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왕성에서 가장 위험한 회의는 전쟁 회의가 아니다.
예산 회의다.
전쟁 회의에서는 적어도 누구를 때릴지 의견이 모인다. 예산 회의에서는 서로의 부서를 때리려고 한다.
그날도 그랬다.
"흑산 상단과의 모든 거래를 중단하라!"
제르칸의 외침이 알현실을 울렸다.
시설관리국장은 고개를 끄덕였고, 제17군단 대표도 박수를 쳤다. 루시아는 무슨 일이든 일단 강하게 해결하는 걸 좋아하는 사람답게 만족스러운 표정이었다.
나만 손을 들었다.
"전하. 전면 중단은 잠시 보류하시면 안 될까요?"
모두가 나를 봤다.
"왜?"
"흑산 상단이 계약한 물건 중에는 제17군단의 식량도 있습니다. 대체 공급처를 구하지 않고 끊으면 병사들이 굶습니다."
제르칸의 얼굴이 굳었다.
"너는 상단을 옹호하는 것이냐?"
"아뇨. 상단과 계약한 우리 병사들을 보호하자는 겁니다."
"상단이 부정을 저질렀는데도?"
"아직 의심 정황을 조사 중입니다. 이미 확인된 불일치에 대해서는 지급을 보류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식량까지 중단하면 사건과 관계없는 사람이 피해를 봅니다."
루시아가 팔짱을 꼈다.
"그렇다면 나쁜 놈에게도 돈을 줘야 하느냐?"
"아뇨. 이미 납품한 물건의 대금과 앞으로 납품할 물건의 계약은 구분해야죠."
"말이 너무 어렵다."
"밥은 계속 먹여야 한다는 뜻입니다."
"아. 그건 알겠다."
이 사람, 단순해서 다행인 때도 있다.
***
나는 양피지에 표를 그렸다.
첫째, 실물이 확인된 필수 식량은 지급 유지.
둘째, 품목이 다른 군수 물자는 대금 정산 보류.
셋째, 미확인 운송비와 보증 준비금은 별도 검증.
넷째, 이미 지급된 금액은 반환 협상과 회수 가능성을 검토.
제르칸은 표를 보더니 물었다.
"왜 한 번에 끝내지 않느냐?"
"한 번에 끝내면 쉽죠."
"그럼 왜?"
"잘못한 사람이 누구인지도 모르는데 상단 전체를 망하게 하면, 다음에는 누구도 우리에게 물건을 팔려고 하지 않을 겁니다."
마왕의 손가락이 멈췄다.
"그렇다면 전쟁에 필요한 보급이 끊기겠군."
"네."
"이런 인간들이 우리 성을 얼마나 얕잡아 볼지 모르겠구나."
"그럴 때일수록 계약서대로 하시면 됩니다."
"계약서가 그렇게 무서운 물건이더냐?"
"전하가 함부로 기분에 따라 일을 바꿀 수 없게 하니까요."
정적.
루시아가 기침을 했다. 몰트는 두개골을 손바닥으로 감쌌다.
내가 너무 솔직했나?
제르칸은 한동안 나를 노려보더니 갑자기 껄껄 웃었다.
"좋다! 본왕을 묶는 사슬이 적을 묶는 사슬도 되겠지."
"그렇습니다."
"하지만 본왕에게는 잘 어울리는 금사슬로 만들어라."
"그건 예산이……"
"농담이다, 인간!"
아.
마왕도 농담을 배우셨네.
피코에게 알려주면 좋아하겠다.
***
회의 후 루시아와 함께 제17군단 보급기지를 방문했다.
닉스라는 고블린 병사가 우리를 맞았다. 얼마 전 식량 부족을 증언해 줬던 친구였다.
"도윤 재정관님!"
그가 허리를 숙였다.
"지난번에 보내 주신 건조육 덕분에 이번에는 제대로 먹었습니다."
"다행이네요. 지금 남은 건 얼마나 됩니까?"
