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왕성에는 예산을 신청하는 방법이 세 가지 있다.
첫째, 정식 신청서를 작성한다.
둘째, 마왕에게 직접 부탁한다.
셋째, 마왕이 지나가는 길목에 '전하의 위엄이 걸린 문제'라고 적힌 팻말을 세운다.
믿기 어렵겠지만 셋째가 가장 빠르다. 그게 문제다.
“특별 감사 예산이 필요하다고?”
제르칸이 팻말을 발견한 지 십 분 만에 재정실로 들어왔다. 나는 손에 들고 있던 계산표를 내려놓았다.
“전하, 아직 정식 신청서를 제출하지 않았는데요.”
“위엄이 걸렸다면서!”
“그건 피코가 붙인 겁니다.”
피코가 책상 뒤로 숨었다. 나는 한숨을 쉬었다. 이 녀석의 보고서는 훌륭해졌는데 가끔 홍보 문구가 심하게 과장된다.
“아무튼 제8호 공방 관련 정산을 확인하려면 외부 감정과 기록 열람이 필요합니다. 예상 비용부터 설명드릴게요.”
“적이 있느냐?”
“있을 수도 있고 없을 수도 있습니다.”
“그럼 군사를 보내자!”
“아직 어디에 보내야 할지도 모릅니다.”
제르칸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내 업무를 이해하지 못해도 되지만, 군사 동원이 조사 대상자를 겁먹게 한다는 사실만큼은 알아주셨으면 좋겠다.
나는 예산안을 펼쳤다. 금형 감정 비용, 중립 정산대행의 원본 발급료, 피해자 면담 이동비, 증인 보호비. 그리고 별도 항목 하나.
[제8호 공방 자동 지급 임시 중지 시 필수 수리 서비스 대체비]
제르칸이 손가락으로 그 줄을 짚었다.
“잘못된 돈을 막는 데 왜 새 돈이 필요한가?”
“그 돈이 실제로 어떤 서비스를 유지하는지도 봐야 하니까요. 무작정 끊었다가 방호벽 수리 장치가 멈추면 피해는 현장 사람들이 입습니다.”
“그러면 적에게 돈을 주는 셈 아닌가?”
“적이라는 건 아직 확정하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현장 수리하는 사람들에게는 급료를 줘야죠.”
왕국의 재무관과 동의서를 맞추는 일보다 마왕에게 이걸 설명하는 일이 더 어렵다. 하지만 예전이라면 내 말을 듣기도 전에 '전쟁 비용으로 편성하라'고 했을 사람이 지금은 금액을 묻고 있다.
“얼마가 필요하느냐?”
“금화 예순 닢을 한도로 잡았습니다. 전액 사용한다는 뜻은 아닙니다.”
“예순 닢….”
제르칸의 눈동자가 번쩍였다.
“본왕의 망토 보관실 수리비보다 적군.”
“망토 보관실에 그만한 돈을 쓰셨습니까?”
“예산서에 있지 않느냐!”
나는 몰트 쪽을 봤다. 몰트는 시선을 피했다. 망토에 골드가 얼마나 들어가는지 꼭 조사하고 싶지만 지금은 다른 사건부터다.
승인은 조건부로 나왔다. 조사의 단계마다 지출 내역을 제출하고, 증인에게 불필요한 위험을 끼치지 말 것. 제르칸이 직접 그 문구를 불러줬다. 나는 조금 놀랐다.
“전하, 이 문구는 어디서 배우셨어요?”
“네가 항상 하는 말 아니냐.”
어.
이런 순간에는 마음이 조금 이상해진다. 마왕이라 부르는 존재가 내 말을 기억한다. 한국에서 부장님은 내가 제출한 보고서의 표지 색조차 기억하지 못했는데.
그날 오후에는 다른 문제가 터졌다.
“담당자님! 북쪽 보급 거점에서 연락이 왔습니다!”
피코가 뛰어 들어왔다.
“무슨 일인데?”
