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날 아침 마왕이 나를 왕좌실로 불렀다.
"한도윤! 중요한 결단을 내릴 때가 왔다."
나는 미리 가계부를 꺼냈다. 마왕이 중요한 결단이라고 말하면 보통 돈이 들었다. 오늘만은 다를 수도 있었지만, 확률적으로는 돈을 준비하는 편이 안전했다.
"얼마입니까?"
"왜 첫마디가 금액이냐!"
"지난번에도 중요한 결단을 내린다며 왕좌용 망토를 주문하셨잖아요."
"그 망토는 국가의 위엄이었다."
"세탁비는 회사 운영비였죠."
제르칸은 반박하려다 포기했다. 오늘의 결단은 다른 것이었다. 그는 지난 청문회 결정에 따라 마왕성 내부의 불합리한 대행 결재 권한을 전면 정비하겠다고 했다. 나는 깜짝 놀랐다. 왕좌에 앉아 내 도장을 빼앗던 마왕이 이제 자기가 가진 승인 권한의 범위를 줄이겠다는 것이다.
"정말입니까?"
"그대들이 계속 이야기하지 않았느냐. 명령과 동의는 다르다고. 나도 이제 안다."
"그럼 먼저 직원 퇴사와 휴가 신청에서 부서장 대리 동의 기능을 삭제하겠습니다."
"좋다. 단, 왕좌 관리 일정은 내 의견을 들어야 한다."
"그건 실제 책임자시니까요."
제르칸이 만족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뜻밖에 합리적인 출발이었다.
나는 회계실로 돌아왔다. 피코는 지난 청문회 이후 만든 '승인과 접수의 차이' 그림을 벽에 붙이고 있었다. 서류를 받은 손, 서명하는 손, 돈을 보내는 손이 각각 그려져 있었다. 몰트는 옆에서 오래된 인장 장부를 살폈다.
"오늘부터 불필요한 대행 결재 기능을 줄이겠습니다."
"천 년 동안 없애지 못한 기능입니다. 조심해서 하십시오."
"그래서 실제 사용 중인 업무부터 분류할 겁니다."
루시아가 고개를 끄덕였다.
"직원들이 신청할 때 상관에게 말하기 어려운 것도 있겠지."
"그렇죠. 직접 신청할 수 있어야 해요."
"그럼 기사단에도 적용하겠다."
"안전 보고는 상관을 거칠 필요 없이 기록되게 해 주세요."
루시아는 검을 탁자에 내려놓더니 바로 메모하기 시작했다. 검이 없어도 손이 빠른 사람이었다.
마왕성의 대행 결재 규정을 정리하기 전 우리는 직원 설명회를 열었다. 예전에는 '전 직원 적용'이라는 문장을 공지 한 장에 적고 끝냈지만, 이번에는 근무 부서마다 어떤 권한이 바뀌는지 따로 설명했다. 어떤 직원은 자기 이름으로 결재할 수 있게 됐다고 좋아했고, 어떤 직원은 오히려 책임이 늘어날까 걱정했다.
첫 질문자는 성문 경비병이었다.
"상관이 쉬는 날에도 저희가 긴급 출입 허가를 할 수 있습니까?"
"현장 안전을 지키기 위한 긴급 권한은 남겨야 합니다. 대신 기록을 남기고 사후에 검토받도록 하죠."
"그럼 상관이 없다는 이유로 길에서 사람이 다치는 일은 없겠군요."
"그게 목표입니다."
두 번째는 청소 담당자였다. 그는 담당 구역을 바꿀 때마다 다른 부서장이 자기 이름으로 배치 변경을 승인해 왔다고 했다. 그 때문에 실제 근무 장소와 급여 기록이 다르게 표시된 적도 있었다.
"배치 변경은 관리자가 지시할 수 있습니다. 다만 직원에게 알리지 않고 기존 기록을 덮어써서는 안 돼요."
"그럼 앞으로는 제가 어디서 일했는지 확인할 수 있겠네요."
"네. 변경 이력도 남기겠습니다."
