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장비를 신청했더니 마왕이 전쟁을 선포하려 했다.
“그게 어째서 전쟁이냐고요?”
“적국 영토로 본왕의 직원을 보내는데 호위 군단이 없어서야 되겠느냐!”
나는 서류를 내려놓았다. 제르칸의 뒤에서는 검은 망토가 혼자 펄럭이고 있었다. 이번 달 의전비를 삭감했더니 부하들이 직접 바람 마법을 불어 준다고 했다. 비용이 안 든다며 자랑했는데, 그 부하들 근무시간은 누가 계산하지?
“전하. 회색 경계는 중립 구역입니다. 제2공관에 가서 원본 기록을 확인하고 돌아오는 일정이에요.”
“그러니까 군단 하나면 충분하겠군.”
“마차 두 대면 충분합니다.”
“두 대?”
제르칸은 내가 왕관을 팔아먹기라도 한 듯한 표정을 지었다.
“저쪽에서 군단 하나가 나왔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왕국도 대응 병력을 내보내겠죠. 그러면 출장 한 번에 국경 긴장이 올라갑니다. 제 보고서에 '원본 열람 비용: 국경 분쟁'이라고 적고 싶진 않습니다.”
그가 입을 다물었다. 마왕을 설득할 때 비용표가 통한다는 사실은 입사 이후 가장 유용한 발견이었다.
“대신 루시아 기사단장님과 왕국 측 경호원 한 명, 기록관 둘, 저와 피코가 가겠습니다.”
“피코도?”
“네. 제 필체는 제가 제일 못 알아봅니다.”
“그렇다면 어쩔 수 없지.”
피코가 옆에서 기침을 했다. 웃음을 참는 소리였다.
출장 승인서에는 다섯 가지 항목을 넣었다. 이동 경로, 열람 대상, 각국 입회인, 증거 원본 보존 방식, 출장비 지급 책임. 마지막 항목에서 왕국 재무관 라델이 손을 들었다.
“왕국 조사단이 공동 임무로 인정하면 비용을 절반 부담하겠습니다.”
“말로만요?”
“서면으로 제출하겠습니다.”
“많이 성장하셨네요.”
라델은 복잡한 표정을 지었다. 왕궁에서 처음 만났을 때만 해도 이분은 '용사는 금전 따위에 얽매이지 않는다'고 했다. 지금은 통행료 분담 비율을 소수점까지 따지고 있으니 세상 참 오래 살고 볼 일이다.
왕국 대표는 라델, 기록관은 아레인. 마계 쪽에는 나와 피코, 몰트, 루시아가 동행하기로 했다. 몰트는 자신이 천이백 살이라는 이유로 길을 잘 안다고 주장했지만, 마지막으로 그 길을 간 시각이 삼백 년 전이라는 말을 듣고 지도 담당에서는 제외했다.
“그때는 저기 바다가 있었네.”
“지금은 들판입니다.”
“세월이 무상하군.”
“그러게요. 지도도 갱신하셔야죠.”
우리는 출발 전 제3서명 보관함의 상태를 다시 확인했다. 새벽 세 시의 열람 시도는 실패했고 봉인은 그대로였다. 기록 구슬 두 개에 동일한 내용을 복제하되, 원본 구슬의 봉인은 건드리지 않기로 했다. 아레인은 왕국 문양이 찍힌 봉인 테이프를 가져왔고 피코는 마계 봉인끈을 가져왔다.
둘 다 서로의 물건을 믿지 못했다.
“왕국 봉인이 먼저입니다.”
“마계 봉인끈이 더 튼튼해요.”
“잠깐.”
나는 두 사람 사이에 빈 종이를 놓았다.
“둘 다 쓰면 됩니다. 하나가 훼손되면 다른 하나로 확인할 수 있어요.”
아레인과 피코가 동시에 고개를 끄덕였다. 아, 이 평화. 중립 협정이 왜 필요한지 알 것 같다. 싸움의 절반은 대개 '누가 먼저'에서 시작한다.
출발 준비가 그걸로 끝났으면 얼마나 좋았을까.
재정실로 돌아왔더니 내 책상 위에 신청서가 세 장 더 쌓여 있었다. 하나는 여행 중 위험 수당, 하나는 해외 출장 식비, 마지막 하나는 마왕성 귀환 후 격리 검진 비용이었다.
