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로운 작품, 이어지는 이야기 · 페이루아에서 다음 페이지를 만나보세요
작품으로마왕성에 취업했더니 내가 제일 무섭단다 · 33화
PAYLUA ORIGINAL · 제33화

33화. 지워진 전송번호 4189

마왕성에 취업했더니 내가 제일 무섭단다 · 6,022자

오프라인 책장
제4병기창이라는 곳을 처음 들었을 때 나는 무기 공장 정도를 상상했다. 철을 두드리는 대장장이, 검을 쌓아 놓은 창고, 화약 냄새가 풍기는 작업장. 그런데 실제로 확인한 동부 제4병기창의 시설 목록은 조금 달랐다. 병기 제작소 하나. 운송 창고 셋. 마법 통신소 둘. 공문 교환 창구 하나. 그리고 정체불명의 '서명 보정실'. “서명을 보정한다니요?” 나는 문서를 넘기다 말고 라델을 봤다. “그게 공식 부서 이름입니까?” “그렇습니다.” “오타 아니고요?” “왕국 재무청에도 똑같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야. 이 세계에서는 서명까지 보정한다. 한국 회사에서도 부장님이 결재를 안 해 주면 내가 대신 결재선을 맞춰 보려던 적은 있지만, 적어도 그걸 전문 부서로 만들지는 않았다. “정확히 뭘 하는 부서죠?” “전쟁 중 손상된 마법 인장의 식별성을 복구합니다.” “아.” 그럴듯하다. 서류가 불에 타거나 마법에 그을리면 본래의 승인자를 알아볼 필요가 있을 테니까. “그렇다면 보정 전 원본과 보정 후 사본을 같이 보관하겠네요?” 라델의 얼굴이 난처해졌다. “규정상으로는요.” 또 시작이다. 규정상으로는. 정말 듣기만 해도 가슴이 두근거리는 단어다. 불길한 쪽으로. “실제로는 어떻습니까?” “최근 열두 건의 보정 신청서 중 세 건의 원본 등록처가 비어 있습니다.” 나는 펜을 내려놓았다. 세 건. 그중 하나라도 마왕성 복합 인장과 연결되면 상황이 꽤 복잡해진다. “서명 보정실의 책임자 이름은요?” “현재 공석입니다.” “전임자는?” “퇴직했습니다.” “언제요?” “지난달입니다.” 참 절묘한 타이밍이네. 하지만 퇴직했다는 이유만으로 사람을 범인 취급할 수는 없다. 문제는 후임 인계가 제대로 되었는지다. “인계 서류는 있습니까?” 라델이 문서 하나를 내밀었다. [인계 항목: 업무 일체.] 나는 눈을 감았다. “이거 누가 썼어요?” “전임 책임자입니다.” “업무 일체라니. 저는 이런 인수인계서가 제일 싫습니다.” “왜요?” “받는 사람이 뭘 받은 건지 전혀 모르잖아요.” 피코가 내 옆에서 필기하다가 중얼거렸다. “실장님께서는 예전에 '내가 죽으면 네가 알아서 해라'라고 인계하셨는데요.” “실장님은 이미 죽으셨잖아.” “아, 그러네요.” 몰트의 턱뼈가 달그락거렸다. “리치는 죽어도 근무할 수 있네.” 이게 농담인지 복지 정책인지 모르겠다. *** 병기창으로 가는 길은 멀었다. 왕국 영토를 지나야 하는데 나는 아직 지명수배 상태였다. “재무청 조사단의 공동 조사 대상자로서 동행하면 신분 보장을 받을 수 있습니다.” 라델이 말했다. “그 보장이 문서로 있습니까?” “있습니다.” 그가 미리 준비한 통행 확인서를 내밀었다. 오호. 이번에는 준비가 잘됐네. 나는 서명을 읽었다. 