"열흘 정도요."
"대체 물량은요?"
"흑산 상단에서 다음 달 초에 온다고 했습니다."
나는 달력을 확인했다.
거래를 전면 중단하면 식량이 먼저 바닥난다.
"혹시 다른 상단에서 공급받을 수 있나요?"
닉스가 고개를 저었다.
"전쟁터까지 오는 상인이 별로 없습니다. 다들 길이 위험하다고 해서요."
루시아가 이를 악물었다.
"내가 호위하면 오겠지."
"기사단장님이 매일 호위하면 다른 임무는 누가 하죠?"
"……그것도 문제군."
나는 닉스와 함께 창고를 둘러봤다. 식량 포대마다 실제 수량을 적어 놓고, 손실된 물량은 별도 표시돼 있었다. 지난 감사 이후 조금씩 바뀌고 있었다.
그런데 가장 안쪽에 놓인 포대에는 익숙한 표식이 찍혀 있었다.
[흑산 상단 제2운송소]
"이 포대는 언제 받았습니까?"
"사흘 전입니다."
"봉인은 누가 확인했나요?"
"저와 보급반장님이 같이 봤습니다."
닉스가 두 사람의 서명이 적힌 인수증을 내밀었다.
나는 웃었다.
"잘하셨네요."
닉스의 귀가 쫑긋 섰다.
"정말요?"
"네. 사흘 뒤에 누가 '그런 물건 납품한 적 없다'고 해도 이걸 보여 주면 되니까요."
그가 만족스럽게 웃었다.
작은 변화였지만 이런 걸 볼 때마다 기분이 좋아졌다.
장부가 현장에서 살아 움직이는 느낌이었다.
***
회의가 끝난 뒤 나는 마계 상업금고에 들렀다.
보증 계정을 제안해 놓고 실제로 만들 수 있는지 확인하지 않으면 또 문제가 생긴다. 대한민국 회사에서도 '가능한 줄 알았다'는 이유로 프로젝트가 시작되는 걸 수없이 봤다.
금고 직원은 내 말을 듣더니 두꺼운 안내책자를 내밀었다.
"공동 인출 계정은 만들 수 있습니다. 다만 서명 주체가 둘이면 두 명 모두 마력이 있어야 합니다."
"저는 마력이 없는데요."
"그럼 본인은 서명을 못 합니다."
아.
이세계 금융의 진입 장벽이다.
나는 성검을 바라봤다.
"얘가 대신 서명할 수는 없겠죠?"
검이 잠깐 빛났다.
직원이 깜짝 놀랐다.
"신성 장비는 법인이 아니므로 안 됩니다!"
그렇구나.
의외로 법체계가 정확하네.
"그럼 마왕성의 재정실장과 상단의 권한 있는 대표가 각각 서명하면 되겠군요."
"가능합니다. 계정 관리자는 중립인 금고로 지정하고, 지급 조건을 문서로 적으면 됩니다."
"분쟁이 생기면요?"
"계정이 동결됩니다. 양쪽이 합의하거나 중재 절차가 끝나야 풀립니다."
나는 안내책자에 표시를 했다.
이 방식도 완벽하지는 않다. 지급이 늦어지면 정당하게 물건을 납품한 업체가 손해를 볼 수 있다. 그러니 지급조건을 너무 복잡하게 만들면 안 된다.
금고 직원은 원래 계약서를 가져오면 임시 계정 개설 가능 여부를 검토하겠다고 했다.
"비용은요?"
"월 보관료가 금화 두 닢입니다."
나는 계산했다.
금화 두 닢으로 팔만 닢짜리 거래를 투명하게 할 수 있다면 싼 편이다. 물론 그 두 닢을 누가 부담할지도 계약서에 적어야 하겠지만.
"보관료를 미납하면요?"
"계정에서 자동 공제됩니다."
"그럼 보관료 계산서도 주시죠."
금고 직원이 나를 멍하니 쳐다봤다.
