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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품으로마왕성에 취업했더니 내가 제일 무섭단다 · 31화
PAYLUA ORIGINAL · 제31화

31화. 봉인 계정은 아직 열지 않습니다

마왕성에 취업했더니 내가 제일 무섭단다 · 6,486자

오프라인 책장
왕국 재무관 라델이 내민 서류에는 익숙한 숫자가 적혀 있었다. [공동 보관 계정 00-성전 / 열람권한 확인 요청] 어제까지만 해도 장부 한 귀퉁이에 숨어 있던 이름이 오늘은 대놓고 회의실 한가운데 올라왔다. 아, 기분 묘하네. 일곱 해 동안 회계 일을 하면서 미확인 계정이 스스로 찾아오는 경우는 처음 봤다. 대개는 내가 찾아다녔다. 서랍을 뒤지고, 담당자를 붙잡고, 승인 번호를 묻고, 그러다 결국 금요일 오후 여섯 시에 '월요일까지 확인'이라는 말을 듣곤 했다. 그런데 이번에는 왕국에서 직접 찾아왔다. 물론 더 좋은 소식이라는 뜻은 아니다. “먼저 확인할 게 있습니다.” 내가 말했다. 라델은 얌전히 고개를 끄덕였다. 왕궁에서 내게 신성한 의무 운운하던 때와는 사뭇 다른 태도였다. “이 문서는 무엇을 열람하라는 요청입니까? 계정의 잔액입니까, 거래 내역입니까, 아니면 열람할 권한이 있는 사람의 명단입니까?” “마지막입니다.” “그럼 계정 내용은 안 봐도 되는 거네요?” “당장은 그렇습니다.” 당장은. 회계 담당자에게 저 말은 '나중에는 봐야 한다'는 뜻이었다. 나는 서류를 탁자 위에 놓았다. 라델 옆에 앉은 왕국 기록관이 깃펜을 세웠다. 이름이 아레인이라고 했다. 조사관 두 사람은 내 오른쪽에, 군수 감독관은 루시아 맞은편에 앉았다. 마왕 제르칸은 의장석에서 최대한 무시무시한 표정을 유지하고 있었다. 어젯밤 새로 매달아 놓은 검은 깃발 세 장이 그의 뒤에서 바람도 없는데 흔들렸다. 대체 뭘로 움직이는 건지는 모르겠다. 아무튼 돈은 안 들었다니 다행이지. “회의를 시작하지.” 제르칸이 입을 열었다. “적국의 사자들이여. 본왕이 너희에게 허락하는 시간은—” “전하, 오전 회의는 한 시간 반으로 잡았습니다.” “……한 시간 반이다!” 상당히 효율적인 마왕이다. 요즘은 시간 제한도 잘 지킨다. 그런데 라델이 건넨 첫 서류에는 문제가 있었다. [열람 대상: 00-성전] [요청 주체: 왕국 재무청] [승인 주체: 공동 감리 사무소] 공동 감리 사무소. 이런 곳이 있었나? 나는 몰트를 바라봤다. 실장님의 눈구멍 속 푸른 불꽃이 작게 흔들렸다. “실장님, 혹시 들어보셨어요?” “명칭만. 지금 쓰는 조직은 아닐 걸세.” “언제 마지막으로 보셨는데요?” “칠백…… 아니, 육백팔십 년쯤 전인가.” 잠깐. 우리 회사는 연혁이 길어도 너무 길다. 한국에서 육백팔십 년 전이면 조선 시대보다도 오래전이다. 그런 조직을 '예전에 쓰던 부서'라고 말하는 곳에서 내가 근무하고 있다니, 가끔 현실감이 사라진다. “폐지된 조직입니까?” “정확히는 기록이 끊겼네.” “폐지 결의서나 인계 장부는요?” 몰트가 나를 바라봤다. “그 시절에는 종이를 오래 보존하는 관습이 없었네.” “리치가 육백 년 전에 뭘 했는지도 기억하는데 서류를 안 보존했다고요?” “기억은 보존 기간이 무기한이지.” “……부럽습니다.” 하지만 증빙 없는 기억은 증빙 없는 기억이다. 백 년을 산 사람이 말하든 천 년을 산 사람이 말하든 마찬가지다. 왕국 기록관 아레인이 조심스럽게 끼어들었다. “왕국에도 같은 이름이 남아 있습니다. 