가 조용히 다가왔다. “혹시… 제 마차도 봐줄 수 있습니까?” “무슨 물건인데요?” “구호 물자는 아닙니다. 아이들 장난감인데요. 마을 축제에 납품해야 하거든요.” 그는 작은 나무 인형 하나를 꺼냈다. 등에 태엽이 달린 인형이었다. 메르넬의 가게에서 본 것과 비슷했다. “기한은 언제입니까?” “내일입니다. 늦으면 계약 위약금을 내야 해요.” 나는 그의 송장을 확인했다. 인증 계약이 유효하지 않다는 이유만으로 멈춰 있었고, 위험 물품은 아니었다. 다만 긴급 통행 대상도 아니었다. “지금 당장 통과시켜 드리긴 어렵습니다.” 그의 어깨가 축 처졌다. “그렇군요.” “대신 계약 지연 사유 확인서는 발급해 드릴 수 있습니다. 당사자가 지연 책임을 다투는 데 쓸 수 있도록요.” 그가 나를 올려다봤다. “그런 것도 받을 수 있습니까?” “규정상 가능합니다. 우선 요청을 넣어 보겠습니다.” 모든 사람을 한 번에 구할 수는 없다. 하지만 무엇 때문에 길이 막혔는지 남기면 피해를 줄일 수는 있다. 그날 해골 운반병은 축제 마을에 미리 연락을 보냈다. 마을에서는 늦더라도 물건을 받겠다는 답이 왔다. 위약금 여부는 별도 협의하기로 했다. 그는 내게 작은 인형 하나를 건네려 했지만 나는 정중히 거절했다. “이건 판매용이잖아요. 제가 사겠습니다.” “고맙습니다.” 나는 돈을 내고 인형을 받았다. 버튼을 누르니 작은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오늘도 힘내세요!” 회사에 다닐 때는 이런 인형을 보면 유치하다고 생각했을지도 모른다. 그런데 낯선 세계에서 들으니 꽤 위로가 됐다. 피코가 그 인형을 한참 바라봤다. “도윤 님. 그거 저한테 빌려주시면 안 돼요?” “왜?” “야근할 때 틀어 놓게요.” “야근 안 하게 만드는 게 먼저지.” 그래도 녀석에게 인형을 빌려줬다. 피코는 작은 소리를 듣고 방긋 웃었다. 오늘도 힘내세요. 그 말이 필요한 사람은 생각보다 많았다. 우리는 약품부터 확인했다. 왕국 쪽 기록관이 봉인을 읽고, 마계 쪽 운송인이 재고를 세고, 나는 수령 병원의 주문서를 대조했다. 첫째 상자는 맞았다. 둘째도 맞았다. 셋째 상자에서 문제가 나왔다. “이건 약품이 아니라 무기 손잡이잖아요?” 벨안이 말했다. 나는 상자 안을 들여다봤다. 나무 손잡이가 잔뜩 들어 있었다. 순간 또 검 만 자루 사건이 떠올랐다. 그러나 성급하게 짐을 빼앗을 수는 없었다. “주문서에는 '고정 손잡이'라고 적혀 있네요.” “무기 손잡이 아닙니까?” “수리용 장치의 손잡이일 수도 있죠.” 운송인이 서둘러 설명했다. “방호벽 조임 도구예요. 저기 철제 고리에 끼우는 겁니다.” 그는 실제 부품 하나를 꺼내 조립해 보였다. 구멍에 손잡이를 끼우자 나사가 움직였다. 벨안의 표정이 누그러졌다. “무기로 쓰긴 어렵겠군.” “그렇죠. 사람을 때리려면 뭐든 무기가 될 수 있지만, 그렇다고 숟가락까지 군수품으로 분류할 순 없잖아요.” 루시아가 조용히 손잡이를 들어 보았다. “이 정도면 충분히 때릴 수 있는데.” “단장님.” “농담이다.” 정말 농담이었을까. 확신할 수 없다. 검수는 오후까지 계속됐다. 그동안 나는 보관비가 누구 책임인지 정리했다. 검문소의 거부로 발생한 비용이니 왕국이 전액 부담하라고 요구하기 쉬웠지만, 마계 측 계약 표기에도 오류가 있었다. 서로 원인을 확인한 뒤 분담하자는 데 합의했다. 사람들의 물건을 먼저 보내는 것이 급했다. 검문소 뒤편에 있던 낡은 수리 구슬도 확인했다. 제8호 공방의 인장이 새겨져 있었다. 