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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품으로마왕성에 취업했더니 내가 제일 무섭단다 · 1화
PAYLUA ORIGINAL · 제1화

1화. 야근하다 용사로 소환됐습니다

마왕성에 취업했더니 내가 제일 무섭단다 · 14,015자

오프라인 책장
“한 대리, 오늘도 야근 좀 해야겠다.” 아, 또 시작이다. 나는 모니터 오른쪽 아래에 표시된 시간을 확인했다. 오후 6시 42분. 정시 퇴근 시간으로부터 정확히 42분이 지났다. 물론 우리 회사에서 정시 퇴근이라는 단어는 전설 속의 동물 같은 존재였다. 누구나 들어본 적은 있지만 실제로 목격한 사람은 극히 드물다는 점에서 유니콘과 비슷했다. “무슨 일인데요?” “내일 아침 임원회의 있잖아. 보고서 좀 손봐야겠어.” “어제 최종본 올렸는데요?” “회장님이 보실 수도 있대.” 아하. 그렇다면 어쩔 수 없지. 회장님이 보실 수도 있다는 이유만으로 대한민국의 수많은 직장인이 집에 가지 못하는 법이다. 회장님이 실제로 보시는지는 중요하지 않다. 그분이 보실 가능성이 있다는 사실 자체가 하나의 자연재해였다. “어느 부분을 수정하면 됩니까?” “전체적으로 좀.” “전체적으로요?” “응. 뭔가 숫자들이 마음에 안 들어.” 숫자가 마음에 안 든단다. 나는 모니터에 떠 있는 손익계산서를 바라봤다. 매출액, 매출원가, 판매관리비, 영업이익. 죄다 지난 분기에 실제로 발생한 숫자들이다. 내가 마음에 든다고 매출액을 늘릴 수도 없고, 싫다고 인건비를 지워버릴 수도 없는 노릇인데. “부장님, 구체적으로 어떤 수치가 문제인지 말씀해 주셔야 수정할 수 있습니다.” “한 대리.” “네.” “일을 너무 어렵게 생각하지 마.” 아니, 어렵게 만드는 건 부장님이잖아요. 차마 입 밖으로 꺼내지는 못했다. 내 나이 서른둘. 입사 7년 차. 아직 회사를 그만둘 만큼의 돈은 모으지 못했고, 그렇다고 부장님과 멱살을 잡을 만큼 인생을 포기한 것도 아니었다. 나는 대신 아주 건설적인 질문을 던졌다. “그럼 수정 방향을 메일로 보내주시겠습니까?” “그걸 꼭 메일로 남겨야 하나?” “네.” “왜?” “나중에 확인하려고요.” 부장님이 못마땅한 표정을 지었다. 저 표정도 벌써 7년째 보고 있다. 일을 시키는 건 좋은데 기록을 남기는 건 싫다는 표정. 대한민국 직장인이라면 누구나 한 번쯤 본 적이 있을 것이다. “하여튼 요즘 젊은 직원들은 융통성이 없어.” 그러고는 나가셨다. 퇴근하셨다. 본인이 일을 시켜놓고. 이야. 역시 부장이라는 직책에는 공간이동 마법이라도 붙어 있는 모양이다. 일을 남에게 넘기면 본인 몸이 자동으로 집으로 이동하는 그런 마법. 나도 승진하면 쓸 수 있으려나. *** 밤 9시 13분. 회사에는 나를 포함해 세 사람이 남아 있었다. 재무팀 막내인 김주임, 총무팀 박과장, 그리고 나. 박과장은 아까부터 엑셀 파일을 열어놓고 고개를 까딱거리고 있었다. 저 정도면 잠을 자는 게 아니라 수면과 업무를 동시에 수행하는 신기술의 영역이었다. “선배님.” 옆자리 김주임이 슬그머니 의자를 끌고 왔다. “왜?” “저 진짜 하나만 물어봐도 돼요?” “하나만이면.” “이번 달 외주 용역비요. 뭔가 이상한데요.” 오호. 나는 의자를 돌렸다. “뭐가?” “분명히 같은 업체인데 세금계산서가 두 장 올라왔어요.” “금액은?” “둘 다 4,800만 원이요.” “날짜는?” “똑같아요.” “적요는?” “시스템 고도화 컨설팅이요.” 그 말을 듣는 순간 머리가 맑아졌다. 