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립 기록소 연락 장비 2호는 세상에서 가장 형편없는 모양을 하고 있었다.
어찌나 커다란지 마차 한 대를 통째로 삼킬 것 같았고, 옆면의 나사는 절반이 녹슬어 있었다. 장비를 바라본 피코가 대뜸 말했다.
"고장 난 냉장고 같아요."
"냉장고를 본 적 있어?"
"도윤 님이 설명해 주셨잖아요. 차갑고, 안에 먹을 게 들어 있는 상자요."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지. 피코에게는 내가 하는 한국 이야기가 전부 이세계의 괴상한 발명품 이야기였다. 하지만 이번 상자에 든 것은 음식이 아니었다.
연락 장비를 조사하기 전에 나는 아레인에게 한 가지를 물었다.
"한국어 음성이 나온다면, 그걸 저 혼자만 알아듣는 상황이 될 수도 있겠네요."
"그렇겠죠. 그래서 녹음된 말과 당신의 통역을 별도로 기록하려고 합니다."
"제가 듣고 싶은 대로 해석할 수도 있잖아요."
"그러지 않으려고 오랜 시간 애쓰셨다고 들었습니다. 그럼에도 독립 검수가 필요하지요."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내가 한국어를 할 줄 안다는 사실은 장점이지만, 그것이 모든 판단을 대신할 수는 없었다. 한국어 문장도 사람마다 다르게 이해할 수 있고, 비슷한 억양이 다른 뜻으로 들릴 수도 있다.
그날 기록소에는 다른 외부 언어 전문가 두 명도 참석했다. 한 사람은 옛 음성 체계를 복원하는 기술자였고, 다른 한 사람은 언어의 시대별 변화를 연구하는 학자였다. 그들은 한국어를 읽지는 못했지만, 녹음의 편집 흔적과 매체 변조 여부를 확인할 수 있었다.
"통역을 검증하지 못하면 어떻게 하죠?" 피코가 물었다.
"모르는 부분은 모른다고 적는 거지. 나중에 확인할 수도 있어."
"도윤 님이 한국어를 모를 때도 있어요?"
"당연하지. 한국어로 된 모든 책을 다 읽은 건 아니잖아."
피코가 진지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자기 말을 아는 사람과 모든 걸 아는 사람은 다르다. 이 구분을 배우는 데 우리 모두가 오래 걸렸다.
장비의 겉면에는 세 줄짜리 사용 수칙이 붙어 있었다. '녹음 전에 뜻을 확인할 것', '녹음 후 작성자에게 재생해 들려줄 것', '기록 보관 동의를 따로 받을 것'. 나는 마지막 줄에 눈길이 갔다. 한국어의 동의를 구분하려던 사람이 이 장치에서 가장 중요한 절차를 잊지 않은 것이다.
그러나 한쪽에 붙은 개정 스티커는 일부 글씨가 지워져 있었다. 분류 코드를 간소화했다는 기록이었다. 왜 그랬는지는 아직 알 수 없었다. 우리는 스티커를 무리하게 떼지 않고 표면 사진만 남겼다.
"여기는 기억보다 물건이 더 오래 살았네요." 내가 말했다.
이스카가 고개를 들었다.
"물건도 관리하지 않으면 금방 사라집니다. 사람들이 이 장비를 보존하기로 결정했기 때문에 남은 거예요."
"그럼 보존 비용이 든 것도 의미가 있었군요."
"네. 하지만 비용이 들었다고 그 장비를 마음대로 사용해도 된다는 뜻은 아닙니다."
맞는 말이었다. 수많은 서류를 뒤진 결과 나는 어떤 물건의 가격보다 그 물건을 누가 쓸 권리가 있는지가 더 중요하다는 사실을 배웠다.
기록관 아레인이 장비 앞에서 장갑을 끼고 있었다.
"금화 십 닢으로 설치된 연락 장비가 이 기계입니다. 작동 기록 일부가 아직 남아 있습니다."
"그럼 예산만 책정된 게 아니라 실제로 사용됐군요."