세 번째는 야간 주방 직원이었다. 그는 글씨를 잘 읽지 못하는 동료를 대신해 수당 신청서를 작성해 줬는데, 이번 개정으로 그런 도움도 금지되는지 물었다.
"대신 작성하는 것과 대신 동의하는 건 다릅니다. 내용을 설명하고 작성하는 걸 도울 수는 있지만, 마지막 의사는 본인에게 확인해야죠."
그는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우리가 원한 건 서로 돕지 못하게 하는 규정이 아니라, 도움이라는 이름으로 선택권을 빼앗지 못하게 하는 규정이었다.
설명회가 끝나고 피코가 나를 끌고 갔다. 작은 직원은 게시판 한쪽에 그림을 붙여 놓았다. 관리자에게서 나오는 화살표가 직원에게 닿을 때는 '알림', 직원에게서 나오는 화살표가 반대로 갈 때는 '동의'라고 적혀 있었다.
"이렇게 하면 쉽게 알 수 있어요?"
"아주 좋아."
"그럼 마왕님도 이해할까요?"
"…조금 더 크게 그리자."
피코가 웃었다. 나는 마왕의 위엄을 지키기 위해 불필요한 설명을 하지 않았다.
점심에는 내 급여명세서를 확인했다. 근무 시간과 출장비가 정상적으로 반영돼 있었지만, 지하 서고 열람에 사용된 안전 장비 비용이 내 개인 공제 항목으로 잠깐 표시돼 있었다. 시설팀의 전표 분류 오류였다.
"저 이제 안전모도 사비로 사야 합니까?" 나는 몰트에게 물었다.
"그럴 리가요."
"공제 화면에는 그렇게 나옵니다."
몰트는 당황한 듯 자료를 살폈다. 시설 유지비 전표의 책임자 이름이 내 이름으로 등록되면서 지급 대상이 바뀐 것이었다. 우리는 원본 전표를 수정하지 않고 분류 오류 정정 이력을 남겼다. 급여 산출을 다시 돌리자 개인 공제는 사라졌다.
"이런 일은 옛날 이야기에서나 나올 줄 알았는데요."
"새 시스템에서도 사람은 실수합니다." 몰트가 말했다.
"실수하지 않는 게 아니라 고칠 수 있어야 하겠군요."
"그렇습니다."
나는 가만히 앉아 급여명세서를 다시 살폈다. 내가 이세계에 와서 처음 마왕성을 선택했던 이유는 간단했다. 계약서를 써 주고 월급을 주겠다고 했기 때문이다. 지금은 그 한 장의 계약서를 제대로 지키기 위해 세 나라와 천계의 기록을 뒤지고 있었다. 그러나 시작은 여전히 똑같았다. 내가 일했으면 내 이름으로 돈을 받아야 한다는 것.
오후에는 왕국 조사관 라델이 청문회 후속 통지를 보냈다. 신규 요율 청구 중지 명령이 현장 기관에 전달됐는지 확인하는 일정이었다. 우리는 통지 발송 성공만 보고 끝내지 않고, 실제 수신 기관이 신규 청구 기능을 중단했는지 확인했다. 일부 기관은 통지를 받았지만 구형 단말기에 아직 적용하지 않았다.
"이건 다시 연락해야겠네요."
"현장 장치가 멈추면 긴급 통보까지 끊어질까 봐 걱정합니다." 라델이 말했다.
"그럼 레타가 만든 우회 절차를 함께 제공하죠."
우리는 기술사에게 먼저 사용 허가를 구했다. 레타는 기꺼이 문서를 공유하겠다고 했고, 실제 설치 작업은 각 기관의 정비 담당자가 수행하도록 했다. 기술 문서 사용료와 정비 수당도 구분해 정산하기로 했다.
이렇게 하루를 보내고 나니 왕좌실의 결재 한 장이 얼마나 많은 사람과 연결되는지 새삼 느껴졌다. 공문을 고치는 것만으로는 끝나지 않는다. 그 공문을 읽는 사람, 장치를 고치는 사람, 실제로 월급을 받는 사람까지 확인해야 한다.
