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의 제기서의 제목은 아주 점잖았다.
[계약 질서 회복을 위한 긴급 권고]
내용은 그렇지 않았다.
'마왕성 재정실의 불법 지급 중단으로 중립 보급 거점의 운영에 위험이 발생했으므로 모든 지급을 즉시 재개하고 특별 감사 예산을 동결하라.'
한마디로 돈을 다시 보내라는 뜻이었다.
“이걸 누가 보냈습니까?”
내가 묻자 피코가 외부 봉투를 펼쳤다.
“발신 표시가 없어요. 접수 대행인이 대신 제출했대요.”
“그 대행인 이름은?”
“법정 등록명은 공개 요청 중이고요. 문서 서명에는 '제3교역 감독관'이라고만 적혀 있어요.”
제3교역 감독관.
제3감리인.
대리번호 0003.
어째 숫자 3이 자꾸 모인다. 이쯤 되면 이름에 3이 들어가는 사람을 전부 의심할 판이다. 그러면 마왕성 제3식당 아주머니까지 조사해야 한다. 그분은 볶음 버섯을 정말 잘 만드시는데.
“실장님, 이의 제기 자체는 막지 맙시다.”
몰트가 고개를 끄덕였다.
“접수하고 반박 자료를 내라는 뜻이군.”
“네. 정산대행이 실제로 돈을 받을 권리가 있다면 확인하면 됩니다.”
“반대로 없다면?”
“그때는 환급을 요구하고요.”
몰트는 서류 아래의 작은 문양을 짚었다.
“이 표식, 기억나는군.”
“제8호 공방 인장과 같은 겁니까?”
“같아 보이지만 선이 하나 다르네.”
그는 렌즈를 꺼냈다. 나는 실장님을 보며 문득 그분의 안경 값을 예산에 넣어야 하는지 고민했다. 해골에게 안경은 복지일까 장비일까. 회계 분류가 참 애매하다.
“원형은 기록 보존을 뜻하는데 이 표식은 계약 갱신을 뜻하는 듯하군. 정확히는 장인의 감정이 필요하겠어.”
그 말에 우리는 메르넬을 다시 찾았다. 다만 이번에는 노인을 먼 곳으로 데려오지 않았다. 사고를 겪은 그의 손에 무리가 가지 않도록 기록 구슬로 문양을 전달하고 상담 시간을 정식으로 예약했다.
“오호. 오랜만에 보는 무늬군.”
메르넬이 구슬을 바라보며 말했다.
“만드신 겁니까?”
“원형은 만들었소. 하지만 이건 누가 선을 덧그었군.”
“어디가 다르죠?”
장인은 문양 오른쪽을 가리켰다.
“이 점. 정식 인장은 끝이 갈라지는데 저건 매끈하오.”
“그럼 위조입니까?”
“그것도 단정하면 안 되오. 내 원형에서 파생된 후속 등록품일 수도 있으니까.”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뭔가 수상할 때마다 '위조다!'라고 외치면 드라마 주인공처럼 멋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실제로는 소송만 늘어난다. 전 직장에서 법무팀과 일해 본 사람은 안다. '확인 필요'라는 네 글자가 얼마나 많은 사람의 인생을 구하는지.
메르넬이 낡은 도면을 펼쳤다. 제8호 공방이 만들었던 덧씌움 장치는 금형의 원래 모양을 유지한 채 겉으로 다른 권한을 표시하는 기능이었다. 핵심은 실제 권한을 생성하는 게 아니라 이미 존재하는 것처럼 보이게 한다는 점이었다.
“인증 장치에 이걸 붙이면 어떤 일이 생깁니까?”
“접수 담당자가 별도 검증을 하지 않을 때만 속을 수 있소.”
“그러면 구슬이 진짜 권한을 받은 건 아니군요.”
“그렇소. 장부의 서명과 실제 서명을 구분할 수 있는 사람은 구별하겠지.”
