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리번호 0003이 사람에게 명령을 내렸다.
드디어 얼굴을 잡았나 싶었지만, 막상 붙잡고 보니 그 사람은 아무것도 몰랐다.
“누가 시켰습니까?”
내 질문에 관리부 직원이 고개를 숙였다.
“전송 구슬로 지시가 왔습니다.”
“어느 구슬로요?”
“관리부 공용 구슬이요.”
“목소리는?”
“없었습니다. 글자만 떴습니다.”
아.
이건 또 신원 확인 없는 전자결재잖아.
대한민국에서도 공용 계정으로 결재를 돌리다 사고가 나면 담당자 찾느라 며칠씩 허비했다. 여기서는 마법 구슬로 똑같은 일을 한다. 문명 수준이 달라도 잘못된 편의는 어째 하나같이 비슷한 모습으로 발전한다.
“그 지시를 보고 누구에게 확인했습니까?”
“부서장이 전날부터 자리를 비웠습니다.”
“대리 결재자는요?”
“없습니다.”
“지시가 가짜일 수도 있겠다고 생각 안 하셨습니까?”
직원은 눈을 피했다.
“원래 이 번호로 오는 지시는 안 물어봤습니다.”
그 말에 라델이 얼굴을 굳혔다.
나도 마음이 무거워졌다. 이건 한 사람의 실수로 끝날 문제가 아니다. 번호 자체에 관행적인 권위가 붙어 있었다. 아무도 이름을 모르는데 모두가 따르는 번호.
“반출하려던 문서는 무슨 내용입니까?”
“그건 모르겠습니다. 봉인된 상태로 가져오라고만 해서요.”
우리는 직원에게 고의로 허위 진술을 했다고 단정하지 않았다. 가방의 외부 봉인, 반출 시각, 공용 구슬의 수신 기록을 각각 보존했다. 직원 신분증을 대조해 관리부 소속이라는 점도 확인했다.
루시아는 남자를 붙잡고 있던 손을 풀었다.
“도망칠 필요는 없었다.”
“단장님이 검 들고 달려오셔서…….”
“검은 안 뽑았다!”
“그렇죠. 칼집째로 들고 계셨죠.”
나는 조용히 끼어들었다.
“일단 안전하게 조사받도록 하겠습니다. 신체 접촉은 여기서 끝내죠.”
루시아가 시무룩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요즘은 뭘 해도 서류부터 쓰는군.”
“직원을 안 다치게 한 기록은 아주 좋은 서류가 됩니다.”
그녀가 다시 웃었다.
왕국에서 전령이 도착하기 전까지 우리는 관리부 직원의 근무 기록을 확인했다.
이름은 토베르. 중립 보관소에서 여섯 해를 일한 직원이었다. 피코가 시간표를 살펴보더니 눈썹을 찌푸렸다.
“이분 근무표에 이상한 게 있어요.”
“어떤 거?”
“어젯밤부터 오늘 아침까지 야간 경비로 일했고, 오늘 낮에도 계속 근무했어요.”
나는 종이를 받아 들었다. 연속 근무 시간이 열여덟 시간이었다.
“교대자는?”
“이번 달 초에 퇴직했대요.”
아.
사람 하나가 빠지면 남은 사람이 두 사람 몫을 하는 방식. 이것도 참 보편적인 경영 철학이구나.
토베르에게 물었다.
“쉬지 못한 상태에서 지시를 받았습니까?”
그는 조심스럽게 고개를 끄덕였다.
“눈이 감길 것 같았습니다. 공용 구슬에서 빨간 불빛이 나길래 긴급 지시인 줄 알고…….”
“구슬의 긴급 표시 기준이 따로 있나요?”
“예전부터 빨간 글씨는 무조건 먼저 처리하라고 배웠습니다.”
나는 한숨을 쉬었다.
