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회사에도 존재하지 않는 직원이 있다.
아니다. 정확히 말하면 존재하지 않는 직원에게 배정된 업무가 있다.
“제3교역 감독관은 임명된 적이 없다면서요?”
피코가 문서 두 장을 들고 물었다.
“현재 확인한 인사 기록에는 없어.”
“그런데 권한은 살아 있고, 지시도 내리고, 돈도 받아요.”
“응.”
“그럼 사람보다 훨씬 효율적인데요?”
“성과평가에는 좋아 보이겠네.”
나는 피코가 웃기 전에 말을 덧붙였다.
“다만 그런 직원에게 월급까지 주는 건 사양이야.”
존재하지 않는 상사가 존재하는 부하들을 부린다. 대한민국 직장생활에서 비슷한 기분을 느껴 본 적은 있지만 이곳은 한술 더 뜬다. 실체가 없어도 승인 버튼만 누를 수 있으면 조직이 돌아간다고 생각하는 모양이었다.
아레인이 가져온 인사 명부에는 감독관의 직급도, 업무 시작일도, 퇴직 처리도 없었다. 그런데 업무용 구슬에는 권한이 남아 있었다. '임시 업무 계정'이라는 설명만 적혀 있었다.
“이건 임시라기엔 꽤 오래됐네요.”
내가 날짜를 짚었다.
“몇 년인가요?”
“적어도 열세 해.”
피코의 얼굴이 길어졌다.
“저보다 나이가 많아요.”
“그렇겠네.”
“그럼 상사로 모셔야 하나요?”
“아니. 계정은 상사가 아니야.”
우리의 첫 조사는 '권한이 실제로 어떤 일을 할 수 있었는가'를 확인하는 것이었다. 승인 이력만 보면 언제나 손쉬운 함정에 빠진다. 장치에 권한이 있다고 표시돼도 실제로 문서에 서명할 수 있는지, 돈을 움직일 수 있는지, 다른 사람의 계약을 바꿀 수 있는지는 각각 다르다.
“세 가지로 나눠 보자.”
내가 판에 적었다.
[문서 접수]
[지급 요청]
[계약 변경]
“셋 다 할 수 있으면 어떡해요?”
피코가 물었다.
“그럼 승인권한이 한 사람에게 너무 몰린 거야. 그 사람은 존재하지도 않고.”
몰트 실장님이 피식 웃었다. 해골이 웃으면 턱관절에서 작은 소리가 난다. 실장님은 그걸 굉장히 품위 있다고 생각하는 것 같다.
“인간 세상에서는 이런 걸 뭐라고 부르나?”
“퇴사자 계정 미삭제라든가, 권한 회수 누락이라고 부르죠.”
“우리 세상에서는?”
“유령 직원이요.”
“내 앞에서 유령이란 말을 그렇게 쓰지 말게.”
“죄송합니다.”
몰트 실장님은 리치다. 유령이라는 말에 민감하실 수도 있다.
점심 무렵 아레인이 왕국 측 담당자로부터 공동 열람 허가를 받아 왔다. 그런데 이 허가서는 예상보다 더 조심스러웠다. 감독관 계정의 실제 거래 내역 중 개인 계약에 해당하는 항목은 이름을 가려야 하고, 열람 기록이 자동으로 남는다고 했다.
“좋아요. 그 정도는 필요하죠.”
내가 서명하자 아레인이 의외라는 듯 쳐다봤다.
“더 넓은 권한을 요구할 줄 알았습니다.”
“필요한 걸 봐야죠. 지나가는 사람의 사생활까지 감사할 생각은 없습니다.”
그는 고개를 끄덕였다. 왕국 재무청에서 이런 대화를 나누게 될 줄은 서로 몰랐을 것이다.
권한 표를 열자 예상하지 못한 항목이 나왔다.
[계약 갱신 인증: 가능]
[계약 신규 생성: 불가]
[수취 계정 지정: 불가]
[기존 수취 계정 유지: 가능]
미묘하다.