"맞습니다. 다만 최초 사용자가 누구인지는 별도 검증이 필요합니다."
장비는 무척 느렸다. 아레인이 전원을 넣자 수십 년 전에 녹음된 듯한 안내 음성이 나왔다.
'사용자 본인 확인 후 발언을 남겨 주십시오.'
이어 다른 언어로 같은 말이 반복됐다. 엘프어, 드워프어, 왕국 공용어. 마지막에는 낯익은 언어가 들렸다.
'본인의 뜻을 직접 말씀해 주세요.'
나는 그대로 굳어 버렸다. 또렷한 한국어였다.
"도윤 님, 무슨 말이에요?" 피코가 물었다.
"본인의 말을 직접 남기라는 뜻이야."
한국어 문장의 높낮이가 묘하게 자연스러웠다. 번역 장치가 만든 기계적인 억양과 달랐다. 정말 누군가 입으로 말한 것 같았다.
이스카는 장비를 멈추고 기록 매체를 검사했다.
"음성 원본 자체가 아니라 장비에 남은 복제본입니다. 녹음된 순서가 그대로인지 확인해야 합니다."
"그래도 한국어가 실제로 녹음됐다는 사실은 맞겠죠?"
"매체 검사가 끝나면 확인할 수 있습니다."
나는 잠깐 웃었다. 이스카 앞에서는 감격마저 검사를 받아야 했다. 하지만 그 고집 덕분에 지금까지 서류가 살아남았다. 나도 조금씩 그녀처럼 생각하게 됐다.
연락 장비의 내부 목록에는 사용자 번호가 세 개 남아 있었다. 첫 번째는 소환 준비용 시험 표본. 두 번째는 실제 회신 연습. 세 번째는 봉인된 긴급 보존 메시지. 숫자만 봐서는 어느 쪽이 한국어를 말했는지 알 수 없었다.
라델은 오래된 운용 수첩을 찾아냈다.
"이 장비는 다른 세계 출신의 자원 통역자가 참여하는 시험에도 사용됐다고 적혀 있네요."
"자원 통역자요?"
"당시 기록에는 '외부 출신 방문자'라고 돼 있습니다."
내 가슴이 조금 빠르게 뛰었다. 이 세계에 나 말고도 한국어를 할 수 있는 사람이 있었다는 사실은 이제 낯선 일이 아니었다. 여러 한국어 문서가 존재한다는 걸 알고 있었으니까. 그러나 누가 어떤 이름으로 여기 왔는지는 대부분 확인되지 않았다.
이날 오후 확인된 사용 승인표에는 한 명의 이름이 적혀 있었다.
[통역 자문: 윤서진. 언어 표기: 한국어.]
나는 그 이름을 몇 번이고 다시 읽었다. 윤서진.
아무리 흔한 이름이라도, 낯선 세계에서 한국 이름을 보면 마음이 흔들릴 수밖에 없다. 나에게는 어머니가 보내 주던 문자와 회사 사원증이 떠올랐다.
"도윤 씨와 아는 사람입니까?" 아레인이 물었다.
"모릅니다. 한국에서는 흔히 볼 수 있는 이름이에요."
"그럼 신원 확인부터 해야겠군요."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같은 언어를 쓴다는 이유로 나와 같은 시기에 왔다고 단정할 수도 없었다. 여기에 적힌 이름이 본명인지, 기록 담당자가 임의로 표기한 이름인지도 알 수 없었다.
운용 수첩의 뒷장에는 자문 업무 내용이 있었다. '피난 통지의 자발적 응답 표현 검수'라는 문구였다. 나는 손가락으로 그 부분을 짚었다.
"응답 표현 검수라면…"
"사람이 거절할 때 쓰는 말과 승낙할 때 쓰는 말을 구분하는 일이었겠죠." 아레인이 설명했다.
기록에는 예시가 남아 있었다. 한국어로 '받았습니다'와 '동의합니다', '지금은 대답하지 않겠습니다', '돌아가지 않겠습니다'. 네 문장은 각각 다른 코드에 연결되어 있었다.
