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서진에게서 다시 연락이 온 건 내 도시락 반찬이 식어 갈 무렵이었다.
피코가 오늘의 반찬이 무슨 고기냐고 물었지만 나도 몰랐다. 마왕성 식당의 메뉴판에는 '용맹한 전사의 점심'이라고만 적혀 있었다. 모든 것을 숫자로 기록할 수 있다고 믿었던 내가 이곳에서 아직도 모르는 것 중 하나가 식당 재료였다.
"한국어 답장 왔어요?" 피코가 눈을 반짝였다.
"응. 그런데 먼저 아레인이 확인해야 해."
"도윤 님은 편지도 결재받고 읽어요?"
"남의 비밀이 들어 있을 수 있어서 그래."
"그럼 편지가 말하는 동안 저는 사탕 먹을게요."
"그건 네 자유야."
아이에게 중요한 결정은 늘 단순했다. 사탕을 먹겠다는 사람을 대신해 먹었다고 표시하는 시스템이 없다면 그걸로 충분했다.
아레인은 윤서진이 보내 온 두 번째 음성 연락에 관한 동의 범위를 확인했다. 이전에 그가 밝힌 사실은 분명했다. 옛 한국어 검수 자문이었으며 왕국 제6정산금고의 6-17 관련 원문을 별도로 보존해 달라고 의뢰했다. 그러나 내 이름을 소환 후보로 등록한 승인자는 아니었다. 이번 편지에도 그는 먼저 그 사실을 반복했다.
'한도윤 씨. 저를 모든 서류의 작성자로 생각하지는 말아 주세요. 제가 한 일과 하지 않은 일을 구분해 두고 싶습니다.'
나는 대답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이런 문장을 한국어로 듣는다는 건 이상했다. 상대가 내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고 있는 것 같았다. 나도 내가 영웅 이야기의 주인공이라면 한 사람이 모든 비밀의 열쇠였으면 편하겠다고 생각하곤 했다. 현실은 그렇지 않았다. 한국에서 회사 장부를 정리할 때도 모든 숫자를 설명하는 사람은 한 명도 없었다.
'제가 의뢰한 보존 문구는 원문 작성자가 허락 없이 복제하지 말아 달라고 요청했습니다. 일부 문장은 긴급 구조 절차 설명에 쓰이도록 동의받았지만, 다른 문장은 개인적인 안부였습니다.'
나는 구슬을 멈췄다. 아레인이 고개를 끄덕였다. 공개 범위를 먼저 확정한 뒤 듣기로 했다. 우리가 들을 수 있는 것은 당사자의 선택권과 오래된 이관 장부의 관련 사실에 한정됐다.
다음 음성에는 중요한 정보가 있었다. 윤서진은 초기 `00-성전` 보관 제도를 설계한 기술자가 아니라, 몇 차례의 언어 검수와 보존 안내를 맡은 자문이었다. 그가 말한 첫 이관 장부는 두 권이며, 권리자 회신 대기부 뒤쪽에 '적색 표찰'의 이동 경로가 들어 있다는 것이었다. 그 표찰은 동의 표식이 아니라, 당사자를 직접 만난 적이 없다는 경고로 사용됐다고 했다.
"우리가 발견한 장부에 그 표찰 목록이 있어요." 내가 말했다.
아레인이 물었다.
"하지만 대기부 뒷부분은 아직 비식별 열람 심사를 받지 않았지요?"
"네. 이름이 섞여 있어요."
"그러면 번호와 처리일만 먼저 비교하세요."
윤서진은 마지막에 케드란이라는 이름을 말했다. 그러나 상대의 현재 신원에 대한 추측을 하지 말라고 덧붙였다. 케드란은 옛 문서관리관이었고, 일부 안내 서식의 번역본을 관리했던 사람으로 기억하고 있었다. 임시 후보 명단의 최초 입력자로 직접 확인한 적은 없다고 했다.
