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을 만나겠다고 말하면 왕이 나와 주는 줄 알았다.
아니었다.
재무관은 나를 방에 앉혀 놓고 무려 두 시간을 기다리게 했다. 그사이 물은 세 번이나 갈아 주면서 정작 내가 요청한 계약서는 한 장도 가져오지 않았다.
우리 회사도 그랬다. 회의할 때 커피만 고급으로 바뀌면 중요한 의사결정이 이루어진 줄 아는 사람들이 있었다.
“용사님, 폐하께서는 바쁘십니다.”
“그러시겠죠.”
“조금만 더 기다려 주십시오.”
“제가 기다리는 동안에도 마왕은 세계를 위협하고 있을 텐데요.”
재무관이 움찔했다.
“그, 그렇습니다.”
“그러니까 계약을 빨리 끝내야겠네요.”
“계약이라는 표현은 좀…….”
“그럼 고용 관계를 정리한다고 할까요?”
“그것도 좀…….”
어렵다.
이 나라에서는 칼 들고 마왕을 잡으러 가는 건 쉬운 일인데, 일하기 전에 조건을 확인하는 건 굉장히 어려운 일인가 보다.
나는 기다리는 동안 양피지에 질문을 추가했다.
[근무 중 지휘권: 국왕? 사제단? 신?]
[마왕 토벌 완료 판정 기준: 사망? 항복? 전쟁 종료?]
[왕국의 귀환 지원 의무: 존재 여부 확인 필요]
마지막 항목을 적을 때 손이 잠깐 멈췄다.
돌아간다.
말은 쉽다.
하지만 누가 길을 열어 주지 않으면 나는 영영 이 세계에 남을지도 모른다.
회사에서 야근하다 실종됐으니 가족들에게는 무슨 설명이 갈까. 경찰은 프린터 앞에서 사라진 직원을 어떻게 수사할까.
뭐, CCTV에 마법진이라도 찍혔다면 담당 경찰관이 먼저 정신과 상담을 받아야 할지도 모른다.
농담 같은 생각을 하다가 문득 웃음이 사라졌다.
엄마한테 마지막으로 전화한 게 언제였더라.
지난주 일요일이었나. 아니다. 일요일에도 출근했고, 엄마가 전화를 걸었을 때 회의 중이라는 문자만 보냈었다.
‘밥은 먹고 다니니?’
그 문자가 아직 읽지 않은 상태로 남아 있었다.
주머니에서 휴대폰을 꺼냈다.
배터리 19퍼센트.
신호 없음.
와이파이 없음.
당연하지. 이세계 왕궁에 통신사 기지국이 있을 리가 없잖아.
그래도 메시지 목록은 볼 수 있었다.
[엄마: 밥은 먹고 다니니?]
나는 화면을 한참 바라봤다.
그러다 전원을 껐다.
19퍼센트는 아껴야 한다. 혹시라도 돌아갈 실마리를 찾았을 때 이 물건이 필요할지 모르니까.
“용사님.”
재무관이 문틈으로 고개를 내밀었다.
“드디어 폐하께서 부르십니다.”
좋아.
이제 협상 시작이다.
***
알현실에 들어서자 어제 본 국왕이 왕좌에 앉아 있었다.
그런데 분위기가 어제와 달랐다.
어제는 꽃가루라도 뿌릴 기세로 환영하던 사람들이 오늘은 무슨 세금 조사라도 나온 것처럼 굳은 얼굴이었다.
나는 괜히 반가웠다.
이 표정, 익숙하다.
분기 결산 자료를 들고 임원회의에 들어갈 때마다 보던 표정이다.
“이세계의 용사 한도윤.”
국왕이 내 이름을 불렀다.
“예, 폐하.”
“그대가 신성한 사명을 거부하려 한다는 말을 들었다.”
“거부가 아니라 조건 협의입니다.”
“말장난은 그만두라!”
벌써 목소리가 커진다.
우리 부장님도 질문을 두 번 이상 받으면 목소리부터 커졌는데, 권력을 가진 사람들의 공통적인 기능인가 보다.
“그대에게는 성검이 주어졌다. 그것으로 충분하지 않은가?”
“성검이 식비를 지불해 주지는 않더라고요.”
“왕국은 그대에게 영광을 약속했다!”
“폐하, 그 영광은 마트에서 쓸 수 있습니까?”
기사 하나가 헛기침하다가 목이 막혔다.
국왕의 눈썹이 들썩였다.
“그대는 세상의 운명보다 자신의 이익이 중요한가?”
“제 목숨이 걸린 일이니까 중요한 건 맞습니다.”
나는 양피지를 펼쳤다.