"그걸 요구하는 분은 처음입니다."
아, 또 최초 달성이다.
이 세계에서 내가 남기는 업적은 대체로 웃기지도 않은 행정 기록이다.
***
돌아오는 길에 피코의 급여명세서를 떠올렸다.
월영 관리단은 야간 노동자에게서 안전 장비비를 공제하고 있었다. 그 돈이 정말 다른 장부의 보증 준비금으로 사용됐다면 피해자에게 돌려줘야 할 가능성이 있다.
하지만 먼저 계약마다 돈이 실제로 이동했는지 확인해야 한다.
이름만 같은 계정일 수도 있고, 금고가 지급 명세를 묶어 표시했을 수도 있다.
나는 질문을 적었다.
[급여 공제와 정산 보증 준비금의 계정 소유자는 같은가?]
[각 계약의 승인권자는 누구인가?]
[직원에게 안내한 목적과 실제 사용처가 같은가?]
질문은 셋.
답은 아직 하나도 없다.
이렇게 적어 놓으니 조금 허탈했다.
아무리 많은 장부를 봐도, 돈의 끝은 아직 보이지 않았다.
그때 금고 앞에서 아까 만난 직원이 뛰어왔다.
"재정관님!"
"무슨 일입니까?"
"아까 말씀하신 공동 계정 말인데요."
"네."
"왕국 쪽 상인과 마왕성 양쪽이 서명할 경우 추가 확인 절차가 필요합니다. 전쟁 중 거래라서요."
"어떤 절차죠?"
"물품이 실제로 납품됐는지 제삼자가 확인해야 합니다."
나는 웃었다.
"그건 오히려 잘됐네요."
"네?"
"저희가 원래 하려던 일이니까요."
그는 이해하지 못한 얼굴이었다.
나는 마음이 조금 가벼워졌다.
장부를 믿지 못하겠다면 실물을 보자.
처음부터 그 원칙 하나로 여기까지 왔다.
저녁에는 흑산 상단과 직접 협상했다.
나르딘은 큰 회의실에 앉아 있었다. 내 앞에는 마왕성의 식량 구매 계약서와 군수 물품 정산 보류서가 각각 놓여 있었다.
"거래를 완전히 끊으신 줄 알았습니다."
그가 먼저 말했다.
"필수 식량은 별도로 협의하려고 합니다."
"저희를 신뢰하시는 겁니까?"
"신뢰 여부와 계약 이행은 다릅니다."
나르딘이 쓰게 웃었다.
"꼼꼼하시군요."
"직업병입니다."
나는 새 제안을 내밀었다. 식량은 납품 시 독립 검수를 하고, 검수된 수량에 대해서만 대금을 지급한다. 의혹이 남은 군수 거래의 미지급금은 별도 보증 계정에 묶어 둔다. 이미 지급된 돈의 회수는 별도 협상한다.
"우리 회사가 대금을 못 받을 위험은요?"
나르딘이 물었다.
"검수된 식량분은 계약된 날짜에 지급하겠습니다. 두 사람 이상이 수량을 확인하고 기록을 남길 겁니다."
"보증 계정은 누가 관리합니까?"
"마계 상업금고에 독립 계정으로 두는 방안을 제안합니다. 양쪽 서명이 있어야 인출하도록요."
나르딘이 의자를 밀었다.
"상단 본사의 승인이 필요합니다."
"알겠습니다. 검토 기한을 언제로 잡을까요?"
"사흘."
"그럼 사흘 뒤에 답을 듣겠습니다."
그는 내 얼굴을 한참 봤다.
"재정관님은 우리 상단을 범죄자로 생각하지 않으십니까?"
"제가 판단할 일은 증거가 보여 주는 범위까지입니다."
"만약 우리 쪽이 잘못했다면요?"
"그건 바로잡아야겠죠."
"그런데 정말 억울하다면요?"
"그때도 기록이 필요합니다."
나르딘은 잠시 말이 없었다.