“수리 구슬 세 개가 동시에 멈췄어요. 유지 계약이 확인되지 않는다는 오류래요.”
하필 우리가 관리료를 보류하자마자?
나는 우선 시간을 확인했다. 보류 요청이 접수된 시각은 오전 11시 40분. 구슬 정지 시각은 정오 2분. 시간상 연결될 가능성은 있지만 원인으로 확정할 수는 없다.
“서비스 제공처와 접수 시스템을 따로 확인하자. 장치 자체 결함일 수도 있어.”
루시아가 허리에 검을 찼다.
“수리 구슬이 멈췄으면 내가 가서 지키겠다.”
“그건 부탁드립니다. 다만 가는 김에 고치겠다고 부수지는 마세요.”
“한 번만 부숴 보면 안 되나?”
“안 됩니다.”
그녀는 굉장히 실망한 표정으로 나갔다.
북쪽 보급 거점은 마왕성에서 반나절 거리였다. 해골병사들이 사용하던 작은 보급로와 민간 운송로가 만나는 곳이라 안전 장비 수리와 마차 점검이 끊기면 곧장 물류가 막힌다. 현장 책임자 오르둑은 낡은 망치를 들고 우리를 맞았다.
“사람이 다치기 전에 와서 다행이오.”
“장치 셋이 모두 멈췄다고요?”
“예. 마지막으로 확인한 경고 문구가 이거요.”
그가 검은 판을 내밀었다.
[유지 인증 미수신 / 계약 상태 확인 실패 / 보호 기능 정지]
“보호 기능까지 정지해요?”
“예. 아주 똑똑한 장치라더니 정작 돈이 안 들어오면 일을 안 한다니까.”
나는 판을 바라봤다.
똑똑하다기보다 악질이다.
안전장치가 비용 문제 때문에 꺼지는 건 용납하기 어렵다. 물론 정비 계약이 끝나면 업체가 책임을 지지 않는 경우가 있다. 하지만 지금은 고장 난 위험을 경고하는 수준이 아니라 보호 기능을 스스로 멈추고 있었다.
“비상 수동 전환이 있습니까?”
“있긴 한데 허가된 장인만 열 수 있소.”
“메르넬 장인에게 문의합시다.”
피코는 즉시 전송 구슬을 꺼냈다. 연결은 빨랐다. 장난감 가게에서 메르넬의 목소리가 들렸다.
“인장이 없어도 수동으로 열 수는 있소. 다만 안전한 상태인지 직접 확인해야 해. 옛날에는 무턱대고 열다가 사람이 다쳤거든.”
“현장 영상 구슬로 함께 확인해 주시겠습니까?”
“그 정도라면 가능하오.”
메르넬은 장치 내부의 압력을 먼저 낮추고 각 구슬을 하나씩 점검하도록 안내했다. 오르둑이 긴장을 풀고 고개를 끄덕였다. 첫 번째 구슬이 살아났다. 그 뒤로 둘째, 셋째. 다만 수동 모드에서는 처리 속도가 절반으로 줄었다.
“다행입니다.”
“다행이긴 하지만 근본 해결은 아니오.”
메르넬이 말했다.
“인증이 끊긴 이유를 찾아야 해.”
나는 정비 비용과 별도로 긴급 인력 수당을 기록했다. 누군가 늦은 저녁까지 현장을 지켰으니 돈을 줘야 한다. 정산대행의 잘못인지 아직 모르더라도 현장 직원의 근무시간은 분명하다.
사실 문제는 내가 생각한 것보다 가까이에 있었다.
오르둑은 우리를 창고 뒤쪽 작은 작업장으로 데려갔다. 물품 선반에는 바퀴가 부서진 운송 카트와 수리 중인 마차용 금속 부품이 잔뜩 쌓여 있었다. 그 한가운데에 키가 작은 임프가 서 있었다.
“이 녀석이 밤새 구슬을 지킨 직원이오. 이름은 나탄.”
나탄은 내 얼굴을 보자 급히 모자를 벗었다.
“죄, 죄송합니다!”