재무청과 마왕성의 공동 입회, 현장 조사 범위, 무장 인력 제한, 귀환 통로 보장. 문구가 비교적 명확했다. “그런데 여기에 저를 '왕국 용사'라고 적으셨네요.” 라델이 기침했다. “그건 기존 등록 신분을 그대로 사용한 것입니다.” “제 마왕성 직책도 함께 적어 주세요.” “두 직함을 동시에 적어도 되겠습니까?” “그렇게 되어 있는 게 현재 사실입니다.” 라델이 잠시 웃었다. “이런 서류를 제출하면 재무청 기록관들이 머리를 싸맬 겁니다.” “그러라고 기록관을 두는 거 아닙니까?” 아레인이 뒤에서 한숨을 쉬었다. “저 들립니다.” 아, 죄송합니다. 나는 정중하게 고개를 숙였다. “고생 많으십니다.” “정말 그렇게 생각하시면 서류 양식은 한 번만 고쳐 주세요.” 듣고 보니 맞는 말이다. 역시 훌륭한 실무자는 서로의 고충을 안다. 현장 조사에는 나와 피코, 루시아, 왕국 측 라델과 아레인이 동행하기로 했다. 몰트는 마왕성 자료를 지켰다. 제르칸은 자기도 가겠다고 우겼지만 나는 지출 계획서를 보여 줬다. 마왕 전용 행차 비용. 근위대 출장비. 검은 말 일곱 필의 식량비. 의전 행렬을 보려는 주민 통제 비용. “전하께서도 가시면 경호비만 금화 백 닢이 듭니다.” “그렇게 비싸냐?” “왕국 영토에 마왕이 나타나면 더 비싸질 수 있습니다.” 제르칸은 한동안 고민했다. 그러고는 말했다. “본왕은 성에서 더 중요한 일을 보겠노라.” 정말 훌륭한 경영 판단이었다. 결재는 그가 마음을 바꾸기 전에 받았다. *** 동부 접경지의 공동 교역소는 생각보다 활기찼다. 마계 상인과 인간 상인이 한 시장에서 물건을 사고팔았다. 오우거가 커다란 손으로 빵을 고르고, 드워프가 인간 장인에게 쇠못 값을 흥정했다. 밖에서는 서로 죽이겠다고 전쟁을 하는데 여기서는 서로 할인해 달라고 싸우고 있었다. 어느 쪽이 더 평화로운지는 설명할 필요가 없다. “도윤 님, 저 과자 먹어도 돼요?” 피코가 물었다. “출장 중이잖아. 식비 한도 안이면 돼.” “한도는 얼마인데요?” “금화 반 닢.” “그럼 저 가게를 통째로 먹어도 되는데요?” “……그러면 식비 규정부터 손봐야겠다.” 루시아는 주변을 살피느라 바빴다. “인간 병사가 많군.” “우린 무기 반입 제한에 합의했습니다.” “저들이 먼저 덤비면?” “그때는 저를 보호하셔야죠.” “좋다. 드디어 검을 쓸 이유가 생기는군.” 아니, 생긴 게 아니라 가정이라고요. 나는 피코에게 몰래 말했다. “기사단장님이 앞으로 달려가면 붙잡아.” “제가요?” “아, 그렇지. 너도 위험하겠다.” 루시아가 다 들었다는 듯 웃었다. 역시 귀가 밝은 사람이다. 우리는 교역소의 문서 보관실에서 제4병기창 발송 대장을 열람했다. 왕국 기록관 아레인이 공식 허가증을 제시했고, 마왕성 측은 같은 기록의 사본을 받았다. 발송 번호. 수취 기관. 전송 시각. 담당 인장. 처음 몇 장은 평범했다. 군량 요청서, 방패 수리비, 성벽 자재 주문. 그런데 문제의 날 기록에 작은 공백이 있었다. “이 번호 보이세요?” 내가 물었다. [송-4187] [송-4188] [송-4190] 4189가 없었다. “중간 번호가 빠졌네요.” 아레인이 말했다. “폐기되었을 수도 있습니다.” “그렇죠. 폐기 기록을 보면 됩니다.” 기록관이 폐기 대장을 펼쳤다. 