나는 그걸 보는 순간 등줄기가 서늘해졌다. 이 사람은 지금 우리가 바로잡고 있는 문제를 정확히 알고 있었다. 단순히 번역을 해 준 것이 아니라, 동의와 수령이 다르다는 것을 장치에 직접 입력한 것이다.
"그런데 왜 지금 시스템에서는 다 같게 처리됐을까요?"
라델은 낡은 문서 옆의 개정 기록을 가리켰다.
"이 표본을 오래된 정산 프로그램으로 옮길 때 네 가지 구분 중 두 가지가 빠졌습니다."
"누가 빠뜨렸습니까?"
"기록에는 '축약 전송 규칙 적용'이라고만 나옵니다. 승인 번호를 더 찾아야 합니다."
나는 당장 최초 한국어 문서를 만든 사람이 윤서진이라고 단정하지 않았다. 연락 장비에서 한국어 표현을 검수한 기록이 있다는 것과, 제6정산금고 봉인물 6-17의 원문을 썼다는 것은 다른 문제였다. 그렇지만 처음으로 확인할 수 있는 이름이 생겼다.
그때 통신 장비의 아래쪽이 갑자기 울렸다.
삐삐삐.
피코가 뒤로 펄쩍 뛰었다.
"화났어요!"
"아마 전원이 불안정한 거야."
이스카가 장비의 뒷면을 열어 전원 안정기를 확인했다. 연결부가 오래되어 흔들리고 있었다. 그녀는 즉시 전원을 내리고 수리 담당 기술자를 불렀다.
"지금 더 재생하면 자료가 손상될 수 있습니다."
"그럼 오늘은 여기까지군요."
나는 아쉬웠지만 동의했다. 듣고 싶은 목소리가 있다고 해서 기록을 망가뜨릴 수는 없었다. 특히 그 목소리가 누군가의 마지막 증언일 수도 있다면 더더욱.
점심은 기록소 직원 식당에서 먹었다. 피코는 접시 위의 국수를 건드리며 말했다.
"도윤 님이랑 같은 말 하는 사람이 또 있네요."
"그러게."
"그럼 만나면 무슨 말을 할 거예요?"
나는 한참 고민했다.
"안녕하세요, 하겠지."
"그렇게 평범하게요?"
"같은 말을 하는 사람을 만났을 때 가장 하고 싶은 말이 그거거든."
피코는 고개를 끄덕이다가 갑자기 물었다.
"그럼 저도 한국어로 안녕하세요 배울래요."
"지금 말했잖아."
"아, 그게 한국어예요?"
우리는 동시에 웃었다. 몇 달째 같은 식탁에서 밥을 먹어 온 피코가 내 말을 하나씩 배우고 있었다. 내 마음이 조금 따뜻해졌다.
한국어 표본을 듣고 나서는 잠깐 밖으로 나갔다. 기록소 뜰에는 작은 분수가 있었고, 물가에 새가 앉아 있었다. 나는 나무 벤치에 앉아 한국을 떠올렸다.
처음 소환됐을 때는 모든 게 낯설고 두려웠다. 용사로 싸우라는 명령을 거절한 뒤 마왕성에 취업했지만, 내 생활은 온통 서류와 전투 경보로 가득했다. 그 사이에 누군가 한국어로 남긴 음성 하나가 이렇게 사람을 멈춰 세울 줄 몰랐다.
피코가 내 옆에 앉았다.
"집 생각나요?"
"응. 조금."
"그러면 돌아갈 거예요?"
"모르겠어. 언젠가는 돌아가고 싶지. 하지만 지금 당장 무엇을 할지는 내가 정하고 싶어."
피코는 발끝으로 돌멩이를 툭 쳤다.
"그럼 저는 도윤 님이 있을 때 많이 배워 둬야겠네요."
"왜?"
"혼자서도 월급 계산할 수 있게요."