'처음부터 큰 악당을 찾으려 하지 마세요. 그때는 서로 다른 부서가 상대 부서의 입력을 원본으로 믿고 사용했어요. 누가 무엇을 안 채로 승인했는지 확인해야 합니다.'
녹음은 거기서 끝났다.
나는 구슬을 내려놓았다. 피코는 사탕 포장을 접으며 물었다.
"좋은 사람이에요?"
"좋은 일을 한 기록이 있어. 하지만 사람이 어떤지는 직접 만나야 알 수 있겠지."
"그럼 악당도 아니에요?"
"그것도 지금 말할 수 없어."
피코는 좀 실망했지만 금방 고개를 끄덕였다. 내 대답보다 사탕이 더 중요해졌다.
우리는 몰트에게 적색 표찰 목록의 비식별 열람을 요청했다. 그 문서에는 번호, 이관 날짜, 언어 분류, 보관 방식이 기록돼 있었고, 옆에는 이름이 적힌 별도 칸이 있었다. 아레인은 이름 칸을 가린 복제본을 만들었다. 개인 정보가 필요한 경우에는 추가 사유를 제출하기로 했다.
열람 승인을 받은 적색 표찰 목록을 실제로 펼치려는데 작은 소동이 있었다. 보존실의 문이 열리지 않은 것이다. 열쇠는 있고 자물쇠도 멀쩡해 보였는데 손잡이를 돌리면 안쪽에서 무언가 걸렸다. 루시아는 즉시 쇠막대를 들었다.
"한 번만 당겨 보겠다."
"그 전에 안에 사람이 없는지 확인하세요."
루시아가 문에 귀를 댔다. 안에서는 낡은 마력 장치가 웅웅거리는 소리가 났다. 우리는 시설 관리자를 불렀다. 그는 장치가 사람을 가두려고 만들어진 것이 아니라, 기압 차이를 조절하는 보존용 환기석이라고 설명했다. 환기석이 고장 나면 문이 안쪽으로 끌려 들어갈 수 있다고 했다.
"그럼 제가 문을 부쉈으면 어떻게 됐습니까?" 루시아가 물었다.
"보존실 먼지가 복도로 터져 나왔겠죠. 그 안의 종이도 훼손될 수 있고요."
루시아는 쇠막대를 조용히 내려놓았다. 한때 전투라면 뭐든 해결할 수 있다고 믿었던 사람이었다. 요즘은 막대를 쓰지 않아야 할 순간을 더 자주 배웠다.
시설팀이 환기석 전원을 분리하고 예비 장치로 교체했다. 출입구 주변의 온도와 습도를 기록하고 문을 열었다. 그제야 보존 담당자가 안에 들어갈 수 있었다. 작업 시간과 부품 사용 내역은 시설 계정에 정리했다. 오래된 제3감리 기금에서 비용을 가져오는 것은 원래 목적과 달랐다.
안으로 들어가자 적색 표찰이 걸린 서랍이 열두 개 있었다. 각 서랍에는 서로 다른 종류의 회신 자료가 담겨 있었다. 이름이 공개될 수 없는 것도 있었고, 이미 당사자가 직접 열람해 가져간 것도 있었다. 우리는 오늘 조사에 필요한 번호만 확인하기로 했다.
피코는 아주 작은 글씨로 적힌 목록을 보더니 안경이 필요하다고 했다. 이스카가 보존용 확대경을 빌려 줬다. 아이는 그걸 들고 자신의 손바닥을 들여다봤다.
"손금도 커져요!"
"서류를 보라고 빌려 준 거야."
"손도 서류를 잡는 데 쓰잖아요."
부정하기 어려운 논리였다. 나는 확대경을 조심히 돌려 줬다.
우리가 확인한 표찰 가운데는 사용 언어가 '미상'으로 남은 자료가 있었다. 이전 조사에서 소리검수청의 가상 시험 계정이 실제 사람으로 잘못 표시되는 일이 있었다. 나는 같은 오류가 아닌지부터 점검했다. 시험 기록과 실제 인명 등록 기록을 분리한 최근 수정 사항이 적용됐는지 확인하자, 다행히 새 화면에는 가상 계정이 별도 색으로 표시됐다.