없었다. “서류가 누락되면 이런 경우도 있습니다.” “그렇죠. 그래서 이게 무슨 번호였는지 알아봐야 합니다.” 나는 제4병기창 측 책임자에게 원본 전송 기록의 열람을 요청했다. 책임자는 마지못해 작은 수정 구슬을 가져왔다. 구슬 안에는 전송 흔적이 저장된다고 했다. “어느 시각을 보시겠습니까?” “4188과 4190 사이요.” 구슬이 빛났다. 그리고 아주 짧은 글자가 나타났다. [송-4189 / 전송 실패 / 수신처 미확인] 아. 보이는 기록과 대장이 다르다. 절대 감사가 푸른 빛을 냈다. [기록 식별자 불일치] 놀랍지도 않다. “구슬이 원본입니까?” 나는 물었다. “현재 남아 있는 가장 오래된 저장물입니다.” “그럼 구슬이 만들어진 날짜와 관리자를 확인하죠.” 서류 담당자가 입술을 깨물었다. “왜 그렇게까지 필요합니까?” “한쪽 기록에는 빠졌고, 다른 기록에는 실패라고 적혔잖아요. 어느 쪽이 틀렸는지 확인하려면 보존 경로부터 봐야 합니다.” 아레인은 아무 말 없이 그 내용을 적었다. 마왕성의 임프 서기와 왕국의 기록관이 같은 탁자에서 같은 번호를 적고 있었다. 이상한 광경이었다. 그런데 나쁘지 않았다. *** 제4병기창 창구를 나서기 전에는 소소한 소동도 있었다. 교역소 관리인이 우리 일행에게 체류세를 청구한 것이다. “조사관 다섯 분, 마차 두 대, 전송석 한 개. 합해서 금화 여섯 닢입니다.” 나는 청구서를 봤다. “저희는 마차 두 대를 가져오지 않았는데요?” “왕국에서 가져온 마차가 있잖습니까.” 라델이 고개를 저었다. “이번에는 공동 교역소의 공용 운송편을 이용했습니다.” 관리인이 서류를 뒤적였다. “그러면 마차 비용을 빼겠습니다.” “전송석도 개인 물품이 아니고 교역소에서 빌렸습니다.” “그럼 사용료만 받겠습니다.” 나는 다시 계산했다. 금화 두 닢. 처음의 삼분의 일이었다. 관리인이 머쓱해했다. “전임자가 쓰던 표를 그대로 적용했습니다.” “다음부터 이용 형태별로 나눠 주시면 좋겠습니다.” “정말 꼼꼼하시군요.” “출장비가 제 월급에서 나가면 저도 덜 꼼꼼할 겁니다.” 라델이 어이없다는 표정으로 웃었다. “그대는 전쟁보다 비용에 더 민감한 것 같습니다.” “전쟁도 비용 문제거든요.” 나는 영수증을 접어 품에 넣었다. 나라끼리 싸우면 장군들은 명예를 이야기하지만, 결국 마차를 모는 사람에게는 건초가 필요하고 병사에게는 밥이 필요하다. 그 돈을 누가 내는지 모르면 언젠가 누군가가 굶는다. 루시아는 교역소 바깥에서 장인들과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흑철 연결대의 제작 흔적을 보여 주자 드워프 장인 하나가 뜻밖의 말을 했다. “이 무늬는 군용 검보다 성벽 방호 장치에 가깝습니다. 하지만 같은 철을 잘라 검도 만들 수 있습니다.” “그럼 완제품 용도를 확정할 수는 없겠네요.” “그렇죠. 크기만 보고는요.” 나는 장인에게 간단한 의견서 작성을 부탁했다. 그는 금화 한 닢을 요구했다. 루시아가 인상을 찌푸렸다. “말 한마디 하는 데 돈을 받는다고?” “전문가 의견이잖아요.” 내가 말했다. “책임을 지는 기록이 된다면 대가를 주는 게 맞습니다.” 드워프는 고개를 끄덕였다. 우리는 의견서에 '현장 관찰 범위에 한함'이라고 표시했다. 