이상하게도 나는 이런 일에만 정신이 번쩍 들었다. 누군가는 축구를 보면 흥분하고, 누군가는 아이돌 무대를 보면 심장이 뛴다. 나는 숫자가 안 맞으면 잠이 깼다. 건강한 취미는 아니다. 하지만 재무팀에서 7년을 살아남으려면 이런 취미라도 있어야 했다. “계약서 가져와 봐.” 김주임이 파일을 열었다. 나는 세금계산서 두 장과 계약서를 나란히 띄웠다. 계약금액은 4,800만 원. 그런데 청구금액은 9,600만 원. “야.” “네?” “이거 승인 나갔어?” “아직요. 결재 올리기 전에 확인하려고요.” 잘했다. 아주 잘했다. 나는 김주임의 어깨를 두드렸다. “오늘 네가 회사 돈 4,800만 원 살렸다.” “진짜요?” “응.” “와!” 김주임이 환하게 웃었다. 사회생활 1년 차의 순수한 미소였다. 저 웃음이 언제까지 유지될지 모르겠지만, 적어도 오늘만큼은 지켜주고 싶었다. 그런데 이상한 점이 하나 더 있었다. 두 번째 청구서의 승인 요청자는 우리 회사 구매팀장이었다. 계약 담당자는 외주업체 대표. 거래 내용은 동일한데 문서 번호만 달랐다. 실수일 수도 있다. 물론이다. 사람이 하는 일인데 실수야 얼마든지 할 수 있지. 하지만 그 실수가 하필이면 4,800만 원이라는 사실은 조금 마음에 걸렸다. “선배님, 그냥 중복 청구겠죠?” “글쎄.” 나는 결재 이력을 다시 열었다. 같은 업체. 같은 금액. 같은 날짜. 그리고 결재 요청이 올라온 시각은 오후 11시 58분. 지난달에도 비슷한 기록이 있었다. 그 전달에도. 어라? 이거 냄새가 나는데. “김주임.” “네.” “이 건은 결재 올리지 마.” “왜요?” “내일 담당자한테 확인부터 하자.” “문제 있는 거예요?” “아직 몰라.” 나는 파일을 별도 폴더에 저장했다. 확실하지 않은 걸 확실하다고 말하는 건 좋은 습관이 아니다. 하지만 확실하지 않다는 이유로 의심스러운 숫자를 그냥 넘기는 건 더 나쁜 습관이었다. “그런데 선배님.” “응?” “이거 발견하면 포상금 같은 거 줘요?” 나는 김주임을 바라봤다. 그리고 빙긋 웃었다. “우리 회사가?” “네.” “하하하.” “왜 웃으세요?” 아이고, 우리 막내. 아직 세상을 덜 살았구나. “일단 퇴근해. 내일 알려줄게.” *** 밤 11시 47분. 결국 사무실에 남은 사람은 나 혼자였다. 보고서 수정은 여전히 끝나지 않았다. 부장님이 말씀하신 '전체적으로'라는 지시를 충실히 수행하려면 차라리 회사 전체를 새로 창업하는 편이 빨랐기 때문이다. 나는 마지막으로 수정한 보고서를 훑어봤다. 영업이익 23억. 전년 대비 14퍼센트 감소. 사유는 원자재 가격 상승과 외주 용역비 증가. 음. 역시 마음에 안 들겠군. 숫자를 고친다고 실적이 좋아지는 건 아닌데, 이상하게도 사람들은 보고서의 숫자가 예뻐지면 현실까지 좋아지는 줄 안다. 차라리 마법이 존재하는 세상이었으면 좋겠다. '영업이익이여, 증가하라!' 이렇게 외치면 매출이 쑥쑥 오르고. '불필요한 비용이여, 사라져라!' 한마디면 쓸데없는 접대비도 없어지고. 아. 상상만 해도 아름답다. 나는 책상에 놓인 식은 커피를 마셨다. 쓰다. 인생도 쓰고 커피도 쓰다. 그러고 보니 저녁도 못 먹었다. 오늘 회사에서 먹은 건 편의점 삼각김밥 두 개와 믹스커피 세 잔이 전부였다. 이쯤 되면 사람이 아니라 카페인으로 움직이는 회계 프로그램이 아닐까 싶다. 휴대폰이 울렸다. 부장님이었다. [한 대리, 자료 아직 멀었어?] 아니, 진짜. 집에 가셨으면 쉬세요. 왜 남의 야근까지 원격으로 관리하십니까. [거의 마무리됐습니다.] 답장을 보내자 곧바로 메시지가 하나 더 왔다. [아 그리고 내일 아침 8시까지 출력해서 회의실에 놔줘.] 