“뭘요?”
“정비 일지를 마지막까지 못 썼습니다!”
나는 황당해서 웃음이 나왔다.
“일지를 못 썼다고 먼저 사과할 필요는 없습니다. 다친 곳은 없어요?”
그는 눈을 깜빡였다.
“네?”
“장치가 갑자기 멈췄잖아요. 넘어지거나 끼인 데 없냐고요.”
“아… 손바닥이 좀 까졌습니다.”
그는 작은 손을 펼쳤다. 살갗이 벗겨져 있었다. 피가 말라붙은 자리도 있었다.
“치료는 받았습니까?”
“별거 아니에요. 일지도 못 썼는데 치료비까지 쓰면…”
“일지보다 손이 먼저죠.”
나는 작업장 책임자에게 응급 치료품을 요청했다. 비용은 사고 조사 예산이 아니라 근무 중 부상 처리 항목으로 분리했다. 작은 상처라고 공짜가 되는 건 아니니까.
나탄은 치료를 받는 동안 구슬이 멈춘 순간을 설명했다. 인증 문구가 사라진 뒤 잠깐 정상 작동하는 듯하다가 금속 부품을 잡던 보호막이 풀렸다고 했다. 그는 카트를 밀어 다른 사람이 다치는 걸 막았다.
“왜 그렇게 했어요?”
“거기 어린 심부름꾼이 지나가고 있었거든요.”
그의 목소리가 작아졌다.
“그 애가 다치면 안 되니까요.”
나는 나탄을 바라봤다.
우리나라 회사에서도 이런 사람이 많았다. 매뉴얼에 없는 위험을 몸으로 막는 사람들. 정작 평가표에는 '정해진 업무 외 활동'이라고만 적히는 사람들이다.
“잘했어요. 다만 다음부터는 본인도 다치지 않는 방법을 찾읍시다.”
“네.”
“그리고 일지는 지금 같이 작성합시다. 기억이 생생할 때 쓰는 게 좋으니까.”
피코가 펜을 들었다. 나탄은 구슬이 경고를 띄운 시각과 보호막이 풀린 시각을 기억하고 있었다. 작업장 벽시계는 정오 1분을 가리켰다고 했다. 현장 장치에 남은 기록은 정오 2분. 오차가 있을 수 있다.
“벽시계가 정확합니까?”
오르둑이 머리를 긁었다.
“일주일에 한 번 태엽을 감는데, 어제는 깜빡했소.”
좋아. 시각 차이는 우선 보류다.
나탄은 한 가지 말을 더 했다.
“장치가 멈추기 직전에 낯선 소리가 났어요.”
“무슨 소리요?”
“종이 찢어지는 소리요. 마치 계약서를 누가 잡아당기는 것처럼.”
나는 피코와 눈을 마주쳤다. 이상한 말이지만 웃을 수는 없었다. 마법 장치는 원래 이상한 소리를 내니까.
몰트와 전송으로 연결해 물어보니 오래된 인증 장치에는 마법 양피지의 결을 끊는 기능이 있다고 했다. 갱신 인증이 끝날 때 찢어지는 듯한 소리가 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럼 고장 소리가 아니겠네요.”
“그럴 수도 있네. 다만 실제 기능을 확인해야겠지.”
몰트의 대답은 언제나 신중했다.
우리는 수리 구슬의 외장을 기록한 뒤 봉인했다. 나탄이 다쳤다는 사실을 장비 고장과 연결할 수는 있지만 누가 고의로 그랬다고 몰아갈 순 없다. 그래도 그가 일하는 공간의 안전을 보장하는 것은 당장 할 수 있는 일이었다.
오르둑은 우리가 돌아가기 전 다 같이 모아 놓고 말했다.
“앞으로 인증 경고가 떠도 보호막은 유지할 수 있게 긴급 수동 장치를 별도로 만들겠소.”
“좋습니다. 위험성 평가도 같이 하죠.”
나탄이 손을 번쩍 들었다.
