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계 사절단이 마왕성에 다시 왔다.
첫 방문 때와 달라진 점이 있다면, 이번에는 제르칸이 황금 접시 열두 개를 새로 만들자고 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대신 입구에 커다란 현수막을 걸었다.
[마왕성에 오신 천상의 손님 여러분을 환영한다. 우리 폐하가 제일 강하다.]
나는 마지막 문장을 가리켰다.
"이건 굳이 안 써도 되지 않습니까?"
"내가 제일 강한 걸 알리면 분쟁이 줄어들지 않겠느냐?"
"오히려 늘 것 같은데요."
"그러면 글자 크기를 줄여라."
그것이 우리의 타협이었다. 거대한 마왕성이 세계 평화에 기여하는 방식은 때로 현수막 글자 크기 하나에서 시작한다.
루멘은 오래된 여행 가방을 들고 왔다. 가방에는 천상 관리단의 봉인이 붙어 있었다. 그런데 봉인은 금빛이 아니라 회색이었다.
"색이 바뀌었습니까?" 피코가 물었다.
"정식 후원금에는 금빛 봉인을 쓰지만, 오늘은 미확정 지원 건이라 임시 봉인입니다."
"그럼 금빛은 아직 못 받는 거예요?"
"맞아요."
"우리 회사랑 똑같네요."
나는 피코가 참 빨리 배우는 게 두려워졌다. 어느 날 저 아이가 내 책상에서 결재 대기 목록을 전부 처리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오늘 회의의 목적은 천상 관리단 계정 `6-17-A`의 실체를 확인하는 것이었다. 그 이름은 제6정산금고의 봉인물 6-17과 비슷했지만, 비슷하다는 이유로 동일 문서라고 할 수는 없었다. 루멘은 그 차이를 인정한 뒤 자신이 확인한 원장을 펼쳤다.
"이 계정은 원본 문서 구매 자금이 아닙니다."
"확실합니까?" 아레인이 물었다.
"원래 예산 항목을 찾았습니다. 명칭은 '회신권 회복 준비금'입니다."
나는 펜을 멈췄다.
"회신권이요?"
"오래된 긴급 피난 계약에서 본인의 답을 듣지 못한 경우, 나중에 직접 확인할 수 있는 비용을 마련하려 했던 항목입니다."
그는 손가락으로 계정의 세부 항목을 짚었다. 통역비, 안전 연락 비용, 임시 보존비, 왕복 교통비. 내가 지난 세월 동안 하나씩 찾아다닌 업무들이 나란히 있었다.
"이런 제도가 있었는데 왜 아무도 몰랐죠?"
"예산은 책정됐지만 운영 규정이 확정되지 않았습니다. 몇 차례 조직이 바뀌면서 계정이 동결됐고요."
"금액은요?"
"금화 백이십 닢 책정, 승인 사십 닢, 실지급 십 닢. 나머지는 사용 제한 상태입니다."
나는 바로 질문했다.
"실지급 십 닢은 누구에게 갔습니까?"
"당시 중립 기록소의 긴급 연락 장비 설치비로 확인됐습니다. 제6정산금고의 문서 보존료와는 별개입니다."
우리는 증빙을 확인했다. 금화 십 닢의 영수증에는 통신 장비 두 대와 교육비가 적혀 있었다. 수취인은 중립 기록소. 실제 설치 기록도 남아 있었다. 다만 장비가 지금까지 사용 중인지는 별도 확인이 필요했다.
"그럼 `6-17-A`와 봉인물 6-17은 같은 사건의 번호입니까?" 라델이 물었다.
루멘이 난처하게 웃었다.
"동일성을 주장할 근거는 아직 없습니다. 번호를 붙인 부서도 다릅니다."
"그럼 현재 사실은 회신권 회복 준비금이 있었다는 것뿐이네요."
"그렇습니다."
나는 그 말에 묘하게 기운이 났다. 돈이 실제로 도난당한 증거는 없었다. 하지만 예전에 누군가 사람의 대답을 다시 들을 제도를 만들려고 했고, 그 비용까지 마련했다는 건 확인됐다. 우리보다 먼저 같은 문제를 본 사람이 있었던 것이다.