나는 눈을 감았다. 그렇구나. 오늘은 야근이고 내일은 조기 출근이구나. 회사 근처에서 한숨 자고 출근하라는 뜻일까. 아니면 회사에서 자라는 뜻일까. 어느 쪽이든 집은 장식품이 되겠네. 퇴근 후 휴식 시간까지 계산해 보고 싶었지만 괜히 슬퍼질 것 같아서 관뒀다. 대신 프린터로 최종 보고서를 전송했다. 위이잉. 프린터가 움직였다.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 출력물을 가지러 갔다. 그런데. “어?” 프린터에서 이상한 소리가 났다. 평소처럼 종이를 끌어들이는 소리가 아니었다. 위이이잉. 기계 안쪽에서 푸르스름한 빛이 새어 나왔다. 뭐야? 토너가 터졌나? 나는 전원 버튼을 눌렀다. 반응이 없었다. 다시 눌렀다. 여전히 반응이 없었다. “아니, 너까지 왜 이러는데.” 오늘 하루 나를 괴롭힌 인간들만으로도 충분했다. 프린터까지 파업하면 곤란하다. 나는 전원 코드를 뽑으려고 허리를 숙였다. 그 순간이었다. 파앗! “으악!” 눈앞에서 푸른빛이 폭발했다. 뭐야, 뭐야! 전기 누전인가? 프린터가 터진 건가? 순간적으로 뒤로 물러났지만 이미 늦었다. 바닥에 무언가 나타나고 있었다. 동그란 원. 알아볼 수 없는 문자들. 그리고 원을 따라 회전하는 복잡한 문양. 이거 어디서 많이 봤는데. 판타지 게임? 애니메이션? 그런 데 나오는 마법진이랑 똑같이 생겼다. 설마. 에이, 아니겠지. 나는 잠을 못 자서 헛것이 보이는 거라고 생각했다. 실제로 지난 사흘 동안 제대로 잔 시간이 열 시간도 안 됐다. 이 정도면 헛것이 보이는 게 아니라 용이 나타나서 말을 걸어도 이상하지 않은 상태였다. “한도윤.” 누군가 내 이름을 불렀다. 여자 목소리였다. 맑고 아름다운 목소리. 분명히 처음 듣는 목소리인데 이상하게 머릿속에서 직접 울리는 것처럼 느껴졌다. “선택받은 자여.” 어? “그대에게 세계의 운명을 맡기노라.” 잠깐만. 선택받은 자? 세계의 운명? 나는 프린터를 바라봤다. 프린터는 더 이상 보이지 않았다. 빛이 너무 강해서 아무것도 구분할 수 없었다. “아니, 저기요!” 목소리가 커졌다. “그대는 어둠을 물리치고—” “잠깐만요!” “—세상에 평화를 가져올—” “제 말 좀 들어보세요!” 처음부터 남의 말을 안 듣는군. 어째 우리 부장님이랑 비슷하다. “지금 저 보고 어디 가라는 겁니까?” 대답은 없었다. 대신 발밑의 마법진이 더욱 밝아졌다. 다리가 허공으로 떠올랐다. “아니, 잠깐! 저 아직 퇴근도 못 했어요!” 그게 마지막이었다. 푸른빛이 시야를 가득 채웠다. 그리고. 세상이 뒤집혔다. *** 눈을 떴다.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온 것은 천장이었다. 높았다. 엄청나게 높았다. 우리 회사 로비보다 최소 세 배는 높아 보였다. 게다가 천장에는 거대한 샹들리에가 매달려 있었다. 반짝이는 보석들. 황금으로 장식된 기둥. 흰 대리석 바닥. 중세 유럽 영화에서나 볼 법한 공간이었다. 음. 어디지? 꿈인가? 나는 바닥에 손을 짚었다. 차갑다. 굉장히 차갑다. 꿈치고는 감촉이 지나치게 생생했다. 그때 누군가 외쳤다. “성공이다!” 나는 고개를 들었다. 하얀 로브를 입은 노인 열댓 명이 나를 둘러싸고 있었다. 다들 눈물을 글썽이고 있었다. 몇 명은 바닥에 무릎까지 꿇었다. “드디어!” “천 년 만에!” “용사 소환에 성공했어!” 용사? 나는 주변을 돌아봤다. 다른 사람이 소환됐나? 혹시 나 말고 누가 있나 싶어서 뒤까지 살펴봤다. 없었다. 