“사실 조건이 어려운 것도 아닙니다. 왕국 병사에게 제공하는 치료 지원, 용병에게 지급하는 출정 수당, 그리고 귀환을 위한 협조. 이 세 가지만 문서로 보장해 주시면—”
“문서?”
국왕이 코웃음 쳤다.
“짐의 말이 문서보다 못하다는 것인가?”
아.
이 질문 싫다.
우리 회사 회장님도 비슷한 말을 하신 적이 있다.
‘내가 하겠다고 했으면 하는 거지, 왜 결재를 올려?’
그래서 결재 없이 진행했다가 감사실에 불려간 사람은 회장님이 아니라 실무자였다.
“폐하의 말씀을 의심해서가 아닙니다.”
나는 최대한 정중하게 웃었다.
“폐하께서 다음 왕에게도 약속을 지키게 하시려면 기록이 필요하다는 뜻입니다.”
“다음 왕?”
“마왕 토벌에 얼마나 걸릴지 모르니까요. 백 년이 걸릴 수도 있지 않습니까?”
국왕의 수염이 떨렸다.
재무관이 내게 눈짓했다. 제발 입 좀 다물라는 뜻인 모양이었다.
미안합니다. 이건 제 직업병입니다.
기한이 없는 업무를 맡기려는 사람에게 기한부터 묻지 않으면 잠이 안 온다.
그때 왕좌 옆에 서 있던 대사제가 앞으로 나왔다.
흰 수염이 가슴까지 내려온 노인이었다. 어제 소환식에서 가장 큰 소리로 울던 사람이다.
“용사님.”
“네.”
“신께서는 계약서 따위를 요구하지 않으십니다.”
“다행이네요.”
“……무슨 뜻입니까?”
“신께서 계약을 요구하지 않으신다면 저도 아직 동의한 건 없다는 뜻이니까요.”
대사제의 얼굴이 붉어졌다.
이상하다.
왜 다들 상대방에게 의무를 부과하는 건 좋아하면서 동의를 확인하는 건 싫어할까.
“성검이 그대를 인정했습니다!”
“네. 그건 인정합니다.”
나는 옆구리에 찬 검을 손가락으로 툭 쳤다.
은은한 빛이 번졌다.
“이 녀석은 저를 좋아하는 것 같아요.”
“그렇다면—”
“그렇다고 제가 이걸 잡았다는 이유만으로 다른 사람의 명령을 전부 따라야 하는 건 아니잖습니까.”
대사제가 입을 다물었다.
나는 검을 조금 들어 보였다.
“혹시 성검에게도 물어보실래요?”
검에서 맑은 음이 울렸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노랫소리가 나오지 않았다.
대신 칼날에 작은 글씨가 떠올랐다.
[소유자 확인 완료. 지시 권한: 미승인.]
어?
나는 눈을 깜빡였다.
지시 권한?
이거 어디서 많이 보던 말인데.
회사 전산 시스템에서 사용자 권한을 설정할 때 쓰는 말 아닌가.
“왜 그러느냐, 용사여?”
“아, 아닙니다.”
칼날의 글씨가 사라졌다.
아무래도 나한테만 보이는 모양이었다.
이 세계에 온 지 하루도 안 지났는데 자꾸 내 직업에 맞는 물건이 나타난다.
설마 신이라는 양반도 재무팀 출신인가?
***
그 뒤로 한 시간 동안 협상은 제자리걸음이었다.
내가 위험 수당을 묻자 사제는 신의 은총을 말했다.
식비를 묻자 대신은 국민의 기도를 말했다.
상해 보상을 묻자 국왕은 용기의 가치를 말했다.
정말이지 이 사람들은 화폐 말고 다른 결제 수단을 너무 많이 가지고 있었다.
“좋습니다.”
나는 결국 종이를 접었다.
“그럼 반대로 하나만 확인하겠습니다.”
국왕이 피곤한 얼굴로 턱을 괴었다.
“또 무엇이냐.”
“왕국군에는 급여 체불이 있습니까?”
재무관이 벌떡 고개를 들었다.
“없습니다!”
“용병에게는요?”
“계약대로 지급합니다.”
“그럼 저는 용병 계약을 하겠습니다. 용사라는 호칭은 그냥 명예직으로 두시고요.”
“안 된다!”
국왕이 왕좌의 팔걸이를 내리쳤다.
쾅!
알현실 전체가 울렸다.
“용사는 거래하는 자가 아니다! 신의 뜻에 복종하는 자다!”
그제야 알았다.
아, 이 사람들은 내가 마왕을 잡을 수 있는지가 궁금한 게 아니구나.
