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물상자를 눈앞에 두고 열지 않은 사람은 아마 나밖에 없을 것이다.
정확히는 열 수가 없었다.
[제3서명 보관용 / 승인 전 개봉 금지]
저 문구가 괜히 적혀 있는 게 아닐 테니까.
“그냥 자물쇠를 자르면 되잖아.”
루시아가 검을 뽑으며 말했다.
“그러면 안의 서류도 잘릴 수 있죠.”
“내 검술을 의심하느냐?”
“서류의 내구성을 의심하는 겁니다.”
“서류가 그렇게 약한가?”
“대부분 그렇죠.”
전투광 기사단장 앞에서 얇은 양피지 한 장의 생존 가능성을 설명하는 일은 참 어렵다.
나는 상자를 봉인된 상태로 기록했다. 크기, 무게, 표면 문구, 발견 위치, 발견자, 보관 담당자. 그리고 왕국 기록관 아레인에게 확인 서명을 부탁했다.
아레인이 고개를 끄덕였다.
“왕국 쪽에도 같은 모양의 상자가 하나 있습니다.”
“열어 봤습니까?”
“아니요. 열람 허가가 나지 않았습니다.”
“안에 뭐가 있는지도 모르고요?”
“그렇습니다.”
아.
다행이다.
우리 회사만 이런 곳이 아니었다.
아니, 다행이라고 할 일은 아니지.
왕국과 마왕성이 나란히 잠긴 상자를 들고 서로 한숨을 쉬고 있었다.
“혹시 세 번째 상자도 있는 겁니까?”
피코가 물었다.
“있을 수도 있어.”
나는 답했다.
“하지만 세 명이 서명해야 열린다는 규정과 상자가 세 개라는 건 다른 이야기야.”
“아…….”
“추측은 메모해 두자. 나중에 맞는지 확인하면 돼.”
피코가 수첩에 '세 번째 상자 있을지도'라고 적었다.
그 글씨가 묘하게 귀여웠다.
***
그날 오후 성검이 난리를 피웠다.
평소에는 내 허리에 얌전히 달려 있던 녀석이 서고에서 나오자마자 웅웅거리기 시작했다.
“또 왜 이래.”
나는 칼집을 두드렸다.
우우웅.
“배고파?”
빛이 더 세졌다.
“아니면 퇴근하기 싫어?”
이번에는 주변의 횃불까지 일제히 흔들렸다.
피코가 깜짝 놀랐다.
“도윤 님, 성검이 화난 것 같아요!”
“말을 해야 알지.”
그 순간 내 눈앞에 푸른 문구가 떠올랐다.
[신성 계약: 등록 정보 대조 중]
[원 소속: 왕국 소환 용사]
[현재 근무: 마왕성 재정실]
[계약 동의 기록: 확인 불가]
아.
다시 그 문제다.
내가 이 세계에 떨어진 순간부터 나를 따라다니던 검.
처음에는 원래 주인에게만 붙는 마법 무기쯤으로 생각했다. 그런데 요즘은 영락없는 회사 전산 시스템 같다. 기존 조직에 퇴사 처리가 안 돼서 이중 소속으로 잡히는 직원처럼.
“라델 재무관님께도 보여 드려야겠네요.”
내가 말하자 몰트가 걱정스러운 얼굴로 다가왔다.
“성검이 왕국에서 널 데려가겠다고 하면 어쩌겠나?”
“검은 계약 당사자가 아니잖아요.”
“신의 의지를 전하는 물건이라고들 하지.”
“그럼 신께서 직접 근로조건을 설명해 주시면 좋겠습니다.”
나는 진심이었다.
누군가 나를 강제로 여기 데려왔고, 의무를 부과하려 한다면 적어도 동의 절차가 있었는지 확인해야 한다. 설령 그 누군가가 신이라 해도.
몰트가 한숨을 쉬었다.