나밖에 없었다. 어라. 설마. “저기요.” 가장 가까이 있던 노인을 불렀다. 노인이 감격스러운 얼굴로 나를 바라봤다. “말씀하십시오, 용사님!” “저 말씀하시는 거예요?” “물론입니다!” “저를요?” “그렇습니다!” “왜요?” 노인이 입을 벌렸다. 옆에 있던 사제도 입을 벌렸다. 다른 사제들까지 나를 바라봤다. 아니, 내가 뭘 그렇게 잘못 물었는데. “용사님은 신의 선택을 받아 이 세계에 강림하셨습니다.” “아니, 그러니까 왜 하필 저냐고요.” “그것은 신의 뜻입니다.” 아. 만능 답변 나왔다. '높으신 분의 뜻이다.' 전 직장에서도 많이 들었던 말이다. 이상하게 높은 사람이 결정을 내리면 구체적인 이유는 아무도 설명하지 못했다. “그럼 여기가 어디죠?” “아르세니아 왕국입니다.” “대한민국은 아니고요?” “대한민국?” 노인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처음 듣는 나라입니다.” 큰일 났네. 나는 다시 주변을 둘러봤다. 로브를 입은 사제들. 창과 검으로 무장한 기사들. 황금 왕좌. 그리고 왕좌에 앉은, 왕관을 쓴 할아버지. 이거. 진짜잖아. 아무리 봐도 현실이다. 손등을 꼬집어봤다. “아야!” 아프다. 꿈이 아니다. 다시 꼬집었다. “아야!” 두 번 해도 아프다. 굳이 세 번째까지 확인할 필요는 없을 것 같았다. 왕좌에 앉아 있던 할아버지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오오! 이세계의 용사여!” 우렁찬 목소리였다. “그대의 강림을 온 왕국이 기다리고 있었노라!” 아니, 저는 기다리지 않았는데요. “그대는 악의 화신인 마왕을 쓰러뜨리고 이 세계를 구원할 위대한 영웅이 될 것이다!” 짝짝짝짝! 느닷없이 박수가 터졌다. 기사들이 환호했다. 사제들은 감격해서 울었다. 대신들은 서로 부둥켜안았다. 분위기만 보면 내가 이미 마왕을 쓰러뜨리고 돌아온 것 같았다. 그런데 정작 당사자인 나는 아직 아무것도 이해하지 못했다. 잠깐. 마왕을 쓰러뜨리라고? 내가? “저기, 폐하?” “말하라, 용사여!” “혹시 사람 잘못 부르신 거 아닙니까?” 웅성웅성. 알현실이 술렁였다. “그게 무슨 말인가?” “저는 싸움 같은 거 못 하는데요.” “허허! 겸손하기까지 하구나!” 아니, 겸손이 아니라 사실입니다. “검술을 배운 적도 없습니다.” “신께서 그대에게 힘을 내려주셨을 것이다!” “마법도 못 씁니다.” “그 또한 곧 깨우치게 될 터!” “체력도 별로 안 좋고요.” “용사의 육체는 일반 인간과 다르다!” 아. 대화가 안 통한다. 무슨 말을 해도 좋은 쪽으로 해석해 버린다. 우리 회사 인사평가도 저렇게 해줬으면 얼마나 좋았을까. “이번 분기 목표를 달성하지 못했습니다.” “겸손하군! 다음 분기에는 반드시 해낼 인재야!” 세상이 이렇게 긍정적이었다면 나도 회사 다니기가 좀 편했겠지. 그때 국왕이 손을 들어 올렸다. “성검을 가져오라!” 기사 두 명이 거대한 상자를 끌고 왔다. 상자가 열렸다. 안에는 은빛 검 한 자루가 놓여 있었다. 화려한 금색 손잡이. 푸른 보석이 박힌 칼집. 딱 봐도 비싸 보였다. 오. 저건 좀 탐나는데? 나는 무심코 검을 바라봤다. 그러자. 우우웅. 성검이 떨리기 시작했다. “오오!” 사제들이 소리쳤다. “성검이 용사를 알아보았다!” 검이 허공으로 떠올랐다. 그리고 그대로 내 앞으로 날아왔다. “으악!” 반사적으로 손을 뻗었다. 철컥. 검이 내 손에 잡혔다. 그 순간. 파아아앗! 새하얀 빛이 알현실을 가득 채웠다. 어디선가 아름다운 노랫소리까지 흘러나왔다. 할렐루야 비슷한 노래였다. 