제르칸이 팔짱을 끼고 물었다.
"그렇다면 왜 지금 당장 그 돈을 풀지 못하는 것이냐?"
"운영 규정의 승인권자가 비어 있습니다." 루멘이 답했다.
"빈칸이라면 내가 서명해 주겠다!"
"폐하는 승인권자가 아닙니다."
"나는 마왕인데?"
"더더욱 아닙니다."
제르칸이 처음으로 천사에게 말문이 막혔다. 나는 그 모습을 오래 기억하기로 했다.
회계 담당자에게 가장 반가운 서류는 뜻밖에도 '아직 지급하지 않았음'이라고 적힌 종이다. 지급하지 않은 돈을 이미 보냈다고 생각하면 문제가 복잡해진다. 그런데 오늘은 반대로, 아직 쓰지 못한 돈이 사람에게 필요한 일에 쓰일 가능성을 보여 주었다.
"준비금을 실제로 사용할 수 있게 하려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루멘은 조건 세 가지를 설명했다. 독립 감독관의 지정, 당사자에게 연락할 합법적 절차 마련, 원본 보관기관의 동의 없는 정보 이전 금지.
"전부 필요한 조건입니다." 내가 말했다.
"그러면 시간이 걸립니다."
"이번에는 시간을 쓰는 이유가 명확하네요."
아레인이 고개를 끄덕였다.
"당사자를 보호하기 위해 기다리는 것과 아무도 책임지지 않아서 기다리게 하는 것은 다릅니다."
우리는 서명을 강요하지 않았다. 대신 운영 가능한 소규모 시범 사업의 범위를 작성했다. 기존에 도움을 신청한 사람에게만 연락하고, 돈을 받지 않은 사람을 임의 수혜자로 등록하지 않는다. 마엔처럼 공개 참여 의사를 밝힌 사람을 첫 대상으로 삼을 수 있었다.
그날 회의 중간에 우리는 천계 지원금의 처리 절차를 시범 실행해 보기로 했다. 실제 돈을 보내지는 않고, 모형 계정을 사용한 연습이었다. 나는 예전에 피코가 제안했던 방식을 기억하고 있었다. 금고의 작은 방수 지붕을 물방울로 시험하듯, 새 규정도 사용자가 직접 시험해 봐야 한다.
몰트가 모형 장부 세 권을 가져왔다. 하나는 지원금 신청, 하나는 이용자의 연락 동의, 마지막 하나는 실제 지급 내역이었다. 그는 첫 번째 장부를 루멘에게, 두 번째를 아레인에게 건넸다. 마지막은 내 몫이었다.
"저는 뭘 하나요?" 피코가 물었다.
"시범 이용자 역할을 해 봐."
"그럼 사탕 신청할래요!"
"사탕이 아니라, 오래전에 보낸 편지의 회신을 확인할 수 있도록 도와 달라는 신청이야."
피코는 금방 수긍했다. 그는 신청서 맨 위에 큼지막하게 자기 이름을 쓰고, 연락 방법 칸에는 '직접 찾아오면 좋겠음'이라고 적었다.
루멘은 서류를 받아 들고 날개를 조금 흔들었다.
"원래 규정대로라면 이 부분에 예산 집행 동의도 자동으로 붙습니다."
"그러면 안 되죠." 내가 말했다.
"시범이니까 일부러 예전 규칙을 적용해 본 겁니다."
아레인은 두 번째 장부의 동의란을 확인했다.
"피코는 연락을 받겠다고 했지, 자기 돈을 후원금으로 내겠다고 한 게 아닙니다."
피코가 소리쳤다.
"맞아요! 제 월급은 제 거예요!"
모두가 웃었다. 그때마다 피코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 우리를 봤다. 도대체 뭐가 우스운지 모르는 듯했다. 하지만 그 아이가 자기 권리를 아주 정확하게 말한다는 게 우리에게는 작은 기적처럼 느껴졌다.