“신에게 설명을 요구하는 인간이라니.”
“왕국에서 이미 한 번 해봤습니다. 답이 없더라고요.”
***
라델과의 회의는 예상보다 순조로웠다.
그는 내 요청을 듣더니 옛 용사 등록 대장을 가져왔다. 두꺼운 책이었다. 표지에는 황금으로 된 성검 문양이 새겨져 있었다.
“왕국에서 소환된 용사는 이 대장에 등록됩니다.”
“본인이 서명합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그럼 누가 등록해요?”
“소환진을 집행한 대사제가 확인합니다.”
“대사제 서명은 있습니까?”
라델이 페이지를 펼쳤다.
내 이름이 적혀 있었다.
[한도윤 / 이세계 소환 / 성검 귀속 완료]
아래에는 대사제의 이름과 인장이 찍혀 있었다.
내 서명은 없었다.
“이건 용사 등록 기록이지 근로계약은 아니잖아요.”
“왕국에서는 같은 의미로 보았습니다.”
“저는 동의한 적 없습니다.”
라델이 잠시 침묵했다.
“그대의 주장도 일리가 있습니다.”
“주장이 아니라 사실입니다. 제가 서명했는지 묻는 거잖아요.”
“기록상 서명은 없습니다.”
좋아.
중요한 사실을 확인했다.
내 동의가 없었다는 점.
다만 신성 계약이 서명을 필요로 하는지는 별도의 문제다. 이 세계의 법을 한국 근로기준법처럼 취급할 수는 없다.
“관련 규정을 보여 주세요.”
내가 말하자 아레인이 고개를 들었다.
“용사 소환 조례 말씀이십니까?”
“네. 원본과 개정 기록이 있으면 같이요.”
“그건 왕국 최고기록원에서만 열람할 수 있습니다.”
“열람 신청은 가능합니까?”
“사유서를 제출하면요.”
아.
또 사유서.
이 세계에 와서 가장 익숙한 단어가 '신성'이 아니라 '사유서'가 될 줄 누가 알았을까.
나는 신청서 초안을 작성했다.
[열람 목적: 본인 명의 등록의 효력 및 동의 절차 확인]
그때 성검이 다시 울었다.
[계약 검증 요청 인식]
“어?”
나도 모르게 소리를 냈다.
라델이 몸을 숙였다.
“왜 그러십니까?”
“검이 방금 제 신청서를 읽은 것 같아요.”
피코가 눈을 반짝였다.
“정말요? 그러면 답도 해 줄까요?”
“그랬으면 좋겠네.”
우리는 잠시 검을 바라봤다.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역시 답장은 안 하네.”
검이 삐친 듯 희미하게 빛났다.
서류를 읽고도 답을 안 주다니.
완벽하게 왕국 행정기관이다.
***
그날은 왕국 기록관 아레인과 점심도 함께 먹었다.
그녀가 내게 질문했다.
“한 재정관님은 왜 그렇게 동의 여부에 집착하십니까?”
“사람이 자기 이름으로 무슨 약속을 했는지 알아야 하니까요.”
“왕국에서는 신성 소환을 대단한 영광으로 여깁니다.”
“영광은 감사할 수 있죠. 하지만 죽을지도 모르는 일을 맡기는 거잖아요.”
아레인이 수프를 저었다.
“제가 기록관이 된 것도 집안의 뜻이었습니다. 어릴 때부터 우리 가족은 기록을 지키는 게 의무라고 들었지요.”
“그 일을 좋아하십니까?”
“지금은요.”
“그렇다면 다행이네요. 하지만 좋아하게 됐다는 사실이 처음 선택할 권리가 없었던 문제를 지우진 않겠죠.”
그녀는 한동안 말이 없었다.
그리고 조용히 웃었다.
“마왕성 직원에게 이런 말을 듣다니.”
“저도 왕국 기록관에게 노동 인권 이야기를 하게 될 줄은 몰랐습니다.”