스스로 계약을 새로 만들지는 못하지만, 이미 있던 계약은 끝나지 않도록 붙잡을 수 있다. 그리고 돈을 새 계정으로 돌릴 수는 없지만 기존 수취인에게 계속 보낼 수는 있다.
“그러면 공방이 해지를 신청해도 유지할 수 있겠네요?”
피코가 물었다.
“해지 요청을 처리할 권한이 다른 곳에 있다면 그럴 수 있지.”
바로 그때 '절대 감사'가 붉은 실을 그었다.
[동일 계약 / 해지 요청 접수 / 갱신 인증 발행]
두 기록의 접수일은 정확히 같았다.
우연일 수 있다.
하지만 우연이라면 어떻게 같은 날 서로 반대되는 처리가 이루어졌는지 확인해야 한다.
나는 제8호 공방의 옛 해지 요청서를 다시 펼쳤다. 메르넬이 보여 준 원본 사본에는 접수 번호 `0003-8`이 찍혀 있었다. 시스템 표에도 같은 문자열이 있었다.
“번호가 같아요!”
피코가 소리쳤다.
“응. 이건 의미 있네.”
“그럼 감독관이 해지를 막은 건가요?”
“아직은 몰라. 번호 체계가 같은 접수함을 공유했을 수도 있어.”
다만 지금까지 본 단서 중 가장 구체적인 연결이었다. 우리는 원본 접수함의 관리자를 찾기로 했다.
다음 날에는 라미아가 서둘러 전송 구슬을 보내 왔다. 반출 기록에서 인수자가 남긴 서명이 이상하다는 내용이었다.
“어떻게 이상한데요?”
“이름이 없어요. 도장만 찍혀 있어요.”
“그건 흔한데요.”
“아뇨. 도장 자체에 이름 칸이 없다고요.”
나는 기록 사본을 받아 들었다. 인장에는 권한 번호와 갱신 문양만 있었다. 누가 찍었는지 알아보려면 사용 구슬의 접속 기록을 확인해야 했다.
“그럼 구슬 기록을 열람할 수 있습니까?”
“접수함 관리자로서 요청은 할 수 있습니다. 다만 승인권자가 누군지 몰라요.”
라미아의 네 귀가 축 늘어졌다. 나는 웃음이 나오려다가 참았다. 귀가 네 개나 있는데 전부 실망한 표정을 지으니 마음이 쓰였다.
“승인권자가 누구인지 확인하는 요청부터 합시다. 권한 담당 부서를 조회하면 되죠.”
“그 부서가 없어진 지 오래예요.”
“또요?”
“사실 통합하면서 이름이 바뀐 걸 수도 있어요.”
라미아가 머리를 감쌌다.
이세계에서는 계약보다 부서명이 더 오래 살아남는다. 반대로 중요한 담당 부서는 서류에서 너무 쉽게 사라진다.
우리는 옛 조직도와 현재 조직도를 맞춰 보기로 했다. 메르넬에게 자료를 요청하고, 에브란에게 중립 보관소의 권한 승계 문서를 부탁했다. 피코가 세 장의 조직도를 펼쳤다.
첫 번째에는 정산심사부가 있었다.
두 번째에는 중립 계약관리실이 있었다.
세 번째에는 공동 보증 회계소가 있었다.
“셋이 같은 조직일까요?”
피코가 물었다.
“업무가 비슷하긴 하지. 하지만 이름이 바뀌었다고 자동으로 법적 책임까지 승계되는 건 아니야.”
“그럼 뭘 봐야 해요?”
“이전 계약서와 인수인계 목록.”
피코는 한숨을 쉬었다. 이해한다. 또 계약서다. 이쯤 되면 검술을 연습하러 들어왔다가 도서관 사서가 된 기분일 것이다.
조직도를 보는 동안 루시아가 문을 벌컥 열었다.
“한도윤. 이상한 사람이 널 찾아왔다.”