피코가 말했다.
"도윤 님, 이거 다 하면 퇴근은 언제 해요?"
"일단 오늘 할 일부터 끝내자."
"그럼 내일은 쉬어요?"
"그건 휴가 신청서를 봐야겠는데."
아이는 내게 눈을 흘겼다. 나는 웃었다. 이세계의 회계 담당자로 일하는 내 삶은 여전히 이상했다. 그래도 하루에 한 번쯤은 어떤 사람이 자기 서명을 되찾는 순간을 볼 수 있었다. 그것만으로도 오늘 출근한 보람이 있었다.
다음 날 오전에는 왕국에서 노엘의 업무 경위를 확인한 중간 회신이 도착했다. 에드렌은 '노엘'이 옛 개정 공문을 발송한 단말기에 접속했지만, 실제 신규 요율 문구를 기안했다는 증거는 아직 부족하다고 했다. 그리고 예상하지 못한 자료가 첨부돼 있었다.
노엘은 소환 관리소의 임시 후보 표본을 정리한 사람이기도 했다. 당시 그의 업무는 여러 출처의 후보 이름을 한 표에 모으고, 확인 전 표식을 붙이는 것이었다. '한도윤 — 확인 전'이라는 표찰도 그가 접수한 것으로 남아 있었다. 처음 이름을 작성한 사람이 노엘이라는 증거는 없었다. 다만 그 표찰을 입력한 시점과 장소는 정확히 확인됐다.
나는 날짜를 확인했다. 소환 열하루 전이었다. 지난 150화에서 밝힌 임시 등록의 행정 경로가 이제 실제 담당자의 작업 기록으로 연결됐다.
"그럼 내 이름을 넣은 사람을 찾은 건가요?" 피코가 물었다.
"입력한 담당자를 찾은 거야. 이름의 원래 출처는 아직 따로 있어."
"그 사람은 왜 '확인 전'이라고 썼어요?"
"그때는 실제 본인 확인이 안 됐다는 뜻이겠지."
피코는 잠시 내 얼굴을 봤다.
"그런데 그다음에 확인한 것처럼 바뀐 거잖아요."
"맞아. 이제 그 단계가 남았어."
나는 기록에서 한 가지 흥미로운 사실을 발견했다. 노엘의 입력 표찰에는 '임시'와 '확인 전'이 두 번 반복돼 있었다. 작은 글씨로 원문을 읽은 사람은 누구든 그 상태를 알아볼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런데 다음 세대의 소환 관리 시스템은 그 칸을 '입경 준비 완료'로 표시했다. 명단이 형식 변환될 때 상태값이 바뀐 것이다.
그 변환 작업을 승인한 사람을 찾아야 했다. 옛 소환 관리소의 개선 프로젝트는 왕국과 천계, 중립 관리단이 공동 수행했다. 각 기관은 자기 담당 분야의 기술 변경만 승인했고, 전체 변환 규칙을 최종 확인한 기록은 분실돼 있었다.
"또 사라진 승인자군요."
몰트가 말했다.
"이번에는 최초 표본과 변환 로그가 모두 있습니다. 찾을 수 있는 범위가 좁아졌지요."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지난번보다 나아진 것이다. 처음에는 내 이름이 왜 소환 전에 나타났는지도 몰랐다. 지금은 그 이름을 옮긴 담당자와 상태가 바뀐 단계까지는 알았다.
점심에는 마레나가 웃는 얼굴로 찾아왔다. 그녀의 초과근무 수당이 실제 급여 계좌에 들어온 것을 은행 기록으로 확인했다고 했다. 인계 작업 두 시간을 포함해 재심사한 근무분이 지급된 것이었다.
"이번에는 '예정'이 아니죠?" 그녀가 물었다.
"네. 은행 거래 확인번호가 있습니다. 지급 완료입니다."
피코가 신나서 박수를 쳤다. 이번에는 조그만 박수가 아니었다. 나는 그녀의 수당이 새 제도를 완성했다는 상징이 아니라, 한 사람이 실제로 일한 돈을 돌려받은 사실이라는 점이 좋았다.
