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벽 세 시에 일을 하게 됐다.
대한민국 직장인으로 일곱 해를 살면서 이런 시간을 숱하게 겪었다. 하지만 마왕성에 취업한 뒤로는 야근을 줄이려고 노력했는데, 결국 이런 날이 다시 오는구나.
그래도 차이는 있었다.
이번에는 누가 '내일 아침까지 보고서를 예쁘게 만들어 달라'고 시킨 게 아니었다.
오래전에 사라진 조직의 권한으로 보관함을 열겠다는 예약이 들어왔다.
그 날짜가 하필 오늘 새벽이었다.
“도윤 님, 따뜻한 차 가져왔어요.”
피코가 작은 잔을 내밀었다.
“고마워. 그런데 너는 퇴근했어야지.”
“제가 직접 지키겠다고 지원했어요.”
“지원했다고 다 되는 건 아니야.”
“교대 근무 신청서도 냈어요.”
나는 입을 다물었다.
아.
이 녀석, 절차를 정말 제대로 배웠네.
피코가 해맑게 웃었다.
“초과 근무 수당도 승인받았고요.”
“누구한테?”
“실장님한테요.”
옆에 서 있던 몰트가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자네가 늘 강조하던 방식 아닌가.”
나는 차를 한 모금 마셨다.
그래.
이런 야근이라면 차라리 낫다.
최소한 서류는 제대로 되어 있으니까.
***
제3서명 보관함은 독립된 석실 가운데 놓여 있었다.
상자를 옮긴 건 아니었다. 기존 보관실 입구에 경계선을 긋고, 방문자의 이동을 기록할 수 있게 정리한 것이다. 보존 상태를 바꾸면 나중에 문제가 생길 수 있으니까.
입회인은 여섯 명이었다.
마왕성 쪽은 나, 몰트, 피코.
왕국 쪽은 라델과 아레인.
그리고 무장 경호를 맡은 루시아.
원래는 왕국 조사관 한 명도 올 예정이었지만 국경 검문소에 문제가 생겨 늦는다고 했다. 우리는 그 사실도 기록했다.
“이렇게 모여 있으면 적이 나타나도 도망가기 어렵겠군.”
루시아가 말했다.
“적이 나타날 근거는 없는데요.”
“네가 적의 근거를 확인하는 사이 내가 적을 베면 된다.”
“제발 그 순서가 반대였으면 좋겠습니다.”
그녀가 활짝 웃었다.
정말이지, 이분에게는 검을 쓰는 모든 상황이 즐거운 모양이다.
나는 시간을 확인했다.
새벽 두 시 오십오 분.
예약된 열람 시도까지 오 분 남았다.
“오늘 목표는 세 가지입니다.”
내가 말했다.
“누가 접근을 시도하는지 확인한다. 실제로 봉인이 풀리는지 확인한다. 그리고 누구도 상자 내용을 임의로 열람하지 않는다.”
라델이 고개를 끄덕였다.
“세 번째 조건이 중요하군요.”
“네. 승인권자가 누군지 모르는 상태에서 내용을 먼저 보면 우리까지 절차를 어기게 됩니다.”
아레인이 기록을 시작했다.
피코도 같은 시각을 적었다.
종소리가 울렸다.
정각까지 세 분.
***
그 순간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당연하지.
예약 시각 전에 무슨 일이 일어나면 그게 더 이상하다.
그런데 침묵이 길어지자 루시아가 검집을 두드리기 시작했다.
딸깍.
딸깍.
딸깍.
“기사단장님, 그 소리 좀.”
“긴장되느냐?”
“아뇨. 시계 소리보다 커서요.”
“나는 긴장되지 않는다.”
“네. 잘 알겠습니다.”
“정말이다!”
그럴수록 더 긴장한 사람처럼 보였다.
몰트는 내 옆에서 옛 규정집을 펼쳤다.
“도윤, 발견한 내용이 있네.”
“뭔데요?”