아무리 작은 증거라도 확인된 범위를 남기는 게 중요했다. 라델은 교역소 밖에서 뜻밖의 사과를 했다. “예전에 귀하에게 급여 지급을 거부한 건 제 판단이 짧았습니다.” “왕국의 제도 문제였죠.” “그렇다고 제가 질문을 무시한 건 달라지지 않습니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 말이면 됐다. 사람을 바꿀 수는 없더라도 다음 절차는 바꿀 수 있을 테니까. “그럼 다음 용사가 소환되면 계약서부터 만들어 주세요.” 라델은 진지하게 답했다. “검토하겠습니다.” “검토만 하지 마시고요.” 이번에는 그도 웃었다. 돌아가려는 순간 서명 보정실에서 한 노인이 찾아왔다. 자신은 전임 책임자의 보조였다고 했다. 이름은 레쿠스. “송-4189를 찾으신다고 들었습니다.” “기록을 알고 계십니까?” “무엇이었는지는 모릅니다. 다만 그 번호는 실패가 아니었습니다.” 내 손이 멈췄다. “그렇게 말씀하시는 근거는요?” 그가 낡은 업무 일지를 내밀었다. [송-4189. 수신 확인 후 보정실 재입력 지시.] 기록 일지 옆에는 인장이 하나 찍혀 있었다. 원 세 개와 세로줄 하나. 렘이 그려 준 표식이었다. 나는 곧장 좋아라 할 수 없었다. 오래된 업무 일지도 위조할 수 있으니까. “이 일지는 언제부터 보관하셨습니까?” “제 개인 기록입니다. 공문 원본은 위에서 회수했습니다.” “위가 누구죠?” 노인은 주위를 살폈다. “그날은 책임자가 출근하지 않았습니다. 대신 낯선 사람이 왔어요.” “이름이나 직책은요?” “모릅니다. 다만 제 책상에 이렇게 적힌 명패를 놓았습니다.” 그가 주머니에서 얇은 금속판을 꺼냈다. [공동 감리 대리인] 나는 라델을 바라봤다. 그도 처음 보는 표정이었다. “육백팔십 년 전에 사라졌다는 그 조직 말입니까?” “기록상 그렇습니다.” 나는 금속판과 업무 일지의 출처를 따로 기록했다. 누가 왜 전송 기록을 재입력했는지 아직은 모른다. 하지만 이제 조사해야 할 사람이 하나 더 생겼다. 공동 감리 대리인. 직책은 있는데 이름이 없다. 마왕성 경비병 중에도 이름표 없는 해골이 있지만, 그쪽은 적어도 뼈 모양으로 구분이라도 된다. 나는 한숨을 쉬었다. 이 조직은 사람을 숨기는 데 진심이구나. 그때 허리의 성검이 한 번 울렸다. [등록되지 않은 승인 형식 감지] 나는 구슬 화면을 다시 바라봤다. 4189의 수신처는 미확인이었지만, 맨 아래에 희미하게 남은 네 글자가 있었다. [제3서고] 아니. 그건 마왕성에 있는 서고 이름이잖아. 나는 곧장 몰트에게 전송을 요청했다. 동부 병기창에서 사라진 문서 한 장이, 우리 성 어딘가에 도착했을지도 모른다. 이번엔 집으로 돌아가서 찾아야 할 차례였다.

PAYLUA 소설 본문은 인쇄가 제한되어 있습니다.

제33화 끝

읽은 위치는 이 브라우저에 저장되며 로그인 중에는 계정에도 동기화됩니다.
READER DISCUSSION

제33화 댓글 0

댓글·공감·신고는 로그인 후 이용할 수 있습니다. 이전 익명 댓글은 그대로 표시됩니다.

댓글을 남기려면 로그인해 주세요.로그인회원가입

댓글을 불러오는 중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