우리의 '절대 감사'와 비슷하면서도 정반대였다. 내 능력은 기록 사이의 틈을 보여 주지만, 저 물건은 틈 위에 종이를 덧붙인다. 작은 차이 같아도 결과는 커진다.
우리는 구슬의 발급 내역을 요청했다. 문제는 발급 시스템이 중립 구역에 있어 열람 허가가 필요하다는 점이었다. 라델에게 공동 요청서를 보내자 생각보다 빠르게 회신이 왔다.
[왕국 재무청 공동 조사 협의 수락. 단, 군사 정보 및 개인 동의 기록은 별도 보호.]
“라델 님이 많이 달라지셨네요.”
피코가 말했다.
“그러게. 처음에는 내 월급부터 막던 분인데.”
“지금은 우리랑 같은 편인가요?”
“같은 편이라기보다 같은 증거를 보고 있지.”
그게 더 믿을 만하다. 편은 기분에 따라 바뀌지만 서로 서명한 조사 범위는 기록에 남는다.
마왕성으로 찾아온 왕국 기록관 아레인은 사본과 원본 보존 절차부터 확인했다. 왕국의 문서 검증 도구와 마계의 구슬을 동시에 사용하자 한 장의 신청서에 서로 다른 접수 시각이 나타났다.
“왕국 쪽에는 어젯밤에 접수됐다고 나옵니다.”
아레인이 말했다.
“마계 쪽에는 이틀 전 새벽으로 표시되네요.”
“시차일 수도 있겠죠.”
내가 말했다.
“검증해 보겠습니다.”
이세계의 지역마다 하루 길이가 다르다는 이야기는 아직 듣지 못했지만, 마법 시계가 사용하는 기준 시각은 장소마다 조금씩 달랐다. 우리는 중립 공관의 표준 종소리 기록과 대조했다. 차이는 몇 분이었다. 이틀 차이는 설명되지 않았다.
'절대 감사'가 붉은 실을 짧게 튕겼다.
[동일 문서 번호 / 서로 다른 최초 접수 시각]
“문서가 두 번 작성됐을 수도 있습니다.”
아레인이 말했다.
“그렇죠. 아니면 사본 중 하나가 나중에 갱신됐거나요.”
몰트는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서류 번호는 같은데 최초 접수 시각이 다르면 최초라는 말부터 의심해야겠군.”
나는 조사표에 두 가지 가능성을 적었다. 아직 어느 것도 결론은 아니었다.
우리가 인장 목록을 정리하는 사이, 제르칸은 마왕성 대회의실을 내주겠다고 했다. 적국 사람들을 한 공간에 모으려면 넓은 곳이 필요하다는 이유였다.
“대회의실은 좋습니다. 다만 장식용 용암 분수는 꺼 주세요.”
“전하의 위엄을 보여 주는 분수다!”
“증거 사본이 열기에 말릴 수 있습니다.”
마왕은 잠시 고민하다가 분수를 끄도록 했다. 붉게 빛나는 물줄기가 멈추자 방 안이 갑자기 평범해졌다. 평범한 회의실이라는 게 이렇게 반가울 줄이야.
아레인은 왕국 기록관의 표준 열람대를 가져왔고, 몰트는 마계 쪽 봉인 도구를 준비했다. 그런데 양쪽이 책상에 올린 도구들이 서로 반응했다. 왕국의 은빛 잉크병에서 흰 연기가 피어오르고, 마계의 검은 봉인끈은 뱀처럼 꿈틀거렸다.
“이걸 같이 써도 되는 겁니까?”
피코가 물었다.
“안 되는 것 같습니다.”
내가 답했다.
몰트가 당황해 끈을 거뒀다. 아레인도 잉크병을 닫았다. 둘 다 자기 방식이 완벽하다고 주장했지만 가까이에 놓으니 서로를 방해하는 모양이었다.
“그러니까 둘 다 제각각 쓰자는 게 아니라, 중립 확인서를 하나 더 만들자는 겁니다.”
