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왕성에는 결재할 권한이 없는 사람이 결재란에 앉아 있는 경우가 많았다. 특히 제르칸이 마음에 드는 의자를 전부 왕좌라고 부를 때 그랬다.
오늘은 그런 문제가 아니었다. 공동운영국 긴급 배포 허가서의 최종 승인란이 비어 있었다. 대신 작은 옆 칸에 '14-B 조건부 가동'이라는 문구와 두 종류의 도장이 겹쳐 찍혀 있었다.
"누가 이걸 승인한 겁니까?"
에드렌은 서류를 한참 보더니 말했다.
"긴급 가동 자체는 공동 운영관이 승인했습니다. 그러나 신원 확인 자동 전환은 허가 범위에 포함되지 않았습니다."
"그럼 사용 중인 기능이 허가 범위를 벗어난 셈이네요."
"그렇게 볼 근거는 충분하지만, 배포 당시 예외 승인 자료가 있는지 마지막으로 확인해야 합니다."
나는 한숨을 쉬었다. 누군가 '이제 범인을 잡았다'라고 외치기를 기대하는 사람이라면 우리 조사 방식을 몹시 답답해할 것이다. 나도 가끔 답답했다. 하지만 틀린 사람에게 책임을 씌우는 건 돈을 틀린 계좌로 보내는 것보다 더 나쁜 일일 수 있었다.
예비 검토회가 시작되기 전, 몰트는 나를 복도로 불렀다. 평소보다 목소리가 낮았다.
"도윤 씨, 이번에는 실무 책임자들의 이름이 기록에 오를 겁니다. 그분들의 후손이나 가족이 영향을 받을 수도 있습니다."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증거가 말하는 범위에서만 공개해야죠."
"내가 처음 이관 장부를 맡았을 때의 전임자도 그런 말을 했습니다. 그러나 후대에는 이름만 남아 모든 책임을 떠안는 사람이 생겼지요."
나는 몰트의 말을 오래 생각했다. 천 년 가까운 시간을 기억하는 사람에게는 오늘의 작은 단어도 내일 큰 오해가 될 수 있었다.
"그래서 이번엔 이름 옆에 역할도 적겠습니다. 입력, 검수, 승인, 집행. 누가 무엇을 했는지요."
"그것만으로도 조금은 다르겠지요."
몰트는 가슴 안쪽에서 낡은 작은 메모를 꺼냈다. 지하 서고에서 처음 발견한 회신권 보전 약속의 사본이었다. 전임자 이름은 지워졌지만 문장은 또렷했다.
[답할 수 없는 사람의 침묵을 다른 사람의 이익으로 바꾸지 말 것.]
"그분이 이렇게 생각했다는 걸 앞으로도 사람들이 알아줬으면 합니다."
"원본이 있으니 기록으로 남길 수 있습니다."
나는 몰트에게 말했다. "다만 그분이 어떤 사람이었는지는 이 문장만으로 전부 설명할 수 없겠죠."
몰트는 고개를 끄덕였다. 기억과 기록을 서로 견제할 수 있을 때, 우리는 과거를 조금 덜 함부로 다룰 수 있었다.
회의장에 들어가자 사람들이 분주했다. 헤르만은 오래된 비용 분류 작업표를 들고 서 있었고, 베른은 시험 수첩의 접수 번호를 확인했다. 그 둘은 서로 다른 부서에서 일했지만 같은 시기에 문제를 마주했다. 나는 둘을 당장 같은 책임자로 묶지 않았다.
헤르만은 베른을 보고 먼저 인사했다.
"그때 당신 보고서를 제대로 봤다면 다른 선택을 했을 거요."
베른은 잠시 생각하다가 대답했다.
"당신이 그걸 볼 수 있었는지는 모르겠소. 내 보고서는 교육 질문으로 분류됐으니까."
둘은 조용히 자리에 앉았다. 나는 그 장면이 드라마처럼 거대한 화해는 아니라고 생각했다. 그냥 서로의 말이 처음으로 같은 방 안에 있었다.
