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왕성에 취직한 뒤 가장 무서웠던 것은 마왕이 아니었다.
첫째는 급여일 아침의 몰트 실장님. 둘째는 출장비를 청구하러 왔을 때의 몰트 실장님. 셋째는 내가 그의 책상 위에 놓인 오래된 보관함을 열어 달라고 부탁하는 순간의 몰트 실장님이었다.
"분실하시면 안 됩니다."
"아직 열지도 않았는데요."
"열기 전에 하는 말입니다."
나는 서고 출입 신청서 위에서 펜을 굴렸다. 마왕성 지하 옛 인수인계실의 열람 자격은 세 종류였다. 소유부서 책임자, 보존 담당자, 그리고 비상시에 한정된 마왕의 특명자. 문제는 서고가 세 차례 조직 개편을 겪었다는 점이다. 서고를 소유했던 부서는 사라졌고, 최초 책임자는 이미 뼈가 되었으며, 현재 보존 담당자는 그 뼈였다.
"실장님이 서고 주인이면서 증인까지 하셔도 되는 겁니까?"
"규정상 두 역할을 분리해야 합니다. 그래서 증인을 한 분 더 요청했습니다."
문이 열리더니 루시아가 들어왔다. 등에 검 대신 긴 쇠막대와 구조용 밧줄을 메고 있었다.
"열쇠를 잃어버린 문이 있다면서?"
"부수는 게 아닙니다."
"알아. 그래서 밧줄을 가져왔지."
쇠막대는 왜 가져왔는지 묻지 않기로 했다.
피코가 종이를 흔들며 뛰어왔다.
"도윤 님, 창고에 들어가면 간식 가져가도 돼요?"
"보존 서고에서는 먹지 못해."
"그럼 나오자마자 먹을게요."
"왜 벌써 나올 계획을 세워?"
"일이 끝나는 시간을 먼저 생각해야 행복하다고 실장님이 그랬어요."
몰트가 눈구멍을 나에게 돌렸다. 나는 고개를 저었다. 내 말이 아니다. 천 년 근속 리치가 그런 생산적인 행복론을 가르쳤다는 사실이 조금 충격적이었다.
우리는 신청서를 작성했다. 열람 목적에는 '00-성전 최초 이관 장부의 소재 확인 및 관리 책임 추적'이라고 적었다. 대외 유출 금지 조항 아래에는 '제3자 권리 침해 시 원문 공개 범위 별도 심사'라는 단서를 달았다. 윤서진의 한국어 회신은 그 사람의 동의한 범위 안에서만 사용하기로 이미 약속했다. 장부에 누군가의 옛 이름이 나온다고 해서 그 사람의 삶 전체를 공개할 권리가 생기지는 않는다.
제르칸은 결재란을 한참 바라봤다.
"왜 내 이름 옆에 '열람권 승인'만 적혀 있느냐? 왕의 위엄에 관한 문구는 없느냐?"
"승인하실 권리만 적은 겁니다. 열람 결과가 마음에 들지 않아도 바꾸실 권리는 없습니다."
"너는 왕 앞에서 참 무례하구나."
"그것도 근로계약서에 없던 업무입니다."
마왕은 인장을 찍었다. 도장 소리가 과장되게 컸다. 피코는 옆에서 박수를 쳤다. 월급날보다 크게 박수치는 건 조금 섭섭했다.
지하 인수인계실은 왕좌실 아래에 있었다. 계단 열세 칸을 내려가자 벽에 오랜 시대의 표어가 겹겹이 붙어 있었다. '침략군 물자 반출 금지', '살아 있는 포로 목록 별도 보관', '국경 비상 문서 상호 봉인'. 마지막 표어는 지금의 마왕성 규정과 달랐다. 왕국과 적대하던 시기에도 어떤 문서는 양쪽이 함께 봉인했다는 뜻이었다.
루시아가 표어를 읽었다.
"왜 적의 문서를 우리가 보관했지?"
"버리면 곤란한 물건이 있었던 거겠죠."
"전쟁할 때는 적의 장부를 불태우라고 배웠다."
몰트가 말했다.
"저 표어가 붙은 해에 살아 있는 사람의 명단을 불태웠다가, 포로 교환을 하지 못한 일이 있었습니다. 이후 문서는 적의 것이라도 원본을 남겼지요."