오후에는 티아에게서도 연락이 왔다. 유족 연금 재심이 승인됐고 첫 지급 예정일이 통지됐다고 했다. 돈이 아직 들어오지 않았기 때문에 우리는 축하하면서도 '지급 예정'이라고 기록했다. 마엔의 남은 다섯 건은 계속 증빙을 대조하고 있었다. 모든 것을 한꺼번에 해결했다고 말할 수는 없었다.
그 사이 청문회에서 중단시킨 신규 요율 청구가 각 기관에 실제 반영됐는지 확인했다. 라델은 왕국 시스템의 차단 표시를, 아레인은 중립 기록소의 원본 통지를, 베실은 지급 통로의 신규 집행 보류 기록을 보냈다. 우리는 세 기록이 같은 시행 시각을 가리키는지 비교했다. 적어도 오늘 이후 같은 규정으로 새 청구가 자동 생성되는 길은 막혔다.
그날 저녁 제르칸이 다시 회계실에 왔다. 그의 손에는 직접 서명한 첫 번째 대행 권한 축소 결정서가 들려 있었다. 그러나 문서 하단에는 이상한 문구가 하나 있었다.
[시스템 효력 발생 시 모든 관련 직원이 동의한 것으로 간주함.]
나는 잠시 종이를 보다가 붉은 도장을 꺼냈다.
"마왕님. 이건 반려합니다."
"내가 직접 결재했는데!"
"마왕님 결재로 직원들의 의사가 만들어지는 건 아닙니다. 효과를 알리고, 불리한 변경이 있다면 개별 동의를 받아야 해요."
제르칸은 종이를 다시 읽었다. 천천히 고개를 끄덕이더니 내게 펜을 건넸다.
"그럼 고쳐라."
"제가 대신 쓰지 않겠습니다. 수정 의견을 드릴 테니 마왕님이 고르세요."
"너는 끝까지 귀찮구나."
"월급을 받고 하는 일이니까요."
마왕이 웃었다. 우리는 문구를 바꿨다. 직원의 대행 결재 기능은 폐지하되, 실제 업무 담당자에게 변경을 안내하고 기존 동의 없는 처리 기록은 별도 정정 절차로 확인한다는 내용이었다. 신규 권한은 실제 책임과 안전 범위 안에서만 부여하도록 했다.
제르칸은 다시 서명했다. 나는 이번에는 승인 도장을 찍었다. 마왕성의 공식 결재 문서가 처음으로 자기 잘못된 문구 때문에 한 번 반려됐다가 수정된 날이었다. 위대한 전쟁의 승리보다 조금 수수했지만, 내겐 중요한 장면이었다.
밤에는 중립 기록소로부터 짧은 전달문이 도착했다. 윤서진이 이번 조사에서 확인된 '한도윤 — 확인 전' 표찰의 사본을 본 뒤, 동의 범위 안에서 새 자료 하나를 보내기로 했다는 내용이었다.
그 자료의 이름은 '소환 후보 표본의 최초 작성 경위서'였다. 지금까지 본 적 없는 문서였다. 작성자는 아직 확인되지 않았고, 내용이 내게 공개될지는 별도 심사를 거쳐야 했다.
나는 편지를 천천히 접었다. 오늘 우리는 서류의 한 칸을 제대로 고쳤고, 직원 한 명의 수당이 실제로 입금되는 것도 확인했다. 그리고 수십 년 전에 '확인 전'으로 남겨졌던 내 이름이 왜 그 다음 단계에서 '확인 완료'가 됐는지 알아볼 길을 하나 더 얻었다.
피코가 나를 올려다봤다.
"도윤 님, 이제 다 끝났어요?"
"아니. 그래도 오늘 끝낸 일은 있어."
"그럼 내일도 출근해요?"
"월요일이면 그렇겠지."
"마왕성에도 월요일이 있어요?"
나는 대답하지 못했다. 이세계에 와서 가장 두려운 사실은, 달력이 달라도 월요일 같은 날은 반드시 존재한다는 것이었다.
제180화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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