정확한 가사는 알아들을 수 없었지만 대충 신성하고 위대한 존재를 찬양하는 내용인 것 같았다. 나는 검을 내려다봤다. 뭐야, 이거. LED라도 달렸나? “기적이다!” “진정한 용사께서 강림하셨다!” “왕국이 구원받았다!” 기사가 눈물을 흘렸다. 사제가 바닥에 엎드렸다. 국왕은 두 팔을 벌린 채 하늘을 향해 감사를 드렸다. 나만 멀뚱히 서 있었다. 아니, 검을 잡았다고 왜 이렇게 난리야. 그보다 이 노래는 어디서 나오는 거지? 나는 성검을 살짝 흔들어봤다. 노랫소리가 커졌다. 다시 흔들었다. 더 커졌다. “어우, 시끄러.” 무심코 중얼거리자 노래가 뚝 끊겼다. 주변이 조용해졌다. 사제들이 나를 바라봤다. 나도 사제들을 바라봤다. “……죄송합니다.” 분위기를 망친 것 같았다. *** 그날 나는 왕궁의 특별 객실로 안내받았다. 특별 객실이라더니 정말 특별했다. 침대가 우리 집 안방보다 컸다. 욕조는 거의 작은 수영장 수준이었고, 창문 너머로는 아름다운 왕도가 내려다보였다. 식탁에는 처음 보는 음식들이 한가득 차려져 있었다. 로스트 치킨처럼 생긴 고기. 향긋한 수프. 과일과 빵. 그리고 뭔지 모르겠지만 일단 비싸 보이는 디저트. 솔직히 조금 감동했다. 일단 밥은 주네. 지난 7년 동안 회사에서 야근할 때마다 저녁 식대를 아끼겠다고 편의점에 들르던 나였다. 그런데 이세계에서는 처음 보는 사람들이 고급 식사를 대접하고 있었다. 이건 상당히 좋은 변화다. 나는 고기를 한 점 잘라 입에 넣었다. 맛있다. 정말 맛있다. 육즙이 입안에서 터졌다. 이 정도면 마왕 토벌까지는 몰라도 왕궁 식당 평가단 정도는 해볼 만하겠다. “용사님.” 식사를 준비하던 시녀가 말을 걸었다. “네?” “불편하신 것은 없으십니까?” “아뇨. 아주 좋습니다.” “다행입니다.” “그런데 하나만 물어봐도 될까요?” “무엇이든 말씀하십시오.” 나는 포크를 내려놓았다. “제가 원래 있던 세계로 돌아가려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시녀의 손이 멈췄다. 어? 표정이 이상한데. “그것은…….” “네.” “저는 잘 모르겠습니다.” “아, 담당자가 따로 있나요?” “아마 대사제님께서 아실 것입니다.” 그렇구나. 그럼 내일 물어보면 되겠다. 나는 다시 고기를 먹었다. 그런데 곰곰이 생각해 보니 이상했다. 사람을 다른 세계에서 데려왔으면 돌려보내는 방법 정도는 준비해 놔야 하는 거 아닌가? 아니, 하다못해 배송을 잘못했을 때 반품 절차라도 있어야지. 나는 들고 있던 포크를 내려놓았다. “저기요.” “네, 용사님.” “혹시 제가 마왕을 쓰러뜨린 뒤에는 어떻게 됩니까?” “온 왕국이 용사님을 칭송할 것입니다.” “그다음은요?” “역사에 영원히 이름을 남기실 것입니다.” “그리고요?” “……네?” “그다음에 제가 뭘 하냐고요.” 시녀는 한참 동안 나를 바라봤다. 그리고 조심스럽게 말했다. “아마…… 왕국에서 평화롭게 지내시지 않을까요?” 음. 불안하다. 이 대답, 상당히 불안하다. 나는 회계 담당자다. 숫자만 보는 사람이라고 생각할지 모르지만 사실 회계의 기본은 숫자가 아니라 증빙이다. 돈을 지출했으면 어디에 썼는지 확인하고, 계약을 맺었으면 어떤 의무가 생기는지 확인한다. 그런데 지금 내 상황은 어떤가. 모르는 세계에 끌려왔다. 모르는 왕을 만났다. 모르는 마왕과 싸우라는 명령을 받았다. 그 대가로 무엇을 받을지는 아무도 설명하지 않는다. 와. 이거 완전히 신규 프로젝트에 투입된 외주 개발자 신세잖아. 처음에는 좋은 경험이 될 거라고 한다. 막상 시작하면 업무 범위가 계속 늘어난다. 