그 침묵은 조금 이상했다. 마치 그 역시 말하고 싶은 게 있는데, 아직 말할 수 없는 사람처럼 보였다.
***
협상장을 나오려는데 나르딘이 나를 불렀다.
"한 재정관님."
"네?"
"채석장 사고 소식 들었습니다."
"네."
"다친 작업자들의 치료비는 상단이 일부 부담하겠습니다."
나는 그를 바라봤다.
"계약상 책임이 있습니까?"
"확실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저희 물건이 그곳으로 운송된 건 맞으니까요."
"책임 범위와 별도로 지원하시겠다는 건가요?"
"그렇습니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 지원이라면 감사하죠. 다만 치료비 명세서는 남겨 주세요. 작업자들에게 실제로 지급돼야 합니다."
그가 피식 웃었다.
"끝까지 영수증이군요."
"영수증을 받는 사람이 제가 아니라 다친 사람들이었으면 좋겠습니다."
나르딘은 조금 진지한 얼굴로 고개를 숙였다.
그날의 협상은 완전히 성공한 것도, 실패한 것도 아니었다.
하지만 적어도 병사들은 다음 주에 밥을 먹을 수 있게 됐다.
그리고 다친 노동자들은 치료비를 받게 될 가능성이 생겼다.
문제는 그다음이었다.
그사이 루시아에게서 짧은 보고가 들어왔다.
새 검수 절차를 적용한 첫 식량 마차가 제17군단에 도착했다는 내용이었다.
[건조육 열두 상자. 밀봉 상태 정상. 수령 확인 닉스, 보급반장 공동 서명.]
나는 보고서를 읽으며 웃었다.
"이번에는 숫자가 맞네."
피코가 고개를 내밀었다.
"도윤 님이 직접 안 가셨는데도요?"
"그러니까 좋은 거지. 내가 없어도 굴러가야 제도잖아."
"그럼 도윤 님은 할 일이 없어지는 거예요?"
"그랬으면 좋겠다."
"정말요?"
"응. 그때는 월급 받으면서 책 좀 읽고 싶어."
피코가 웃었다.
"그런 날이 올까요?"
나는 잠시 창문 밖을 바라봤다.
성벽 위에서는 해골 경비병들이 창을 들고 순찰하고 있었다. 검은 종소리가 저녁을 알렸다.
"오게 만들어야지."
그 말은 농담이 아니었다.
한 사람만 모든 걸 알고 움직여야 하는 회사는 언젠가 무너진다. 그래서 확인 절차를 만들고, 적어 놓고, 다른 사람에게도 설명하는 것이다.
피코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저도 내일부터 더 열심히 기록할게요."
"열심히 말고 정확하게. 그리고 퇴근은 제때."
"아, 또 그 말이에요?"
"응. 평생 할 거야."
마왕성으로 돌아온 내 책상 위에 새로운 결재 요청이 올라와 있었다.
[흑산 상단 계약 대체 업체 제안]
추천 업체 이름은 처음 보는 곳이었다.
그런데 계좌 번호 뒤 네 자리가 눈에 익었다.
월영 관리단의 보증 준비금 계좌와 같았다.
동일한 금고의 공용 계좌일 수도 있었다. 확인이 필요했다.
하지만 만약 정말 같은 계좌라면?
거래를 끊으려 했더니 다른 이름으로 다시 들어온 셈이었다.
나는 결재 요청서를 덮었다.
"하아."
피코가 물었다.
"도윤 님, 왜 그러세요?"
"밥은 지켜 놨는데, 이번엔 밥값 받는 이름이 바뀌었어."
"그럼 다시 확인하면 되죠!"
정말 해맑은 녀석.
나는 피코의 말을 듣고 웃었다.
그래. 다시 확인하자.
그게 우리 일이니까.
제29화 댓글 0
댓글·공감·신고는 로그인 후 이용할 수 있습니다. 이전 익명 댓글은 그대로 표시됩니다.
댓글을 불러오는 중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