“어떤 사람인데요?”
“가슴에 명패를 열세 개 달고 있더군.”
열세 개?
정문으로 나가 보니 정말이었다. 마르고 키가 큰 남자가 가슴에 여러 개의 명패를 주렁주렁 달고 있었다. 각 명패에는 다른 조직명이 적혀 있었다.
“누구십니까?”
“저는 통합 계약 지원 담당자 테르입니다.”
“왜 명패가 그렇게 많으세요?”
“조직이 개편될 때마다 새로 받았습니다.”
“예전 건 왜 안 떼셨어요?”
“떼면 누가 저를 알아보겠습니까?”
아.
얼굴보다 명패가 먼저인 세계다.
테르는 현직 계약 지원 직원이었다. 그가 가져온 것은 계정 접근 권한의 실제 후계자가 누구인지 적힌 공식 증명서였다. 다만 문서에는 옛 조직의 보관 업무를 승계했다는 말만 있었고, 승인권한까지 넘겨받았다는 말은 없었다.
“그럼 본인은 문서 보관 담당이군요.”
“네. 승인권자는 아닙니다.”
“그런데 왜 제3교역 감독관 이름으로 서류가 처리되죠?”
테르는 어색하게 웃었다.
“제가 입사할 때부터 구슬이 그렇게 움직였습니다.”
“오류 신고는 하셨어요?”
“세 번이요.”
또 세 번.
그는 자신의 신고 내역을 보여 주었다. 첫 신고에는 '정상 운영'이라는 답변이 왔고, 둘째에는 '차기 개편 때 검토', 셋째에는 답변이 없었다.
“그런데 신고를 계속하셨네요.”
내가 묻자 테르가 어깨를 으쓱했다.
“나중에 제 책임이 될까 봐요.”
너무 익숙한 말이었다.
“그 판단은 맞습니다. 그리고 기록을 남긴 게 정말 다행이에요.”
나는 그의 세 통 신고서를 증거 목록에 넣었다. 본인의 동의를 받고 이름은 공개 자료에서 가렸다. 누군가 문제를 경고했는데 조직이 계속 외면했다면 그 사람에게 모든 책임을 물을 수는 없다.
테르는 돌아가기 전 마지막으로 말했다.
“혹시 이번에도 '다음 개편 때'라는 답이 나오면 어쩌죠?”
“이번엔 변경 전후의 책임자를 서명으로 받겠습니다.”
“정말요?”
“네. 당사자들이 서명하지 않으면 개편이 완료된 게 아니니까요.”
그가 고개를 숙였다.
명패 열세 개가 짤랑거렸다.
처음에는 우스웠는데 돌아가는 뒷모습을 보니 이상하게 안쓰러웠다. 명패는 계속 늘어났지만 그가 해야 할 일은 누구도 명확히 알려 주지 않았던 것이다.
관리자는 놀랍게도 세무 담당자가 아니라 작은 우편 업무실의 직원이었다. 마족 여성 우편사 라미아는 귀가 네 개였고, 그래서인지 우리가 문을 열기도 전에 이름을 불렀다.
“한도윤 재정 담당자 맞죠? 오늘 문의가 올 거라고 들었어요.”
“누가 알려 줬습니까?”
“중립 기록실에서요. 열람 요청서가 먼저 도착했거든요.”
“아.”
이 세계 우편이 가끔은 전자문서보다 빠르다. 귀가 네 개면 업무 효율도 높아지는 걸까. 그런 말을 했다간 이상한 표정을 볼 것 같아서 참았다.
라미아는 커다란 서랍을 열었다. 접수 번호 `0003-8`은 사람 식별자가 아니라 세 번째 공용 접수함의 여덟 번째 항목을 뜻한다고 설명했다.
“그럼 대리번호 0003과는 다른 겁니까?”
“형식이 비슷하지만 달라요. 원래는 별도 코드였거든요.”
“언제부터 섞였죠?”