색깔 하나로 모든 결재를 가속하는 시스템이라니. 정말 위험한 발명이다. 빨간 글씨가 많아지면 아무도 긴급하지 않은 걸 구분하지 못한다.
“지시를 읽고 이상하다고 느낀 부분은 없었습니까?”
“원래 가져가라는 문서는 오래된 전송철이었습니다. 그런데 아무도 이런 문서를 찾지 않았거든요. 조금 이상하다고 생각은 했습니다.”
“그런데 왜 확인하지 않았죠?”
“이 번호로 오는 요청에 질문했다가 다른 직원이 벌점을 받은 적이 있어서요.”
나는 펜을 놓았다.
벌점.
질문했다고 벌점.
이러면 아무도 질문하지 않는다. 질문하지 않는 조직에서는 위조된 지시가 한 장만 들어와도 시스템 전체가 움직인다.
“그 벌점 기록을 볼 수 있을까요?”
“관리부 인사 기록에 있을 겁니다.”
세베나가 자료를 가져왔다. 벌점 사유는 '권한 있는 대리인의 명령 이행 지연'이었다. 그런데 대리인 실명은 없었다.
“관리자가 누구인지도 모르는데 지연했다고 벌점을 줬군요.”
라델이 불쾌한 표정을 지었다.
“왕국에는 적어도 이런 경우 책임자가 기록됩니다.”
“저희 마왕성도 얼마 전까지는 별 차이 없었습니다.”
나는 말했다.
“중요한 건 지금부터 고치는 거죠.”
토베르는 내 말을 듣더니 작게 고개를 들었다.
“그럼 저도 벌점을 없앨 수 있습니까?”
“조사 결과에 따라 재심사를 요청할 수 있습니다. 다만 제가 인사 담당자는 아니라 바로 약속드리지는 못합니다.”
“재심사라도 해 주면 좋겠습니다.”
나는 세베나에게 근무 기록 사본 보존과 안전한 교대 인력 확보를 요청했다. 당장 토베르를 처벌하기보다 누가 어떤 지시 체계를 만들었는지 확인하는 게 먼저였다.
루시아는 그 모습을 보더니 나직이 말했다.
“도윤, 적을 잡았는데도 풀어 주는 건가?”
“아직 적인지도 몰라요.”
“도망친 건 사실이잖아.”
“그렇죠. 그래서 도망친 경위를 기록하고 있어요. 하지만 지시를 받은 사람이 곧 지시한 사람은 아니잖아요.”
그녀는 한동안 생각했다.
“전장에서는 명령한 장수와 칼을 든 병사가 다르지.”
“맞습니다.”
“그럼 장수를 찾아야 하는군.”
나는 웃었다.
“오늘은 그 표현이 딱 맞네요.”
이야기를 듣던 피코가 용기를 내어 입을 열었다.
“예전에 저는 서류를 잘못 적으면 혼났어요. 이유를 물으면 '상급자가 시켰다'고만 했고요.”
“그랬지.”
“그런데 요즘은 물어봐도 돼서 좋아요.”
나는 피코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틀린 질문도 할 수 있어야 맞는 답을 찾지.”
그 말이 거창하게 들릴 수도 있겠다. 사실 내가 하고 싶은 말은 단순했다. 숫자가 이상하면 이상하다고 말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
우리는 토베르의 진술과 관련 문서 사본을 봉인했다. 실제 책임자를 찾는 동안 신원과 거주지는 공개하지 않기로 했다. 전쟁 중이라 누군가의 증언이 그대로 위험이 될 수 있었다.
“왜 이렇게까지 신경 써 주십니까?”
토베르가 마지막으로 물었다.
나는 잠깐 생각했다.
“저도 예전에 상사가 시킨 일을 하다가 문제를 떠안을 뻔한 적이 있거든요.”
그가 놀란 표정으로 나를 바라봤다.
“당신은 용사라면서요.”
“용사도 월급 안 주는 회사 다녔습니다.”