자기들이 시키는 대로 움직일지가 궁금한 거였다.
말을 잘 듣는 사람에게는 용사라는 이름을 붙이고, 말을 안 듣는 사람에게는 배신자라는 이름을 붙이는 식이다.
좋아.
그렇다면 나도 태도를 정해야지.
“폐하.”
나는 양피지를 탁 접었다.
“저는 마왕이 어떤 놈인지 아직 보지도 못했습니다.”
“악의 화신이다!”
“그럴 수 있죠. 그렇다면 왜 악한지, 어떻게 싸워야 하는지부터 설명해 주셔야 합니다.”
나는 잠깐 숨을 골랐다.
“지금까지 들은 건 ‘그냥 믿고 가라’뿐입니다. 회사에서도 그런 프로젝트는 실패합니다.”
“회사?”
“제가 원래 일하던 곳입니다.”
“짐의 왕국을 그 천한 곳과 비교하느냐!”
비교해 보니 아직은 우리 회사 쪽이 낫다.
적어도 거긴 의료보험은 있었으니까.
물론 이 말을 하면 목이 달아날 것 같아서 참았다.
국왕은 잠시 나를 노려보더니 옆의 대사제에게 손짓했다.
“신성 서약서를 가져오라.”
서약서?
오호. 드디어 문서가 나오나.
나는 내심 기뻤다.
대사제가 은빛 판 하나를 가져왔다. 판 위에는 빛나는 글자가 떠 있었다.
[성검의 선택을 받은 자는 대지와 하늘 앞에서 마왕의 소멸을 맹세한다. 이 맹세를 어길 경우 신성의 심판을 받는다.]
밑에는 손바닥 모양의 빈칸이 있었다.
“이곳에 손을 얹으십시오.”
대사제가 말했다.
“그러면 모든 오해가 풀릴 것입니다.”
나는 글자를 처음부터 끝까지 읽었다.
한 번 더 읽었다.
그리고 물었다.
“서약을 하면 왕국도 저한테 뭔가 약속합니까?”
“신성한 사명을 수행할 기회를 얻게 됩니다.”
“그거 말고요.”
“…….”
“계약 내용은 전부 제 의무인데, 왕국의 의무는 어디 있죠?”
아무도 대답하지 않았다.
나는 판을 내려놓았다.
“못 찍습니다.”
사제가 눈을 부릅떴다.
“그대는 신성한 서약을 거부하는가!”
“내용을 고쳐 주시면 검토하겠습니다.”
“신이 내린 서약을 감히 고치겠다고?”
아이고.
이것도 수정 권한이 없는 문서네.
그럼 결재를 올리면 되지.
“작성자한테 수정 요청을 전달해 주세요.”
“작성자는 신이시다!”
“아, 그럼 신께 요청하면 되겠네요.”
국왕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만!”
그 소리에 기사들이 일제히 창을 들었다.
나는 입을 다물었다.
갑자기 알현실의 공기가 싸늘해졌다.
아까까지는 말싸움이었다.
그런데 지금은 아니다.
창끝들이 모두 나를 향해 있었다.
한 발만 잘못 움직여도 일이 커질 것 같았다.
솔직히 무서웠다.
나는 재무팀 직원이지 전투 부대원이 아니다.
성검을 들고 있어도 싸우는 방법은 모른다.
그 사실을 기사들이 눈치채지 않기만 바랐다.
“용사 한도윤.”
국왕의 목소리가 낮아졌다.
“그대에게 마지막 기회를 주겠다. 내일 해가 뜨기 전까지 서약하라. 그렇지 않으면 왕궁의 보호를 거둘 것이다.”
“보호를 거두신다고요?”
“그렇다.”
“그럼 저는 어떻게 됩니까?”
“왕국에서 내쫓길 것이다.”
아.
해고 통보네.
입사도 안 했는데.
“알겠습니다.”
나는 고개를 숙였다.
“생각해 보겠습니다.”
그제야 기사들이 창끝을 내렸다.
그런데 대사제가 한마디를 더했다.
“참고로 성검은 왕국의 신성한 유산이다. 그대가 서약을 거부하면 당연히 반납해야 한다.”
나는 허리에 찬 성검을 내려다봤다.
아까 칼날에 떠올랐던 글자가 마음에 걸렸다.
[지시 권한: 미승인.]
왕국의 유산인데 왕국의 지시를 듣지 않는다고?
어쩐지 재미있는 물건이네.
“네. 돌려드릴 수 있으면 돌려드리겠습니다.”
대사제가 만족스럽게 웃었다.
나도 웃었다.
물론 그 말을 한 이유는 따로 있었다.