세 번째 장부를 넘겨 보니 예상했던 문제가 있었다. 연락 동의가 입력됐을 뿐인데 지급 승인 칸에 '예정'이라는 표시가 자동으로 생긴 것이다. 실제 송금은 없었지만, 지급 단계가 한 칸 앞서 있었다.
"이건 신규 업무에서 다시 오류가 날 수 있다는 뜻입니다." 내가 말했다.
몰트가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모형에서 발견했으니 다행이지요."
우리는 장부 연결을 끊고, 별도의 비용 심사를 통과해야 지급 승인으로 넘어가도록 바꿨다. 새 규칙으로 다시 시험하자 이번에는 '신청 접수'와 '지급 보류'가 정확하게 분리됐다.
"이제 되는군요." 루멘이 말했다.
"오늘 모형에서만요. 실제 운영 전에 보안 검사도 해야 합니다."
그는 잠깐 고개를 숙였다.
"전에는 제가 그냥 지원금을 송금하면 끝날 문제라고 생각했습니다."
"의도가 좋아도 과정이 잘못되면 또 누군가 대신 결정하게 됩니다."
"맞습니다. 이제는 그게 조금 이해됩니다."
시범을 마치자 루시아가 실제 이용자의 입장에서는 어떨지 묻고 싶다고 했다. 우리는 지원 신청 문안을 마엔에게 미리 보내 의견을 받기로 했다. 당사자에게 듣지 않고 만든 절차는 다시 당사자에게 부담을 줄 수 있기 때문이었다.
마엔은 짧은 회신을 보냈다. '거절을 증명하려고 또 먼 곳까지 걸어오라는 말만 없다면 좋겠소.'
나는 그 한 문장을 회의 안건의 첫머리에 넣었다. 예산보다 중요한 요구였다. 돈이 있다 해도 장애가 있는 사람이 그것을 받으러 몇 날 며칠 이동해야 한다면 잘못된 지원일 수 있다.
베실은 곧장 교통비 지원 규칙을 수정했다. 당사자가 원한다면 방문 확인을 허용하고, 의료 관련 자료는 본인이 지정한 기관에서만 확인하도록 했다.
"지원금이라는 게 꽤 복잡하네요." 피코가 말했다.
"사람마다 필요한 게 다르니까."
"사탕은 다 똑같이 좋아할 줄 알았는데."
"사탕을 안 좋아하는 사람도 있어."
피코는 세계의 진리를 처음 알게 된 사람처럼 입을 벌렸다.
"정말요?"
"정말."
그는 한동안 생각하다가 말했다.
"그럼 사탕 말고 빵도 준비해야겠어요."
나는 웃었다. 다양한 선택지를 마련하는 복지 정책을 이렇게 이해하는 직원이 있다니. 어쩌면 피코가 나보다 더 좋은 제도를 만들지도 몰랐다.
실제 장부를 검토할 때는 장비 설치비 십 닢의 영수증이 문제가 됐다. 중립 기록소가 당시 기계를 실제로 받았다는 인수 확인서는 있었지만, 유지 보수 기록은 중간부터 비어 있었다. 베실은 그 부분을 별도 확인 항목으로 남겼다.
"사용하지 않는 기계에 유지비를 계속 지급하진 않았겠죠?" 내가 물었다.
"현재 확인된 지급은 초기 설치비뿐입니다. 후속 유지비 청구가 있었다는 사실과 실제 지급 여부는 구분해야 합니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이 말은 내게만큼은 지루하지 않았다. 우리가 지금 찾는 자료가 얼마나 복잡하든, 한번 확인한 사실을 부풀리지 않는 것이 가장 빠른 길이었다.
회의 도중 몰트가 조용히 다가왔다.
"도윤 씨, 지난번 기술자 브렌의 지붕 보수비 잔금이 오늘 지급 완료로 표시됐습니다."
"실지급 자료 확인했어요?"
"네. 왕국 시설 관리부 계좌에서 브렌의 지정 계좌로 송금된 확인서입니다."