토베르는 무슨 뜻인지 이해하지 못했겠지만 피코는 웃었다.
나는 그저 어깨를 으쓱했다.
용사든 직원이든, 모르는 일을 모른다고 말할 수 있는 곳에서 일하고 싶은 건 똑같다.
토베르가 휴게실로 가자 피코가 조용히 물었다.
“도윤 님. 저분이 몰래 가져가려던 서류가 중요하니까, 저분도 중요한 사람이 된 거죠?”
“중요하긴 하지. 하지만 그 사람이 잘못했다고 결론이 난 건 아니야.”
“그럼 진짜 잘못한 사람이 따로 있을 수도 있겠네요.”
“그렇지.”
나는 마당에 서 있던 경비병들을 바라봤다. 토베르가 체포되는 순간 그 장면을 본 사람은 여럿이었다. 하지만 그가 왜 달렸는지, 무슨 지시를 받았는지 아는 사람은 드물었다.
“사람들은 눈에 보이는 장면을 먼저 믿거든.”
“그럼 우리는요?”
“그 장면 뒤에 놓인 서류도 봐야지.”
피코가 웃었다.
“회계 담당자가 제일 귀찮은 이유네요.”
“정확해.”
나는 피코의 기록에 '진술자 보호 및 불이익 방지 요청'이라는 항목을 추가했다. 일단 잘못을 발견한 사람부터 지키지 못하면 다음에는 아무도 기록을 남기지 않을 테니까.
그날 오후, 왕국에서 특급 전령이 도착했다. 흰 깃발을 단 작은 마차였다. 전령은 라델을 찾더니 봉인된 명령서를 내밀었다.
“왕국 최고재무회의의 통보입니다.”
라델이 문서를 읽는 동안 나는 그의 얼굴빛이 변하는 것을 봤다.
“무슨 일입니까?”
“공동 조사가 일시 중지됐습니다.”
“왜요?”
“안전상 사유라고 합니다.”
안전상 사유.
말로는 참 편리하다. 위험할 때도 쓸 수 있고, 위험하다고 주장하고 싶을 때도 쓸 수 있으니까.
나는 통보문을 읽었다. 조사 일시 중단, 왕국 측 자료의 반출 금지, 성검 소지자에 대한 재등록 심사 요구.
“저를 재등록하겠다고요?”
“그렇게 적혀 있군요.”
“제가 동의하지 않았던 등록을 다시 하자고요?”
라델이 난처한 얼굴로 나를 바라봤다.
“저도 이 문서를 처음 봅니다.”
나는 마지막 장의 발송 시각을 확인했다. 우리가 보관소 직원의 지시서를 발견하기 두 시간 전이었다. 즉 이 통보는 현장 상황을 보고 보낸 게 아니었다.
“중단 사유가 언제 발생했습니까?”
라델은 전령에게 질문했다.
전령이 말했다.
“정확한 사유는 저도 모릅니다. 내려온 명령만 전달합니다.”
“그럼 상급자에게 질의서를 보내겠습니다.”
라델이 단호하게 말했다.
오.
이분이 이렇게 말할 날이 오다니.
나는 잠시 감동했다.
피코도 입을 벌렸다.
“도윤 님, 라델 님이 질문하셨어요.”
“나도 봤어.”
라델은 우리 쪽을 흘끗 봤다.
“두 분, 다 들립니다.”
우리는 동시에 입을 다물었다.
문제는 왕국 통보가 당장 효력을 가지는지였다. 조사 중단 명령이 왕국 내부 행정에만 적용되는지, 공동 협정에 따라 마계 조사단에도 적용되는지 확인해야 했다. 아레인이 협정문을 펼쳤다.
“공동 조사는 양측의 동의로 개시하고, 종료는 양측의 서면 합의가 있어야 한다고 적혀 있습니다.”
“그럼 일방적으로 중단할 수는 없겠네요.”