하지만 외장만 보고 속까지 같다고 단정할 수는 없었다. 내부의 운영 기호를 읽어 보니 현재 인증 제공자가 따로 있었다. [인증 공급처: 공동 보증 회계소] “이 기관은 또 뭡니까?” 피코가 물었다. “새 이름이네.” “천상 교역 관리단하고 관계가 있나요?” “모르지. 같다고 하려면 계약서가 있어야 해.” 우리는 기관명을 적었다. 그 뒤 약품 마차부터 통과시켰다. 다음은 식량, 마지막은 수리 부품이었다. 벨안은 모든 마차가 지나간 뒤 구슬의 경고 표시를 보며 깊은 한숨을 쉬었다. “저 장치 때문에 저도 매번 곤란합니다.” “예전에도 이런 일이 많았습니까?” “한 달에 서너 번이요. 통과시켜도 되는 물건인지 모르겠는데 장치가 막으면 병사들이 겁을 먹어요.” “불이익이 두려워서요?” “네. 잘못 승인하면 개인 봉급에서 손해를 물린다는 규정이 있거든요.” 역시. 이상한 승인 시스템 뒤에는 늘 책임을 떠넘기는 규정이 따라온다. 나는 벨안에게 공동 조사 범위 안에서 그 규정을 확인할 수 있는지 물었다. 그는 사본 발급을 신청하겠다고 했다. 조금 전까지 나를 수배자라고 부르던 사람이 이제는 나와 함께 서류를 찾고 있었다. “용사님.” 그가 조심스럽게 불렀다. “저는 아직도 당신이 왜 마왕성에서 일하는지 이해가 안 됩니다.” “월급을 줘서요.” “그게 다입니까?” “어…… 밥도 잘 줍니다.” 그는 한숨을 쉬다가 결국 웃었다. “정말 이상한 분이군요.” “많이 듣습니다.” 검문을 끝낸 뒤 우리는 벨안과 짧은 업무 개선 회의를 했다. 담당자들이 교대할 때 어떤 물품이 보류 상태인지, 어디까지 검수했는지 인계받도록 표준표를 만들었다. 특히 부패하기 쉬운 약품과 식량은 별도로 표시하기로 했다. “왕국 서식에 마계 담당자의 서명이 들어가도 됩니까?” 벨안이 물었다. “공동 검수 항목이면 가능하다고 라델 님이 확인해 주셨습니다.” “정말 세상이 변했군요.” 그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나도 그렇게 생각한다. 마왕성으로 출근하면서 적국 검문소의 업무 매뉴얼까지 손볼 줄 누가 알았겠는가. 그러니 월급만 잘 나온다고 모든 걸 예측할 수는 없는 법이다. 그날 저녁, 마왕성으로 돌아오는 길에 피코가 물었다. “도윤 님. 오늘 이긴 건가요?” “누구를?” “그 감독관이요. 물건을 결국 통과시켰잖아요.” 나는 잠시 생각했다. “오늘은 사람이 이긴 거야. 약품이 필요한 사람한테 갔으니까.” 피코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데 도착하자마자 낯선 전송 구슬이 울렸다. 발신인은 공동 보증 회계소였다. [귀하의 긴급 통행 조치로 발생한 인증 손실에 대해 구상 청구를 검토 중입니다.] 나는 구슬을 내려다봤다. “피코.” “네?” “오늘부터 내 서류함 하나 더 만들자.” “무슨 이름으로요?” “남의 실수를 나한테 청구하는 사람들.” 피코가 웃음을 터뜨렸다. 나는 진심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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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56화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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