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 번째 사람이 있는 곳이라니.
그럼 문을 열고 나와 주면 좋겠는데.
“접수 규정 제1항이라면 제2항도 있겠네요?”
나는 문을 향해 물었다.
안쪽에서 낮은 웃음소리가 났다.
“글을 읽을 줄 아는 사람이 왔군.”
“저희 실장님도 읽을 줄 압니다. 천이백 년째 읽고 계시거든요.”
몰트가 옆에서 헛기침을 했다. 문 안의 웃음소리는 잠깐 멈췄다가 더 커졌다.
“젊은이, 재치가 있네. 하지만 규정은 규정이지.”
아.
규정으로 싸우자는 거구나.
좋아. 그건 내 전문인데.
나는 여행 가방에서 승인 서류 묶음을 꺼냈다. 최고기록원의 열람 허가, 공동 조사 합의서, 증인 보호 확인서, 성검 운반 신고서. 가방이 무거웠던 이유를 이제 알겠다. 검보다 종이가 더 무겁다.
“방문 목적은 '제3서명 후계 기록의 원본 확인'입니다. 여기 왕국 최고기록원의 승인이 있고, 마왕성도 공동 입회를 승인했습니다. 부족한 요건이 뭔지 구체적으로 알려 주십시오.”
한동안 조용했다.
“너희가 보려고 하는 원본은 누구의 것이냐?”
“원본 소유권은 아직 확인하지 못했습니다.”
“그렇다면 보여 줄 수 없다.”
“소유권을 확인하려고 원본을 보러 온 건데요?”
“그건 너희 사정이지.”
어라.
이 논리, 익숙하다.
경력증명서를 발급받으려면 경력증명서를 제출하라는 식이다. 우리 회사 협력사 등록 창구에서 몇 번이나 본 적이 있다.
“그럼 원본을 보지 않고도 소유권을 확인할 수 있는 대장이나 목록이 있습니까?”
이번에는 답이 늦었다.
“……접수 목록은 있지.”
“그것부터 열람하겠습니다.”
문이 아주 조금 열렸다. 문틈 사이로 주름진 손 하나가 나타났다. 긴 장갑을 끼고 있어 피부는 보이지 않았다. 손이 내민 것은 작은 판자였다.
[방문자 기록]
그 아래에는 이름과 소속, 열람 목적을 적는 칸이 있었다.
“전부 적어.”
나는 이름을 썼다. 라델도 썼다. 아레인과 피코, 몰트도 적었다. 루시아는 자기 이름을 아주 크게 썼다.
“기사단장님, 한 칸에 한 분입니다.”
“내 이름은 원래 이만하다.”
“소속 칸까지 침범했어요.”
“그럼 소속을 줄여라.”
결국 '마왕성 전군 야전 경호 총책임'을 '마왕성 경호'로 줄였다. 불가능해 보였는데 해보니 된다. 회사 직함도 이런 식으로 정리할 수 있으면 좋겠다.
마지막 칸에는 서명 대신 두 개의 인장이 필요했다. 왕국과 마계. 라델과 몰트가 각각 찍자 문 안쪽에서 작은 금속음이 울렸다.
철컥.
문이 열렸다.
안에는 생각보다 소박한 방이 있었다. 낡은 서가, 작은 화로, 창가의 나무 의자. 그리고 긴 회색 머리를 뒤로 묶은 노인이 앉아 있었다. 얼굴은 인간처럼 보였지만 귀 끝이 희미하게 뾰족했다.
“이런.”
노인이 몰트를 보더니 눈썹을 올렸다.
“자네 아직도 살아 있나?”
“나를 아십니까?”
“이백 년 전 세금 양식이 바뀌었다고 항의서를 보낸 리치잖아.”
몰트의 눈구멍에 푸른 불꽃이 번쩍였다.
“그건 합리적인 항의였네! 날짜 칸이 사라졌다고!”
세상에.
이 두 사람은 구면이다.
“저는 후계 기록 보존관 에브란입니다.”
노인이 우리를 둘러봤다.