“공동 감리인의 열람 권한은 재위임이 불가능하다고 쓰여 있네.”
“재위임이요?”
“권한을 다른 사람에게 맡길 수 없다는 뜻이지.”
오.
중요한 내용이다.
그렇다면 대리번호 0003이 권한을 행사할 수 있는지부터 문제가 된다.
“이 규정은 언제 작성됐습니까?”
“오래전이네. 날짜는 확인 중일세.”
“개정됐을 가능성은요?”
“있지.”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참고 자료로 두고, 결정적 근거로는 쓰지 맙시다.”
몰트가 고개를 끄덕였다.
이 사람도 많이 변했다.
처음 만났을 때는 천이백 년 동안 아무도 따지지 않은 장부라며 자랑했는데.
지금은 기록의 한계를 먼저 설명하고 있다.
정말 훌륭한 상사다.
물론 여전히 서류함 분류는 엉망이지만.
***
새벽 세 시.
상자가 아주 작게 울렸다.
우웅.
피코가 잉크병을 붙잡았다.
아레인의 펜이 멈췄다.
라델이 숨을 삼켰다.
나는 상자를 바라봤다.
뚜껑은 움직이지 않았다.
다만 표면의 세 원 가운데 첫 번째가 빛났다.
곧 두 번째도 빛났다.
세 번째는 그대로였다.
“왕국과 마계의 서명인가요?”
피코가 속삭였다.
“그럴 수는 있지만 지금은 모릅니다.”
나는 입술을 깨물었다.
이럴 때마다 '그럴 수 있다'고만 말하면 아주 재미없는 사람이 된다.
하지만 모르는 걸 안다고 할 수는 없잖아.
그때 성검이 강하게 떨렸다.
[신성 계약 대조 요청]
[제3서명자 인증 대기]
나는 검을 뽑지 않았다.
지난번 가까이 가져갔을 때도 반응이 있었기 때문이다. 오늘은 상자와 일정 거리를 유지하기로 합의했다.
그런데 성검은 스스로 칼집에서 조금 빠져나왔다.
빛이 새어 나왔다.
“도윤!”
몰트가 외쳤다.
“검을 잡게!”
나는 손잡이를 붙잡았다.
“야, 너 가만히 있어!”
검이 잠시 멈췄다.
그리고 내 눈앞에 글자가 나타났다.
[현재 소지자: 한도윤]
[원 소환 등록: 유효]
[본인 동의: 미확인]
아.
또 그 이야기.
“등록되어 있다고 제가 동의한 건 아니라니까!”
내가 소리쳤다.
그 순간 세 번째 원이 짧게 반짝였다.
상자는 열리지 않았다.
대신 허공에 작은 문장 하나가 떠올랐다.
[승인 거절]
모두가 침묵했다.
승인 거절.
누가 거절했지?
나?
성검?
아니면 세 번째 서명자?
나는 바로 시간을 기록했다. 새벽 세 시 영 분 십일 초. 세 번째 원의 발광 지속 시간은 약 한 호흡. 상자 뚜껑은 움직이지 않음. 봉인은 유지.
피코가 놀란 얼굴로 물었다.
“열리지 않았는데도 성공한 겁니까?”
“적어도 한 가지는 확인했어.”
“뭔데요?”
“예약된 시각에 실제 반응이 일어났다는 거.”
“그게 전부예요?”
“큰 성과야. 누군가 시간을 미리 알았고, 그 시간에 시스템이 작동했으니까.”
라델이 천천히 숨을 내쉬었다.
“그렇다면 대리번호 0003의 신청이 단순한 문서상 오류는 아니었다는 뜻이군요.”
“그럴 가능성이 커졌죠.”
나는 상자의 표면을 다시 살폈다.
세 번째 원은 이미 빛을 잃었다.
***
사건이 끝났다고 생각했을 때 두 번째 문제가 시작됐다.
마왕성 회계 장부에 새로운 접근 기록이 들어온 것이다.
피코가 기록 구슬을 확인하던 중 소리쳤다.