루시아는 말없이 표어를 다시 봤다. 전투를 좋아하던 기사단장도 이제는 글자가 누구를 지킬 수 있는지 알았다.
우리가 지하로 내려가기 전, 피코가 빠뜨린 물건이 하나 있었다.
"출입증이요!"
피코는 계단을 다시 올라갔다. 얼마 뒤 달려 내려온 아이의 손에는 자기 이름이 큼직하게 적힌 출입증이 들려 있었다. 그러나 사진 칸에는 동그란 사탕 그림이 붙어 있었다.
"이게 정말 네 사진이야?"
"닮았죠?"
"너는 사탕이 아니잖아."
"저는 사탕을 좋아하는 피코예요."
몰트가 출입대장에 잠깐 손을 멈췄다.
"이 서고는 출입자 신원을 분명히 해야 합니다."
"그러면 사탕 그림은 안 되겠네요."
피코는 풀이 죽었다. 나는 아이를 데리고 기록실로 올라가 임시 출입증을 다시 만들었다. 실제 얼굴과 이름, 출입 예정 시간, 동행 책임자를 확인했다. 출입 범위는 보존 상자 운반 보조까지만 허가했다. 고문서 원문을 직접 다루는 일은 포함되지 않았다.
"도윤 님이 제 대신 서명해도 돼요?"
"동행 책임자로 서명할 수 있어. 네가 방문하겠다는 의사는 네가 확인해야 해."
피코가 고개를 끄덕이더니 조그만 글씨로 자기 이름을 적었다. 글씨는 삐뚤빼뚤했지만 누구의 명령으로 그랬는지보다 자기 마음으로 서명했다는 점이 중요했다.
그 사이 루시아는 지하 계단의 난간을 점검했다. 어제 비가 새었다던 계단 모서리에 습기가 남아 있었다. 그녀는 직접 밧줄을 걸어 임시 난간을 보강하고 시설팀에 수리를 요청했다. 예전 같으면 칼로 벽을 쳐서 진동을 확인했을 사람이다. 지금은 이동하는 사람이 다치지 않게 하는 데 더 신경을 썼다.
"서고에서 지진이라도 나면 어쩌죠?" 피코가 물었다.
"출구를 먼저 확인할 거야."
"장부는요?"
"사람이 나온 뒤에."
나는 그렇게 대답했다. 지난 폭우 때도 배웠던 일이다. 서류를 지키려다 사람이 다치면 우리가 왜 서류를 보존하려 했는지부터 잊게 된다.
몰트는 비상 대피로가 오래전에 막혀 있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이유를 확인해 보니 지하 환기석의 교체 공사를 하며 그쪽 문을 임시로 잠가 놓은 뒤 열지 않았다. 공사는 몇 년 전에 끝났다. 나는 담당 업체의 폐업 여부가 아니라 실제 비상구가 열리는지부터 확인했다.
루시아가 보수용 막대를 사용해 잠금쇠를 시험했다. 드디어 아침부터 들고 다니던 도구가 제 역할을 했다. 그녀의 표정이 조금 밝아졌다.
"이번에는 써도 된다고 했지?"
"네. 문을 부수는 게 아니라 비상장치 점검이니까요."
"그 차이를 이제 안다."
장치는 고장 나 있었다. 시설팀이 교체 부품을 가져와 설치했고, 루시아가 정상 개방되는 것을 두 차례 확인했다. 교체 비용은 마왕성 시설 유지비에 올렸다. 오래된 `00-성전` 자금에서 임의로 빼 쓰지 않겠다고 몰트가 선을 그었다.
"금고를 찾으러 왔는데 돈을 쓰게 됐군요."
"사람이 지나는 길을 안전하게 만드는 비용입니다." 몰트가 말했다.
"왕좌 밑에 이런 길이 있었다는 것도 몰랐습니다."
제르칸이 화면에 나타나 우리를 노려봤다.
"내가 모른다고 해서 마왕성이 내 것이 아닌 건 아니다."
"그럼 왕좌 아래 비상구 수리비도 결재하시겠네요."
"…그건 알고 있었던 것으로 하자."