예비 검토회에서 가장 먼저 다룬 건 배포 이전의 시험 항목이었다. 레타는 교육용 나무 인형 세 개를 가져왔다. 의장은 인형을 보고 놀랐다.
"이게 뭡니까?"
"가상 언어 표본입니다. 실제 사람의 정보를 사용하지 않으려고 만든 복제 시험용 물건입니다."
레타가 초록 표시등을 켜자 세 인형 모두 '확인 완료'가 떴다. 방 안에서 작은 탄식이 나왔다. 나는 그때까지 숫자와 코드로만 설명하던 실수가 한 번에 보이는 순간을 목격했다.
"나무 인형도 신원 확인이 됩니까?" 누군가 물었다.
"화면상으로는 그렇습니다. 실제로는 말이 안 되죠."
레타는 다음 시험에서 신원 확인 대기 상태를 따로 남기는 교정 규칙을 적용했다. 노란 불이 켜졌다. 참석자들은 두 화면을 비교하며 메모를 했다.
나는 사람들을 탓하기보다 이 화면을 만든 방식이 위험했다고 설명했다. 운영자가 빠르게 판단해야 하는 상황에서 잘못된 표시가 반복되면, 결국 아무도 의심하지 않는 사실처럼 굳어질 수 있었다.
의장은 왜 당시 교정되지 않았는지 물었다. 에드렌은 증거를 순서대로 소개했다. 베른의 보고, 교육 질문으로 잘못 분류된 접수 기록, 긴급 가동 허가의 안전 조건, 그와 다른 실제 배포 설정. 그러나 어느 개인이 의도적으로 조건을 없앴는지는 추가 조사가 필요하다고 밝혔다.
"그럼 우리는 오늘 아무도 책임지지 않는다고 결론 내리는 겁니까?"
나는 고개를 저었다.
"아닙니다. 우선 기관의 운영 책임과 피해 복구 의무는 분명하게 정할 수 있습니다. 개인의 위법 행위는 근거가 확인되는 대로 별도 판단해야 합니다."
라델이 내 말을 기록했다. 그는 피해 당사자의 이름으로 기관 전체의 의무를 요구할 수 있는 방법을 설명했다. 잘못된 자료를 받아서 사용한 기관들도 '원래 다른 곳에서 온 자료였다'는 이유만으로 정정 의무에서 벗어나지 못한다는 내용이었다.
예비 검토회가 잠시 쉬자 제르칸이 나에게 작은 질문을 했다.
"한도윤. 만약 내가 과거에 이 일을 했다면 지금 너는 날 쫓아냈겠지?"
"그때 마왕님이 어떤 권한을 가졌고 어떤 결정을 했는지 보고 판단해야죠."
"그럼 무조건 용서해 주는 건 아니군."
"네. 그렇다고 무조건 범인으로 정하는 것도 아닙니다."
제르칸은 한참 생각하다가 말했다.
"어쩌면 그게 왕좌보다 무거운 자리일 수도 있겠다."
나는 그런 말을 하는 마왕이 조금 낯설었다. 그는 곧바로 왕좌용 새 쿠션을 주문할 생각이라며 분위기를 깼다. 나는 가격부터 물었다. 역시 우리는 아직 평범한 상사와 부하 직원이었다.
회의실 복도에는 오래된 안내판이 있었다. 그날의 의제는 거창했지만 옆에 붙은 가장 작은 문구가 내 눈을 끌었다. [참석자는 자신의 발언을 정정할 수 있습니다.] 나는 그 문장을 사진으로 남겼다. 과거를 되돌릴 수 없어도 누군가의 말을 잘못 기록했다면 고칠 기회는 있어야 했다.
우리는 긴급 배포 허가 14-B의 보존 사본을 세 기관에서 동시에 열었다. 서로 다른 시간에 열면 중간에 자료가 수정됐다는 의혹이 생길 수 있었기 때문이다. 이스카가 봉인 번호를 확인하고, 에드렌이 법률 효력을 설명하고, 나는 회계상 지출과 인력 동원 기록을 대조했다.