다만 예전 전쟁 조약의 부속 기관으로 기재되어 있을 뿐입니다.” “전쟁 조약이요?” “휴전 조약입니다. 항구에서 민간 물자를 보호하기 위한 협정이지요.” 그녀가 표지를 펼쳤다. [제8차 동부 휴전협정 / 공동 감리 항목] ‘휴전’이라는 단어가 반가웠다. 이 세계 사람들도 가끔 싸움을 멈췄구나. 진짜 놀랍다. 그런데 이상했다. 전쟁 중인 왕국과 마왕군이 공동으로 관리하는 계정이라니. “서류 원본은 어디 있습니까?” 아레인이 잠깐 망설였다. “현재 재무청 문서실에 있는 사본입니다.” “원본의 보관처는요?” “기재되어 있지 않습니다.” 하하. 역시. 서류를 열 장 받아도 열한 번째 질문이 생기는 세계다. *** 첫 회의는 돈이 아니라 의자 때문에 멈췄다. 정확히는 의자에 앉아 있던 왕국 군수 감독관 때문에. “이런 서류를 마왕성에서 검토할 수는 없습니다. 왕국의 중립 회의장으로 옮기셔야 합니다.” 이름은 헤른. 우람한 어깨에 턱수염을 기른 사람인데, 들어온 뒤부터 우리 성벽에 있는 무기 숫자를 세는 눈치였다. 루시아가 곧장 일어났다. “인간. 여기가 싫으면 성문 밖으로 나가라.” “기사단장님.” “왜?” “앉으세요.” “도윤, 저자가 먼저—” “알아요. 그래서 더 앉으셔야 합니다.” 루시아는 불만스럽게 앉았다. 의자가 끼익 울었다. 왕국 감독관도 입을 다물었다. 나는 두 사람 사이에 물잔을 밀어 놓았다. “회의 장소를 바꾸자는 의견은 기록하겠습니다. 다만 지금은 열람권한 확인 절차를 정하는 자리니까 장소 변경은 별도 안건으로 두죠.” 헤른이 미간을 찌푸렸다. “마왕성 직원이 어찌 왕국 조사 절차를 통제합니까?” “통제하는 게 아니라 합의하는 겁니다. 왕국 서류를 왕국에서만 확인하면 저희가 원본 대조를 어떻게 합니까?” “왕국 조사관을 믿으면 됩니다.” “마왕성 재정실도 믿어주실 겁니까?” “그건……” “그렇죠. 서로 못 믿으니까 확인 절차를 만드는 겁니다.” 라델이 헛기침했다. “헤른 감독관. 그 부분은 한 재정관의 말이 맞습니다.” 감독관은 마지못해 입을 다물었다. 나는 서류에 한 줄을 추가했다. [열람 장소: 공동 관리. 원본 이동 시 쌍방 입회. 복사본에는 발급처와 열람 시각 기재.] 이왕 시작한 김에 끝까지 제대로 하자. “그리고 한 가지 더요.” 라델이 나를 봤다. “계정 이름이 왜 '성전'입니까?” 그 순간 방 안이 아주 조용해졌다. 제르칸은 코웃음을 쳤다. “뻔하지 않느냐. 인간들은 우리가 악이라며 성스러운 전쟁이라고 부르지.” “그런 뜻일 수도 있죠.” 하지만 아직은 모른다. '성전'이란 단어만 보고 곧장 천계와 왕국의 돈세탁을 떠올리는 건 추측이다. 회계 파일 이름이 '긴급'이라고 적혔다고 실제로 긴급한 적은 없으니까. 라델이 말했다. “계정 개설 당시의 명칭입니다. 왕국 문서에도 의미에 대한 설명은 없습니다.” “개설 연도는요?” “기록마다 다릅니다.” “아니, 개설 연도가 다른 건 좀 큰 문제 아닌가요?” “마법력과 왕국력, 마계 연호가 다르기 때문일 수도 있습니다.” 그건 그럴듯하다. 우리 회사도 해외 법인과 회계 기간을 맞추다가 며칠씩 헤매곤 했다. 달력 하나만 어긋나도 연말 정산이 다른 분기로 넘어간다. 나는 피코에게 연호 환산표를 준비해 달라고 했다. 피코는 곧장 작은 책자를 가져왔다. “만들어 뒀어요.” “언제?” “지난번 왕국 문서 날짜가 이상하다고 하셨을 때요.” 오호. 이 녀석, 일 잘하네. “피코. 이번 달 평가 때 꼭 적어둘게.” “월급 올라요?” “그건 예산부터 확인해야 해.” “도윤 님도 똑같아요!” 