그렇게 우리는 국경도 종족도 아닌, 본인의 선택이 무엇인가 하는 문제를 두고 오래 이야기했다.
이상하게도 처음보다 대화가 쉬워졌다.
오후에는 라델에게 내 왕궁 추방 기록을 다시 확인해 달라고 부탁했다.
“지명수배는 아직 유효합니까?”
“행정상으로는 그렇습니다.”
“무슨 혐의죠?”
“소환 의무 이탈입니다.”
“제가 계약을 거부했다고 도망친 사람이 된 거군요.”
라델은 고개를 숙였다.
“재검토를 요청해 두었습니다.”
“그러면 처리 기한은요?”
“정해져 있지 않습니다.”
아.
왜 이렇게 익숙한가 했더니 한국에서 민원 넣을 때 듣던 말이랑 똑같다.
“그럼 검토 요청 접수증이라도 주세요.”
라델이 서류를 꺼냈다.
신성 소환 기록과 지명수배 기록은 서로 다른 기관이 관리한다고 했다. 소환 담당 사제단은 등록 정보가 유효하니 문제없다는 입장이었고, 재무청은 계약 보수가 정해지지 않았으므로 토벌 의무의 범위를 다시 봐야 한다는 의견이었다.
“부처끼리 의견이 다르군요.”
내가 중얼거리자 라델이 말했다.
“왕국에서는 흔한 일입니다.”
“지구에서도요.”
우리는 서로를 보다가 웃었다.
웃을 일은 아니지만, 웃지 않으면 정말 답답해서 미칠 것 같았다.
나는 두 기록의 번호를 받아 적었다. 현재 신분에는 영향을 주지 않더라도 나중에 원래 세계로 돌아갈 길을 찾을 때 중요한 자료가 될 수 있다.
그리고 한 가지 생각이 떠올랐다.
“제가 왕국의 용사로 등록됐다는 사실과 성검이 제 손에 붙어 있는 사실은 분리해서 조사해야겠네요.”
“어째서입니까?”
“법적인 등록과 마법적인 현상이 반드시 같은 건 아니니까요.”
라델이 놀란 표정으로 나를 바라봤다.
“보통 사람들은 성검이 따라오면 신의 뜻이라고 받아들입니다.”
“전 그걸로 월세를 낼 수 있는지부터 고민했는데요.”
피코가 웃었다.
나는 진지했다.
실제로 왕국이 나를 쫓아냈을 때 성검은 팔 수도 담보로 맡길 수도 없었다. 빵을 사는 데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 무기였다.
“만약 검이 소유자의 동의를 확인하는 장치라면 어떻게 됩니까?”
내가 물었다.
“그건 대사제가 알아봐야 할 문제입니다.”
“좋습니다. 하지만 대사제만의 설명으로 끝내지는 말죠. 마왕성 쪽 마법사도 독립적으로 확인해야 합니다.”
아레인이 조용히 말했다.
“중립 감리인도 그런 역할을 했을까요?”
“글쎄요. 우리가 찾는 제3의 서명자와 관련 있을 수는 있겠죠. 그러나 지금은 모든 가능성이 열려 있습니다.”
저녁이 되자 라델이 내게 작은 서류철을 건넸다.
“추방 기록의 검토 신청서 사본입니다. 원본은 재무청으로 보냈습니다.”
나는 그 서류를 받아 들었다.
이세계에 와서 처음으로 내 이름으로 된 권리를 누군가 함께 확인해 주고 있었다.
솔직히 조금 고마웠다.
하지만 말은 이렇게 나왔다.
“처리 기한 꼭 적어 주세요.”
라델이 고개를 푹 숙였다.
“그러겠습니다.”
해 질 무렵 서고 보관함의 금속판을 다시 살폈다.
아레인이 왕국 기록원에서 가져온 그림과 비교해 보니 오래된 신성 계약 문서에 비슷한 표식이 있었다.