“여기 계신 분들 가운데 한도윤이 누구지?”
나는 손을 들었다.
“접니다.”
에브란의 시선이 내 허리에 찬 성검으로 내려갔다. 그는 놀라는 대신 한숨을 내쉬었다.
“또 소지자가 왔군.”
“또요?”
“그 검을 들고 온 사람이 자네가 처음은 아니야.”
그 말을 듣는 순간 피코의 펜이 멈췄다. 나는 본능적으로 질문을 삼켰다. 먼저 기록부터 해야 한다. 상대가 무슨 뜻으로 말했는지 확인하지 않으면 그럴듯한 오해만 남는다.
“과거에도 동일한 성검 소지자가 이 공관을 방문했다는 말씀이십니까?”
“맞아.”
“몇 명입니까?”
“기록이 남아 있는 건 일곱.”
일곱.
내 앞에 용사가 일곱 명이나 있었다고?
왕국 사제들은 천 년에 한 번 열리는 소환이라던데. 내 계산이 맞다면 적어도 육천 년 넘는 기록을 봐야 한다. 그런데 에브란은 이백 년 전 몰트의 항의서도 기억하는 사람이다. 시간 규모가 수상하다.
“방문 날짜도 있습니까?”
“있지.”
“그럼 먼저 그것부터 보겠습니다.”
에브란이 웃음을 거뒀다.
“원본은 못 보여 줘.”
“아까 방문자 목록은 보여 주셨잖아요.”
“목록과 원본은 달라. 목록에는 누가 왔는지가 적히지만, 원본에는 그 사람이 왜 돌아가지 못했는지가 적혀 있어.”
방 안이 조용해졌다.
나는 천천히 입을 열었다.
“돌아가지 못했다는 게, 이 세계를 떠나지 못했다는 뜻입니까?”
“그렇게 기록되어 있네.”
그는 서가에서 얇은 장부를 꺼냈다.
[성검 방문자 접수 색인 / 원본 열람 전용]
그 아래에는 일곱 줄의 숫자와 날짜가 있었다. 일곱 사람의 이름은 가려져 있었다.
아레인이 몸을 앞으로 기울였다.
“이건 최고기록원 색인과 양식이 다른데요.”
“왕국 것은 왕국 기록이지. 여기는 중립 기록이야.”
“원본 등록 시각을 대조할 수 있을까요?”
“그건 할 수 있네.”
에브란은 두 책을 나란히 놓으라고 했다. 왕국 소환 색인과 중립 방문 색인. 나는 양피지의 합산 기능을 이용해 날짜 차이를 계산했다.
첫 방문 기록과 왕국 등록 기록 사이에는 열흘 차이가 있었다. 둘째는 한 달, 셋째는 세 해. 기록 기준이 다를 수 있으니 이상하다고 단정할 수는 없다.
그런데 다섯 번째 줄에서 손이 멈췄다.
“이 사람은 왕국 소환 등록보다 먼저 방문했는데요?”
에브란이 눈을 감았다.
“맞아.”
“그럴 수 있습니까?”
“그게 우리가 지켜온 질문이지.”
루시아가 드디어 입을 열었다.
“질문만 지키지 말고 답도 지키면 좋겠군.”
정확한 지적이다. 다만 검을 꺼내지만 않으면 좋겠다.
에브란은 작은 접수증 한 장을 내밀었다.
[제3감리 후계 기록 보존 / 접수인 확인]
“이제 본인 동의서를 작성해.”
“무슨 동의서죠?”
“네 기록을 원본과 대조해도 되는지 묻는 동의서.”
나는 문서를 자세히 읽었다. 열람 범위는 '한도윤 본인의 소환 등록 및 성검 소지 기록', 제3자 공개 금지, 서명 철회 가능. 읽어 볼수록 왕국의 첫 용사 계약보다 훨씬 정상적이었다.
“철회하면요?”
“즉시 열람을 중단하지.”
“불이익은?”
“없어.”
나는 펜을 들었다. 그리고 아주 천천히 내 이름을 적었다.