“제8호 공방이 문을 닫던 무렵이요. 접수 시스템을 통합하면서 번호가 겹쳤어요.”
오.
이제야 조금 현실적인 이유가 나왔다.
대단한 음모가 아니라 시스템 통합 오류일 수도 있다. 그런데 시스템 통합 오류 때문에 누군가 열세 해 동안 돈을 가져갔다면 그 역시 작은 문제가 아니다.
“당시 작업 명령서가 있습니까?”
“있어요. 하지만 담당자의 개인정보는 가려 드려야 해요.”
“그렇게 주세요.”
그녀는 고개를 끄덕이고 서류를 찾기 시작했다. 그런데 갑자기 표정이 변했다.
“어?”
“왜요?”
“명령서가 분명 여기 있었는데….”
서랍 안에는 빈 봉투만 남아 있었다.
[원본 반출: 긴급 감사 대응]
[인수자: 제3교역 감독관]
우리는 다 같이 그 문구를 바라봤다.
“아까 없던 직원이죠?”
피코가 속삭였다.
“그래.”
“그 직원이 직접 와서 가져간 거예요?”
“아직 모른다. 누가 그 이름으로 반출 신청을 했는지 확인해야 해.”
라미아가 급히 출입 장부를 펼쳤다. 반출 시각은 오늘 새벽. 실제 출입자는 작은 마차를 타고 왔고 얼굴은 천으로 가렸다고 한다.
“그분이 남긴 물건은 없습니까?”
“명함이요.”
라미아는 서랍 아래에서 얇은 금속판을 꺼냈다.
[제3교역 감독관 / 정산 보전 업무]
아래에는 주소 대신 이런 문구가 있었다.
[업무 연락: 상위 계약을 통해서만 가능]
나는 한숨을 쉬었다.
상사 이름도 모르고, 주소도 모르고, 연락도 못 한다. 일만 시키는 명함이라니.
우리 회사 부장님도 이렇게까지는 안 하셨는데.
밖에서 기다리던 루시아가 명함을 들여다봤다.
“그럼 이자를 어떻게 찾지?”
“이 명함을 만든 사람부터 찾죠.”
“장인을?”
“네. 이제는 얼굴 없는 직함보다 손에 잡히는 물건이 낫습니다.”
루시아는 검집을 가볍게 두드렸다.
“손에 잡히는 물건이라면 내 검도 있지.”
“그건 일단 넣어 두세요.”
그날 저녁 명함의 재질을 확인한 메르넬에게서 답신이 왔다.
[해당 금속판은 제8호 공방의 정식 생산품이 아님. 다만 폐업 전에 설계한 덧씌움 장치와 동일한 고정홈 사용.]
누군가 오래된 설계도를 가지고 있었다.
그리고 그 누군가는 오늘 새벽 우편 업무실에서 원본 명령서를 가져갔다.
우편사 라미아에게는 오늘부터 원본 반출 때 실물 수령자를 확인하자는 임시 안내서를 남겼다. 얼굴을 가렸다고 모두 범인은 아니다. 다만 권한이 적힌 명함 하나로 누구든 원본을 가져갈 수 있는 구조는 바꿔야 했다.
“추가 근무가 많아지겠네요.”
라미아가 한숨을 쉬었다.
“그러면 절차가 늘어난 만큼 인력과 수당도 같이 요청하세요. 통제는 공짜가 아니니까요.”
“그렇게 써도 됩니까?”
“문서에 이름 걸고 말씀하세요. 제가 공동 증빙을 붙이겠습니다.”
그녀는 네 귀를 쫑긋 세웠다.
“그건 마음에 드네요.”
나는 피코에게 물었다.
“반출 승인 도장도 사진 찍었지?”
“네. 그런데 이상한 게 있어요.”
“뭐?”
“잉크가 아직 안 말랐어요.”
새벽에 찍었다면서 저녁까지 젖어 있는 잉크.
이번에는 단순한 시각 오류만으로 설명하기 어려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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