“도윤 님! 00-성전 계정에서 알림이 왔어요!”
“열람이 성공했어?”
“아뇨. 거절됐대요. 그런데…….”
“그런데?”
“거절한 사람 이름이 찍혔어요.”
나는 구슬 앞으로 다가갔다.
[열람 시도: 1건]
[승인 결과: 거절]
[거절 처리자: 제3감리인]
“이름이 아니잖아.”
내가 말하자 피코가 민망하게 웃었다.
“직책이네요.”
“그래도 중요한 기록이야.”
문제는 그다음 줄이었다.
[대리번호: 0003]
[최종 보존 위치: 미상]
[거절 사유: 본인 동의 부재]
본인 동의 부재.
어째 익숙한 말이다.
성검에 계속 표시되던 문구.
왕국에서 용사로 등록될 때 내 서명이 없었던 문제.
그리고 방금 상자에서 나타난 승인 거절.
모든 것이 하나의 질문으로 모이고 있었다.
누군가 내 동의를 대신하려는 건가?
하지만 아직은 확실하지 않았다.
나는 양피지에 가능성을 여러 개 적었다. 제3감리인이 정말로 존재하는 경우. 오래된 마법 장치가 자동으로 거절한 경우. 성검이 단순히 일치하는 문구에 반응한 경우.
어느 쪽이든 검증할 방법이 필요했다.
“원본 열람 규정을 가져오죠.”
라델이 말했다.
“왕국 최고기록원에 남아 있을 겁니다.”
“그럼 공동 열람 신청서를 작성합시다.”
내가 답했다.
아레인이 머리를 감쌌다.
“또 신청서입니까?”
“죄송합니다.”
“이젠 종이가 부족하겠어요.”
“그럼 종이 구매 예산도 올려야겠네요.”
다들 웃었다.
새벽 세 시를 넘긴 석실에서 왕국과 마왕성 사람들이 같이 웃고 있었다.
참 이상한 광경이었다.
***
성검의 반응이 끝난 뒤 제르칸도 석실에 내려왔다.
마왕은 밤새 자기가 빠진 회의가 열렸다는 소식을 듣고 상당히 서운해했다.
“본왕을 부르지도 않았느냐?”
“전하, 새벽 세 시였습니다.”
“본왕은 언제든 깨어 있을 수 있다!”
“그럼 오늘 낮 공식 업무 일정은 줄이시겠습니까?”
“그럴 필요는 없다.”
“두 시간 뒤에 군단장 회의가 있습니다.”
제르칸의 얼굴이 굳었다.
“……그렇다면 보고만 받겠노라.”
나는 그에게 확인된 사실과 아직 모르는 부분을 구분해 설명했다.
제르칸은 특히 '본인 동의 부재'라는 문구에 관심을 보였다.
“그 말은 너를 데려온 신에게도 계약서가 필요하다는 뜻이냐?”
“모르겠습니다. 적어도 이 계정은 동의를 확인하는 절차가 있는 모양입니다.”
“그렇다면 신도 참으로 귀찮은 장부를 쓰는구나.”
“전하께서도 쓰시잖아요.”
“본왕은 이제 익숙해졌다!”
마왕이 가슴을 폈다.
나는 피코가 작성한 열람 기록부를 보여 줬다. 제르칸은 자기 이름을 마지막 결재란에 적었다.
그리고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도윤, 그대가 원해서 이 성에 남는다는 사실은 바뀌지 않겠지?”
나는 의외의 질문에 잠시 그를 바라봤다.
“계약 조건이 유지된다면요.”
“그럼 됐다.”
제르칸은 기분 좋은 얼굴로 계단을 올라갔다.
참 이상하다. 왕국은 신성한 운명이라는 말로 사람을 잡아두려 했는데, 마왕은 내 의사를 먼저 확인했다.
그 차이를 어떻게 장부에 적어야 할까.