한도윤.
서명이 끝나자 성검이 미세하게 떨렸다.
[당사자 동의서: 신규 접수]
그 문장을 본 순간 가슴이 철렁했다.
내가 처음으로 이 세계의 신성 계약에 자발적으로 서명한 것이다.
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열람 동의서였다.
나는 아래쪽의 '토벌 의무'라는 문구가 없는지 세 번이나 확인했다.
그런데 접수 목록을 확인하는 일도 간단하지 않았다.
에브란은 방문자의 이름을 가린 이유부터 설명했다. 오래전 이 공관의 기록을 노린 이들이 있었다고 했다. 왕국 사람도 있었고 마계 사람도 있었다. 어떤 사람은 진짜 가족을 찾으려 했고, 어떤 사람은 성검의 이전 소지자에게 빚을 청구하려 했다.
“이미 돌아간 사람에게 빚을요?”
“돌아갔는지도 모르면서 말이지.”
나는 혀를 찼다.
내가 왕국에서 처음 받은 계약도 비슷했다. 목숨을 바치는 건 당사자에게 요구하고, 보상에 대해서는 나중에 생각하자는 식. 그걸 당연하게 여기면 사람 이름이 언제든 남의 자산처럼 취급된다.
“기록이 있으니까 사람들이 악용하는군요.”
“기록이 없으면 당사자는 권리를 증명하지 못하고.”
“곤란하네요.”
“그래서 열람 범위를 정하는 거야.”
에브란은 각 방문자의 기록을 세 단계로 나눴다. 누구나 확인 가능한 방문 건수, 당사자 동의로 확인 가능한 개인 기록, 그리고 관련 세 주체가 함께 입회해야 보는 계약 원본.
나는 그 구조를 메모했다. 우리 재정실에도 적용할 만했다. 지금까지 마왕성은 부장급이면 웬만한 장부를 다 볼 수 있었다. 덕분에 부패한 군단장도 자기 부대의 구매기록을 멋대로 수정해 버릴 여지가 있었다.
“이 열람 규정 사본을 받을 수 있습니까?”
“왜?”
“제 직장에 가져가려고요.”
“그 마왕성?”
“네. 생각보다 배울 게 많습니다.”
에브란이 나를 빤히 보더니 입가를 올렸다.
“마왕에게 이런 말을 하게 될 줄은 몰랐는데.”
“저도 거기 취업할 줄은 몰랐습니다.”
우리는 서로 웃었다.
라델은 웃지 않았다. 옆에서 진지하게 방문자 분류 기준을 적고 있었다. 과거의 그 재무관이라고는 믿기 어려웠다.
“왕국에서도 이 제도를 시행할 수 있을까요?”
라델이 물었다.
에브란이 어깨를 으쓱했다.
“시행은 자유지. 단, 당사자들이 자기 기록을 볼 권리를 먼저 마련하게.”
“그건 쉽지 않겠습니다.”
“그럼 시작하는 이유가 생겼군.”
어쩐지 이 노인이 조금 멋져 보였다.
그다음으로 확인한 것은 방문자의 직업 분류였다. 성검을 들고 왔다는 사실만으로 모두 용사라고 단정하면 안 되는 이유를 에브란이 예시로 설명했다.
“삼백 년 전에는 대장장이가 검을 수리하려고 가져온 적도 있어.”
“성검을 수리했다고요?”
“날은 건드리지 못했지. 칼집을 고친 거야.”
내 허리에 찬 성검을 내려다봤다. 저 칼집은 지금도 멀쩡하다. 그 대장장이가 남긴 솜씨일까.
“다른 경우도 있습니까?”
“호위병이 잠시 들고 온 적도 있어. 원래 소지자가 다쳤거든.”
“그럼 성검이 떨어졌어요?”
“그 당시에는 그렇다고 기록돼 있지.”
나는 갑자기 기대가 생겼다.
“방법이 남아 있습니까?”
“관련 의료 기록은 별도로 보존되어 있을 거야.”