"그럼 이 표찰의 언어 미상은 정말 모른다는 뜻인가요?"
"현재 자료로는 그래. 적어도 시험용 가상 계정과 같은 사람이라고 표시하지는 않네."
그때 통신 담당자가 새 문의서를 가져왔다. 송-4189 번호를 가진 오래된 연락함을 찾으려는 사람이 한 명 더 있었다. 왕국 소환 관리소의 직원이었다. 그는 이 번호가 자기 부서의 구형 전송표에 있기 때문에 자료를 달라고 요청했다. 하지만 소환 관리소에서 그 번호가 최초로 만들어졌다는 증거는 없었다.
"자료를 넘기지 않으실 겁니까?" 직원이 물었다.
"필요한 업무 근거를 알려 주시면 확인할 수 있는 범위만 제공하겠습니다. 원본을 빌려가실 수는 없습니다."
"왕국의 공식 업무입니다."
"공식 업무라는 말만으로 개인 연락 기록 전체를 받을 수는 없습니다."
직원은 불만스러운 표정이었지만 결국 원문 대신 등록 연혁과 비식별 번호 대조 자료를 받기로 했다. 우리는 그의 업무도 방해하지 않으면서 당사자의 개인정보를 보호할 수 있는 범위를 찾았다.
아레인은 그 과정을 지켜보더니 작게 말했다.
"예전에는 어느 기관이 먼저 서류를 가져가느냐에 따라 진실이 달라지곤 했어요."
"원본은 남겨 둬야죠."
"그게 별것 아닌 것 같지만 굉장히 중요해요. 한 번 분리되면 다음 기관에서는 사본을 원본으로 여겨 버리니까요."
나는 지난 140화와 150화의 일을 떠올렸다. 가상 언어 시험 계정이 실제 사람의 명단으로 바뀌고, 임시 후보 기록이 정식 계약처럼 읽힌 것은 누군가 원문에 붙어 있던 경고를 떨어뜨렸기 때문이었다. 오늘의 작은 거절 한 번이 앞으로 비슷한 일을 막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
첫 표찰의 외형을 확인한 뒤 우리는 아직 내용을 펼치지 않은 서랍에는 잠금 표시를 남겼다. 피코가 입회 시간을 적고, 루시아가 출입문을 점검했으며, 아레인은 앞으로 만들 전자 사본의 열람 제한을 미리 설정했다. 이스카는 확대경을 잠시 돌려받았다. 피코는 마지막까지 손바닥을 들여다보고 싶어 했지만, 보존실의 물건은 자기 물건이 아니라는 말을 듣고 선뜻 돌려줬다.
"오늘 저도 뭔가를 지킨 거죠?" 아이가 물었다.
"그래. 누군가의 편지를 함부로 열지 않았잖아."
피코가 기뻐했다. 마왕성 회계과에서 가장 작은 직원이 오늘 가장 어려운 일을 해냈다. 알고 싶지만 참는 일. 그건 숫자를 맞추는 것보다도 훨씬 힘들 때가 있었다.
서랍 앞에서 아레인은 오늘 확인할 자료의 복사본 목록을 나에게 보여 줬다. 복사본마다 보존 기간과 열람 가능 기관이 적혀 있었다. 왕국 소환 관리소에는 번호 이동 경로만, 합동운영국에는 청구 연결 여부만, 당사자에게는 본인 관련 자료의 정정 신청 경로를 제공하는 방식이었다.
"같은 사건인데 기관마다 보는 내용이 다르군요."
"업무 목적이 다르니까요. 가장 많은 자료를 가진 사람이 언제나 가장 옳은 판단을 하는 것도 아니에요."
나는 동의했다. 지난번 자동 동의 오류도 아무 기관이나 모든 정보를 가져가려고 하다가 서로 다른 기록을 한 사람의 기록으로 합쳐 버린 탓이 있었다.