피코는 세 번째 인증 원이 빛났을 때의 기록을 두 번 확인했다. 자신이 놀라서 시간을 잘못 적었을까 걱정한 모양이었다. 하지만 아레인이 적은 시각과 비교하니 거의 같았다.
“도윤 님, 제가 제대로 했네요.”
“당연하지. 네가 실력이 늘었잖아.”
그가 웃었다. 나는 피코의 기록 옆에 입회 확인 표시를 남겼다. 작은 인정 하나가 다음에 더 큰 기록을 지키는 힘이 될 수도 있다.
해가 뜰 무렵 우리는 기록 정리를 마쳤다.
상자는 열리지 않았다.
승인권자의 이름도 밝혀지지 않았다.
하지만 세 가지는 분명해졌다.
예약된 시각에 열람 시도가 발생했다.
세 번째 인증 단계에서 거절됐다.
거절 사유에는 '본인 동의 부재'가 적혀 있었다.
나는 이 세 문장을 보고서 맨 앞에 적었다. 그 뒤에는 미확인 사항을 따로 정리했다. 누가 시도를 예약했는지, 왜 성검이 반응했는지, 오래된 공동 감리 사무소와 실제로 어떤 관계인지.
그렇게 써야 다음 조사 때 엉뚱한 전제에서 출발하지 않는다.
피코는 책상에 엎드려 졸고 있었다.
나는 그에게 담요를 덮어 줬다. 정식 교대 근무 수당을 받아야 하는 직원에게 잠까지 빼앗을 생각은 없었다.
몰트가 옆에서 말했다.
“자네도 좀 쉬게.”
“잠깐만요. 보고서 마지막 줄만 쓰고요.”
“그 말은 다들 그렇게 하더군.”
아.
틀린 말이 아니다.
나는 펜을 내려놓았다.
그때 문밖에서 조용히 노크 소리가 났다.
왕국 기록관 아레인이 서 있었다.
“한 재정관님. 최고기록원에서 답신이 왔습니다.”
“벌써요?”
“긴급 조회라고 하니 우선 처리했나 봅니다.”
그녀가 문서를 내밀었다.
[제3감리인 관련 원본 열람 승인]
좋은 소식이었다.
드디어 무엇이든 원본을 볼 수 있게 됐다.
그런데 아래쪽에 조건이 하나 더 적혀 있었다.
[열람 대상자: 성검 소지자 본인]
[입회 조건: 왕국 대표, 마계 대표, 제3감리인의 후계 기록 보유자]
후계 기록 보유자?
나는 다시 읽었다.
거기에 분명히 '제3감리인의 후계 기록 보유자'라고 적혀 있었다.
사람 이름은 없었다.
대신 첨부 서류에 짧은 주소가 있었다.
[구역: 회색 경계 / 옛 휴전항 제2공관]
나는 창밖을 바라봤다.
거기는 우리가 공문을 보냈다가 두 시간 만에 반송된 곳이었다.
사람이 없다던 곳에 후계 기록이 남아 있다.
그 말이 사실이라면 누군가는 그곳을 아직 관리하고 있다는 뜻이다.
나는 천천히 펜을 들었다.
이건 분명 출장이다.
출장비부터 신청해야겠군.
그 순간 성검이 조용히 한 번 빛났다.
[미완료 서약: 확인 대상 위치 갱신]
계약이 끝나지 않았다는 건가.
나는 칼집을 내려다봤다.
“야. 솔직히 말해 봐.”
아무 대답도 없었다.
“너도 어디 가야 하는지 모르는 거지?”
검이 아주 작은 소리로 울었다.
어째 한숨처럼 들렸다.
좋아.
그럼 다음에는 원본을 보러 가자.
이번에는 반드시 누가 내 이름으로 서명했는지 확인하고 말 테다.
아무리 신성한 일이라도.
내 허락 없이 계약서를 써 놓는 건 좀 아니잖아.
제40화 댓글 0
댓글·공감·신고는 로그인 후 이용할 수 있습니다. 이전 익명 댓글은 그대로 표시됩니다.
댓글을 불러오는 중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