이 검이 내 손에서 떨어지기는 하는지, 아직 확인해 본 적이 없었으니까.
***
밤이 깊었다.
특별 객실에서 나는 성검을 침대에 올려놓았다.
그리고 한 걸음 뒤로 물러났다.
“자, 이제 여기 있어.”
잠깐 조용했다.
철컥.
검이 저절로 침대에서 미끄러져 내려왔다.
그리고 내 발치까지 왔다.
“……어?”
다시 올려놓았다.
이번에는 문밖으로 나가 봤다.
복도까지 열 걸음.
철컥!
등 뒤에서 검이 날아와 내 허리춤에 딱 붙었다.
“아, 깜짝이야!”
이거 완전 자동 장착 기능이잖아.
좋은 기능인가? 아닌가?
반납하려는 입장에서는 최악이다.
나는 이불로 검을 감싸고 의자에 묶었다.
그러고 문 앞에 서 봤다.
이불이 펄럭였다.
의자가 쓰러졌다.
검이 다시 내 허리로 돌아왔다.
와.
고급 보안장치네.
분실할 걱정은 없겠다.
문제는 내가 버릴 수 없다는 것이지만.
그 순간 방문 밖에서 작은 목소리가 들렸다.
“안에 계십니까?”
어제 식사를 가져다준 시녀였다.
“네.”
문을 열자 시녀가 조심스럽게 들어왔다.
“이걸 드리려고 왔습니다.”
그녀는 손바닥만 한 빵 두 개를 내밀었다.
“식사는 아까 먹었는데요?”
“내일 아침 식사가 제공되지 않을 수도 있어서요.”
아.
이미 궁정 안에는 소문이 다 났구나.
“감사합니다.”
나는 빵을 받아 들었다.
시녀는 돌아서려다가 잠시 머뭇거렸다.
“용사님.”
“네?”
“정말 돈 때문에 마왕과 싸우기 싫으신 건가요?”
나는 빵을 내려다봤다.
이 질문을 오늘 몇 번이나 들었더라.
“돈만의 문제는 아닙니다.”
“그럼요?”
“죽을지도 모르는 사람한테 무엇을 해야 하는지 설명해 주고, 다치면 치료해 주고, 약속한 건 지켜 달라는 겁니다.”
시녀가 잠시 말이 없었다.
“그런 요구가 이상한가요?”
“……아니요.”
그녀가 작게 대답했다.
“제 오라버니도 국경에서 전사했거든요.”
나는 입을 다물었다.
“연금이 나온다고 했는데, 아직 못 받았어요. 서류가 없어졌다고 해서요.”
아까 알현실에서 재무관이 했던 말이 떠올랐다.
전사자 유족에게 위로금과 연금을 지급한다.
제도는 있다고 했다.
그런데 실제로 지급되는지는 다른 문제였다.
나는 시녀에게 물었다.
“서류 번호를 기억하십니까?”
“예?”
“신청서 접수 번호요. 없으면 오라버니 성함이라도요.”
그녀는 당황한 얼굴로 이름을 말했다.
나는 양피지 한구석에 적었다.
당장 뭘 할 수 있을지는 모르겠다.
하지만 적어도 잊지는 말아야지.
“기회가 되면 확인해 보겠습니다.”
시녀가 놀란 표정으로 나를 바라봤다.
“정말요?”
“장담은 못 합니다. 다만 확인은 해 보겠습니다.”
그녀는 허리를 깊이 숙이고 나갔다.
나는 빵을 한 입 베어 물었다.
아까보다 조금 짰다.
내가 눈물을 흘린 건 아니다.
배가 고파서 급하게 씹었을 뿐이다.
아마도.
그때 복도 끝에서 갑옷 부딪히는 소리가 들렸다.
문틈으로 보니 기사들이 내 방 앞에 자리를 잡고 있었다.
서약에 서명할지 말지 생각할 시간을 준다더니 감시까지 붙였다.
문 앞에 선 기사의 손에는 봉인된 명령서가 있었다.
바람에 종이 끝이 들렸다.
잠깐 보인 글씨가 눈에 들어왔다.
[일출 즉시 용사 신병 확보. 성검 회수.]
잠깐만.
내일 내쫓겠다는 게 아니라 붙잡겠다는 뜻인가?
나는 빵을 씹던 입을 멈췄다.
아이고.
협상이 결렬됐다고 사람까지 압류하려고 하네.
이 왕국, 생각보다 훨씬 무서운 회사였다.
제2화 댓글 0
댓글·공감·신고는 로그인 후 이용할 수 있습니다. 이전 익명 댓글은 그대로 표시됩니다.
댓글을 불러오는 중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