그러다 일정이 터지면 책임은 전부 실무자가 진다. 나는 이세계까지 와서 그런 꼴을 당하고 싶지는 않았다. “혹시 종이랑 펜을 받을 수 있을까요?” “물론입니다.” 시녀가 곧바로 준비해 줬다. 신기한 양피지였다. 글자를 쓰면 은은한 빛이 흘렀다. 숫자를 나란히 적어 보니 맨 아래에 합계가 자동으로 나타났다. “오!” 이건 좀 대단한데? 나는 숫자 세 개를 써 봤다. 100. 200. 300. 아래에 600이라는 숫자가 나타났다. 세상에. 자동 합산 기능이 달린 종이라니. 우리 회사에서 쓰던 일부 오래된 전산 시스템보다 낫잖아? 나는 흥미가 생겨 한참 동안 종이를 만지작거렸다. 서식을 만들 수 있을까? 열을 나눠서 숫자를 적어 봤다. 잘 된다. 합계뿐 아니라 차액까지 표시됐다. 이야. 이 세계 기술력, 무시할 게 아니네. 마법으로 이런 걸 만들 수 있다면 회계 자동화는 끝장나겠다. 순간 머릿속에서 별별 생각이 다 떠올랐다. 그런데. 잠깐. 내가 지금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 거지? 마왕을 잡으러 가야 하는 사람이 회계 시스템부터 만들 궁리를 하고 있었다. 직업병이란 참 무섭다. 나는 한숨을 내쉬며 종이 위에 제목을 적었다. [용사 소환 관련 계약 조건 확인 사항] 그리고 항목을 하나씩 적기 시작했다. 첫째. 수행 업무. 마왕 토벌. 둘째. 업무 수행 기간. 불명. 셋째. 업무 수행 장소. 마왕성 및 그 주변 지역. 넷째. 지급 보수. 불명. 다섯째. 위험 수당. 불명. 여섯째. 부상 시 치료비. 불명. 일곱째. 사망 시 보상금. 불명. 여덟째. 원래 세계로의 귀환 조건. 불명. 나는 펜을 내려놓았다. 그리고 완성된 목록을 읽어 봤다. ……. 이야. 아주 환상적이다. 모르는 항목이 이렇게 많은데 어떻게 일을 시작하라는 거지? 우리 회사도 근로계약서만큼은 작성했는데. 나는 양피지를 곱게 접었다. 그래. 내일 물어보자. 잘 설명해 주겠지. 국왕씩이나 되는 사람이 설마 사람을 공짜로 부려먹으려고 하겠어? 나는 침대에 누웠다. 푹신했다. 너무 푹신해서 몸이 푹 꺼졌다. 눈을 감자 피로가 한꺼번에 몰려왔다. 생각해 보면 참 이상한 하루였다. 아침에는 지하철을 타고 출근했고, 점심에는 구내식당에서 제육볶음을 먹었다. 저녁에는 보고서를 수정하다가 야근했고. 밤에는 프린터가 폭발하더니 이세계로 떨어졌다. 그리고 지금은 왕궁 침대에 누워 있다. 인생이란 정말 한 치 앞을 알 수 없다. 그런데 한 가지 마음에 걸렸다. 내가 사라졌으니 내일 아침 회의는 어떻게 되는 거지? 부장님은 보고서를 찾다가 난리가 날 텐데. 잠깐 상상해 봤다. 부장님이 텅 빈 내 자리를 보고 소리친다. '한 대리 어디 갔어!' 누군가 대답한다. '이세계로 소환됐답니다!' 그러면 부장님은 뭐라고 하실까. 아마 이렇게 말씀하시겠지. '그건 알겠고, 보고서는?' ……. 무섭다. 마왕보다 그게 더 무섭다. 나는 이불을 머리끝까지 끌어올렸다. 적어도 이 세계에는 우리 부장님이 없다는 사실만큼은 감사하게 생각하기로 했다. *** 다음 날 아침. 나는 왕궁 재무관이라는 사람과 마주 앉았다. 나이는 오십쯤 되어 보였다. 반질반질한 이마에 잘 정돈된 수염. 비싼 옷을 입었는데도 어딘지 피곤해 보이는 얼굴이었다. 아. 동종 업계 종사자다. 한눈에 알아봤다. 이 사람도 숫자 때문에 고생하는 인간이구나. “용사님께서 전쟁 수행과 관련해 몇 가지 문의하셨다고 들었습니다.” “네. 확인할 사항이 좀 있어서요.” 나는 어젯밤 작성한 양피지를 펼쳤다. 재무관이 그것을 보더니 눈을 동그랗게 떴다. “오호. 