아니, 나는 적어도 근거를 설명하잖아. *** 점심 시간이 되자 왕국 조사단이 가져온 도시락과 마왕성 주방에서 준비한 음식이 한 탁자에 놓였다. 문제는 국이었다. 왕국 조사관 한 명이 검붉은 국물을 보고 얼굴이 파래졌다. “이건 설마…… 피입니까?” 주방장이 상처받은 얼굴로 소리쳤다. “비트 수프입니다!” “비, 비트?” “마왕성 농장에서 직접 기른 거요!” 그 뒤로 설명이 길어졌다. 한쪽은 농산물 원산지 증명서를 꺼내고, 다른 쪽은 독성 검사를 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나는 수프를 한 숟갈 먹었다. 달다. “그냥 맛있는데요.” 아무도 나를 쳐다보지 않았다. 이런 순간에는 회계보다 음식이 더 어렵다. 다행히 피코가 왕국 조사관들에게 평범한 빵을 나눠 줬다. 기록관 아레인은 조심스럽게 수프를 맛보더니 두 번째 그릇까지 비웠다. “맛있네요.” 주방장이 눈물을 글썽였다. 자존심이 걸린 외교 문제가 이렇게 해결됐다. 점심 뒤 라델은 내게 따로 이야기하자고 했다. 나는 몰트와 피코를 함께 데리고 갔다. 상대가 비밀을 말하고 싶어 하더라도 우리 회의에는 기록자가 있어야 한다. 라델이 멋쩍게 웃었다. “아직도 그렇게 절차를 중요하게 생각하시는군요.” “절차 덕분에 여기까지 살아왔습니다.” “왕궁에서는 절차 때문에 쫓겨나셨는데요.” “그러니까 더 필요하죠.” 라델이 한숨을 쉬었다. “재무청에는 00-성전의 잔액을 보는 권한이 없습니다. 저희가 볼 수 있는 것은 계정에 대한 접근을 누가 승인했는지 여부뿐입니다.” “그 승인 기록을 왜 확인하려는 겁니까?” “왕국 명의로 최근 열람 신청이 들어왔기 때문입니다.” “재무청이 신청하지 않았는데요?” “그렇습니다.” 나는 펜을 멈췄다. “신청자는 누구로 찍혀 있습니까?” “서명자가 없습니다. 직인 번호만 있습니다.” “직인은 발급 가능하잖아요.” “원래는 재무청 봉인실에 보관되어야 하는 번호입니다.” “원래는?” “봉인실 장부에는 반출 기록이 없습니다.” 그래. 그런 단어가 제일 싫다. *장부에는 없는데 실제로는 움직였다.* 나는 라델에게 물었다. “누가 접근할 수 있습니까?” “봉인실장과 관리관 두 명입니다.” “세 분 모두 조사받았나요?” “아직 아닙니다.” “그렇다면 내부자라고 단정하지 마세요. 누군가 직인 번호만 복제했을 수도 있고, 다른 기관에서 이전 권한을 사용했을 수도 있습니다.” 라델이 씁쓸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 말을 하러 왔습니다. 왕국에서만 조사하면 결론이 한쪽으로 기울까 두렵습니다.” 나는 말없이 그를 바라봤다. 지난번에 나를 무급으로 보내려던 사람이 이제 절차적 공정성을 이야기하고 있었다. 사람이 변할 수도 있는 법이지. 물론 월급 없는 용사 계약이 합법으로 바뀌는 건 아니다. “공동 확인은 가능합니다.” 내가 말했다. “단, 왕국도 우리 자료를 보겠다면 같은 범위의 자료를 제공해야 합니다. 특히 제4병기창 전송 원본이요.” 라델이 곧장 답하지 못했다. “쉽지 않을 겁니다.” “그럼 가능한 범위부터 합시다.” 나는 양피지를 펼쳐 오늘의 합의사항을 적었다. 계정의 잔액은 확인하지 않는다. 열람 요청의 존재와 승인 경로만 확인한다. 양측이 가진 문서는 교차 대조한다. 원본의 소유권은 이전하지 않는다. 확인되지 않은 사실은 공식 발표하지 않는다. 내가 항목을 읽어 주자 피코가 고개를 끄덕였다. 