나는 빈 양피지에 접수 순서를 적었다. 원본을 놓는 시간, 각자의 사본을 만드는 시간, 두 사본의 내용이 일치하는지 확인하는 시간. 그리고 누가 언제 만졌는지 남기는 손대기 기록.
루시아가 의자를 빙빙 돌리며 물었다.
“그럼 내가 할 일이 없잖아?”
“있죠. 아무도 허락 없이 문서를 가져가지 못하게 지켜 주세요.”
“그거면 충분하다.”
“그런데…”
그녀가 고개를 돌렸다.
“혹시 누군가 문서를 가져가려고 하면?”
“먼저 멈추라고 말씀하시고, 출입 기록을 남기시면 됩니다.”
“그다음엔?”
“그다음에도 계속 저항하면 안전하게 제지해 주세요.”
“검으로?”
“맨손으로요.”
루시아는 손바닥을 폈다 오므렸다. 마치 그것도 썩 마음에 들지 않는 듯했다.
서류 검토가 시작되자 예상하지 못한 이견이 생겼다. 왕국의 사본에는 제3교역 감독관이라는 직함 앞에 '대리'라는 글자가 있었는데, 마계의 사본에는 빠져 있었다. 뜻이 달라질 수 있는 부분이었다.
“대리 감독관이라면 원 권한자를 따로 찾아야 합니다.”
아레인이 말했다.
“그런데 대리 표시가 없는 문서를 기준으로 처리한 사람들은 정식 감독관으로 믿었을 수 있죠.”
나는 두 서류의 하단을 살폈다. 왕국 사본은 제2정산소, 마계 사본은 제1운송소를 거쳤다. 같은 기관의 다른 지점이라면 판본을 다르게 쓸 수 있다. 하지만 대리라는 글자를 뺐다면 누군가 권한을 과장했을 수도 있다.
“둘 다 언제 인쇄됐는지 확인합시다.”
그렇게 말한 뒤 자료를 넘기자 인쇄 시점이 나왔다. 왕국 사본이 석 달 빨랐다. 새 버전에서 '대리'가 지워졌다는 의미는 아니었다. 중간에 또 다른 개정판이 존재할 수도 있다.
“이상하군.”
몰트가 중얼거렸다.
“왜요?”
“마계 쪽 개정 요청은 반려됐다는 기록이 있는데, 문서는 이미 바뀌었어.”
나는 펜을 내려놓았다.
결재를 받기도 전에 배포된 문서라니.
우리 회사에서라면 누가 테스트 환경의 설정 파일을 운영 서버에 올린 상황과 비슷했다. 그런데 이곳에서는 그 문서로 돈과 사람을 움직인다.
“정식 판본이 확인될 때까지 이 문구만으로 권한을 인정하면 안 되겠습니다.”
아레인도 동의했다. 우리는 판본별 차이 목록을 만들고, 현재 운영 중인 구슬에 어떤 판본이 반영됐는지 추가로 확인하기로 했다.
회의가 끝났을 때 피코가 내 옆으로 다가왔다.
“도윤 님. 오늘은 돈을 한 닢도 찾지 못했어요.”
“그럴 수도 있지.”
“그런데 다들 왜 표정이 나쁘지 않죠?”
“돈을 잃을 수 있는 길을 하나 막았으니까.”
나는 구슬을 가리켰다.
“앞으로 누가 확인되지 않은 감독관 이름으로 결재하려고 하면 적어도 한 번은 멈출 거야. 그게 오늘 얻은 거지.”
피코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 날은 보고서에 뭐라고 적어요?”
“사고 예방.”
“성과가 없는 게 아니군요.”
“그럼. 사고가 안 난 날도 성과가 있을 수 있어.”
그날 오후에는 뜻밖의 손님이 왔다.
왕국 국경 경비대 소속 중년 장교였다. 이름은 세딘. 그는 오래전에 제8호 공방의 인장 장치가 설치된 국경 검문소에서 근무했다고 했다.