정리 솜씨가 훌륭하시군요.” “전직이 이쪽이었습니다.” “그렇습니까? 아주 흥미롭군요.” 좋아. 분위기가 나쁘지 않다. 말이 통할 것 같다. 나는 첫 번째 질문부터 꺼냈다. “마왕을 쓰러뜨리는 데 얼마나 걸립니까?” 재무관이 수염을 쓰다듬었다. “그것은 아무도 알 수 없습니다.” 음. 좋아. 예상한 답변이다. 프로젝트 기간은 미정. “그럼 보수는 어떤 방식으로 지급됩니까?” “보수라니요?” “일한 대가요.” 재무관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용사님께서는 신의 선택을 받으셨습니다.” “네. 그건 어제 들었습니다.” “세계를 구원하는 숭고한 사명을 수행하시게 됩니다.” “네. 그것도요.” “그것만으로도 역사에 이름을 남길 영광이지요.” “그러니까 돈은요?” 재무관이 입을 다물었다. 어? 왜 대답을 안 하지? 나는 다시 물었다. “급여는 월 단위로 지급합니까? 아니면 토벌 성공 후 일시금입니까?” “아, 포상금 말씀이셨군요.” “포상금이요?” “물론 마왕을 쓰러뜨리신다면 국왕 폐하께서 큰 상을 내리실 것입니다.” “금액은 정해져 있습니까?” “그것은 폐하의 재량입니다.” “최소 보장액은요?” “그런 것은 따로 없습니다.” 아. 그렇구나. 아주 익숙한 냄새가 난다. 회사에서 자주 듣던 말이다. '프로젝트 성공하면 성과급 두둑하게 챙겨줄게.' 그리고 막상 성공하면? '회사가 어려우니 다음 기회에.' 그런데 지금은 상황이 조금 다르다. 프로젝트 실패 시 회사가 망하는 정도가 아니다. 내가 죽는다. “그럼 출정 수당은요?” “없습니다.” “위험 수당은?” “없습니다.” “숙식은요?” “왕궁에 머무시는 동안에는 제공됩니다.” “왕궁을 떠나면요?” “마왕 토벌 여정에서는 현지 상황에 맞게 조달하셔야 합니다.” “장비는요?” “성검이 있지 않습니까?” 나는 옆에 세워둔 성검을 바라봤다. 그래. 검은 있다. 그런데 검이 있으면 뭐 하나. 사람이 밥을 먹어야 힘을 쓰지. 설마 성검을 잘라서 구워 먹으라는 건 아닐 테고. “마지막으로 하나만 더 묻겠습니다.” 재무관의 얼굴에 안도감이 스쳤다. 드디어 질문이 끝난다고 생각한 모양이다. “제가 죽으면 어떻게 됩니까?” “……예?” “마왕 토벌 중 사망하면요.” 그의 표정이 굳었다. “그런 불길한 말씀을 하시다니요.” “그럴 가능성이 있으니까 여쭙는 겁니다.” “용사님께서는 신의 가호를 받으십니다.” “그래도 죽을 수는 있잖아요.” “그, 그렇기는 합니다만…….” “사망 보상금은 있습니까?” “용사님은 이 세계에 연고가 없으시지 않습니까?” “지구에 가족이 있습니다.” “지구가 어디인지…….” “제가 살던 세계요.” “아.” 재무관이 곤란한 표정을 지었다. “다른 세계로 재산을 송금하는 제도는 아직 마련되지 않았습니다.” 그렇겠지. 하긴, 우리 회사도 해외 송금 하나 하려면 서류가 몇 장인데 차원 간 송금이 가능할 리가 있나.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습니다.” “이해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재무관이 활짝 웃었다. 아니. 아직 이해한다고 안 했는데요. 나는 양피지에 마지막 항목을 적었다. [사망 시 유족 보상: 없음.] 그리고 지금까지 확인한 내용을 천천히 훑어봤다. 기간 미정. 보수 미정. 수당 없음. 보험 없음. 귀환 조건 미정. 사망 보상 없음. 그런데 요구사항은 마왕 토벌. 심지어 실패하면 죽는다. ……. 이거. 