“왕국 측 인력이 참여하지 않는 건 가능할 수 있어요. 하지만 이미 보존된 공동 증거를 회수하는 건 별개입니다.”
우리는 그 구분을 문서로 만들었다. 왕국 내부 명령에 따르는 라델의 지위는 존중하되, 공동 수집 증거의 원본을 임의로 옮기지 않기로 했다.
그러자 전령이 말했다.
“명령서에는 성검도 왕국에 반환하라고 되어 있습니다.”
아.
끝내 나왔다.
나는 허리에 찬 성검을 바라봤다.
“돌려주라면 돌려드리고 싶은데요. 얘가 안 떨어집니다.”
전령은 내 말을 농담이라고 생각한 모양이었다. 의심스러운 표정으로 검을 잡아당겼다가 곧 뒤로 넘어질 뻔했다.
성검이 반짝였다.
[소지자 변경 요청: 거절]
전령이 얼굴이 하얘졌다.
“이, 이건…….”
“보셨죠? 저도 힘듭니다.”
“그럼 강제 회수 부대를 보내겠습니다!”
루시아가 벌떡 일어났다.
“누가 온다고?”
“기사단장님, 앉으세요.”
나는 서둘러 그녀의 팔을 붙잡았다.
“여기서 칼부림이 나면 왕국은 '위험한 마왕성 직원이 성검 반환을 거부했다'고 기록할 겁니다.”
“그렇다면?”
“반환 의사와 반환 불가능 사실을 둘 다 기록합시다.”
나는 서류를 꺼냈다. 성검을 제3의 중립 보관소에 임시 위탁할 의사가 있으나 마법적인 소지자 분리가 불가능하므로 해당 조건의 기술적 검증이 필요하다고 적었다.
“이런 말을 쓰면 누가 이해하겠나?”
루시아가 물었다.
“이해 못 하면 기술 담당자를 데려오겠죠.”
“그럼 그때는 베도 되나?”
“안 됩니다.”
그녀가 크게 한숨을 쉬었다.
전령이 돌아간 뒤 에브란에게 긴급 연락을 보냈다. 새로 발견한 송-4189 관련 봉투와 왕국 중단 명령을 알리고, 후계 보존관 입회를 요청했다.
그런데 답신에는 예상하지 못한 문구가 있었다.
[제2공관에서 회색 경계 특별 열람을 개시한다. 관련 자료 반출 금지.]
“이게 무슨 의미죠?”
피코가 물었다.
“우리가 찾은 서류를 여기서 한 번에 확인하겠다는 뜻인 것 같아.”
“누가요?”
나는 답신의 서명란을 읽었다.
[후계 보존관 에브란 / 공동 감리의 긴급 중재 요청]
긴급 중재.
왕국은 조사를 멈추려 하고, 중립 공관은 오히려 조사를 공식화했다.
나는 마른웃음을 지었다.
이제 일이 커졌다.
그리고 일이 커진 만큼 출장비도 늘어나겠지.
내가 웃자 라델이 물었다.
“왜 웃으십니까?”
“이럴 때마다 궁금해서요.”
“무엇이?”
“제가 용사가 아니라 회계 담당자인 게 정말 다행인지 말입니다.”
라델은 잠시 생각하더니 진지하게 대답했다.
“저는 이제 다행이라고 생각합니다.”
어라.
칭찬인가?
이런 칭찬은 조금 부담스럽다.
나는 괜히 펜 끝만 만지작거렸다.
그날 밤 제2공관의 작은 종이 세 번 울렸다.
누가 쳤는지 아무도 보지 못했다.
문 아래에는 새 문서 한 장이 들어와 있었다.
[당사자 동의 없는 신성 등록에 관한 임시 보호 요청]
신청인 칸에는 처음 보는 이름이 적혀 있었다.
그런데 대상자 이름은 익숙했다.
한도윤.
또 누군가 나 대신 신청서를 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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