나는 피코를 바라보다 웃음을 터뜨렸다. 내가 사라질 때를 상상하는 아이에게 가장 큰 걱정이 자기 월급이라는 것이 우스우면서도 조금 마음이 놓였다. 저 아이가 자기 생활을 이어갈 수 있다는 뜻이었다.
"좋아. 다음 달에는 네 급여명세서를 직접 검토해 보자."
"사탕 지출도요?"
"그건 가계부에 적어야지."
"할 일이 너무 많아요."
"나도 그래."
기록소 안으로 돌아오니 라델이 오래된 통역 자문인 명부의 검증 결과를 설명했다. '윤서진'이라는 이름 옆에는 오래된 인장이 있었고, 다른 서류에도 같은 서명 표본이 남아 있었다. 그러나 그 자료들만으로 현재의 신분을 확정할 수는 없었다. 과거 문서와 살아 있는 사람의 신원 확인은 별개의 문제였다.
"그분께 연락할 수 있는지 확인해야겠군요."
"네. 전달을 원하시면 짧은 문서를 작성해 주세요."
"제가 오래전에 이곳에 왔다는 사실도 적어야 할까요?"
"상대가 부담을 느끼지 않을 정도로만요. 요청 목적을 분명히 하고요."
나는 한참 고민했다. 한국 사람을 만날 수 있다는 기대가 앞섰지만, 상대에게도 오랜 시간이 있었을 것이다. 우리가 모르는 삶을 살아온 누군가에게 갑자기 내 질문 전부를 쏟아낼 권리는 없다.
그날 내가 적은 첫 연락 문안은 놀랄 만큼 짧았다.
'한국어로 남긴 옛 기록을 읽었습니다. 작성하신 기록인지 확인하고 싶습니다. 원하지 않으시면 답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아레인은 그 문안을 받아 봉인했다. 나는 서명란을 바라보았다. 이번에는 내 이름을 적는 일이 두렵지 않았다. 누군가가 내 이름을 대신 쓰는 게 아니라, 내가 직접 쓰고 있었으니까.
오후에는 옛 윤서진의 인적 자료를 찾기 위한 절차를 밟았다. 중립 기록소는 살아 있을 가능성이 있는 개인의 연락처를 외부에 공개할 수 없다고 했다. 나는 그 제한에 동의했다.
"그럼 제가 일방적으로 주소를 받아 찾아갈 수는 없겠네요."
"그렇습니다. 대신 연락 동의 요청을 전달할 수 있습니다."
"상대가 거절하면요?"
"거기서 멈춥니다."
나는 웃으며 신청서에 서명했다. 온갖 자동 동의와 싸운 끝에 결국 가장 중요한 규칙을 내 앞에서 적용받는 순간이었다.
제르칸에게 이 소식을 전하자 마왕은 크게 흥분했다.
"너 말고 또 다른 세계의 사람이 있다고? 데려와라! 반드시 내 성에서 근무하게 하겠다!"
"폐하, 채용도 본인 동의가 필요합니다."
"그러면 면접부터 보자!"
"연락을 받을지도 모릅니다. 일단 기다리셔야죠."
"기다리라고? 내가?"
"네. 아주 훌륭한 군주라면 기다릴 줄도 알아야죠."
마왕은 괴로운 표정으로 왕좌에 앉았다. 권력자가 배우기 가장 어려운 기술은 타인의 답을 기다리는 일인지도 모르겠다.
저녁에 아레인에게서 운용 수첩의 마지막 페이지가 도착했다. 윤서진의 업무 인수 확인서였다. 그 옆에는 작은 문장이 적혀 있었다.
[한국어 원문 보존을 위한 별도 봉인 의뢰. 사유: ‘동의’와 ‘접수’의 구분 삭제 우려.]
나는 종이를 오래 바라봤다.
윤서진이 제6정산금고 봉인물 6-17을 직접 썼다고는 아직 말할 수 없었다. 하지만 누군가가 한국어 원문을 따로 보존해 달라고 요청한 사실은 문서로 확인됐다.
그리고 그것이 왜 중요한지는, 이제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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