아무리 생각해도 이상하지 않나? 나는 양피지를 들어 보였다. “재무관님.” “예, 용사님.” “혹시 이 왕국에서는 병사들도 월급을 안 받습니까?” “무슨 말씀을! 당연히 봉급을 지급합니다.” “용병은요?” “계약에 따라 출정 수당과 전투 수당을 지급하지요.” “마왕군과 싸우다가 다친 병사는요?” “왕립 치료소에서 치료받습니다.” “전사하면요?” “유족에게 위로금과 연금이 지급됩니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아주 좋다. 정상적인 제도가 있네. 그럼 이제 마지막 질문이다. “그런데 왜 저한테는 아무것도 안 줍니까?” “…….” 재무관이 얼어붙었다. 잠시 후, 그가 아주 진지한 얼굴로 말했다. “용사님은 일반 병사가 아니시기 때문입니다.” “그렇죠.” “신께서 선택하신 특별한 존재이십니다.” “네.” “그러므로 돈이나 보상에 얽매이지 않고 세상을 위해 헌신하셔야 합니다.” 아. 그렇구나. 너무 특별해서 돈을 못 받는 거구나. 나는 조용히 웃었다. 정말 대단한 논리였다. 병사보다 위험한 일을 하는데 병사보다 보수가 적다. 정규직보다 중요한 업무를 맡았는데 정규직보다 복지가 없다. 그리고 그 모든 걸 '특별한 사명'이라는 말로 설명한다. 이야. 이거 우리 회사에서도 배워 가야겠는데? 아니. 배우면 안 되지. 지금도 충분히 사람을 괴롭히고 있는데. “알겠습니다.” 나는 양피지를 접었다. 재무관의 얼굴이 밝아졌다. “역시 용사님께서는 대의를 이해하시는군요!” “네. 아주 잘 이해했습니다.” “그렇다면 곧장 출정 준비를—” “그런데요.” “예?” 나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최대한 정중하게 말했다. “이 계약은 못 하겠습니다.” 정적. 재무관의 미소가 사라졌다. “……예?” “계약 조건이 너무 안 좋아서요.” “그, 그게 무슨…….” “제가 왜 목숨을 걸고 일해야 하는지는 충분히 들었습니다.” 나는 양피지를 그의 앞으로 밀었다. “그런데 왕국이 저한테 뭘 보장해 주는지는 하나도 못 들었거든요.” 재무관이 입을 벌렸다.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나는 성검을 집어 들었다. 그러자 검에서 은은한 빛이 흘렀다. 또 그 노래가 나올 것 같았다. “조용히 좀 해.” 빛이 사그라들었다. 좋아. 말은 잘 듣네. 나는 다시 재무관을 바라봤다. “국왕 폐하를 만나야겠습니다.” “왜, 왜 그러십니까?” “계약 조건을 직접 협상하려고요.” “계약 협상이라니요! 용사의 사명은 신성한—” “아, 그 얘기는 이제 충분히 들었습니다.” 나는 양피지의 맨 마지막 줄을 가리켰다. “신성한 건 알겠는데요.” 그리고 웃으며 덧붙였다. “신성하다고 무급으로 일해야 한다는 법은 없잖아요?” 재무관이 의자에서 벌떡 일어났다. 그 얼굴을 보니 일이 순조롭게 풀리지는 않을 것 같았다. 뭐, 어쩌겠는가. 상대가 국왕이든 마왕이든, 계약서도 안 쓰고 목숨부터 바치라는 건 너무하지 않은가. 그때는 몰랐다. 내가 방금 한 말 한마디 때문에 왕궁 전체가 뒤집어지고, 결국 인류의 적이라는 마왕성에 취직하게 될 줄은. 물론 그보다 더 몰랐던 사실도 있었다. 마왕성이 왕국보다 복지가 좋다는 것. 그리고 세상에서 가장 무서운 존재가 마왕이 아니라는 것. 그건 조금 나중에 알게 될 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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