“그 장치 테스트는 제가 해도 됩니까?”
“치료부터 끝나면요.”
그가 웃었다. 손바닥을 감싼 붕대가 작아 보였다.
어쩌면 이런 장면 때문에 내가 이 성을 떠나지 못하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처음에는 숙식 제공이라는 문구만 보고 왔는데, 이제는 내가 없을 때 저 작은 직원이 누구에게 치료비를 청구할지부터 걱정한다.
숫자를 보다 보면 가끔 숫자 밖으로 나가야 할 때가 있다.
저녁 무렵 오르둑이 음식을 가져왔다. 거칠게 구운 빵과 훈제 고기였다.
“우리 거점에 이렇게 빨리 와 주는 재정 담당자는 처음이오.”
“급여일에 문제가 생기면 저희도 빨리 옵니다.”
“평소엔 숫자만 보는 사람인 줄 알았는데.”
“맞습니다. 숫자 봅니다.”
나는 식판을 받아 들었다.
“다만 그 숫자 뒤에 있는 사람도 보려고 합니다.”
그는 한참 말이 없더니 웃었다. 거대한 오우거의 웃음은 조금 무섭지만 이상하게 따뜻했다.
마왕성으로 돌아오자 중립 정산대행에서 답장이 와 있었다.
[제8호 공방 유지 계약의 월간 인증 발행처: 상위 계정으로 자동 연결]
[상위 계정명: 공개 보류]
[연결 종료 요청: 원 계약 당사자 또는 법정 승계인의 동의 필요]
원 계약 당사자는 열세 해 전에 폐업했고, 그 회사 직원은 손가락을 잃었다. 승계인이 누구인지 모른다. 그런데 해지하려면 그 사람의 동의가 필요하단다.
“굉장히 편리한 제도군요.”
내가 중얼거리자 피코가 물었다.
“누구에게요?”
“돈 받는 쪽에게.”
보급 거점에서 돌아온 뒤 나는 나탄의 근무 기록도 검토했다. 초과 근무 수당은 지급됐지만 위험 작업 수당 항목이 비어 있었다. 피코가 손을 들었다.
“도윤 님, 이 항목은 나중에 넣어도 되나요?”
“금액을 확인한 뒤 넣자. 우선 미확정으로 표시해 줘.”
“네. 그럼 오늘도 완료가 아니군요.”
“현장 직원이 받을 돈을 다 받아야 완료지.”
피코는 고개를 끄덕였다. 작은 붕대 하나와 몇 닢의 수당. 숫자로 적으면 사소해 보이지만 그 사람에게는 자신의 일이 정당하게 평가받았다는 증거일 것이다.
그때 '절대 감사'가 처음으로 작은 붉은 선을 그었다. 인증 발행처 기록과 결제 계정의 시각이 맞지 않았다.
[인증 발행: 11시 59분]
[결제 보류: 11시 40분]
[인증 중단 지시: 11시 32분]
뭐지?
돈을 멈추라는 요청을 보내기 전에 이미 인증 중단 지시가 들어갔다.
그러니까 누군가는 우리가 관리료 지급을 보류하기도 전에 장치가 멈출 준비를 해 두었다.
이 사실만으로 범인을 알 수는 없었다. 하지만 누군가 의도적으로 우리 조사에 대응하고 있었다는 의심은 훨씬 구체적이 됐다.
“피코.”
“네.”
“예산서에 긴급 수리비 추가해.”
“얼마나요?”
“실제 사용액만큼.”
“그리고요?”
“누가 11시 32분에 인증을 끊었는지 찾아야지.”
피코가 펜을 움직였다.
그 위로 새 통지가 떠올랐다.
[특별 감사 예산 사용 이력에 대한 외부 이의 제기 접수]
“어?”
이의를 제기한 측은 우리가 아직 이름조차 확인하지 못한 정산대행이었다.
참 신기하다.
폐업한 공방은 아무 말도 못 하는데, 그 공방 이름으로 돈을 받는 누군가는 항의할 줄 아네.
제53화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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