“누가 요청했어?”
피코가 첫 장을 펼쳤다.
“위험 수당은 루시아 단장님, 식비는 저, 검진은 몰트 실장님이요.”
“실장님이 검진을?”
“중립 지대의 낡은 마법 문서를 만질 수도 있으니 저주 감염을 검사하자는 의견입니다.”
그럴듯했다. 문제는 검사 비용이었다.
“저주 검사 한 번에 금화 스무 닢?”
“중급 사제 한 명을 파견해야 한다고 합니다.”
“왜 사제를 마왕성으로 불러요? 적국 사제를요?”
“그분이 유일하게 해당 검사 자격을 갖췄대요.”
나는 뒤통수를 긁었다. 왕국의 사제가 마왕성 직원 건강검진을 담당한다니, 누가 들으면 양쪽 전쟁이 끝난 줄 알겠다.
그런데 이것도 일을 하다 보면 흔한 문제다. 제도가 불편해서 비용이 많이 드는지, 공급자가 일부러 독점하고 있어서 비싼지 구분해야 한다.
몰트를 불러 물었다.
“실장님. 위험성 평가를 했습니까?”
“옛 휴전항에는 봉인 마법이 남아 있을 수 있네.”
“그럼 직접 문서를 만지는 사람만 검사받으면 되지 않을까요? 봉인되지 않은 사본부터 열람할 수 있고요.”
몰트가 잠시 생각했다.
“가능하겠군.”
“그럼 귀환 후 이상 증상 확인을 먼저 하고, 필요한 경우에만 검사 의뢰합시다. 비용은 예상만 잡아 두고요.”
이런 걸 들으면 마왕성이 직원 건강을 신경 쓰지 않는 것처럼 보일 수도 있다. 그렇지 않다. 필요하지도 않은 검사를 강제로 시키고, 비용을 핑계로 정말 필요한 치료를 미루는 조직이 더 위험하다.
다음은 루시아의 위험 수당이었다.
“얼마를 요구하셨어?”
“적 세 명을 쓰러뜨리는 수당에 준하는 금액이요.”
“아직 적이 나타나지도 않았는데?”
“나타날 걸 예상하신답니다.”
와.
선제 지급 방식도 이렇게 창의적으로 쓰는구나.
루시아를 찾아갔다. 그녀는 뜰에서 병사 둘을 상대로 훈련 중이었다. 내가 부르자 검을 허공에 멈추고 달려왔다.
“위험 수당 승인 났나?”
“미리 줄 수는 있는데, 계산 방식을 바꿔야 합니다.”
“왜?”
“적을 벨수록 돈을 받으면 이번 출장에서 적을 찾고 싶어지시잖아요.”
루시아는 입을 벌리더니 조금 억울한 표정을 지었다.
“나는 원래 적을 찾고 싶다.”
“그러니까 더더욱요.”
나는 외근 위험 지역 방문에 따른 고정 수당을 제안했다. 실제 충돌이 일어나든 말든 동일한 금액이다. 위험을 감수한 보상이지 사람을 베어야 받는 상금이 아니라는 뜻이다.
“그러면 적이 나타나지 않아도 받나?”
“네.”
“훌륭한 제도군!”
“대신 먼저 공격하시면 별도 조사 대상입니다.”
“……매우 훌륭한 제도는 아니군.”
이것으로 두 번째 신청서도 해결됐다.
마지막 식비는 예상보다 간단했다. 피코는 장기간 이동하면서 식사를 거를까 걱정했던 모양이다. 나는 두 나라가 같은 마차를 타는 동안 누구만 좋은 음식을 먹는 일이 없도록 공동 식비표를 만들었다. 루시아가 세 끼를 다섯 끼처럼 먹는 문제는 개인 기호로 처리했다.
“제가 기사단장님과 같은 돈을 받아도 돼요?”
피코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똑같은 끼니를 먹는데 당연하지.”
“하지만 단장님은 중요한 분이고 저는 임프 서기잖아요.”
나는 펜을 내려놓았다.
“피코, 출장을 나가면 네 기록이 제일 중요한 순간도 있어. 전투를 못 한다고 중요하지 않은 사람이 되는 건 아니야.”