"다행이네요."
"보존관 르마의 추가 근무 수당도 일부 정산됐습니다. 나머지는 야간 근무 시각 정정 확인이 필요합니다."
나는 회의록에 작은 줄을 더했다. 큰 비밀을 조사하는 와중에도 누군가의 임금이 제때 나오는지 확인하는 것이 우리 일이었다. 세상을 바꾸겠다고 큰소리치는 동안 기술자 월급을 까먹으면 무슨 소용인가.
피코는 그 사이 간식 배달을 맡았다. 그런데 접시를 나르다가 루멘의 날개 끝에 걸려 빵 하나가 바닥에 떨어졌다.
"죄송해요!" 피코가 외쳤다.
루멘이 웃었다.
"괜찮습니다. 제가 날개를 너무 넓게 폈어요."
"그럼 날개 접는 규정도 필요해요?"
"방 안에서는 접어 두는 게 좋겠군요."
제르칸이 심각하게 말했다.
"내 성에는 날개 반입 제한을 두겠다."
"폐하, 날개가 몸에 붙어 있는데 어떻게 반입 제한을 해요."
"그럼 황금 날개만 금지한다!"
아무도 그 결정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이해하지 못했다. 그러나 기록 담당자는 꼼꼼하게 회의록 옆에 '논의 불필요'라고 적었다.
회의가 끝날 무렵 루멘은 피코에게 작은 종이 날개를 접어 줬다. 마법이 걸리지 않은 평범한 종이였다. 피코는 그것을 손에 들고 복도를 뛰어다니다가 내 책상 위에 올려놓았다.
"도윤 님, 이건 후원이에요."
"받아도 되는 후원인가?"
"네. 대신 조건 있어요."
"뭔데?"
"접어서 안 부수기!"
나는 종이 날개를 조심스럽게 책장 위에 놓았다. 서명 없이도 충분히 이해할 수 있는 조건이 세상에는 있다. 하지만 그럴수록 서로 말로 확인하는 것이 더 좋았다.
회계소로 돌아온 베실이 또 하나의 자료를 공개했다. `00-성전` 수수료 수취처 중 일부가 '경계 안정 계수'에 따라 계산됐다는 사실이었다. 천상 관리단의 회신권 회복 준비금과는 별개의 계정이었다.
"같은 천계 기관의 돈이니까 연결됐다고 생각하면 안 되겠군요." 내가 말했다.
"네. 장부는 서로 다른 목적의 돈을 한 이름 아래 모아 놓기도 했습니다."
나는 두 서류를 나란히 놓았다. 하나는 사람의 대답을 되찾기 위해 묶인 돈. 다른 하나는 사람의 대답이 늦어질수록 증가하는 수수료.
세상에는 이상한 대비가 많다. 특히 회계 장부 안에 그런 대비가 있으면 사람의 욕심이 아주 선명하게 보인다.
"왜 준비금은 못 쓰고 수수료는 계속 계산됐을까요?"
루멘이 조용히 대답했다.
"두 제도의 승인 절차가 다르기 때문입니다. 정확히는, 회복에는 세 기관이 서명해야 했지만 수수료는 한 기관의 자동 승인만으로 진행됐습니다."
나는 오래도록 그 말을 곱씹었다. 사람을 도와주는 일은 셋이 합의해야 하고, 사람에게 청구하는 일은 하나로 충분하다. 어딘가 근본적으로 잘못된 구조였다.
그날 밤 나는 다음 회의의 안건 이름을 정했다.
[회신권 회복 준비금 시범 사용 및 자동 수수료 산정 일시 중지 권고.]
처음으로 돈의 이름이 아닌 사람의 권리에서 시작하는 안건이었다.
그런데 결재 문서를 보내려는 순간 마왕성 기록실의 오래된 경고등이 켜졌다.
[중립 기록소 연락 장비 2호에서 최초 한국어 회신 표본이 발견되었습니다.]
나는 손에 쥔 펜을 내려놓았다.
지금까지 열지 못했던 문서의 또 다른 경로가 나타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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