“그걸 보려면?”
“당사자 또는 적법한 후계인의 동의가 필요하지.”
아.
역시 세상에 공짜 해결책은 없다.
그래도 중요한 사실이었다. 성검이 언제나 똑같은 규칙으로만 작동하는 건 아닐지도 모른다. 내가 손을 놔도 떨어지지 않는다고 영원히 붙어 있을 거라는 법은 없지 않은가.
그 사실을 적자 루시아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자네는 왜 검에서 벗어나려고만 하나? 용사들이라면 대개 검을 원할 텐데.”
“검이 좋은 건 알겠는데 제 의사를 묻지도 않고 따라오는 게 문제입니다.”
“검이 먼저 마음에 들어 했을 수도 있지.”
“그럼 제가 싫다고 하면 멈춰야죠.”
루시아가 잠시 생각하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듣고 보니 옳군.”
피코가 웃었다.
“도윤 님은 성검하고도 노동 협상을 하실 것 같아요.”
“이미 하고 있어. 아직 상대가 무응답일 뿐이지.”
성검이 살짝 떨렸다. 혹시 화났나 싶었는데 그냥 칼집에 먼지가 묻은 모양이었다.
나는 손수건으로 칼집을 닦았다. 이상하게도 빛이 조금 맑아졌다.
“보세요. 좋아하잖아요.”
피코가 말했다.
“아니. 검 닦는 건 관리일 뿐이야. 계약 동의와는 별개지.”
일행이 웃었다. 나도 따라 웃었다.
적어도 이 공관에서는 내 의사가 무슨 뜻인지 설명할 필요가 없었다.
왕궁에서는 그걸 이해시키는 데 사흘도 모자랐는데.
그러다 문득 궁금해졌다. 이 건물은 왜 이렇게 오래 살아남았을까. 항구는 사라졌고 조약을 맺었던 왕국과 마계의 왕들도 대부분 바뀌었을 텐데.
에브란은 내 질문에 창밖의 마른 강바닥을 가리켰다.
“강이 사라져도 다리가 놓였던 이유는 남지.”
“무슨 뜻입니까?”
“전쟁하던 사람들에게는 중간에서 기록을 지켜 줄 곳이 필요했어. 누가 이겼는지보다 누가 무엇을 약속했는지 남기는 곳 말이야.”
나는 그 말을 한참 생각했다.
마왕성에 처음 취업할 때 내가 했던 것도 비슷했다. 누가 강한지는 알 수 없지만, 누가 어떤 돈을 받기로 했는지는 기록할 수 있었다.
그 기록이 누군가를 지켜 줄 때도 있는 것이다.
접수 목록 옆에는 오래된 안내문도 붙어 있었다. 글자가 다 닳아 읽기 어려웠지만 마지막 두 줄은 선명했다.
[열람자는 열람 사실을 공개할 수 있으나, 타인의 개인정보는 공개할 수 없음.]
나는 피코에게 그 문구를 가리켰다.
“기억해 둬. 우리도 사건 내용을 설명할 때 개인 이름까지 떠벌리면 안 돼.”
“네. 그런데 나중에 기자가 오면요?”
“확인된 공개 가능 사항만 알려 주면 되지.”
피코는 곧바로 작은 제목을 적었다.
[공개용 요약 보고서 / 개인 이름 제외]
그 모습을 본 아레인이 흐뭇하게 웃었다. 나는 조금 뿌듯했다. 이런 것까지 배우다니, 나중에 이 녀석이 나보다 훌륭한 실장이 될지도 모르겠다.
그때 에브란이 색인 마지막 장을 폈다.
“자네 기록은 여덟 번째가 아니야.”
“네?”
“공관에 먼저 접수된 건 자네보다 일찍이었어.”
그가 손가락으로 한 줄을 가리켰다.
[예비 등록: 한도윤 / 접수일: 소환 11일 전]
나는 종이를 뚫어져라 바라봤다.
뭐라고?
내가 이세계에 오기도 전에, 누군가 내 이름으로 서류를 접수했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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