녀석은 귀 끝까지 빨개졌다.
“네. 그럼 저도 열심히 먹겠습니다!”
아니, 먹는 걸 열심히 하라는 뜻은 아닌데.
그날 저녁 나는 우리 일행의 역할표를 한 장으로 정리했다. 서로 상대 나라의 자료를 몰래 열지 않는다. 분쟁이 생기면 공동 기록을 만든다. 갑작스러운 경호 상황에서는 생명이 우선이고, 증거는 가능한 범위에서 보존한다.
특히 마지막 조항에 루시아가 제일 좋아했다.
“위험하면 먼저 사람을 구하면 된다는 거군.”
“맞습니다.”
“그건 나도 잘한다.”
나는 그녀가 정말 그럴 거라고 믿었다. 숫자로 따지는 건 내 일이지만, 누군가의 목숨이 위험할 때 가장 먼저 달려갈 사람은 분명 루시아였다.
이렇게 준비를 끝내고 나니 밤이 늦었다. 왕국에서 가져온 지도와 몰트의 삼백 년 전 기억을 비교하던 아레인이 말했다.
“생각보다 모두가 진지하네요.”
“당연하죠. 우리도 손해 보기 싫거든요.”
“돈 때문입니까?”
“돈도 중요하죠. 하지만 이번에 잘못하면 사람 이름 하나가 본인 뜻과 무관하게 계약에 묶여 있을 수도 있습니다.”
아레인은 한동안 말이 없었다. 그러다 조용히 답했다.
“그건 왕국 사람에게도 일어날 수 있는 일이겠네요.”
“누구에게나요.”
우리는 잠시 창밖을 바라봤다. 마왕성의 불빛이 하나둘 꺼지고 있었다. 정시에 퇴근하는 직원이 늘고 있다는 뜻이었다.
나는 서류철을 덮었다.
내가 다른 세계에서 하게 될 일이 세상을 구하는 일인지 아직 모르겠다. 하지만 적어도 누가 원하지 않는 계약 때문에 억울하게 일하는 일은 조금 줄이고 싶었다.
출발 당일 아침, 성문 앞은 지나치게 시끄러웠다. 루시아가 병사들의 작별 인사를 받으며 검을 번쩍 들고 있었다.
“내가 없는 동안 적이 오면 성을 지켜라!”
“단장님, 이번 출장은 이틀입니다.”
“이틀이면 성 하나가 무너질 수도 있다!”
“그럴 예정이 없었으면 좋겠네요.”
그녀는 나를 보더니 웃었다.
“도윤, 길에서 습격받으면 내가 처리하겠다.”
“증거부터 확보해 주세요.”
“습격당하는 와중에?”
“습격한 사실을 증명할 목격자라도 남겨 주시면 됩니다.”
“까다롭군!”
그 말은 칭찬으로 받아들이기로 했다.
마차가 움직이고 얼마 지나지 않아 피코가 가방에서 종이를 꺼냈다.
“도윤 님, 출장 일비 정산표입니다.”
“벌써?”
“식대와 숙박비를 구분했어요. 루시아 님은 식사량이 많으셔서 예외 항목을 넣었고요.”
루시아가 고개를 돌렸다.
“전투하는 자는 많이 먹어야 한다.”
“전투 안 하는 출장인데요?”
“만약을 대비해야지.”
피코가 아주 진지하게 적었다.
[전투 대비 예비 식량: 기사단장 요청. 지급 여부 미승인.]
저 녀석, 누구한테 배운 거지. 나네.
길은 생각보다 평화로웠다. 중립 구역에 가까워질수록 왕국 상인과 마계 행상인이 같은 도로를 이용했다. 바퀴가 부서진 마차 옆에서는 인간 청년과 오크 노인이 함께 수리를 하고 있었다. 전쟁 중이라고는 믿기지 않는 풍경이었다.
“저기는 왜 안 싸우죠?”
내 질문에 라델이 창밖을 봤다.
“휴전항으로 물자를 옮기는 운송인들입니다. 국경 조약에 따라 상행을 허용하지요.”
“전쟁은 계속하면서 장사는 같이 하는군요.”
“평화가 완전히 끊어지면 양쪽 백성이 굶습니다.”