피코는 출입증을 손에 쥐며 물었다.
"제 이름도 다른 사람이 잘못 붙이면 고칠 수 있어요?"
"그럴 수 있게 만들어야지."
아이의 질문은 가볍지 않았다. 그걸 가능하게 만들기 위해 우리가 여러 달째 뛰어다니는 중이었다.
표찰들은 대부분 빈 회신함과 함께 이동했다. 그 가운데 하나가 낯익었다.
[연락함 식별번호 송-4189. 보존 사유: 원래 언어 확인 미완료.]
나는 손가락을 멈췄다. 오랫동안 쫓던 번호였다. 하지만 이번에도 그것이 곧 내 소환을 뜻하지는 않았다. 송-4189는 연락함 식별번호로 먼저 쓰였고, 나중에 전송번호로 복제됐다는 가능성이 더 컸다.
"순서가 뒤집혔을 수 있군요." 라델이 말했다.
"네. 원래 있던 연락함 번호가 소환 관리 시스템으로 옮겨졌을지도 몰라요."
몰트가 옛 연혁을 확인했다. 연락함이 설치된 해와, 왕국의 전송 기록에서 같은 번호가 등장한 해 사이에는 꽤 긴 시간이 있었다. 우리는 원본의 최초 사용 목적을 확인하기 위해 운송부서의 부호 목록을 신청했다.
그때 루시아가 문을 벌컥 열었다.
"창구에서 소란이 났다. 어떤 사람이 자기 아버지의 이름이 붙은 적색 표찰을 돌려 달라고 한다."
우리는 곧장 달려갔다. 기다리는 사람들 사이에 젊은 드워프가 서 있었다. 그는 증조부의 연락함이 지금도 매년 관리 대상이라고 표시돼 있다며 화를 내고 있었다. 증조부는 수십 년 전에 사망했고, 그 뒤 누구도 돈을 청구받지 않았는데 최근 갑자기 관리료 고지가 왔다고 했다.
"이 표찰이 내 가족 것 아니오? 그럼 나한테 내놔야지!"
"표찰의 소유와 연락함 속 개인 기록을 받을 권리는 확인이 필요합니다." 아레인이 말했다.
"나는 돈을 내라고 고지받았소!"
나는 고지서를 살폈다. 문제의 관리료는 신규 납부 의무가 확인되지 않은 상태에서 자동 생성된 것이었다. 우리가 169화 청문회에서 신규 적용 중지를 결정한 대상에 해당할 가능성이 있었다.
"먼저 이 고지의 징수를 멈추도록 요청하겠습니다. 권리자 확인은 그다음에 하죠."
"그 말을 믿으라고?"
"접수번호와 처리 담당자를 적어 드리겠습니다. 결과가 나오기 전에는 돈을 내지 마세요."
젊은 드워프는 잠시 나를 바라보다가 종이를 받았다. 나는 그에게 아무것도 확정하지 않았지만 적어도 당장 손해를 막는 조치는 시작했다.
저녁에 통지서를 다시 보니 발행처는 폐쇄된 회신보전소가 아니라 현재의 합동운영국이었다. 최초 봉인 장부를 지키기 위해 설치한 규칙이 어째서 후손에게 비용을 청구하는 근거가 됐는지 점점 분명해졌다. 누군가 시스템을 수정하는 과정에서 보전 대상자와 납부 대상을 같은 칸에 집어넣었다.
하지만 그것이 단순 실수였는지, 수수료를 계속 받기 위한 의도적인 조치였는지는 아직 모른다.
나는 적색 표찰 번호 목록을 펼쳤다. 이름을 가리고도 추적할 수 있는 기록은 생각보다 많았다. 윤서진이 가리키던 방향도 그곳이었다. 사람의 이름을 함부로 공개하지 않고도, 누가 언제 그 이름을 시스템에 옮겼는지는 찾아낼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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