우리는 웃었다. 오래된 서고를 연다는 일이 그저 먼지 쌓인 비밀 상자를 여는 것만은 아니었다. 실물을 보존하고, 열람할 사람을 확인하고, 그 길을 안전하게 만들고, 비용을 올바른 계정에서 집행하는 일까지 포함됐다. 이 모든 귀찮은 일이 끝나고 나서야 우리는 지하로 다시 내려갔다.
서고 문은 세 겹이었다. 첫 번째에는 마왕의 허가, 두 번째에는 보존 담당자의 기록, 세 번째에는 당시 문서를 넘겨준 기관의 봉인이 필요했다. 마지막 봉인에는 손바닥 크기의 회색 패가 매달려 있었다.
[국경 피난 행정 인계용. 개봉 시 상대 기관에 통지할 것.]
"상대 기관이 없어졌는데요?" 내가 물었다.
몰트가 오래된 목록을 펼쳤다.
"폐쇄된 기관의 승계 담당처를 확인해야 합니다. 현재는 중립 기록소의 합동 보존실입니다."
아레인에게 통신을 연결했다. 그녀는 출입 기록과 서고 사진을 요구했고, 소유권이 불명확한 원본에 대해서는 공동 입회를 요청했다.
"오늘 못 열겠군요."
"오늘 열 수 있습니다. 독립 기록관이 원격으로 입회하면요. 대신 봉인에 손대기 전 파손 상태를 확인해야 합니다."
나는 한숨을 내쉬었다. 옛날에는 문 하나 여는 데 자물쇠만 필요했을 텐데. 하지만 예전에 도윤이라는 이름이 누군가의 허락으로 둔갑한 과정을 생각하면, 귀찮은 절차 하나가 사람 한 명의 권리를 지킬 수도 있었다.
우리는 봉인의 왼쪽 아래에 머리카락만 한 균열을 발견했다. 루시아가 손전등을 비추고 피코가 표시했다. 아레인은 화면 너머에서 실물을 촬영했다.
"균열이 오래된 겁니까?"
"겉면 산화 정도로만 보면 그렇습니다. 정확한 연대는 확인이 필요해요. 지금 뜯으면 최근 훼손인지 원래 손상인지 구분할 수 없습니다."
몰트가 보존용 밀랍을 꺼냈다. 나는 그가 천 년 동안 여전히 장부를 지킨 이유를 새삼 이해했다. 그는 숫자를 보관하는 사람이 아니라, 숫자 뒤에 있던 사건을 함부로 지우지 않는 사람이었다.
세 번째 문이 열렸을 때 기묘한 냄새가 났다. 오래된 종이, 금속, 약간의 건조한 풀냄새. 피코가 기침을 하자 루시아가 작은 마력 환기석을 켰다. 입구에서 공기가 먼저 순환할 때까지 기다리는 동안 나는 서고의 물품 목록을 읽었다.
'교전 중인 양측의 포로 신원 대장.'
'미확인 언어 청취기 다섯 개.'
'휴전상 합의에 따른 반환 불가 물품.'
그리고 가장 마지막 줄.
'제3감리 보호물 인수 기록: 성전 계정, 초회.'
나는 손가락을 멈췄다.
"찾았어요."
몰트가 가까이 왔다. 표정이 없다는 것이 이럴 때 문제였다. 그가 놀란 건지 무서워한 건지 알 수 없었다.
목록상 서랍 위치는 '바닥에서 일곱째 칸'이었다. 문제는 서랍이 여섯 칸뿐이라는 점이다.
"숨겨진 칸입니까?" 루시아가 기뻐하며 쇠막대를 들었다.
"잠깐만요. 옛 문서의 번호 표기 방식이 다를 수 있어요."
피코가 바닥에 쪼그려 앉았다.
"도윤 님, 바닥에 숫자 일곱이 있어요."
여섯 번째 서랍 밑의 돌판에 작게 일곱이 새겨져 있었다. 피코가 손가락으로 먼지를 훑어 내자 곁에 화살표가 나타났다. 벽 뒤의 공간을 가리키고 있었다.
"일곱 번째는 서랍이 아니라 바닥 통로였군요."
루시아가 웃었다.
"그럼 이제 막대를 써도 되나?"
"안 됩니다."
"이 쇠막대에게도 출근할 기회를 줘라."