맞는 말이었다. 사람을 먹여 살리는 일은 적과 아군이 나뉘어도 멈출 수 없다. 문제는 누가 그 틈에서 부당한 이익을 챙기는지였다.
점심 무렵 첫 검문소에 도착했다. 간판에는 왕국 글자와 마계 글자가 나란히 새겨져 있었다.
[회색 경계 공동 통행 관리소]
검문관은 우리 일행의 서류를 받아 들더니 성검에서 시선을 떼지 못했다.
“이건 왕국 유물 아닙니까?”
“제 물건이라고는 주장하지 않겠습니다. 다만 현재 소지자는 접니다.”
“반출 허가는요?”
아레인이 최고기록원 열람 승인을 내밀었다. 검문관은 종이를 훑더니 입술을 삐죽였다.
“문제는 이 칸인데요.”
그가 가리킨 곳에는 '신성 유물의 현재 등록 소속'이 적혀 있었다. 왕국 소속이라고 적힌 옆에 마계 출입 허가가 붙어 있었다.
아.
성검이 또 일을 벌이는구나.
“이 검은 제가 왕국에서 가져왔고, 지금은 마왕성에서 근무 중입니다.”
“그건 알겠는데요. 양쪽 소속을 동시에 선택할 수는 없습니다.”
“검한테 직접 물어보실래요?”
성검을 들어 보이자 검문관이 급히 뒤로 물러났다.
“아, 아닙니다!”
“그러면 소속 분쟁 중이라고 기록해 주세요. 열람 종료 후 다시 확인받겠습니다.”
검문관은 규정집을 뒤적였다. 그사이 성검이 은은하게 빛났다. 또 합창이 나오기 전에 손잡이를 두드렸다.
“너 오늘 조용히 있어.”
[임시 통행 상태: 심사 중]
내 눈에만 문장이 떠올랐다. 뭐야. 검도 내부 결재를 기다리는 중인가.
두 시간이 지나 겨우 통행 허가를 받았다. 통행료는 면제였지만 서류 처리 지연으로 하루 일정이 어긋났다. 누군가가 '돈은 안 들었으니 손해가 없다'고 했지만 나는 시간을 계산해 적었다.
[대기 비용: 인원 여섯 명 × 두 시간.]
일은 공짜로 기다려도 시간이 공짜가 되는 건 아니니까.
해가 지기 전, 옛 휴전항이 보였다. 강줄기가 끊긴 넓은 들판에 돌로 지은 건물들이 옹기종기 모여 있었다. 오래된 부두 기둥에는 마른 수초가 달려 있었다. 몰트의 삼백 년 전 기억이 마냥 틀린 건 아니었다. 여기가 정말 항구였던 모양이다.
제2공관은 마을 끝에 있었다.
창문 셋, 기둥 넷, 파란 지붕. 관리가 끊겼다던 건물치고는 벽면의 먼지가 묘하게 적었다. 누군가 최근에 문손잡이를 닦은 흔적도 보였다.
나는 발밑에서 사람 발자국을 찾으려다 멈췄다. 그런 건 루시아가 더 잘하지.
“최근에 누가 드나들었습니까?”
루시아가 창틀을 손가락으로 문질렀다.
“적어도 오늘 누군가 왔다. 이쪽 흙이 아직 마르지 않았어.”
아레인이 건물 옆 안내판을 읽었다.
[제2공관 / 공동 감리 기록의 후계 보존소]
“맞는 곳이에요.”
그 순간 건물 안쪽에서 작은 종소리가 났다.
땡.
피코가 내 소매를 잡았다.
“도윤 님, 사람 없다고 했잖아요.”
“그러게.”
나는 문을 두드렸다.
“마왕성 재정실 한도윤입니다! 원본 열람 승인 받고 왔습니다!”
대답이 없었다.
두 번째로 두드리자 안에서 늙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승인서에 몇 명이 서명했지?”
“왕국과 마계 대표 두 명입니다.”
“그럼 돌아가.”
“예?”
“여기는 세 번째 사람이 있는 곳이야.”
문 아래로 종이 한 장이 미끄러져 나왔다.
[제3감리 후계 보존소 접수 규정 제1항: 방문자의 목적을 증명할 것.]
나는 종이를 집어 들었다.
결국 여기서도 서류다.
정말이지, 어느 세상이나 행정은 위대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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