“그 장치 때문에 사람 하나가 일자리를 잃었습니다.”
그가 말했다.
“무슨 일이었습니까?”
“통행 허가를 확인하던 병사가 승인 불일치를 보고했지요. 그런데 상부에서는 장치가 정상이라고 했습니다. 병사는 오히려 허위 신고를 했다는 이유로 전출됐습니다.”
“그분을 만나 볼 수 있습니까?”
“그분의 동의부터 받아야 합니다. 지금은 작은 마을에서 농사를 짓고 있어요.”
“네. 그렇게 부탁드립니다.”
장교는 서류 하나를 내밀었다.
[검문소 장치 오류 보고 / 시각 불일치 / 오류 발견자 징계 요청]
그 아래에는 붉은 도장 하나가 있었다.
[오류 무시 승인]
나는 황당해서 웃음이 나왔다.
오류를 고쳤다는 뜻이 아니라 무시하라고 승인한 것이다.
“누가 이 결재를 했습니까?”
“당시에는 제3교역 감독관 명의로 처리됐습니다.”
이름이 또 나왔다.
“그 감독관 얼굴을 보셨습니까?”
“아뇨. 장부로만 봤습니다.”
이쯤 되면 이세계에는 직장인만 있는 게 아니라 직함만 있는 사람도 상당히 많은 모양이다.
아레인은 두 문서의 인장을 사진 구슬로 복제했다. 메르넬의 금형 기록과 바로 대조하지 않고, 각자 열람한 버전과 시간을 함께 적었다. 그래야 나중에 우리가 원본을 바꾸었다는 의심을 피할 수 있다.
장교가 돌아간 뒤 나는 피코에게 물었다.
“네가 보기엔 무슨 문제가 가장 커?”
“돈이 새는 거요.”
“또?”
“아무도 자기가 승인했는지 몰라요.”
“맞아.”
“그럼… 승인한 사람을 찾으면 해결되나요?”
나는 한참 대답하지 못했다.
사람 하나를 찾는다고 끝날 문제가 아닐지도 모른다. 누군가 아무 권한 없이 시스템을 움직일 수 있었다면, 그걸 가능하게 만든 구조도 고쳐야 한다.
“사람을 찾는 건 시작이고, 다시는 그런 일이 안 일어나게 만드는 게 끝이지.”
피코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때 아레인이 가져온 왕국 인장 목록에서 작은 문구가 발견됐다.
[제3교역 감독관 / 실제 인사 임명 기록 없음 / 임시 업무 권한은 전산상 존속]
나는 눈을 비볐다.
어느 회사든 직원이 퇴사했는데 계정만 살아 있는 일이 있다. 보안 감사 때마다 지적되는 바로 그 문제다.
그런데 여긴 좀 다르다.
애초에 임명된 적 없는 감독관의 권한이 계속 살아 있었다.
“이게 말이 됩니까?”
아레인이 아주 진지하게 대답했다.
“서류상으로는 그렇습니다.”
“그게 제일 무서워요.”
회의실을 정리하다가 나는 왕국 기록관의 필기구를 보고 웃었다. 마계의 펜과 모양만 다를 뿐 잉크가 새는 문제까지 똑같았다.
“아레인 님. 그거 오래 쓰셨죠?”
“네. 왕실 지급품입니다.”
“고쳐 쓰실 생각은 없습니까?”
“규정상 직접 분해할 수 없어요.”
루시아가 들고 있던 검을 가리켰다.
“나는 이 검을 직접 갈아도 되는데.”
“무기 관리 규정과 사무용품 규정은 다르겠죠.”
나는 웃었지만 조금 씁쓸했다. 잘못 만든 규정 하나가 펜부터 보급 구슬까지 사람을 곤란하게 한다. 이번엔 꼭 규정을 만든 사람에게 그 규정으로 실제 무슨 일이 벌어지는지 보여 줄 생각이었다.
그날의 결론은 간단했다.
우리는 누구의 이름으로 일했는지도 모르는 권한을 상대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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