"도구의 권리는 존중하겠습니다. 벽은 그대로 두세요."
몰트는 잠시 멈춰 서더니 바닥돌의 모서리를 눌렀다. 돌판이 부드럽게 들렸다. 그가 입을 열었다.
"예전에 이 통로를 본 적이 있습니다. 하지만 여기에 무슨 문서를 넣었는지는 제 기억과 남은 목록이 다릅니다."
"실장님 기억이 틀릴 수도 있군요."
"천 년이면 누구나 한두 가지는 잊습니다."
"한두 가지라는 게 무서운데요."
통로 끝에는 사람 하나가 겨우 앉을 수 있는 작은 보관실이 있었다. 가운데 긴 가죽 상자와 낡은 배달 영수증 철이 놓여 있었다. 나는 먼저 방 전체를 기록하고 상자 겉면을 살폈다. 봉인은 두 개였다. 마왕성의 옛 문장 하나, 왕국의 이관 표식 하나. 그리고 세 번째 자리에는 도장 대신 문장이 쓰여 있었다.
[당사자 확인 불가. 보호를 위해 봉인함.]
그 문장을 본 순간 목 뒤가 차가워졌다. 다른 기관이 대신 동의한 게 아니라, 누군가 당사자가 확인할 수 없음을 알고도 문서를 보존했다. 적어도 최초 봉인에는 그런 목적이 적혀 있었다.
"열겠습니다." 내가 말했다.
아레인이 원격 입회 동의를 확인했다. 몰트는 두 기관의 봉인 상태를 기록했고, 루시아는 안전 담당자로 자리를 잡았다. 제르칸은 연락 화면 너머에서 '내 왕좌 밑에서 무슨 일을 하느냐'고 세 번이나 물었지만 네 번째에는 조용해졌다.
상자 안에는 두 권의 장부가 있었다. 첫 권의 표지에는 '00-성전 초회 이관 대장'이라는 제목, 둘째에는 '권리자 회신 대기부'라는 제목이 적혀 있었다. 두 권은 끈으로 묶이지 않았고, 각각 다른 보존 일자가 찍혀 있었다.
나는 첫 장을 펼쳤다.
[이관 목적: 미확인 언어 사용자 및 국경 피난민의 본인 회신권 보전.]
[자금 성격: 담보의 수익화 금지. 반환 의사 확인 전 지출 제한.]
예상했던 전쟁비용이나 무기 조달이라는 단어가 없었다. 계정 이름은 성전인데 첫 장의 내용은 사람의 대답을 기다리라는 규칙이었다.
피코가 작은 소리로 물었다.
"그럼 이건 좋은 장부예요?"
"시작은 그렇게 보이네. 나중에 어떻게 사용됐는지는 별개야."
다음 페이지를 넘기자 인수자 표식이 나왔다. 마왕성 측 보관 담당자는 몰트의 전임자였다. 왕국 측은 국경지원부 문서이관관. 제3감리 자리는 붉은 실로 가려져 있었다. 나는 억지로 실을 풀지 않았다. 먼저 옆의 열람 조건을 살폈다.
[신원 공개 시 보호 대상 동시 노출 우려. 열람 사유와 비식별 절차 제출 후 개봉 가능.]
그때 몰트가 낮게 말했다.
"제가 기억하는 장부가 맞다면, 저 실 아래에는 사람의 이름이 아니라 자리 번호가 있을 겁니다."
나는 그를 돌아봤다.
"그걸 어떻게 아십니까?"
"저는 전임자의 장례를 치른 뒤 이관 서명을 했습니다. 그날 한 사람이 오랫동안 제게 같은 부탁을 했거든요."
"어떤 부탁이요?"
몰트의 눈구멍에 희미한 푸른빛이 흔들렸다.
"명단보다 답장을 오래 보관해 달라는 부탁이었습니다."
나는 장부를 덮었다. 오늘 우리가 찾아낸 것은 단순한 금고의 열쇠가 아니었다. 첫 장부에는 누군가의 이름이 등록됐다는 기록보다, 그 이름을 가진 사람이 대답할 때까지 기다려야 한다는 의무가 먼저 적혀 있었다.
그리고 몰트는 그 의무의 시작을 알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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