그날 제르칸은 조사단의 의장석을 탐냈다.
"마왕인 내가 앉아야 하는 자리가 아닌가?"
"의장석은 회의 진행자가 앉는 자리입니다."
"내 위엄은?"
"옆에 명패를 크게 만들어 드릴게요."
"몇 배 크게?"
"예산 범위 안에서."
마왕은 명패가 세 배 커진다는 말에 겨우 물러났다. 나는 그의 자존심이 생각보다 저렴한 비용으로 유지된다는 사실을 장부에 적고 싶었지만 참았다.
세 기관의 허가서 본문은 일치했다. 배포 개시의 목적은 긴급 피난 연락 유지였고, 시험 표본을 사람으로 확정하지 말라는 조건도 명시돼 있었다. 그러나 실제 야간 실행 예약에는 그 조건을 검사하는 단계가 빠져 있었다.
"누가 검사를 뺐습니까?"
레타가 화면을 보여 줬다.
"당시 야간 배포를 신속하게 하기 위해 선택 기능 중 하나를 '생략 가능'으로 바꿨습니다. 변경자 표시는 공동 계정입니다. 개인 접근 표가 남아 있어 추가 확인은 가능하지만, 그 사람이 직접 의도한 결과까지는 이 기록만으로 알 수 없습니다."
"변경을 승인한 사람은요?"
"기술 배포 책임자의 자필 서명이 있습니다."
서류에는 '아르데나'라는 이름이 있었다. 당시 왕국에서 파견된 기술 책임자였다. 그러나 서명 아래에는 추가 메모가 적혀 있었다.
[긴급 연락 기능만 우선 적용. 신원 전환 검사 생략 금지.]
"이 사람은 오히려 금지했군요."
"그렇습니다. 그런데 실제 배포값은 다릅니다." 레타가 대답했다.
나는 잠시 말을 잃었다. 전쟁 당시 모두 바빴다고 해서 이 차이가 없어지는 건 아니었다. 지시가 있었고, 그 지시와 다른 프로그램이 실행됐다. 실제로 누가 바꿨는지는 더 조사해야 했다.
그때 베른이 조용히 손을 들었다. 그는 옛 기술 보조 담당자였다.
"그날 전송망이 세 번 끊겼소. 구조 요청이 계속 들어왔고, 누구라도 빨리 복구하고 싶었지. 그러나 그 마음으로 모든 버튼을 눌러도 된다는 뜻은 아니오."
나는 그의 말을 기록했다. 위험을 막으려는 사람이 있었고, 그 경고를 충분히 듣지 못한 사람이 있었다. 서로 다른 선택이 같은 기록 안에 남았다.
청문회 중간에는 며칠 전 찾아낸 '정산 편의' 지침의 담당자가 출석했다. 이름은 헤르만. 당시 그는 비용 분류를 담당했던 젊은 계산관이었고 지금은 은퇴했다. 그는 오래된 서류를 보고 표정이 굳었다.
"내가 만든 표입니다."
"신원 연결이 자동으로 완료된 기록을 수수료 대상으로 분류하셨습니까?"
"그렇소. 시스템이 확인 완료라고 보였으니까."
"기술 시험 완료와 사람의 동의를 구분하셨나요?"
그는 대답하지 못했다. 한참 뒤 어렵게 말했다.
"그 화면에 그런 구분이 없었소. 그래도 확인해야 했겠지."
"실제 돈을 받은 기관이 있습니까?"
"일부는 청구만 되었고, 일부는 보관 계좌로 넘어갔소. 거래마다 다릅니다."
우리는 헤르만의 기억을 그대로 사실로 확정하지 않았다. 베실이 당시 정산 전표를 요청했고, 헤르만은 자신이 보관한 비용 분류 작업표를 자발적으로 제출했다. 당장 완전한 환급액을 발표할 수는 없었다. 우선 개별 청구의 법적 근거를 심사하고 실제 납부액을 확인해야 했다.