라델도 천천히 서명했다. “한 재정관.” “네.” “그대가 이 왕국에서 일했다면 재무청은 많이 달라졌을 겁니다.” 나는 웃었다. “그때 급여를 주셨으면 됐잖아요.” 라델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이제 와서 후회해도 소용없다. 마왕성은 숙식도 주고, 근로계약서도 쓰고, 위험수당도 챙겨 준다. 간혹 복도를 해골이 굴러다닌다는 단점이 있지만 세상에 완벽한 회사가 어디 있겠는가. 그런데 회의에 참석한 왕국 조사관 세른이 손을 들었다. “공동 조사 기록을 양쪽이 보관한다면 최종 보고서는 누가 작성합니까?” 좋은 질문이었다. 이런 종류의 업무는 담당자가 둘이면 오히려 아무도 안 하는 경우가 있다. 각자 상대가 작성할 줄 알았다고 말하는 순간 회의는 끝나고 서류는 사라진다. “초안은 양측 기록관이 따로 작성한 다음 대조하는 게 어떻습니까?” 내 제안에 아레인이 고개를 끄덕였다. 피코도 신이 난 얼굴로 서류를 꺼냈다. “틀린 부분은 빨간 잉크로 표시할까요?” “아니. 서로 다른 표현은 먼저 이유를 적어. 실제로 다르게 본 것인지, 단어만 다른 건지 구분해야 하니까.” 세른은 고개를 갸웃했다. “보고서를 두 번 쓰면 일이 더 많아지는 것 아닙니까?” “처음에는 그렇죠. 그런데 나중에 서로 말 바꿨다고 싸우는 시간보다는 적게 듭니다.” “그런 경험이 있으십니까?” “……많습니다.” 이 세계에 소환되기 전에도 나는 회의록을 작성했다. 누가 뭘 결정했는지 적는 일은 단순해 보이지만, 책임과 돈이 걸리면 갑자기 모든 사람이 기억상실증에 걸렸다. 라델이 웃었다. “한 재정관께서는 아주 독특한 방식으로 평화를 추구하시는군요.” “평화라기보다는 재작업 방지입니다.” “그것이 더 정확한 표현일 수도 있겠군요.” 우리는 회의록의 작성자와 검토자를 정했다. 피코는 자기 이름이 검토 담당자란에 들어가자 작은 주먹을 불끈 쥐었다. 몰트가 웃었다. “피코, 이제 자네도 중요한 사람이 되었군.” “예전부터 중요한 사람이었거든요!” 나는 맞장구쳤다. “맞아. 서류 찾을 땐 피코가 제일 중요하지.” 그제야 피코가 환하게 웃었다. 이런 사소한 인정이 급여 못지않게 중요할 때가 있다. 물론 그렇다고 급여를 깎아도 된다는 뜻은 아니다. 두 가지를 바꿔치기하는 상사들을 너무 많이 봐 왔으니까. 회의가 끝나려는 순간 성검이 허리에서 가볍게 울었다. [신성 계약 관련 표기 대조 필요] 정말이지. 너는 왜 꼭 퇴근 직전에 일을 시키니? 그런데 이번 메시지 아래에는 작은 숫자 하나가 붙어 있었다. [열람 시도 1건 / 요청 주체 미확인] 나는 그것을 그대로 받아 적었다. 누가 시도했는지는 모른다. 계정이 열렸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적어도 한 가지는 알았다. 우리가 계정의 정체를 조사하기 시작한 바로 오늘, 누군가 먼저 그 문을 두드렸다. 회의실 창밖으로 검은 깃발이 흔들렸다. 아. 이번 일은 생각보다 오래 걸리겠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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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1화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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