그러나 같지는 않았다.
왕국 쪽은 원 세 개가 정삼각형으로 배치되어 있었고, 마왕성 보관함의 표식은 위쪽 원 하나가 작았다.
“미세한 차이네요.”
아레인이 말했다.
“이 차이가 중요한지는 아직 모르겠습니다.”
“우리 회사에서 도장 모양이 조금 다른 건 큰 문제였어요.”
“위조 때문인가요?”
“아뇨. 임원마다 자기가 쓰는 도장이 다르거든요. 도장 하나만 보고 승인권을 추정하면 안 됩니다.”
나는 두 도안을 나란히 놓았다.
이 도안이 다른 이유는 제조 시기가 달라서일 수도 있고, 사용 목적이 달라서일 수도 있다.
뭔가 밝혀진 것 같다가도 다시 모르는 게 늘어나는 느낌이다.
그때 피코가 말을 꺼냈다.
“도윤 님. 혹시 성검을 상자 옆에 갖다 대면 뭔가 뜨지 않을까요?”
“그러다 봉인이 깨지면?”
“안 닿게 가까이만요.”
솔직히 궁금했다.
하지만 먼저 기록을 남겼다. 거리, 시간, 입회인, 상자의 봉인 상태. 실험 전에 규칙을 정해 두어야 결과를 믿을 수 있다.
피코가 상자를 평평한 책상 위에 올려놓았다.
나는 성검을 칼집째 한 걸음 거리로 가져갔다.
아무 일도 없었다.
반 걸음.
여전히 조용했다.
조금 더 가까이.
순간 칼집이 떨렸다.
[등록 불일치 / 제3서명 확인 필요]
나는 바로 멈췄다.
“그만.”
피코가 급히 거리를 적었다.
“열렸어요?”
“아니. 메시지만 나왔어.”
“그럼 성검이 열쇠라는 뜻인가요?”
“모르겠어. 단순히 같은 종류의 계약을 인식한 걸 수도 있어.”
상자 봉인은 그대로였다.
실험을 더 하고 싶었지만 멈췄다. 괜히 열어 버리고 나서 '원래 열려 있었다'고 주장하는 사람이 나오면 곤란하다.
그때 몰트가 조용히 말했다.
“도윤, 이건 흥미롭군. 서명자가 셋이라고 했지?”
“네.”
“왕국과 마계의 두 서명이 있다면, 세 번째는 누구의 것이겠나?”
나는 성검을 내려다봤다.
머릿속에 답처럼 보이는 생각 하나가 떠올랐다.
신.
혹은 신의 대리인.
하지만 아직은 추측이다.
나는 펜으로 이렇게 적었다.
[제3서명자 신원: 미확인. 성검과 보관함 사이 반응 존재. 인과관계 미확정.]
피코가 내 기록을 보더니 웃었다.
“도윤 님은 정말 낭만이 없어요.”
“낭만은 퇴근 후에 하자.”
“오늘도 늦게 퇴근하시면서요?”
아.
들켰다.
나는 서둘러 서류를 덮었다.
그런데 복도를 나서려는 순간 성검에서 노랫소리가 흘러나왔다.
아주 짧은 구절이었다.
이번에는 평소의 찬송이 아니었다.
마치 누군가 내게 알려 주려는 듯한 한 문장.
“동의 없는 서약은 잠든다.”
나는 걸음을 멈췄다.
“……방금 들었어요?”
피코가 고개를 저었다.
“무슨 말씀이세요?”
몰트도 나를 바라봤다.
나만 들은 건가.
그렇다면 더 위험하다. 남들이 확인할 수 없는 소리는 증거가 되지 않는다.
하지만 마음에 남는다.
동의 없는 서약.
그게 정말 옛 규칙의 일부라면, 내 성검이 왜 아직도 나를 따라오는지 다른 설명이 필요했다.
제37화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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