그런데 헤르만은 한 가지 중요한 사실을 밝혔다. 신원 연결 상태가 '확인 완료'로 바뀐 뒤부터, 자동으로 생성되는 비용 항목을 누가 승인해야 하는지 명확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때 보고했습니까?" 에드렌이 물었다.
"본청에 물었소. 답이 없었지. 그래서 그냥 했소."
회의실이 조용해졌다. 답이 없어서 하지 말아야 할 일을 했다. 그 뒤에는 '이미 하고 있으니까 계속한다'는 논리가 쌓였을 것이다.
나는 헤르만에게 묻고 싶었다.
"지금도 그 결정이 옳았다고 생각하십니까?"
그는 고개를 저었다.
"그때는 빨리 처리하면 다들 좋아할 줄 알았소. 돌아보니, 빨리 처리되면 안 되는 것도 있었구려."
나는 그 말을 기록했다. 책임을 인정하는 발언과 법적 책임을 확정하는 판결은 달랐다. 그러나 그가 작업표를 내놓은 것은 앞으로 실제 피해를 밝히는 데 도움이 될 것이다.
마왕성에서 돌아오는 길, 피코가 날 기다리고 있었다. 마엔의 네 번째 정정 기관인 중립 연결국에서 최종 정정 완료 확인이 도착했다고 한다. 나는 원본 통지와 연동 상태를 대조했다. 새 명부에는 마엔의 거절 회신이 올바르게 반영돼 있었다.
"그럼 넷째 원 지워도 돼요?"
"그래."
피코는 쓱 원을 지웠다. 남은 건 마계 휴전 감시실 하나였다. 그곳은 옛 자동 갱신 장치와 가장 깊게 연결돼 있었다.
"마지막 것도 오늘 지울래요?"
"아직은 안 돼. 장치 검사를 끝내야 해."
피코는 아쉬워했지만 고개를 끄덕였다. 세상은 완벽한 결말을 서둘러 쓰는 사람보다 마지막 한 칸을 남겨 둘 줄 아는 사람이 지키는 것 같았다.
그날 저녁 제르칸이 갑자기 소환 전의 일을 물었다.
"한도윤. 만약 왕국에서 너를 소환하지 않았다면 우리 성에는 누가 왔을까?"
"그건 모르죠. 전 지금 여기 있으니까요."
"나는 예전에는 인간이란 모두 용사처럼 검을 들고 올 줄 알았다."
"제가 검을 들고 왔으면 큰일 났을 겁니다. 검술 경험이 없거든요."
"그대는 다른 것을 들고 왔지."
"계산기요?"
"계약서다."
나는 잠깐 멍해졌다. 마왕이 나보다 철학적인 말을 할 때가 오다니. 나는 자신의 직원이 사람으로 대우받길 배우는 왕을 바라봤다.
"마왕님, 그 말 하실 때는 망토값이 안 드네요."
"감동적인 순간에 비용 이야기를 하지 마라!"
나는 웃었다. 곧바로 에드렌에게서 최종 회신이 도착했기 때문에 그 웃음은 오래가지 않았다.
야간 배포 승인 공란 옆 작은 도장의 정체가 확인됐다는 것이다. 도장은 한 기관의 최종 승인이 아니라 **긴급 연락망 가동 확인**이었다. 그런데 후대 기록은 그 도장을 **신원 확인 절차 완료**의 근거로 옮겨 적었다.
결국 내 이름을 '확인 완료'로 만든 것은 승인자의 선명한 자필 서명이 아니었다. 서로 다른 업무의 도장을 같은 뜻으로 읽도록 바꿔 놓은 시스템이었다.
이제 남은 질문은 하나였다. 그 변환이 위험하다고 경고받고도 누가 실제 운영을 계속하도록 결정했는가. 그리고 그 결정 때문에 잘못 소환된 사람의 권리를 어떻게 돌려줄 것인가.
제189화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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